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9화 〉탐식마(貪食魔)
살짝 혈색이 부족해 보이는 입술사이로 회색빛 연기가 흘러나왔다. 연기는 여느 담배연기와는 다르게 허공에서 흩어지지 않고, 입술 사이로 흘러나온 모양새 그대로 천장까지 올라가다가 천장에 부딪히자 그제야 형체가 흩어졌다.
연기의 정체는 비르고. 미개척 던전에서나 볼 수 있는 회색풀이다.
처녀지에서만 볼 수 있다고 해서 이런 이름이 붙은 이 풀은, 이름과는 다르게 찧어서 쓸 경우 볼 수 있는 지혈효과 이외에도 말린 것을 태운 연기를 들이마시면 흥분을 유발하는 효과가 있다.
당연하게도 플레이어 협회는 이를 마약으로 규정하고 금지물품으로 지정했다. 비르고가 알려진 것도 앞의 지혈효과가 아니라 뒤쪽의 효과 때문이었다. 던전 안에서 자생하는 무수히 많은 독초들과 달리 비르고는 어떠한 부작용도 없었으니까. 협회는 비르고에 대한 정보를 조작하기 까지 해가며 비르고 근절에 힘을 썼다.
하지만 직접감시가 가능한 현실에서도 대마초를 기르다가 잡히는 경우가 허다한데, 감시의 눈이 완벽할 수 없는 던전 내의 물건이라면 근절시키는 것 불가능한 일.
정작 대부분의 플레이어들은 존재조차 정확하게 알지 못하는 이 풀은, 소위 말하는 있는 작자들 사이에서 알음알음 유행 중이었다. 부작용은 없고, 깔끔하게 즐길 수 있는 마약. 비르고의 값은 같은 무게의 금을 훨씬 상회했다. 제3세계 쪽에는 비르고를 전문적으로 체취해서 유통하는 길드까지 있을 정도였다.
그런 귀하신 ‘약’을 태우고 있는 남자의 표정은 썩 밝지 못했다. 그가 들여다보고 있는 테블릿pc에 비치고 있는 지표들이 그렇게 만들었다. 비르고를 태우고 있기에 남자의 눈에는 그 지표들이 더욱 잘 들어왔다.
부자들이 비르고를 비싼 값 주고 피우는 이유였다. 비르고는 무조건적인 흥분을 유발하지 않는다. 약효를 타고 올라가고 싶을 때에 올라 갈수 있고, 다른 일에 집중하고 싶으면 집중력을 높여준다.
[연기에 질식하겠군. 비르고에 중독증상이 없다는 거 다시 검토해봐야하는 것 아닌가 모르겠어. 자네 건강검진은 제대로 받고 있나?]
남자는 왼편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눈살을 찌푸리며 시선을 돌렸다. 남자의 시선이 닿는 곳에는 홀로그램 영사기가, 남자보다 훨씬 나이 들어 보이는 노인의 얼굴을 띄우고 있었다.
남자는 물고 있던 파이프를 입에서 떼고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질식해도 내가 질식하는 데 뭐가 문제란 말이야? ...나라면 시답잖은 불평할 시간에 위스프, 그 고삐 풀린 망아지 같은 놈들이나 신경 쓰겠어. 대체 몇 번째요? 대사관이 무슨 음료수 자판기인 줄 아는 겐지...”
남자가 책상을 손가락으로 두드리자 불투명한 창이 떠올랐다. 창 위에는 어제자 기사가 떠올라 있었는데, 남아공에 있는 프랑스 대사관이 위스프의 공격을 받았다는 내용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그에 관해서 볼코프가 어려움을 호소하더군. 위스프 내에서도 사조직이 생겨나고 있다고 말일세. 어찌 보면 꽤 오래 버틴 셈이지.]
“...민족이니, 독립이니 하는 것들 꼬락서니 하고는. 솔직히 나는 볼코프 그놈도 슬슬 갈아치워야 할 때라고 보는데. 비싼 돈 들여서 박아놨더니 그놈이 제대로 하는 일이 대체 뭐가 있어? 지원금은 따박따박 다 받아먹으면서, 정작 일이 터지면 그 때 가서 수족이 될 수하가 부족하다, 민족주의자 놈들이 강세라서 어떻게 해 볼 수가 없다. 시청 공무원 놈들도 그 정도는 아니라고.”
남자의 불평에 다른 곳에서 여러 침음들이 터져 나왔다. 남자가 자리한 방에 설치되어 있는 영사기는 하나가 아니었다. 족히 열은 넘는 인원 아니, 홀로그램들이 한 자리씩 차지한 채 출력되고 있었다.
