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0화 〉탐식마(貪食魔)
“대체 언제까지 기다리기만 해야 한다는 거죠?”
질책성이 다분한 화련의 물음에 웨인은 눈앞이 깜깜해지는 느낌이었다. 그답지 않은 일이었다.
협회 대표 플레이어로 화려한 길만 걸을 거라는 사람들의 상상과 달리, 웨인은 협회 소속 플레이어들에게는 든든한 아군이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동료를 부고를 전하는 마냥 반갑지만은 않은 존재였다.
굳이 그가 부고를 전하거나, 보상금을 전달할 의무 따윈 없었으나 웨인은 그 일을 자청했고, 유가족이나 유가족이 없을 경우 사망한 플레이어의 동료로부터 원망을 수도 없이 들었다. 그리고 그 원망을 외면하지도 않았다. 그것이 자신의 의무라고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그런 웨인조차 자신을 향하고 있는 시선을 견뎌내기 어려웠다. 그는 결국 도망치듯이 말을 짜냈다.
“...죄송합니다.”
“아니 내가 그런 말 듣겠다고...하, 됐어요. 말을 말죠.”
화련은 그리 말하고도 속이 끓는 지 한참을 더 씨근덕거리다가 방을 나섰다. 웨인은 침묵으로 그녀를 배웅했다.
“후...”
웨인은 뒤를 돌아보더니 무너지는 것처럼 의자에 주저앉았다. 그의 시선 끝에는 병원용 침대와 용도를 다 알 수는 없지만 수많은 수치들을 쏟아내고 있는 기계들이 가득했다. 그 기계의 숲 사이에서 아무 일 없다는 듯이 누워있는 남자, 류 현이 이 모든 소란의 중심이었다.
이런 비상사태에도 협회 밖으로 움직이기는커녕, 미디어 매체에 얼굴조차 못 내밀게 된 원흉.
‘아무 이상 없다...라.’
저도 모르게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류 현이 석비를 보고 의식을 잃은 지 나흘 째. 석비에 떠오른 도시들에 퍼플 던전몹이 동시다발적으로 나타난 지도 나흘이 지났다. 협회로 초대한 손님의 신변문제를 외면할 정도로 웨인과 협회는 몰지각하지 않았다.
외부로 이야기가 새지 않는 선에서 최선을 다해서 방법을 찾았다. 협회 전속 의사라고 할 수 있는 자로 모자라서 교차검증을 위해서 외부에서 초빙도 해왔다. 비밀엄수를 위해서 몇 곱절은 더 비용을 들여서.
그리고 그들이 얻은 답은 ‘이상 없음.’ 이었다. 의식을 잃은 이유도, 왜 이 상태가 지속되는 지도 알아낼 수 없었다. 지금 당장 눈을 떠도 이상하지 않은 상태라는 낙관적인 전망만 얻었을 뿐 해결책을 내놓는 의사는 한 명도 없었다.
그렇게 어영부영 나흘이 지났다. 대 도시에 퍼플 던전이 터진 초유의 사태에 직면한 바깥 상황은 순탄하게 수습 분위기로 흘러갔지만, 협회 본부 분위기는 아니었다.
퍼플 던전이 터진 원인을 알아내기는커녕 그럴싸한 단서조차 찾지 못하고 있는데다가, 아무리 좋게 쳐줘도 뚱한 얼굴을 한 손님들이 돌아다니고 있었으니까. 그것도 협회측에서 제공한 물건 때문에 벌어진 사고였다.
이런 사정을 모르는 일반직원들이나 플레이어들도 아무런 공식일정도 없이 협회 본부에 나타난 검성 때문에 무슨 일이 터지는 게 아닌가 하고 불안해했다.
‘화 안 내는 게 어디냐만은...’
그녀를 향한 불안한 시선들과 달리, 지난 나흘 동안 검성은 정말 얌전히 있었다. 우거지상을 쓰고 돌아다니지도, 쓸데없이 본부를 휘젓고 다니지도 않았고 근처 음식점이나 들락거렸다. 그 좋아하는 술조차 딱 끊고, 시간되면 협회로 돌아와서 자고 눈뜨면 조용히 밖으로 나갔다. 이번 사태 때문에 던전 관리가 허술해진 틈을 타, 튀어나온 괴수를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정리해준 건 덤이었다.
