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117화 〉탐식마(貪食魔) (117/429)



〈 117화 〉탐식마(貪食魔)

달빛조차 희미한 밤이었다. 산위를 뒤덮은 정적과 어둠은 여명까지 떨어져 나갈 것 같지 않은 기색이었지만,


[그르릉][그렁]

그 정적은 산위를 헤매는 망자무리에 의해서 허무하게 깨어졌다.


구울. 현실에 존재할 리가 없는 움직이는 시체의 무리가 산허리를 헤매었다. 어떻게 봐도 던전에서 뛰쳐나온  같은 모습의 괴물들은 던전 안의 그것과는 다르게,


주륵! 철퍽! 실시간으로 썩어가고 있었다. 던전에서 생성된 구울은 보일 수 없는 모습. 명백하게 이 구울들이 현실에서 만들어졌다는 증거. 그런 어찌할 길 없는 진득한 악취를 풍기며 구울들은 천천히 산을 내려갔다.


그런 구울들의 선두를,


우웅! 콰지직!

무형의 철퇴가 사정없이 뭉개놓았다. 근처에 있던 구울들이 반응했지만,

콰지직! 그들의 운명도 다르지 않았다. 무형의 철퇴질은  번으로 그치지 않고, 산허리를 점령한 구울들이 모두 땅으로 돌아갈 때까지 계속되었다.

구울들이 뭉개지며 쏟아내는 썩은 핏물이 작은 개울을 이루었을 무렵, 나무 위에서 두 인영이 뛰어내렸다.

“이건 참고말고  만한 수준이 아닌데. 으으, 벌써 냄새 뱄어. 옷 버려야겠다.”
“그러네요. 생성된 지 반나절도 안  걸로 아는데 어떻게 이렇게...”
“별 쓸데없는 설정만 현실이랑 비슷하단 말이지. 던전 안에서처럼 안 썩고 그냥 깔끔하게 뭉개지기만 하면  좋아?”


희란은 옷소매에 코를 박았다가 질겁하기를 반복하는 화련을 보고 조용히 키득거리다가 말했다.

“언니, 빨리 빨리 움직여야 마스터 따라잡을  있다구요?”
“...희란이 까지 물들 줄이야.”
“네?”
“아니, 아무 것도 아니야. 그럼 갈까.”


희란이 손을 내밀자 화련은 망설이는 기색 없이 그 손을 잡았고,


슉! 바람 새는 소리와 함께 두 사람은 산에서 모습을 감췄다.


***

[그르렁-][그르륵!]

질질하는 소리와 함께 썩은 내가 퍼져나간다. 철퍽하고 진흙 같은 썩은 살점이 땅위에 뒹군다. 이미 죽었음에도 다시금 땅에 서서 천천히 죽어나가는 망자의 군세.

햇빛이 없기 때문에  흉물스러운 모습은 보이지 않았지만, 오히려 그렇게 때문에 구울들의 행진소리를 섬뜩했다.


그리고 그 인세의 지옥 같은 광경을 내려다보는 남자  현은,


“야밤에 이게 무슨 뻘 짓인지...”


반쯤 썩어가는 표정으로 투덜거리기 바빴다.


“별  없지 뭐. 리치 뜬 거 방송 타고 난리 나는 거 보다는 낫잖아?”
“그건 그렇습니다만...”


류 현은 뚱한 표정으로 옆에 선 승하를 돌아봤다. 평소와 다름없이 생글거리는  낯짝이 오늘 따라 좀 짜증났다. 아니, 아주 많이.


“기쁘신가 봅니다.”
“어? 뭐가?”
“구정아랑 약속 펑크 난거요.”
“...아, 아니라니까?”
‘아니긴 개뿔.’

누가 봐도 부자연스러운 반응에 류 현은 한 번 더 쏘아붙였다. 평소라면 그냥 그런가보다 하고 넘어갔겠지만,


“그렇게 어색하면 그냥 거절할 것이지. 대체 그게 뭡니까. 허세 부리는 남자 중학생도 아니고.”
“아니라니까! 그리고 남자 중학생이라니 말이  심하지 않아? 이래봬도 팔팔한 이팔청춘 처녀라고?”
“딱 그건 데 심하고 말게 어디 있습니까. 그리고 이팔청춘은 28살 안쪽이 아니라 16살입니다.”
“어? 진짜?”
“......”
‘사람 심란하게 만들어놓고 약속 깨진 걸 너무 대놓고 좋아하잖아...’