기이하게도 이 회의에 얼굴을 ‘비추고’있는 이들의 구성은, 겉보기에는 놀라울 정도로 일관성이 없어 보였다. 포춘지에 단골손님으로 등장하는 얼굴만 봐도 ‘아! 저 사람!’ 소리가 나오는 이부터, 옆집 아저씨만큼이나 별 특징이 없어 보이는 이까지.
하지만 회의의 참석자 중 누구도 서로를 가볍게 여기지 못했다. ‘공식적인’ 소유자가 아닐 뿐, 포춘지에 매년 등장하는 기업체 네 다섯은 기본으로 가진 이들이니까. 재계에 미치는 영향력은 그 이상이다.
[그렇다고 볼코프를 갈아치울 수도 없는 노릇. 지금 그놈을 치우면 위스프는 말 그대로 고삐 풀린 망아지 꼴이 될 터.]
[애초에 제대로 제어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조차 안 했으니 어쩔 수 없는 노릇 아니겠어? 민족이니, 종교니 외치는 것들한테 제대로 된 판단을 요구할 수도 없으니. 목줄을 제대로 달 수도 없고.]
[그래도 나는 볼코프를 갈아치워야 한다고 보는데. 그놈이 추가로 받아간 지원금을 생각하면 그놈이 말한 위스프 내의 사조직 중 하나가 제 소유일 지도 모르지. 서열 3위씩이나 되는 놈이 하는 일이 대체 뭐야?]
일란 볼코프. 두 번째 테러 이후, 인터폴의 적색 수배를 받고서 2년 넘게 국제 수사망을 피해서 여전히 정력적으로 불장난을 치고 다니는 위스프 서열 3위에 빛나는 국제 범죄자다.
사람들은 위스프가 착취를 견디다 못해 들고 일어난 맛간 민족주의자쯤으로 알지만,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무장단체는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어마어마한 돈이 든다. 민족의 해방을 위한 애민심은 광신도를 만들 수 있을지언정, 총을 만들 수는 없다.
유럽에 국적을 둔 플레이어가 아프리카로 출국했다는 정보를 구하는 데 돈이 든다. 그 플레이어 파티가 던전사냥을 하는 포인트까지 이동하는 데도 돈이 들며, 통상 개인화기 보다 저지력을 더 높인 대 플레이어용 총기를 구하는 데는 말도 안 되는 수준의 웃돈이 올라간다.
이것도 돈, 저것도 돈. 현대의 테러단체는 그야말로 돈 먹는 하마인 것이다. 자금의 출처를 명확히 하는 것보다, 정체모를 스폰을 일단 받고 볼 정도로.
일란 볼코프 라는 남자는 오고가는 현금 다발 속에서 얻어낸 성과 중 하나였다. 위스프 내에 이 사실을 명확하게 인지하고 있는 건 볼코프 본인 뿐 이다. 위스프 간부들은 그가 조국의 스킨헤드 테러에 질려버린 망명자 정도로 안다. 아주 돈 많은 망명자 말이다.
[...나 또한 볼코프가 의심스럽지만 지금은 갈아치울 수도, 치워서도 안 될 일이지.]
“쯧, 또 이런 식으로 유야무야...”
[다른 때라면 몰라도 지금 같은 상황에서 느긋하게 그놈을 치울 계획을 짤 수는 없는 일 아닌가. 그놈이 원하는 대로 착착 움직여주진 않더라도 말이지.]
[마음에 들진 않아도 맞는 말 아닌가. 지금 그놈까지 치워버리면 아프리카에는 귀가 아예 닫히고 말아. 돈 밝히는 깜둥이 녀석들 몸은 더럽게 사리니까 말이지. 민족이니 어쩌니 하는 미치광이들이 아니면 얼마를 주든 간에 도시 밖으로 나가려고 들질 않으니 원.]
거듭되는 설득에 남자는 혀를 차고는 파이프에 다시 비고르를 채워 넣었다. 남자가 불을 붙이는 것까지 기다려 준 후 테이블 중간에 얼굴을 띄우고 있는 노인이 말했다.
[그럼 볼코프에 대한 처분은 차후 일이 수습된 후에 하는 것으로 하고, 웨인 크로이츠는 어떤가?]
“어쩌고 말고 할 것도 없어. 사흘째 협회 본부 밖으로 나오질 않고 있으니까. 협회가 국가의 눈을 피해서 단독으로 지하통로를 뚫을 재주가 없다면 그놈은 아직 협회 안에 있겠지.”
[당일만 해도 혼자서 오우거를 사냥할 정도로 쌩쌩 했다던데, 갑자기 신변에 문제라도 생긴 건가?]