정말 놀랄 일 밖에 없었던 나흘이었다. 검성이 류 현을 부탁한다고 고개를 숙인 것도 놀라웠지만, 그 뒤로 상태를 묻는 것 이외에는 별다른 말이 없는 건 더 놀라웠다. 류 현의 유일한 혈육인 누나에게 거짓말을 늘어놓게 된 화련이 일행을 대표해서 화내고 있다는 느낌도 없잖아 있었지만, 그걸 감안해도 검성의 지난 행보를 생각하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반응. 위원회 측에서 이 와중에도 은근히 검성과 류 현과의 관계를 떠봐달라고 요청해 올 정도다.
‘그것도 본인이 깨어나야 가능한 일이지.’
웨인은 다시 가슴 속에서 치밀어 오르는 한숨을 삼키며 생각했다.
‘무사히만 깨어나 주십시오.’
***
“끄으으...흐으으...”
칠흑 같다는 말 이외에는 더 할 말조차 없는 공간에서 남자는 홀로 신음하고 있었다. 보고만 있어도 그 고통을 짐작할 수 있을 정도로 처절하게 몸부림치고 있었다.
“카학...! 쿨럭!”
머리를 움켜쥔 채로 신음하는 남자는 도통 가만히 있질 못하고, 바닥에 구르는 건 기본이요. 피부가 찢어질 정도로 머리를 긁어대고, 바닥에 머리를 들이받는 등 자해를 반복했다. 마치 자해하고 있는 쪽이 덜 고통스러운 것처럼. 자해를 반복하는 남자의 몸 위로 증기가 피어오르며 자해의 흔적들이 순식간에 아물어갔다.
금방이라도 숨이 끊어질 것처럼 헐떡거리는 남자의 자해는 한참은 더 계속되었다. 반나절 가량이 지나고 나서야 남자의 입에서 끓는 신음이 멎었고, 자해행위도 중단되었다. 고통에서 해방된 남자는 그대로 추욱 늘어졌다.
“흐으...하아...”
모든 기운을 소진하여 축 늘어진 남자는 멍한 머리로 자신을 다잡으려고 애썼지만, 자신의 이름조차 떠올리기 힘들었다.
‘내...이름...이름이...’
그런 남자의 귓가로,
“벌써 포기한 거야? 악룡 사냥꾼씨?”
‘뭐...?’
남자, 류 현은 벌떡 일어서려고 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기절하지 않고 있는 것도 자신의 의지가 아니라, 자신의 머릿속에 비집고 들어와서 한껏 뒤집어 엎어놓고 이제는 기억 아래로 침전하려고 하는 불가해의 지식 덩어리들 때문이었다. 그것들이 탈진해서 정신줄을 놓으려는 그의 신경을 계속해서 건드려댔다.
그런 반 시체 상태의 류 현이 할 수 있는 일은 고개를 살짝 돌리는 정도였다. 바닥에 얼굴이 쓸렸지만 그런 걸 신경 쓸 수 있을 정도로 여유로운 상태도 아니었다. 류 현은 도무지 초점이 잡히지 않는 눈을 최대한 부릅떴다.
‘여자...?’
초점조차 제대로 잡히질 않으니 까만 배경에 덩그러니 서있는 인영조차 구분하기 쉽지가 않았다. 알 수 있는 건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존재가 여자라는 것과, 얼굴을 식별할 수는 없지만 왠지 웃고 있는 거 같다는 기분 나쁜 사실이었다. 이 공간에 누군가가 있다는 사실을 이상하게 여길 정도의 여유가 없었기에, 류 현은 메마르다 못해 갈라진 목으로 간신히 물었다.
“누구...지...?”
“흐음, 글쎄. 당신네 세계 기준으로는 그런 말이 없을 텐데. 뭐라고 해야 하나.”
“......?”
“아, 일단 그런 상태로는 들어도 기억 못할 테니.”
따악! 여자가 손가락을 튕기자 류 현의 몸을 빛이 감쌌다. 그의 몸을 감싼 빛은 아무런 저항도 받지 않고 바로 몸 안쪽으로 스며들었다. 그러자 반시체나 다름없었던 그의 몸뚱이에 활력이 돌아왔다. 웬만한 상위 괴수급의 항마력을 가진 그로서는 상상도 못해본 일이었다.
“어?”
공격 마법이든, 치료 마법이든 당사자의 동의 없는 외부로부터의 마력 행사는, 필연적으로 항마력의 저항을 받게 된다. 내부의 마력이 고갈되면 항마력도 자동으로 깎여나가지만, 강대한 마력을 담았던 그릇은 그 자체만으로도 항마력을 띈다.
류 현 정도에 이르면 마력이 고갈되어도 겉 부분의 항마력이 소멸될지언정, 내부를 쉽사리 장악 당하진 않는다. 마법사가 그의 배에 손을 쑤셔 넣고 천천히 갉아들어 온다면 모를까. 이런 식으로 외부로 부터 단박에 침투를 허용한 적은 없었다. 그런 일이 가능했던 건 아지다하카의 극독뿐이었다.
