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121화 〉탐식마(貪食魔) (121/429)



〈 121화 〉탐식마(貪食魔)

환생(還生).


거기에 단순히 살아난 게 아니라 미래를 기억한 채, 과거로 돌아온 것.

 현이 품고 있는 비밀이다. 과거로 돌아온 이 후 그는 누구에게도  사실을 밝히지 않았다. 그렇다고 이 사실을 숨기기 위해서 적극적으로 노력한 적도 없었다. 그저  밖에 내지만 않았을 뿐이다.

그가 미적지근한 태도를 보이는 이유는 간단했다. 그가 보이는 행동에 뭔가 이상점이 보이더라도 사람들이 배후 세력의 존재를 의심할지언정, 그가 미래에서 왔다고는 생각하지 않을 테니까.


그것도 단독으로 인류를 녹여버릴 수 있는 대괴수와의 사투 끝에 죽었고, 그 기억을 고스란히 가진 채 돌아왔다고 추측해낸다는 건 추리의 영역을 넘어서 망상이다. 류 현은 그런 추측을 내놓는 이에게 타자기를 쥐여 주거나 아니면 정신과 의사를 추천해줄 것이다. 본인이 그런 삼류 소설에나 나올 법한 설정의 주인공이 되지만 않았다면 말이다.

지금의 용잡이 팀이 구성되고, 우연히 엮이게 된 검성과 어영부영 술잔을 주고받는 관계가 되면서 사실을 밝혀야할지 고민하기는 했으나 고민에 그쳤을 뿐이었다.

‘알고 있다고...? 어떻게?’


하지만 눈앞의 여자는 그런 그의 비밀을 입에 담았다.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미소까지 띈 채로 말이다.

푸홧! 자신에게 던진 물음에 대한 대답을 생각해보기도 전에 류 현의 몸에서 검은 안개가, 탐욕을 형상화 한 듯한 안개가 뿜어져 나왔다.


에너지 드레인. 그가 맞닥뜨렸던 모든 괴수들에게 생명의 위협을 느끼게 만들고, 그것을 현실로 만들어낸 탐욕의 힘이 그를 감쌌다. 평소와 달리 탐욕의 안개는 그 공격성을 드러내기보다, 털을 바짝 세우고 경계하는 야생동물처럼 제 주인의 몸 근처에 머물렀다.


“이것 참...그냥 손대중으로 가지고 놀만한 힘이 아닌데 말이지.”

그런 모습을 재미있다는 듯이 바라보던 여자 칼리프 드 오르시아는,


“아무리 악의는 없어도 숙녀한테 향할만한 건 아니니까. 좀 치워주지 않겠어?”


말  마디로 그가 둘렀던 가시 갑옷을 치워버렸다. 후욱! 산 것, 살아있지 않은 것 가리지 않고 세상 모든 것을 먹어치울  같던 기세의 탐욕의 안개가 흩어졌다. 아무런 악의 없는 아이의 손길에 개미집이 무너지는 것처럼, 어떤 강압스러운 기세도 없는 칼리프의 말에 탐욕의 장막이 벗겨졌다.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손쉽게 무장해제 당한 류 현은 멍하니 여자를 바라봤다.

아지다하카급? 말도 안 되는 소리. 눈앞의 여자는 그 악룡조차 한 손으로 짓누를  있는 괴물이었다. 류 현의 감이. 초능력이라고 지칭해도 과언이 아닐 감이 그에게 알려줬다. 아지다하카라는 그가 봤던 천외천의 괴물조차  여자 앞에서는 평범한 도마뱀에 불과하니, 저항은 무의미하다고!

‘대체 어디서 이딴 괴물이...’


류 현의 머릿속에 오만생각이 뒤엉켰다가 기억의 저편으로 굴러 떨어져갔다. 이전 생에서 그가 상대한 네임드 몹들은 지성은 있는 듯 했지만, 의사소통은 불가능했다. 혹여 의사소통이 가능했더라도 인간인 류 현과 느긋하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 정도로 괴수의 본능이 녹록하지도 않았다.

그리고  점이 류 현의 승리 요인  하나였다. 괴수는 눈앞의 인간을 그냥 지나치지 못한다. 목숨이 간당간당한 상황에 몰리는 게 아닌 이상, 감지 범위 안의 인간을 찢어 죽이는 것이 최우선인 것이다.

