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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8화 〉탐식마(貪食魔) (118/429)



〈 118화 〉탐식마(貪食魔)

화련은 기내를 빙 둘러보는 채하다가 옆자리를 힐끗거렸다. 처음 전용기를 타본다는 설렘은 안중에도 없었다.


‘정말 따로 들은 게 없는 거 맞아?’


자리에 앉자마자 눈을 감은 채 아무 말도 없는 류 현 때문이었다. 늦은 밤에 리치 사냥을 나선 피로로 자는 거라면 모르겠는데, 아무리 봐도 자는 기색이 아니었다.


리치를 잡았다는 소리를 듣고 이제 집으로 돌아가서 늘어지게 잘 수 있나 싶었더니, 그게 아니었다. 지휘소에서 만난 그녀의 대장은 썩어 들어가는 표정으로 급히 출국할 일이 있다고 하더니, 계속 저 상태였다. 갑작스럽게 영국행이 결정된 화련과 희란의 질문에는 최대한 응했지만 지금 상황을 정확하게  수 있는 대답은 없었고, 사실을 숨기는 것 같지도 않았다.

던전 안에서 발견한 괴이한 석비의 변화와 그로 인한 웨인의 호출. 그게 전부였다. 옆에서 통화내용을 들었다던 승하도 그의 설명에 별 첨언이 없는  보면 그게 류 현이 들은 이야기의 전부 같았다.


그럼에도 그녀의 대장은 비행기에 오르기 전부터 썩어 들어가는 표정이더니, 자리에 앉고 나서는  한마디조차 없었다. 무겁기 그지없는 그의 침묵에 승하마저 농지거리를 포기하고 잠을 청할 정도였다.

전에 없이 심각한 류 현의 분위기 때문에 화련은 다그쳐 묻는 것조차 할 수 없었다. 그저 미간을 좁힌 채 그를 빤히 쳐다보는  이외에는.

그리고 그런 화련의 시선을  몸에 받고 있는 류 현의 머릿속은 실시간으로 뒤엉키는 중이었다.


‘...대체 뭐가 변한 게 문제가 된 거지? 전생에서도 검성은  시간대에 살아있었어. 변한 건...젠장...너무 많아서 뭐가 문제인지도 모르겠군.’

끝을 알 수 없는 의문들이 꼬리를 물고 그의 머리를 빙빙 휘저어놓았다.

‘웨인은 석비의 내용이 변했다고 했어...단순히 퍼플 던전이 터진  아니야...그럼 뭐지? 3차 ‘대소환’의 전조?’


뿌득. 그의 입속에서 그런 소리가 맴돌았다.


류 현의 고뇌는 비행기가 영국에 닿을 때까지 계속 되었다.

***


영국에 대한 화련의 첫인상은 축축하고 정신없다 였다. 영국에 도착하자마자 그들을 반긴 건 호환이나 콧수염이 멋진 영국 신사가 아니라, 벽이라고 지칭해도 될 정도로 거대한 흑인 남자였다.

화련의 얼굴의 반은 가릴 수 있을 것 같은 안대로 왼쪽 눈을 가리고 있는 군인이라기 보다도 갱이 더 어울려보이는 그 남자는, 일행의 신원을 확인하고는 자신의 소대원을 통솔해서 화련 일행을 호위하며 협회 본부로 직행했다.

반기는 인사도, 편안히 모시겠다는 말도 없었다. 그는 생긴 것보다 훨씬 과묵한 남자였다. “가시죠.” 그게 남자의 입에서 나온 마지막 말이었다. 희란과 화련은 그에게서 정보를 얻어내길 포기했다.

대신 화련은 영화에서 자주 나오는 특수부대 장갑차의 승차감이 생각보다 나쁘지 않다는 쓸데없는 지식을 얻을 수 있었다. 정말 쓸데없는 지식이라고 스스로를 야유하는 것에도 지쳐갈 즈음 차량의 움직임이 멎었다.

차가 멈춘 곳은 지하주차장이었다.

“도착했습니다. 내리시죠.”


그걸로 끝이었다. 시커먼 군인들은 제 할 일을  했다는 듯이 차에서 꿈쩍도 하질 않았다. 차문이 열리자 군인을 대신해서 이번에는 진짜 영국신사가 그들을 맞았다. 검정과 회색이 적절하게 섞인 정장을 입은 노인은 의례적인 인사말을 몇 마디 늘어놓고는 일행을 선도해서 지하 4층으로 향했다.

어찌나 건물이 넓은  일행은 5분 넘게 지하4층 복도를 걸었다. 그 사이에 대화라곤 없었기에 복도가 더 길게 느껴졌다. 그런 일행들과는 대조적으로 복도를 오가는 이들 중에서 걸어 다니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모두가 전화 통화나 혹은 일행과 언성을 높여가며 대화를 주고받았다.