“이제 좀 똑바로 보여? 위험하다 싶으면 그냥 바로 도와주려고 했는데, 그걸 그냥 근성으로 버틸 줄은 줄이야. 보기보다 근성 있네. 하긴, 그거 받아서 남 주는 것도 아니고. 잘 버텼어.”
류 현은 주절주절 말을 늘어놓는 여자를 올려다보며 조심스럽게 자세를 고쳐 앉았다. 그러면서도 여자의 손이나 발에서 시선을 떼어놓지 않았다.
‘괴물.’
초면의 여자에게 내리는 평가라기에는 흉흉한 평이었지만, 류 현은 눈앞에 서있는 여자가 못해도 아지다하카 다음으로 위험한 괴물이라고 직감했다. 전생에서 그가 죽을 때까지 그의 감은 틀린 적이 없었다. 아지다하카급의 상대의 힘을 정확하게 측정할 역량이 없어서 대충 묶어서 퉁친 거지만 그보다 낮을 일은 없어보였다.
검정 라이더 슈트 차림의 여자는 앉을 자리를 찾는 듯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허공에 손을 휘적거렸다. 여자의 손놀림을 따라 어둠이 꿈틀거리더니 안락의자로 변했다. 여자는 시커먼 안락의자에 몸을 싣더니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라이더 슈트 차림에 안락의자. 그 모습을 본 류 현은 여자의 취향이 보통 이상한 게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 생각과는 별개로 여자는 그 괴상한 조합마저 소화해내고 있었지만, 갑작스럽게 아지다하카급 괴물을 맞닥뜨린 류 현은 그런 사실을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묻고 싶은 게 많은 얼굴인데...왜 입을 꾹 다물고 계실까. 혹시 쫄았어?”
“......”
류 현은 대답대신 기세를 날카롭게 벼렸다. 회복한지 얼마 안 돼서 휴식이 간절했지만, 범의 아가리에 머리를 넣고 잠을 자는 취미 따윈 없었다.
“아아, 남자들은 꼭 이런다니까. 괜히 회복시켜줬나 보다. 기억하든 못하든 정보만 건네고 갈 걸.”
“...누굽니까.”
“누구냐고? 흐음, 누구냐.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이네. 아까도 말했지만 당신네 세계에는 아직 그 말이 없거든. 발음은 될 테지만 껍데기뿐이라서 별 의미도 없어. 그러면서 비용은 들고.”
“그게 무슨...”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냐고 받아치려던 류 현은 저도 모르게 움찔했다. 여자의 입술이 달싹거리며 내는 소리가 그를 긴장시켰다.
“[대도서관]의 [사서]. 아니, 2대 [용사]라고 하는 게 더 직관적이려나? 2대 [용사] 칼리프 드 오르시아. 이 정도면 내 소개가 됐으려나?”
“용사...?”
류 현은 자신의 입에서 나온 용사라는 말에 흠칫했다. 분명히 같은 발음이었음에도 달랐다. 저 여자가 내뱉은 [용사]와 자신이 내뱉은 용사는 마치 다른 말처럼, 뭔가가 달랐다.
‘마법사들의 언령 같은 건가? 아니야, 그런 것과는 비교가 안 된다.’
류 현이 얼빠진 얼굴로 제 생각을 곱씹는 동안 여자는 생글생글 웃으면서 상체를 쑥 내밀어왔다.
“응, [용사]. 마을을 괴롭히는 괴물을 썰어버리고, 괴물 두목인 마왕을 썰어버리는 그 [용사]. 뭐 타이틀을 만든 건 선대 [용사]님이 다 하긴 했지만.”
“대체...”
여자가 [용사]라고 할 때마다 위장이 쥐어 짜이는 느낌이었다. 저주나 공격마법에 배가 꿰뚫렸을 때와는 달랐다. 단순히 내장이 물리적으로 타격을 입는 것을 넘어서 류 현이라는 존재를 거대한 추가 짓누르는 듯한 느낌.
아지다하카와 동급이라고? 류 현은 그런 생각을 한 자신에게 쌍욕을 한바가지 퍼붓고 싶은 기분이었다. 격이 다르다. 마치...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 대충 예상은 가는데. 그럴 시간에 빨리 들을 거 듣고 복귀하는 게 훨씬 나을 걸?”
“?”
“시간이 얼마 안 남았거든. 당신이 기억을 가지고 되돌아온 대가를 치를 시간이.”
여자는 웃으며 그리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