네임드  중 지능이 좀 높아 보이는 개체들은 이 우선순위를 어느 정도 바꿀 수 있는 듯했지만, 대전제는 바뀌지 않았다. 인간의 전술을 이해하고, 역이용했던 악룡조차 주요 거점을 공격하고 바로 빠지진 못했으니까.

대화? 의사소통이 가능했어도 괴수는  현의 상 하체를 분리시킨 후에 시도했을 것이다. 류 현이 알고 있는 괴수라는 존재는 그랬다. 협상의 대상이 아니라, 일단 찢어 죽인 후에 생각하는 상대.

“놀랄만하긴 하지만  너무하네. 나도 큰 맘 먹고 희생하면서 찾아온 거라고?”


그런 그에게 말하는 걸로 모자라서, 차분하게 대화를 종용하는 여자의 모습은 류 현에게는 악몽의 현신이었다. 괴수보다  괴물 같은 무력을 지닌 걸로도 모자라서, 본능이라는 제약조차 받지 않는 괴물!

짧지만 일생을 싸움으로 보낸 류 현으로서는, 이전 생에서 저만큼 강하거나 더 강한 존재와 적으로 밖에 만나  적이 없는 그로서는 당연한 반응이었다. 그가 맞닥뜨려온 존재 중에서 비교할 대상이 없는 눈앞의 여자는 경계하지 않고는 배길 수 없는 존재인 것이다.


하지만 그런 류 현의 귀에도 칼리프의 푸념은 아주 잘 들렸다.

“...희생?”
“이제 좀 이야기를 들어줄 마음이 생겼나보지? 그래, 희생. 당신이 혼자서 으르렁거리고 절망하면서 보내버린 이 시간은 너무너무 중요한 기회거든? 억지로 비집고 들어오느라 내가 얼마나 고생한 줄 알아? 당분간은 꼼짝없이 요양해야 할 판이라고.”
“비집고 들어오다니 그게 무슨...”

류 현은 그제야 주변이 이상하다는 것을 깨닫고 황급히 주변을 살폈다. 세상이 온통 검정 일색이었다. 손을 휘두르면 시커먼 검댕이 묻어날 것만 같은 칠흑 같은 어둠. 떨어지지 않고 있기에 바닥이 있음을 알고, 너무나 완벽한 어둠 때문에 천장이 있음을 알 수 있을 따름이었다.

윤곽이라도 알아볼  있는 건 칼리프가 앉아있는, 주변과 똑같은 재질의 시커먼 안락의자가 전부였다.

“여기는 대체...”
“너무 익숙해서 의식은 못  거야?”

실실 웃으면서 내뱉는 칼리프의 말에 류 현은 눈을 흘겼다. 네가 나를 데리고 오지 않았느냐는 눈빛이었다. 칼리프는 어깨를 으쓱해보였고, 류 현은 불현 듯 잊고 있었던 사실을 떠올렸다.

“...맞아, 석비를 보고 나서...”
“이제야 기억났나 보네? 이렇게 손 많이 가는 남자가 뭐가 좋다고 그 난리인지 모르겠다니까.”
“...여기는 어디지?”


석비를 보자마자 머릿속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문자의 폭포에 휩쓸려서 정신을 잃었다. 언제 정신을 차렸는지도 모르게 그 고통에 헐떡거리다가, 정신을 차리고 보니 이런 괴이쩍은 공간이었다. 지금은 도저히   없는 ‘강신’을 빼면 가장 강력한 패가 여자의 손에 깨지긴 했지만, 류 현은 다그쳐 묻는 수밖에 없었다.

이전 생에서는 없었던 일이었지만, 석비가 발광하던 걸로 봐선 퍼플 던전의 동시 다발적인 개방은 중요한 기점인 게 분명했다. 이런 이상한 공간에 있게 된  눈앞의 여자의 짓이라면, 협상이든 싸움이든 방법을 찾아서 돌아가야만 한다.


“여기가 어디냐니. 보고도 모르겠어?”
“내가 이런 기분 나쁜 곳을 어떻게 알...”