노인은 한 방문 앞에서 멈춰서더니 고개를 꾸벅 숙여 보이고는 문을 열어젖혔다.

방안은 복도의 소란이 우스울 정도로 상황이 긴박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책상 자리가 열자리 넘게 있었지만 자리에 앉은 이는 단 한 명도 없었다. 벽 끝에 달려있는 커다란 모니터는 세계지도를 띄우고 있었는데, 지도상에 붉은 점이 안 찍힌 구역이 드물 정도였다. 누가 봐도 좋은 징조는 아니었다.

사람들 사이로 급박하게 오고가는 말을 대충이나마 알아들은 일행의 낯빛이 창백해졌다.


“뉴욕에...리치? 퍼플 던전 동시 개방...? 이게 대체 무슨...”

화련은 도무지 납득이 안 가는 단어 조합을 중얼거리다가 이마를 부여잡고 비틀거렸다. 대충 흘러나오는 말만 조합해도 정신을 차리기 힘들 정도였다.


‘의정부에 뜬금없이 리치 뜬 것도 그렇고 뭐가...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갑자기 밑이 보이지 않는 절벽 앞으로 떠밀린 기분이었다. 발밑을 단단하게 받치고 있던 땅이 사실은 천장단애 위에 판자를 올려놓았던 것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것처럼, 화련은 극심한 어지러움을 느꼈다.


검성조차 당황스러움 때문에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방안을 살피기 바쁜 그 때, 류 현이 앞쪽으로 불쑥 치고 나왔다. 아무 말 없이 일행에게서 떨어져 나온 그는 뚜벅뚜벅 방 반대편으로 걸어가더니, 주변 사람들에게 지시를 내리고 있는 남자의 어깨를 덥썩 잡아 돌렸다.


“우선 위스프의 동향부터...? 류 현님?”
“바빠 보이시는 데 죄송합니다만, 설명을 듣고 싶군요. 이런 곳에서 팀원들 데리고 마냥 기다리기도 좀 그렇고요.”
“아, 아닙니다. 제가 불렀으니 당연히 그래야죠. 어수선하니 이 방에서는 조금 그렇고, 방을 옮기기로 하지요.”


그대로 류 현을 따라서 일행에게로 다가온 웨인은 인사말 몇 마디를 한 후에 일행을 옆방으로 인도했다. 자리에 앉자마자 화련은 속에서 마구 잡이로 뒤엉키고 있던 말을 토해내었다.

“아까 그건 뭐죠? 말하는 걸 들어보니까. 뉴욕이랑 베이징에도...의정부랑 같은 상황인건가요? 아니면...”
“아직 정리가 끝나지 않은 터라 확신하긴 좀 그렇습니다만, 현재까지 들어온 정보에 의하면 의정부와 비슷한 상황으로 보고 있습니다. 미국의 탐지망은 알아주는 수준이고, 중국도 대도시 한정이면 비슷한 수준이니까요. 퍼플 던전이 터질 때까지 방치한다는  있을 수 없는 일이죠.”
“그 말은 보스 몹이 분탕질치기 전 전조조차 없었다는 거야?”
“예, 어떤 전조도 없었습니다. 감지망은 평온 그 자체였다더군요. 협회 건물 바로 옆에 갑자기 오우거  마리가 나타났을 정도니  다한 셈이지요.”


그렇게 말하는 웨인의 차림새는 평소와 달리 꽤 먼지투성이였다. 직접 오우거를 상대한 것 같은 그의 증언까지 더 해지자 더욱 암담해지는 느낌이었다.


괴수는 던전 포화기한이 되어야만 현실에 풀려난다.  한 번도 흔들린 적 없는 대원칙이었다. 그런 ‘대소환’의 규칙이 망가진 것이다. 한 번이 아니라 전세계에 동시다발적으로!

그걸로도 모자라서 레드도, 오렌지도 아닌 퍼플 블루급 던전의 보스몹이 아무런 전조도 없이 현실에 풀려난 것이다. 그 다음은? 그들은  머릿속에 떠오른 의문에 대해서 대답하기가 겁이 났다.

“석비 내용이 변했다고 들었습니다만.”

모두가 입을  생각조차 하지 못하는 상황 속에서 류 현이 불쑥 입을 열었다. 평소와 다를 바 없이 무덤덤해 보이는 얼굴에 일행은 질린 기분이 들었다.

‘...던전 단계가 널뛰기 하긴 했지만...이건 확실히 3차‘대소환’의 전조야. 미적거리면서 현실 도피 해봐야, 곧 던전들이 다 터져. 그래도 이번에는 석비라는 정보라도 있어. 정신 차려라, 류 현. 두 번은 없어.’

