소설리스트

〈 123화 〉탐식마(貪食魔) (123/429)



〈 123화 〉탐식마(貪食魔)

2037년 1월 8일. 새해를 맞이한 설렘이 채 가시기도 전에 검성 나승하는 세상에 퍼플 던전 이상의 던전이 등장했음을 알렸다.

전 세계 주가가 요동쳤고, 각국의 수뇌부들은 급하게 모여서 머리를 맞대야만 했다. 승하가 존재만 밝히고 위치에 대해서는  마디도 꺼내지 않았기에 그 행동들은 모두 헛수고로 돌아갔지만, 모이지 않을 수는 없었다. 드디어 던전을 정복했다고 자신만만해 있던 인류에게  보다 더 끔찍하게 들릴만한 소식은 없었으니까.

문제는 승하가 존재에 대해서만 발표했을 뿐, 위치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었으며 질문 공세에 대한 방어는 모두 플레이어 협회에 일임했다는 것이다. 평소에도 기회만 생기면 협회와 으르렁거리는 강대국들로서는 곤란한 일이었다. 다방면으로 협회를 압박해봐야 나오는 대답이라고는, 가칭 X던전에 대한 정보가 전혀 없으니 불필요한 희생을 줄이기 위해서라도 원정대 출발 이전까지는 위치를 발표할 수 없다 였다.

대중은, 특히 X던전 발생지로 확실시 되던 한국에서는 협회에 대한 비난여론이 끓어올랐지만, 협회는 요지부동이었다. 겉보기에는 그랬다. 사실은 협회 또한 한국에 있다는  이외에는 아는 바가 없어서 완벽한 입단속이 가능했던 것이지만.

그렇다고 자국에 존재하는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탄의 소재 파악을 포기할  없는 노릇이었기에, 한국정부에서는 X던전의 위치를 협회에 묻고, 협회는 기존에 했던 말을 반복했다. 그렇게 시간이 어영부영 흘러갔다.

사람들은 처음 몇 달간은 정부의 무능함과 협회의 이해할 수 없는 태도에 대해 성토했지만, 막상 던전이 터지지 않자  존재를 차츰 잊어갔다. 아니면 검성의 거짓말로 생각하거나. 눈앞에 보이는 것은 없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반응이었다.

그리고 계절이   바뀌고, 해가 바뀌기 두  가량을 남긴 10월의 마지막 날에 웨인은 1월 8일에 느낀 한기를 다시금 느끼고 있었다.

눈앞의 상대는 무어라 말하고 있었지만 웨인의 귀에는 전혀 들어오지 않았다. 평소의 그라면 생각하기도 어려운 무례였지만, 방금 전 던전에서도 보기 힘든 현상을 본 직후라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지난 나흘  제대로 쉬지 못한 탓도 있었다.

“네?”
“그러니까, 소유권에 대한 문제를 확실히 해두고 싶다는 겁니다.”

탁자를 사이에 두고 웨인의 맞은편에 앉은 류 현은 제 오른 손바닥을 보이며 말했다. 그의 손바닥 위에는 육망성 비슷한 문신이 청백색 빛을 내뿜고 있었다. 웨인은 저도 모르게 팔을 뻗어 더듬으려는 자신을 뜯어말렸다.

‘소유권...? 그래, 확실히 석비가 저렇게 변했다고 했지. 하, 소유권이라.’


누가 봐도 육망성 모양의 문신은 류 현의 몸과 하나였다. 이미 소유권을 운운할 상태가 아님에도 소유권에 대해서 먼저 말을 꺼낸 건,

‘저 문신에 뭔가 있다는 거겠지. 그러고 보니 열쇠라고 했었어.’


겉보기 신기한  이상의 뭔가가 있다는 의미일 터. 팔을 잘라내서라도 돌려받겠다고 우길 수는 없겠지만, 저 문신으로 뭘   있는 지는 최대한 알아내야만 했다. 그의 말대로라면 류 현은 단순히 석비에 떠오른 글자를 읽는 수준이 아니라 더 심도 있는 정보를 얻었을 테니까.


석비의 소멸이 그 정보를 기반으로 한 고의성이 다분한 행동이었는지, 아니면 그의 말대로 사고였는지는 모르지만 다행스럽게도 협회는 석비를 하나  확보한 상태다. X던전이 위치해있는 카이로의 블루 던전에서 찾아내었다. 아프리카의 현 상황을 생각하면 확보한 것이 정말 기적이라고 해도 무방했다.


문신으로 변해 버린 석비가 가진 힘이 뭔지는 몰라도, 이미 엎질러진 물을 주워 담겠다고 억지를 부리는 것보다는 아직 컵에 담긴 물을 어떻게 쓸지 조언을 듣는 것이 나을 것이다.