신경질적으로 대꾸하려던  현은 칼리프의 얼굴을 보고 흠칫했다. 칼리프는  없이 진지한 얼굴로  현을 가리키고 있었다. 정확히는 그의 가슴을. 류 현이 편의상 몸 안의 마력의 중심축으로 삼은 지점을 말이다.

‘설마...’

류 현은 고통에 몸부림치느라 닫아걸고 있었던 감각의 창을 열어젖히고는 닥치는 대로 주변을 훑었다. 칼리프 또한 그 범위에 있었지만, 그녀는 당연하다는 듯이 그의 감각을 피해갔다. 아니, 그의 본능이 부담스러워서 피한  같은 모양새였다.

상당히 신경 쓰일만한 일이었지만, 확장된 감각으로 주변을 살피던 류 현은 곧 그 사실에는 신경 쓸  없게 되었다.


‘뭐...? 아니야, 그런 게 가능할 리가...’

자신이 얻은 결론을 부정하기 위해서 다시 감각의 팔을 여기저기로 내뻗었지만, 결과는 똑같았다. 착각할 수가 없다. 그가 괴수와의 싸움을 시작한 이래로, 계속 함께한 그의 든든한 아군이자 끊임없이 신경써야하는 양날 검이었으니까. 류 현은 거의 넋이 나간 얼굴로 칼리프를 올려다봤다. 그녀는 빙글빙글 웃으며 말했다.

“당신이 생각 하는 대로야. 여기는 당신의 몸 안쪽. 정확히는 당신이 억누르려고 그렇게 애쓰던 능력의 벽 너머야. 어때, 생각보다 훨씬 얌전하지?”
“...그런 말도  되는 소리를 내가 믿을 거라고..”
“안을 다 들여다보진 못했지만 대충 어떤지는 알고 있잖아? ‘강림’도 그렇게  거니까. 아니, 어쭙잖게 들여다봐서 더 지레 겁먹었으려나?”
“...당신 대체 누구요?”
“내숭 떨 필요가 없어지니까 여지없이 본성이 나오네. 나 나름대로 크게 희생해서 여기 온 거라니까?”
“신소리 그만하고...”

후우우. 류 현의 입에서 한 숨이 터져 나왔다. 그는 양손으로 제 머리를 한껏 헤집었다. 생각 같아서는 그대로 두개골을 뚫고 뇌를 주무르고 싶은 기분이었다. 그리하면 이 어처구니 없는 꿈같은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았다.

“긴장 좀 풀어주려고 했더니 별 소용이 없네. 좋아, 어차피 모두 설명해  수도 없으니까. 까먹지 말고 잘 기억하라고?”
“......”

류 현이 뭐라고 대꾸할 말을 짜내기도 전에 여자는 폭풍처럼 말을 이어갔다.


“그 석비는 열쇠야. ‘문’을 닫는, 문지기를 멈추는 열쇠. 지금 당신네 세계 마법 수준으로는 쓸 수 없는 물건이지만, 손을 써서 당신에게 반응하게 해뒀어. 잊지 마, 그건 당신에게만 반응해. 다른 플레이어들이 건드려도 열쇠는 반응하지 않아. 당신이 다룰 수 있는 개수도 하나가 한계야.”
“열쇠 없이는 ‘문’은 무슨 짓을 해도 닫을 수 없어. 그렇게 만들어진 물건이니까. 열쇠 없이는 문지기도 잡지 못할 테고. 괜한 시도하려다가 힘 빼지 말고 하나하나 닫도록 해. 사용법은 이미 입력시켜놨으니까. 석비를 보면 자연히 알게 될 거야.”
“세 개의 ‘문’중 하나만 열고 들어가도 나머지도 같이 열리니까   참고하도록 하고. 나머지 두 개의 ‘문’이 열리더라도 완전 개방되기 전에 열쇠로 닫기만 하면 상당한 유예를 얻을  있을 거야. 어쩌면 ‘문’이 좁아져서 못 넘어올 수도 있고. 절대 잊지 마. 최선은 하나하나 최대한 확실하게 닫는 거야.”

 현은 ‘문’이나 문지기에 대해서 물으려고 했지만, 칼리프의 기세에 압도당해서 그 말을 듣기만 하였다. 그런데도,


‘세 개의 문? 지금 발견된 블랙 던전도 세 곳 아니었나...? 석비에 위치가 표시된 블랙 던전이...그래, 한국, 미국, 아프리카 세 곳이었어.’