[그렇게 쉽게 고꾸라질 놈이었으면 진작 잡았겠지. 골치 아프군. 그 놈 성격상 협회가 말리든 말든 벌써 뛰쳐나와서 괴수 때려잡고도 남았을 텐데. 대체 무슨 꿍꿍이 속인 건지.]
[너무 복잡하게 생각하지 말자고, 협회라고 지금 상황에 대해서 알아봤자 얼마나 알겠어? 비상상황이니까 웨인 녀석도 잠자코 대기하는 거겠지. 또 퍼플 던전이 터져서 런던교 위에 오우거가 뜨지 말라는 법은 없으니까.]
[마틴, 자네 그 철학 덕택에 독일이 EU탈퇴하겠다고 노발대발 한 건 기억 안 나나?]
[젠장할, 대체 몇 년 전 이야기를 아직도 우려먹는 거야? 베니 에벌린을 총리한테 보내는 건 자네들도 찬성했잖아!]
[자네가 베니를 따로 만나서 이상한 바람 넣는 건 찬성한 적 없지.]
[자자, 사적인 이야기는 따로 만나서 하도록 하고. 웨인은 침묵하고 있지만 협회가 손을 놓은 건 아니지 않나. 알렉스, 러시아 상황은?]
[공표한 내용 그대로 움직이고 있지. 별 특별할 것도 없어. 방어망 구축하고, 감지 못한 정부 갈구고 뭐 평소대로지. 전에 한 번 호되게 당한 덕에 협회 욕 먹어가면서 할 건 다했지. 방어선 구축은 아마 제일 빨랐을 걸. 사건 당일에 방어선 구축이 끝났으니까.]
[듣던 중 반가운 소리군. 일본은?]
화면 패널에 떠올라 있던 인상 좋은 금발 남자의 얼굴이 순식간에 일그러졌다. 가만히 웃고만 있어도 호감을 이끌어 낼 수 있는 남자의 입에서 나온 말은 예상외로 꽤나 험악했다.
[개판이야. 튀어나온 리치는 잡긴 했는데, 마무리 되려면 한참 멀었어. 그놈의 질서 유지가 피해를 더 늘릴 줄이야. 구울된 시신 훼손하지 말라고 발광해대는 통에 어쩌고 자시고 할 것도 없어. 그 와중에 구울 몇 마리가 지하도 타고 도망간 건 덤이고. 젠장, 망할 원숭이 새끼들 같으니라고.]
어느새 비고르를 다 피운 남자는 파이프에 남은 재를 털어내며 금발 남자에게 물었다.
“원정대 인원을 꾸리기 곤란할 정도야?”
[그건 아니지만 거기에 인원 투입한다고 하면 또 지랄날 거야. 뒷수습도 안 됐는데 국민들 내팽개치고 뭐하는 짓이냐고. 퍼플 던전 터질 때까지 몰랐다는 게 만천하에 드러났으니 욕 먹는 양이라도 줄여야겠다 이거지. 멍청한 놈들 같으니, 구울 정리하는 데 상위 플레이어가 왜 필요해? 소총 든 군인이 낫지.]
“흐음...그래도 일본 쪽 인원은 꼭 필요한데. 러시아 단독 원정대면 협회에서도 거부할 게 뻔해. 놈들도 눈 뜬 장님은 아니니 우리 입김이 들어갔다는 걸 알고 있을 테니까. 거부할 핑계거리도 많지. 정보가 없으니 협회에서 솔선해서 퍼플과 얼마나 차이나나 확인해보겠다고 나서면 뭐라고 하기도 힘들어. 거부할 수 없는 전력을 구축하는 게 핵심이라고. 앱스타인.”
아직 공식적으로는 존재가 알려지지 않은 X던전 원정대에 대해서 입에 올리는 남자는, 방문한 적조차 없는 나라의 플레이어를 동원해야한다고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지만 이 이질적인 발언을 지적하는 이는 없었다. 금발 남자는 그리 말하는 게 당연하다는 듯이 뒷머리를 긁적이며 난색을 표했다.
[알아, 안다고. 젠장, 망할 원숭이 새끼들. 뻑 하면 검성 검성. 왜 우물 안 개구리 소릴 듣는 지 이해할 생각조차 없는 머저리 밖에 없다니까. 검성이 어디서 뭘 하든 지들이랑 대체 무슨 상관이야? ‘예거즈’급 전력만 되도 감당도 못할 것들이...]
“아아, 자네 수고로움은 알고 있어. 그 얘기는 나중에 한잔 할 때마저 하기로 하고, 그놈들이 검성 때문에 안 움직이려고 든다고?”
