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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2화 〉탐식마(貪食魔) (122/429)



〈 122화 〉탐식마(貪食魔)

류 현이 정신을 차렸을 때 그는 침대에 있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는 허리에 화련을 매단채로 복도를 걸어 나가고 있는 상태였다. 누군가 부르는 듯 한 소리에 정신을 차려보니, 그 시커먼 공간과 칼리프  오르시아는 온데간데없고, 전에 본 듯한 복도 한가운데였다.

 현의 정면에는 승하가 지옥의 수문장처럼 앞을 가로막고 서있었고, 뒤는 희란이 훤칠한 키에 어울리지 않게 부들부들 떨면서 막고 있었다.

‘이게 무슨 조화지?’

아니, 그렇게 보이길 원하는 듯 했다. 류 현은 너무 자서 멍해졌을 때처럼 잘 돌아가지 않는 머리를 최대한 굴려봤다. 고목에 달라붙은 매미마냥 허리에 딱 달라붙어서 쨍알거리는 화련 때문에 집중하는 게 쉽진 않았지만.


‘...그래, 그 여자가 건투를 빈다고 한 다음에...젠장, 난 묻고 싶은 것도 못 물었는데 그렇게 보내 버리는 법이 어디 있어? 잠깐, 보내?’

제 말을 곱씹다가 반박하고, 다시 곱씹기를 반복하고 있자니 세상에 다시없을 멍청이가 된 기분이었다.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서 류 현이 주저앉자, 허리에 매달려있던 화련이 작은 비명을 질렀지만, 류 현의 귓가에는 들리지도 않았다. 자신의 생각도 정리하기에도 버거운 상태. 온전한 석비를 처음 봤을 때 쏟아져 들어왔던 문자의 비가 아직 그의 머릿속을 떠돌고 있었다.

‘억누르지 말라니 그건 또 무슨 소리인지...역시‘문’은 그 세 곳의 블랙 던전이겠지? 하지만 전생에서 블랙던전은...’


정리하려들면 들수록 실타래가 엉망진창으로 뒤엉키는 기분이었다. 허투루 들을 수 없는 정보를 너무 많이 들었다. 덤으로 석비에서 쏟아져 들어온 정보까지.

‘젠장, 이런  쥐약이라고.’

 현은 곧바로 눈을 감았고, 어떻게든 그에게 말을 걸어서 주의를 돌리려던 세 여자는 대화를 거부하는 듯이 눈을 감고 있는 그를 보고는 입안의 침만 꼴깍 삼켰다. 그러거나 말거나 류 현은 수련할 때처럼 자신안으로 침잠해 들어갔다.


“후우...”

 현이 대강 생각을 정리하고 눈을 떴을 때는 반시간 가량이 흐른 뒤였다. 눈을 뜬 류 현을 가장 먼저 맞이한 것은,


“...화련 씨?”
“이제야 제가 보이시나 보네요? 마스터.”

방금 막 던전 원정을 마치고 나온 것처럼 산발인 상태로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화련이었다. 그녀는 눈빛만으로 사람을 녹여버릴  있다는 듯이 분노를 불태우고 있었다. 정면에서 쏟아지고 있는 시선이 너무 강렬해서 나머지 시선들은 신경도 안 쓰일 정도였다.

다행스럽게도 생각을 정리하는 동안  현은 지금 상황에 대해서 대강 파악을 마친 상태였다. 일어나자마자 의식이 흐릿한 상태로 석비를 찾아서 방으로 걸어 나오고, 그걸 본 화련이 놀라서 달라붙었다.

류 현이 그냥 단순히 멍한 상태로 움직였다면, 능력을 쓰지 않더라도 쇠파이프 정도는 손아귀 힘으로 찌그러뜨리고도 남는 그녀가 제지하고도 남았겠지만. 류 현은 있는 힘껏 마력을 운용하며 움직였었다. 화련 혼자서는 상처 입히지 않고서는  현을 멈출 수 없는 상황. 희란과 승하가 이 자리에 있게 된 건 그런 이유 때문이었을 것이다.

‘팀에 들어오라고 내가 쫓아다닐 때도 이렇게는 안 봤던 거 같은데.’


화련이 들으면 분노의 땔감으로 쓸 법한 생각을 하며 류 현은 입을 열었다.

“어, 음. 제가 놀라실만한 행동을 했다는 건 압니다만, 해명할 기회를 주시지 않겠습니까?”
“...내가요? 왜요? 내가 왜 놀라야하죠?”


난생 처음 들어보는 그녀의 이 악문 소리에 류 현은 움찔했지만, 할 말을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지금 기세에 밀려서 얌전히 잔소리를 듣고 방으로 돌아가면, 나중에 변명하기가 곤란해진다.