정작 류 현도 속이 평온하진 않았다. 오히려 전생의 경험 때문에 더욱 혼란스러운 상태였다. 혼란스러워 하는  뒤로 미뤘을 뿐.


그런  현의 속을 알 턱이 없는 웨인은 더듬더듬 대꾸했다.

“아, 네. 튜토리얼에 대한...그러니까, 튜토리얼 수행 장소에 대한 언급은 그대로 입니다만...그에 대한 언급이 더 늘었습니다. 의정부나 뉴욕, 베이징, 런던 같이 퍼플 블루급 던전 보스들이 나타난 곳들의 좌표가...”
“직접 눈으로 보고 싶은데. 되겠습니까?”
“안 될  없지요. 그런데...아직 위원분들이 도착하지 않은 터라...본회의에 여러분을 모시고 석비를 직접 보며 상태에서 대해서 설명드릴 예정이었습니다만...”
“혼란 상태이니 차가 움직일 리가 없지요. 우리가 타고 온 전용기가 제대로 뜬 것도 혼란이 퍼지기 전이라서 가능했던 걸 테고요.”


의정부에 나타난 리치의 존재가 확정되었을 때는 이미 한 밤중이었다. 거기에 작전에 참여한 플레이어들의 입에서 소문이 세어나가기도 전에, 승하와 류 현이 리치를 거꾸러뜨렸으니 이제야 슬슬 이야기가 돌고 있을 터.


“...그 말씀대로입니다. 아무래도  시간이 걸릴 듯 하군요.”
“직접 보는 게 힘들다면 모니터링 정도만 할  있어도 좋습니다.”


마법사들도 머리를 싸매는 룬어를 해독할 자신은 없지만, 류 현은 협회장이 석비 조각을 가지고  걸 봤을 때부터 언젠가 한  석비를 직접 보고 만져봐야겠다고 정한 상태였다. 그 결심은 지금, 던전 보스가 예고도 없이 현실로 튀어나오는 초유의 사태 앞에서 당장 실행해야할 일이 되었다.


‘...할 수 있는 건  해봐야지.’

마법사도 아닌 그가 접촉해봐야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가능성이 높겠지만, 아무 것도 안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그런 류 현의 의지를 읽은 것인지 웨인은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윈스턴 경께서도 이미 허가한 일이니 상관없겠지요. 안내해드리겠습니다.”

***


“와...”


화련은 저도 모르게 입을 헤 벌리고 감탄사를 토했다. 마법사라면 보고 감탄하지 않을 수 없는 기물이 눈앞에 있었다.


급변하는 정세를 반영하는 것처럼 살아있는  꿈틀거리는 룬어와 터지지 않는 게 신기할 정도로 복잡한 술식으로 꽉 채워진 높이 2미터 가량의 석비는. 그녀에게는 그냥 돌로 된 비석이 아니라, 완벽하게 보존된 고대 보물이나 다름없었다. 혼자 있었다면 화련은 당장 석비를 뜯어보고 봤을 것이다.


다른 일행들도 각자 경도된 얼굴로 석비를 멍하니 보기 바빴다. 석비 표면에 꿈틀거리는 룬어를 알아보는  화련 뿐이었지만,  위의 글자를 읽지 못해도 석비의 신비로운 분위기는 좌중을 압도하기에 충분했다.

 한사람을 제외하고 선 말이다.

석비를 살피기 바빠서 아무도 눈치 채지 못했지만, 류 현은 눈에 핏발을 세워가며 몸을 가늘게 떨고 있었다. 그의 머릿속으로 인류의 언어도, 룬어도 아닌 문자의 폭우가 쏟아져 들어왔다. 이해하는 건 고사하고, 무시할 수조차 없는 문자의 폭우에 류 현은 이대로 머리가 터져버리는 게 아닐까하는 착각마저 들었다.

‘뭐야? 씨발 대체 뭐냐고! 마신? 멸룡? 재조정?’

간혹 드물게 그가 이해할 수 있는 것도 있었지만, 이해는커녕 혼란만 돋울 뿐이었다.  채로 익사하는 기분을 느끼고 있던 류 현에게 갑자기 문자가 아닌 말소리가 들려왔다. 귀가 아니라 머릿속으로.


[이번이 마지막 기회야. 악룡 사냥꾼 씨, 두 번은 없어. 내가 주는 도움도 이번이 마지막. 그러니까, 잘 해 보라고.]

석비에서 쏟아져 들어오는 말들  유일하게 이해할  있는 문장을 받아들인 류 현은  말을 이해하기도 전에 정신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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