[그래, 검성이 영국에 죽치고 웨인 크로이츠 대신 괴수나 썰고 있으니까 걱정된다 이거지. 여태 그놈들이 자랑할 만한 거라고는 웃기지도 않은 연합의 덩치 정도였으니까. 행여나 검성이 협회랑 제대로 일을 같이 하기 시작하면 곤란하기야 하겠지. 검성이 그놈들을 맞수로 보지도 않는다는 사실만 빼면 말이야.]
“전부터 들은 얘기지만 정말 이해가 안 가는군. 검성은 일본에 건너간 적도 없고, 관련 발언도 한 적 없잖아? 우리가 할 말은 아니지만, 그만한 강자가 근처에 있으면 보통 동맹제안 하는 게 정상 아닌가?”
[웃기지도 않는 경쟁심리지. ‘인형사’를 제대로 받쳐주지도 못하는 놈들이 월드 랭커를 경계한다니 지나가던 개도 웃을 일이야.]
[이럴 때마다 생각하는 거지만 차라리 인도를 고르는 게 나았어. 아니면 필리핀을 고르던가. 나도 일본을 고를 때 찬성하긴 했지만, 인프라만 그럴싸하고 플레이어 전력은 그저 그렇잖아.]
[지금에 와서 후회해봐야 무슨 소용이겠나. 내전 터진 터키 같은 곳을 안 고르길 망정이지. 러시아랑 달리 연합체 장악력도 괜찮은 편이고. 자자, 지금은 코앞에 닥친 일에 집중하자고. 그래서 검성은?]
[괴수 썰 때 빼고는 런던 안에서 요지부동이야. 기껏해야 협회 근처 식당에서나 보이고.]
[협회의 요청 때문이라고 하기에는 좀 이상해. 웨인 크로이츠를 밖으로 돌리고 검성을 꽁꽁 숨겨놓는 게 정상적인 반응 아닌가? 한국에서는 벌써 검성 귀화설이랑 비난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고. 이렇게 행동해서 서로 이득 볼 게 없어. 그나마 한국에 뜬 리치를 당일에 잡고 영국으로 날아와서 덜 한 것뿐이지. 검성이 아무 말도 없이 출국해서 협회로 온 게 벌써 나흘째야. 불안하다는 소리가 나올만하지.]
[웨인 크로이츠의 신변에 문제가 생겨서 그렇다고 하기에도 좀 그렇고. 같이 간 류 현이라는 친구는?]
[코빼기도 안 보여. 그 본인이면 몰라도 팀원들은 눈에 안 띌 수가 없는데, 들어간 이후에 나온 적이 없어. 단 한 번도.]
[그 친구도 한 번 제대로 살펴야할 거 같은데. ‘광대들’때도 그렇고, 데뷔 한지 2년도 못 채운 루키의 행보가 아니야.]
[그 때 ‘광대들’ 한 소대를 다 꼬라박지만 않았어도 손 놓고 있을 일은 없었을 텐데. 너무 경솔했었어. 하다못해 베니 에벌린을 투입하는 건 다시 생각해봤어야 했다고.]
그들이 겪은 최근에 있었던 가장 쓰라린 실패 중 하나였다. ‘광대들’ 한 소대와 그 대장인 베니 에벌린을 잃은 것. 애써 외면하고 있던 일이 수면 위로 떠오르자 회의장은 금세 어수선해졌다.
[어쩌겠나. 그 때는 우리 모두가 마음이 급했으니.]
가장 나이 많은 노인이 나서서 어수선한 분위기를 수습하고자 했지만, 분위기는 쉽게 가라앉을 기색이 아니었다. 따지고 보면 볼코프에 대한 이야기도 베니 에벌린이 살아있다면 쉽게 해결 할 수 있는 문제였으니까. 때늦은 후회와 후회를 질책하는 말이 오고갔다.
그런 분위기는 관심 없다는 듯 파이프를 만지작거리던 남자는 연기를 토해내는 것처럼 중얼거렸다.
“제일 공들여서 숨길 거 같은 검성은 런던에 관광 온 관광객처럼 굴고, 곁다리인 웨인 크로이츠랑 용잡이 팀은 오리무중이라. 대체 뭐가 뭔지.”
저 좋을 대로 떠들고 있던 자들이 남자의 말에 동감을 표하듯 침음성을 흘렸다.
한편 본의 아니게 화두가 된 웨인은,
“대체 언제까지 기다리기만 해야 한다는 거죠?”
저보다 머리 하나 반은 더 작은 여성의 앞에서 자꾸만 작아지는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고 싶은 기분을 느끼는 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