‘이런 건 기세빨로 얼버무리는 게 최고지.’
“제가 화련 씨 입장이었어도 걱정했을 테니까요. 죄송합니다. 눈 뜨고 나서 제정신이 아니기도 했고, 너무 급해서 그랬습니다.”
“...그런 입에 발린 소리에 누가 속을 줄..”
“석비.”
“네?”
“제가 정신을 잃기 전에 석비로부터 전달 받은 중요한 정보가 있습니다. 그게 사실인지 석비를 보고 다시 확인을 해야합니다. 화급을 요하는 일...”
“...그 몸으로 다시 그걸 보러 가겠다고요?”
“...예. 걱정해주신 건 감사하지만..”
“..희란아.”
“네에? 네!”

본의 아니게 외야로 밀려났던 희란이 화련의 부름에 화들짝 놀라며 벌떡 일어났다. 희란의 옆에 앉아있던 승하는 얼떨떨한 얼굴로 화련과 희란을 번갈아 봤다. 눈 아무 죄도 없는 애를 왜 그렇게 무섭게 부르냐고 농을 던질 분위기가 아니었다.

“마스터 좀 부축 해 줄래?   질질 끌려갈 거 같거든.”
“아...알겠어요!”

희란이 반색하며 류 현과 어깨를 맞대며 부축하는 시늉을 했다. 류 현은 약간의 현기증 이외에는 신체적 불편함이 전혀 없으니, 이럴 필요 없다고 하려다가 화련의 눈빛에 주춤했다. 방금 전까지의 화련이 대충 봐도 뜨거움을   있는 시뻘건 불꽃이었다면, 지금은 한계까지 냉각된 쇳덩이 같았다. 어느 쪽이든 손을 대면 화를 입을 게 명백해보였다.

류 현은 드물게도 그 눈빛 아래에 깔린 말까지 읽어낼  있었다. ‘평소처럼 대충 얼버무리려고 드는 거면 각오하시는 게 좋을 거에요.’분명 제 좋을 대로의 해석인데도, 읽히는 말이 존댓말이라서 더 무서웠다.

***


웨인은 류 현이 깨어났다는 소식을 전해 듣곤 협회 건물로 부리나케 달려오다가, 이상한 이야기를 들었다. 지금 류 현이 그가 누워있던 개인실이 아니라, 석비를 보관하고 있는 곳에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설마하니 나흘 동안 누워있던 사람이 그 원인이 있는 곳으로 갔을 거라고 생각하진 않았기에 웨인은 재차 확인했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똑같았다. 웨인이 협회 건물에 도착했을 때 그는 달리고 있었다. 왜 자신이 그런 사고가 터졌던 곳을 접근 금지 명령을 내려놓지 않은 건지 후회하면서.

목표로 했던 방의 문이 가까워지면서 웨인은 천천히 말을 골랐다. 예상할 수 없는 일이었든 아니든, 협회 측이 안일했다는 소리를 면할 수 없는 상황이다.  현이 깨어난 덕택에 최악은 면했지만, 반대로 류 현이 깨어났으니 이제 포화를 두들겨 맞을 차례기도 했다. 보통 일단 열기가 식을 때까지 물러나있는 게 정상이겠지만, 웨인은 다시 그런 사고가 터지길 바라지 않았다. 욕  마디 더 얻어먹는 쪽이 백 번 낫다.

강압적인 태도를 취할 생각 따윈 애초에 없었지만, 그 비슷하게 해석만 되어도 용잡이 팀이 폭발  수도 있는 상황. 웨인이 말을 두 번 세 번 거르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용잡이 팀이 돌아서면 검성도 같이 돌아설 공산이 크다.


“류 현님...?”

그리고 그런 웨인의 노력은 문을 열어젖힘과 동시에 무의미한 일이 되었다.


문 안쪽에는 빛으로 이루어진 물고기가 허공을 유영하고 있었다. 정확히는 물고기가 아니라 빛으로 된 문자였지만, 알아볼 없는 문자이니 웨인의 눈에는 괴상하게 생긴 물고기처럼 보였다.


그런 몽환적인 배경을 뒤에 둔 채, 류 현은 웨인을 돌아봤다. 그의 손끝에는 빛으로 이루어진 문자들이 맴돌며 장난치는 듯한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웨인은 진지하게 자신이 연이은 과로로 인해서 헛것을 보는 게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었다.

멍해져있는 웨인을 향해 류 현은 담담하게 인사를 건넸다.

“오셨습니까. 마침 딱 맞춰서 오셨네요. 일단 문을 좀 닫아주시겠습니까?”