오늘 저녁까지만 해도 계속 불안해하는 모습을 보여서 사람 속을 썩혀놓고, 약속이 깨지자마자 뻔뻔하게 기뻐하는 모습이 손꼴 시렸다.


이틀 전에 구정아와의 약속을 알린 뒤로 승하는 계속 불안한 기색을 내보였다. 같이 가주기로  류 현에게 계속 가줄 거냐고 되묻는 건 양반이었고, 술잔을 뒤집어놓고 보드카를 들이붓는  나사 빠진 만화 캐릭터의 행동을 아주 그대로 재현해 보였다.

그리고 약속 당일인 오늘, 열쇠도 있는 사람이 창문으로 들어와서 새벽부터 용잡이 팀 사무실 방범벨을 울리게 만들더니 점심이 지나서부터는 엉덩이를 어디  군데 5분 이상 붙이고 있질 못했다.

그런 승하를 구해준 건 비상소집 문자였다. 플레이어들에게 병역의 의무 대신 지워진 별도의 국방비 부담과 비상소집 의무. 일개 개인이지만 개인을 넘어선 검성이나, 아무리 급성장했다고는 하나 팀 인원이 셋 밖에 안 되는 용잡이 팀 같은 소규모 팀을 타겟으로 한 소집은 아니었다.

하지만 승하를 불안하게 만든 만남을 제의한 구정아는 이런 소집에 빠질  없는 거대 길드의 수장. 소집 문자가 도착함과 동시에 구정아로부터 약속 취소 문자가 날아왔다. 거기서 그쳤으면 좋았을 것을, 연달아서 다른 발신자로부터 문자가 날아왔고  문자 때문에 그들은 오밤중의 리치 토벌 작전에 참가하게 되었다.


문자를 발송한 육군 관계자도 그녀가 소집에 응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는지, 지휘소에 얼굴을 내밀자 지휘소가 들썩였다. 사태가 시급했기에 소란은 금세 정리 되었고,  둘이 한 팀으로 묶여서 야산을 헤매게 된 것이다. 어울리지 않게 소총에 수류탄까지 차고서.


어떻게 봐도 어마어마한 인력 낭비였지만 류 현은 군관계자들의 표정을 보고는 불만을 접었다. 제발 이 폭탄 좀 지휘소에서 떨어뜨려놔 달라는 듯한 표정을  읽을 정도로 눈치가 없진 않았다. 구정아를 비롯한 불편한 관계의 대형 길드 길마들이 떡하니 버티고 있는 지휘소에 앉아있고 싶은 기분도 아니었고.

리치 몰이 작전이 시작된 지 두 시간째. 리치망토 자락은커녕, 구울만 보고 있지만 승하는 아무런 불평 없이 생글거리기만 했다. 이유가 빤히 보이는  현은 친구의 그런 반응이 불만이었다. 굳이 따지자면 승하의 반응 자체가 불만이라기보다도, 이 상황이 짜증났다.

평소보다 뾰족한 말이 튀어나간 건 그래서였다.


“그렇게 미련이 남았으면 차라리 복귀하시지 그러셨습니까. 솔직히 지금 ‘예거즈’로 돌아가서 검성파만 끌어들여도 성세 유지는 가능할 텐데요.”


미래의 ‘신창’ 김수혁과 함께 ‘예거즈’의 에이스 카드중 하나로 꼽히는 채민아는 반쯤 그녀 쪽으로 몸이 기울어져있다. 그 둘만 뽑아내도 ‘예거즈’는 무시할  없는  타격을 입게 된다.

지금은 ‘대소환’초기 때와는 달리 어중간한 수준   보다는 최상위권 플레이어 한 명이  우대받는 시대다. 더욱이 X던전의 존재가 알려진 지금에는 말할 것도 없다. 이렇게 말하면서도 류 현은 요만큼도 진지하게 그리 생각하진 않았지만.


“...미안해.”