괴수 이외에는 하등 쓸모가 없을 거라고 생각한 그의 직관력이, 칼리프가 쏟아내는 정보를 잡아채서 그가 알고 있는 사실과 연결점을 찾아내었다. 마치 알고 있던 사실을 잠깐 잊었다가, 다시 떠올리는 듯한 자연스러움 마저 느껴졌다. 류 현은 기묘한 고양감 속에서 칼리프의 말을 경청했다.

“원래라면 ‘문’이 나타날 일이 없을 정도로 불공평한 게임이었어. 당신 덕택에 그나마 제대로 돌아가게 돼서 ‘문’이 나타난 거야. 거창하게 대가를 치를 시간이라고 했지만, 이게 당신네 세계가 원래 겪었어야  시련이지. 그러니까, 이겨내. 악룡을 때려잡았을 때처럼. 열쇠가 있으면 ‘문’을 닫는 건 어렵진 않을 거야. 애초에 그건 열쇠를 만들 능력을 강제로 개발시키려고 만들어진 거니까.”“...당신은 나를 이전 생부터 봤다는 겁니까?”

칼리프의 말이 멈추자 류 현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처음에 느꼈던 경계심 같은 건  녹듯이 사라진 후였다. 눈앞의 여자는 적의는커녕, 걱정만이 가득했다. 혹여 의미가 잘 못 전달될까 몇 번이고 고심한 기색이 역력했다.


‘문’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지칭하지 않는 것은 이상했지만, 그렇다고 말에 묻어나는 절절함이 사라지진 않았다.

“정확히는 당신이 악룡을 고꾸라뜨렸을 때부터.”
“...‘문’이라는 것에 대해서 이 이상 말해줄 수 없습니까?”

질문을 내뱉기도 전에 그의 직감이 답을 내놓았지만, 류 현은 그녀의 대답을 듣고 싶었다.


류 현의 물음에 칼리프는 말없이 눈을 감았다. 고개를 끄덕이지도 가로젓지도 않았지만, 그걸로 충분했다. 칼리프는 말을  하는  아니라 못하는 것이다.

‘...말 하는  제약이 있나? 이런 존재한테 제약을  수 있는 존재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팔에 소름이 돋는 듯했다.


“마지막으로 하나 더. 당신 안에 있는 건 억누르려 든다고 억누를 수 있는 게 아니야.”
“...? 그런 걸 그냥 풀어놨다간...!”

욱한 그의 반응을 칼리프는 고개를 젓는 것으로 틀어막고는 말을 이었다. 어린 동생을 조곤조곤 타이르듯이.

“당신을 잡아먹는 게 목적이라면 당신이 가장 약할  잡아먹었을 거야. ‘그건’목 아래가 전부 없어져도 입만 달려있으면 회생 가능하니까. 당신이 강해지기를 기다릴 필요가 없지. 오히려 족쇄만 튼튼해질 뿐.”
“......”


류 현은 속으로 그녀의 말을 반박하려고 노력했지만, 모두 허사였다. 다른 이라면 웃어넘겼겠지만, 그에게는 불가능했다. 그녀의 말대로 그 안에 똬리를 틀고 있는 힘은 크기 유무를 떠나서,  마력을 깨우친 플레이어가 감당할 수 있는 그런 성질을 것이 아니었다. ‘강림’을 통해서 그 편린이나마 지겹도록 맛 본 류 현이 가장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를 집어삼키는 게 목적이었다면, 각성과 동시에 삼켜졌을 것이다.

 현이 혼란에 빠져있는 동안 칼리프의 팔이 화살 맞은 것처럼 경직되었다가, 풀려났다. 그녀는 충격을 받은 제 오른손을 들어보더니 헛웃음을 흘렸다. 칼리프의 웃음소리에 류 현이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봤고, 칼리프는 안락의자에서 내려와 그와 눈높이를 맞췄다.

“...그렇게 많이 들였는데 벌써 한계네. 여하튼 다시 생각해보도록 해. 이전생과는 여러모로 다를 테니, 싫어도 당신은 ‘그걸’ 다루는 방법을 바꿔야  거야. 그럼, 건투를 빌어.”


여자의 작별인사를 들음과 동시에 류 현은 정신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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