웨인은 홀린 것처럼 그의 말대로 했다. 문을 닫은 웨인이 선뜻 방 중앙을 가로질러 다가오지 못하자, 류 현이 손을 휘저어서 빛의 문자들을 양옆으로 물렸다. 거대한 포식자를 만난 열대어 무리처럼 빛으로 이루어진 물고기들이 흩어졌다. 류 현이 내준 길로 다가온 웨인은 멍한 채로 물었다.


“이게...대체 어떻게 된 일입니까? 석비는요...?”

웨인은 말을 내뱉고 나서 흠칫했다. 자신의 말대로  방 한가운데를 점하고 있어야할 석비가 보이질 않았다. 혼란스러워하는 웨인을 앞에 두고 류 현은 곤란하다는 듯이 뒷머리를 긁적거렸다. 발연기라고 매도해도 할  없을 정도로 작위적인 표정이었지만, 눈앞의 광경에 넋이 반쯤 나간 웨인에게는 눈치  여력이 없었다.

“그게, 정신을 차리고 나서 말입니다. 석비로부터  여기로”


류 현은 제 관자놀이를 검지로 톡톡 두들겼다.


“들어온 정보를 확인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석비를 보러왔었는데 말이죠. 보러왔었는데...”
“류 현이 만지자마자 이렇게 된 거야. 돌덩이는 허물어지고 전부 이렇게 빛으로 변했지.”

류 현이 흐린 말끝을 승하가 받아주었다. 류 현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승하를 돌아봤고, 승하는 네가 무슨 거짓말을 하는 지  알고 있다는 표정으로 그를 마주 봤다. 승하가 부축해주고 있는 화련도 비슷한 표정이었다. 석비를 살피다가 어영부영 만지는 연기를 했지만, 의심이 서있던 그녀들에게는 통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결국 말은 하긴 해야겠지만...클리어 이 후로 미루고 싶은데 되려나?’

되는대로 거짓말을 던져서 모면할 때는 편했는데, 막상 이렇게 전부 청산해야할 처지가 되고 보니  던진 거짓말들이 그렇게 후회될 수가 없었다.

그런 류 현의 속내를  길이 없는 웨인은 그제야 검성의 존재를 인식하고 흠칫 놀랐고, 류 현을 향하고 있는 두 여자의 시선이 수상하다는 것은 눈치 채지 못할 정도로 혼란에 빠졌다.

“...혹시 되돌리는 방법은 모르십니까?”
“죄송하지만 그건 모르겠습니다. 다른 방법이라면 석비를 통해서 전해 받았지만요.”
“예? 그, 그럼 다른 방법이라도 어떻게  되겠습니까?”
“어, 저야 괜찮지만 그렇게 하면 석비로 되돌릴 수 없게 될 겁니다.”
“괜찮습니다. 아프리카 쪽에서 석비를 하나 더 확보했으니까요.”

사실 전혀 괜찮지 않았지만, 이대로 두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몰랐다. 이곳은 협회 본부다. 협회의 모든 전력이 이곳에 모여 있지는 않지만, 사고라도 터진다면 복구하기 힘든 귀중한 자료와 협회의 심장이라는 상징성이 있다.

원래라면 석비로부터 뭔가 정보를 얻은 류 현에게 의견을 구해야겠지만, 웨인은 류 현에게 이대로 두면 무슨 일이 나는  아냐고 물어볼 여유조차 없었다. 연이은 사건사고가 그를 반쯤 돌아버리게 만들었다.


“아, 그런가요. 다행이군요.”

류 현은 이상현상과 조우한 사람답지 않게 빙긋 웃으며 오른 손바닥을 허공으로 내뻗었다.

‘이렇게...맞나? 무슨 주문을 외우는 것도 아니고 기점이 될 부위를 내밀고, 해당 부위를 강하게 인지하라니, 설명서라면서 진짜 대충대충 이라니까.’

류 현은 속으로 투덜거렸지만 효과는 그 즉시 나타났다.

후욱! 허공을 유영하는 물고기처럼 흐느적거리던 빛의 문자가 그의 오른 손바닥으로, 빨려 들어가기 시작한 것이다. 방안을 가득 채운 빛의 문자들이 그의 손바닥으로 빨려 들어가는 데에 채 1분이 걸리지 않았다.

 현은 빛의 문제를 다 빨아들인 제 오른 손을 쥐었다 폈다 해보이더니, 손바닥 위로 육망성 비슷한 표식이 떠오르자 씨익 미소 지었다.  미소를 본 웨인은 왠지 모르게 속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웨인은 최대한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석비에서 뭘 얻으셨는지 여쭤 봐도 되겠습니까?”
“왜  되겠습니까. 이건 열쇠입니다. 열쇠이자, 나침반. 그리고 구속구죠.”


류 현은 오른 손바닥의 표식을 가리키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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