“협회는 불의의 사고로 체내로 흡수된 아티펙트를 회수하겠다고 나설 정도로 막무가내는 아닙니다. 체내로 들어간 아티펙트가 말썽을 일으키는지 여부를 정밀 검사는 해드릴 수 있지만요. 아, 혹시 되돌리는 방법은 모르십니까?”
“예, 유감스럽게도 그건...”


 현은 뒷머리를 긁적거리며 천연덕스럽게 대꾸했다. 정말로 모르기도 했지만, 설사 그 방법이 매뉴얼에 포함되어있었더라도 모르쇠로 일관했을 것이다. 칼리프의 말대로라면 되돌릴  있든 없는 아무런 상관도 없을 테지만, 그렇다고 꿈도 아니고 환각 속도 아닌 곳에서 초월자를 만나서 나 말고는 아무도 못쓴다고 들었다고 얘기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그렇군요. 그럼 정밀검사를 준비시키도록 하겠습니다. 혹시 이상이 생기면 바로 말씀해주시고요.”
“걱정 감사합니다. 그럼 석비에 대한 소유권은 제게 있다고 생각해도 되는 겁니까?”
“제게 그걸 정할 권한은 없지만, 위원회에서 석비 소유권을 운운하면서 팔을 째겠다고 나설 일은 없다고 단언할  있습니다. 사실상 소유권 양도라고 생각하셔도 무방합니다. 지금은 류 현님 몸의 일부나 다름없는데 달리 생각하기도 어렵고요.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이렇게 무사히 깨어나 주셨으니, 해프닝으로 취급할 겁니다. 아까 말씀드렸다시피 아프리카에서 추가로 확보하기도 했고요. 우려하실만한 일은 없을 겁니다.”
“그렇다면 다행이군요. 깨어나자마자 사고 쳐서 협회에 찍히는 게 아닌가 했습니다.”

웨인은 허허 웃으면서도  현의 오른 손바닥을 계속해서 힐끔거렸다. 어떻게 봐도 육망성의 변형 같은 그 문신은 생김새와는 영 딴판으로 마력의 편린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저렇게 대놓고 빛을 내뿜으면 흘러나오는 마력이 한 톨이라도 있어야 할 텐데, 그런 게 전혀 없었다.

웨인은 조심스럽게 좌중의 눈치를 살폈다. 류 현의 뒤편에 조금 거리를 두고 앉아있는 용잡이 팀 팀원들과 검성은 대화에 낄 생각은 전혀 없는지,  현의 뒤통수만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누가 봐도 나흘 만에 깨어난 사람을 대하는 태도는 아니었지만, 웨인은 내색하지 않았다. 그렇게 치면 나흘 만에 깨어난 사람을 붙들고 설명을 들으려는 자신도 그 범위를 벗어날 수는 없었으니까.


“류 현님, 방금 깨어나셨는데 이런 말씀 드리기가 좀 그렇습니다만...검사를 마친 후에 아까 하셨던 말씀에 대해서 자세한 설명을 들을 수 있겠습니까?”
“열쇠 말입니까?”
“예, 그거요. 제가 잘 못 이해한 게 아니라면 석비로부터 사용방법을 전달받은 것 같은데...맞습니까?”
“사용 방법...예, 맞습니다. 제품설명서 정도로 자세하진 않지만 어떻게 쓰는지 어디다 쓰는 지 정도는 들어있더군요. 그런데 검사요?”
“아, 나흘 동안 혼수상태일 때 검사를 하긴 했지만, 혹시 모르니 신중을 기해야하지 않겠습니까. 번잡한 절차는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지금 협회 닥터팀이 오고 있을 테니, 오늘은 간단한 검사만 하고 본격적인 검사는 내일부터 컨디션을 봐가면서...”
“안 해도 될 것 같은데...뭐, 신경 써주신다는 데 거절하기도 좀 그렇군요. 그럼 바로 설명 드려야겠네요.”

웨인은 속으로는 반색했지만, 입으로는 질겁하는 소리를 뱉었다. 누구의 과실을 따지기 힘든 사고였지만, 류 현은 협회의 손님으로 들어왔다가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 변을 당했었다. 책임져! 라고 소리치면 협회에서는 억울하지만 책임지지 않을  없는 상황.


플레이어의 권익을 보호하기 위해서 설립된 단체가 초대한 손님의 변고에 대해서 책임회피 한다는 건 말이  되는 일. 더군다나 그 손님이 검성과 연결되어있으니, 외면은커녕 눈치를 봐야만 했다. 류 현이 누워있는 날짜가 늘어날수록 사정을 알고 있는 이들의 한숨도 늘어가는 차에  현이 일어나준 것이다. 모르긴 몰라도 지금쯤 보고를 받은 위원들도 최대한 빨리 협회로 오기 위해서 스케줄을 취소하거나 조정중일 것이다.

그런 나흘 넘게 혼수 상태였던 환자가, 변고와 관련된 물건과 재 접촉한 것만으로도 기겁할 일인데 설명회라니.

“괘, 괜찮습니다. 방금 깨어나셨으니 무리 하실 필요 없습니다. 그리고 가족 분께 연락도...”
“아뇨, 누님에게  편히 연락하기 위해서라도 말씀드리고 가야겠습니다. 제가 협회와 각 국가 간의 동조체계가 어떤지는 몰라도, 지금부터 원정대 꾸릴 준비를 해도 빠듯할  같으니까요.”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류 현의 말에 웨인은 자신이 나흘 넘게 누워 있다가 일어난 환자가 된 기분이었다. 웨인은 극심한 현기증을 느꼈다. 나흘 넘게 잠만 잤다고 여긴 남자가 무슨 골칫거리를 가지고 왔는지 상상이 가질 않았다.

“X던전은 보이는 것처럼 입장자가 없다고 해서 포화기간이 무제한이 아닙니다. 최초의 퍼플 던전은 그랬을지도 몰라도, X던전은 다릅니다.”


‘음,  안 바르고 하니까 뭔가 혀가 뻣뻣하네. 이래서 침 바르고 거짓말해야 한다는 건가?’


자신의 거짓말에 하얗게 질려 들어가는 웨인의 얼굴을 보며 류 현은 그런 시답잖은 생각을 했다.


***

미국 뉴욕의 브루클린, 그린 우드 묘지.


 중 전체적인 조형은 피라미드 본 따고, 입구 좌우로 예수상과 마리아상을 세워놓은 조금 특이한 양식의 묘지는 눈에 띄는 생김새에도 불구하고 지난 십년간 방문자라고는 없었다. 이 사실에 주목하는 브루클린 주민은 없었지만, 이 특이한 생김새의 묘지는  네 달 전부터 성황을 이루고 있었다.

헌화를 위해서 찾아온 이들은 아니었다. 그들  누구도 고인에 대한 추모나, 고인의 생전 행적에 대해서 관심 있는 이는 없었고, 그게 어울리는 차림새도 아니었다. 방문객들은 하나같이 중세와 현대를 뒤섞어 놓은 듯한 차림새를 하고 있었다. 그런 차림새의 사람들을 발견한 게 코스프레 행사장이 아닌 이상, 두 번 생각할 것도 없이 그들은 플레이어다.


못해도  명은 넘는 플레이어들이 묘지 주변을 지키고 있었다. 보이는 이들이 다가 아니었다. 그들은 4교대로 경계를 섰고, 보이는 이들 이외에도 서른이 넘는 플레이어가 이곳에 투입되어있는 것이다. 그런 그들 너머로 시선을 넓히면 굳은 얼굴로 경계를 서고 있는 그린베레 대원들이 있다. 굳은 얼굴이 그들이 느끼는 압박감을 말해주는 듯했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들이 이중삼중으로 지키고 서있는 것은 뉴욕에 있어선 안 될 것이었으니까.

검성이 가칭 X던전이라고 발표한 것이 그대로 명칭이 되어버린 퍼플 던전의 상위 던전. X던전이 그들이 지키고  폭탄이었다.


협회로부터 출처 불명의 정보를 건네받고서 뉴욕을  잡듯이 뒤진 결과 찾아낸 X던전. 평소라면 대피령을 내리고 이중삼중이 아니라 몇 십 단위의 포위망을 펼치고 있었겠지만, X던전은 퍼플 던전 때와 마찬가지로 도전자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안전하다는 결론이 내려졌다. 협회에 발견 사실을 알리진 않았지만, 협회 측에서 눈치를 챘는지 넌지시 그런 정보를 보내왔었다.


그리고 그 사실은 미국정부에게 약간의 호기를 부릴 수 있는 근거가 되었다. 최정상급 플레이어의 부재라는, 플레이어 전력에 있어서 다른 선진국에 비해서 조금 쳐진다는 미국답지 않은 이미지를 벗어던질 기회라고 여긴 것이다. 그렇다고 퍼플 던전의 상위 던전을 얕본 건 아니었다.

오히려 미국은 신중한 편이었다. 다른 선진국들은 한국의 독점을 우려해서 협회와 한국정부에 압력을 넣고, 발을 걸칠 궁리를 하느라 바빴다. 만나서 하는 이야기라고는 한국이 X던전을 독점하게 둘 수 없다 였다. 아직 과실을 따지도 않았는데 과육이 얼마나 달콤할지를 논하는 격이었다.

하지만 미국은 지속적으로 협회를 통해서 X던전에 대한 검성의 의중을 떠보려고 노력했다. 검성이 X던전에 도전할  즈음 뉴욕에 X던전이 존재함을 밝히고 대피를 시킨 후에 향후 상황에 따라서 대처할 생각이었다. 퍼플 던전 때도 최초의 도전자였던 검성의 팀이 클리어하고 나오자마자, 포화기간 카운트다운이 시작되었으니까.


검성이 X던전을 멀쩡히 클리어 하고 나올 경우, 미국 내에서 꾸린 팀을 끼워서 검성에게 X던전 클리어를 청부하거나 최소한 준비에 대한 조언을 받을 생각이었다. 굳이 미국만의 힘으로 클리어 하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이었다. 최상위 던전에서 검성을 제대로 보조할  있는 전력을 보유하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목표치는 충족된다.


인류는 이미 던전을 정복했다고, X던전은 플레이어 관련 인프라가 엉망이었던 퍼플 던전 도전당시보다 훨씬 수월할 거라고 벌써 계산기를 두들기는 유럽국가와는 대조적이었다.‘대소환’초기에 플레이어들을 핍박했다가 던전의 시대의 시작에 크게 뒤쳐졌던 미국으로서는 당연한 신중함이었지만.

미국 정부는 X던전이라는, 재해의 씨앗에 대해서 조금 병적일 만큼 조심스럽게 접근했다. 던전 입구에 서있는 석비를 떼어가지 않고 그냥 있는 그대로 관찰하고 해석했다. 해석 결과는 협회와 동일했다. 튜토리얼 수행 장소가 세 곳이라는 것과 각각 한국의 파주, 이집트 카이로, 미국의 뉴욕에 있다는 것.

처음 몇 달간은 국가에 소속된 마법사들이 밖에 경계 병력처럼 4교대로 석비를 지켰었다. 하지만 한 달이 지나고, 두 달이 지나고, 세 달을 바라보기 시작하자 경계가 조금 허술해지는 건 어쩔 수가 없는 노릇이었다. 석비고 던전 포화 수치고 간에 아무런 변화가 없었으니까.

상층부도 지침을 바꿔서 던전 바로 앞에는 감시카메라를 설치하고 묘지 근처를 지키는 걸로 경계근무를 수정했다. 만에 하나 X던전이 갑자기 포화되어 괴수가 튀어나올 경우, 코앞에서 지키고 있다가 애꿎은 플레이어가 눈먼 공격에 죽는 것보다는 카메라가 부서지는 게 낫다고 판단한 것이다. 둘  병행해야한다는 주장도 있었지만, X던전의 1분기가 넘는 기간 동안의 침묵 때문에 반려되었다.

그리고 던전에 손상을 주는 것조차 꺼린 그 신중함 때문에 이곳에 배치된 누구도 석비 위의 변화를 눈치 채지 못했다. 석비는 언제나처럼 살아 움직이는 듯한 빛의 글자를 출력하고 있었다. 이 움직임 때문에 한 달 넘게 마법사들이 작은 변화도 놓치지 않으려고 매달렸지만, 그 열성적인 관찰의 결과는 의미 없는 변화. 라는 웃기지도 않는 성적표였다.


그러니, 아마 마법사가 한 달 전처럼 석비 감시역으로 배정되었더라도 잘못  것이라고 치부했을 것이다. 튜토리얼 수행 장소를 띄우고 있던 석비의 글자는 살아있는 듯 꿈틀거리다가 정말 한 순간이라고 하기도 힘든 짧은 순간동안 전혀 다른 글자를 출력했다가 원래대로 돌아갔다.

순식간에 떠올랐다가 사라진 글자의 의미는 ‘천공성(穿孔城)’. 보았더라도 뭔가를 추리하기에는 지나치게 짧은 말이었다.

같은 시각, 협회로 이송되고 있던 카이로에서 발견된 석비에도 비슷한 현상이 벌어졌다. 다만 의미는 전혀 달랐다.  석비에 떠올랐던 글자의 의미는 ‘왕의 영지’.

두 석비가 이상현상을 보이기 직전, 류 현이 웨인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열쇠를 발동시켰다가 주변의 만류로 접었다는 것은 아무도 알지 못했다. 열쇠를 발동시킨  현 조차도.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