하지만 승하는 잔뜩 주눅이  채 대답했다. 방금 전까지 생글거리던 기색은 거짓말처럼 순식간에 증발해버렸다. 류 현은 자신이 엄청난 쓰레기가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장난입니다. 장난. 제가 승하 씨보다 그 상황을 더 빨리 알았는데 진심으로 그러겠습니까. 말하고 보니 당사자가 보다 그 상황을 빨리 안 놈이 할 소리는 아니었군요. 죄송합니다.”
“어? 아하하, 그렇지...? 응, 그러네.”

입으로는 웃고 있지만 승하의 표정은 뻣뻣하기 그지없었다.  현은 속으로 한 숨을 몰아쉬었다. 약속이 취소되자마자 생글거리기 시작하기에 괜찮아졌나 싶었더니 전혀 그렇지 않은 모양이었다. 평소의 그녀라면 한  사서 갚으라는 둥 헛소리를 늘어놨겠지만, 지금의 그녀는 그럴 여유도 없는 모양이다. 의도치 않게 지뢰를 제대로 밟았다.

더 쓰레기가 되는 기분이 들었지만,  현은 평소처럼 얼버무리기로 했다.

“...빨리 리치나 잡고 돌아가서 한 잔 걸칩시다.”
“응!”


바랐던 활기찬 대꾸가 돌아오자 류 현은 매고 있던 소총부리를 아래의 구울들을 향했다. 그나 승하가 나설 것도 없이 산 아래에서 포위를 펼치고 있는 병사들이 알아서 처리 할 테지만, 리치의 소재가 확실해 지기 전까지는 어차피  할 일도 없었다.


투두두! 총성이 야산의 정적을 찢어발겼다.


***


[흐아아!] 리치의 입에서 흘러나온 귀곡성은 어딘가 모르게 힘이 없어보였다. 하지만 그런 리치의 손끝이 자아낸 마법은 그렇지 않았다.


[파창!] 리치의 손가락이 타겟을 가리키자 반지가 불길함 빛을 머금었다. 그러자, 리치의 시선보다, 소리보다 빠르게 마법이 공간을 내달렸다.


파쇄 마법. 규모는 작지만 성인 남자 손바닥만 한 면적을 회복 불가능하게 깨고 찢어 뒤틀어놓는 플레이어(생명체) 저격 마법이라고 해도 좋을 그 공격이 남자를 향해서 내달았다. 남자는 마법에 대한 대비는커녕 변변한 장갑조차 장비하고 있지 않았다. 그야말로 무방비.


그러나,

쩌엉! 저주 다음으로 플레이어 킬러로 이름 높은  강력한 마법은 강대한  앞에 허무하게 스러졌다. 괴수에게서도 찾아보기 힘든 무시무시한 항마력이 말 그대로 마법을 삼켜버렸다.


리치의 텅빈 눈구멍에 어린 붉은 빛이 당혹의 기색을 내비쳤다. 그리고 그게 리치의 마지막 생각이 되었다. 자청해서 리치의 샌드백이 되어준 남자의 동료는 이미 리치의 등 뒤를 점한 상태였으니까.


쉭! 소리마저 잘라낸 것 같은 칼끝이 리치의 오른쪽 관자놀이를 두부처럼 뚫고 들어가, 반대편 관자놀이로 빠져나왔다. 그와 동시에 리치의 눈구멍에 어린 붉은 빛이 퓨즈가 나간 것처럼 사라졌다.


리치의 몸이 허물어지기도 전에 칼을 갈무리한 검성, 나승하는 짝다리를 짚은 껄렁한 모습으로 남자에게 물었다.

“오늘 네가 사는  맞지? 그지? 이놈 이거 팔면 얼마나 나오려나? 한 번 마실 돈은 나오겠지?”
“...술로 배 터져 죽을 일 있습니까. 그리고 거의 매번 제가 사잖습니까.”
“돈도 많으면서 쩨쩨하게 굴긴. 어쨌든 끝났으니까. 빨리 가자. 술 고파 죽겠어-”
“밤새 마실 거면서 뭐가 그리 급하십니까. 일단 웨인한테 연락부터 해주고 갑시다. 굳이 우리더러 여기 참가해달라고 한 거 보면 뭔가 일이 있는 게 분명한데...”
“별 일이야 있으려고. 그냥 리치 사체가 갖고 싶어서 그런  아닐까?”
“협회가 무슨 돈 없는 연구실도 아니고...정신 사납게 굴지 말고 무전이나 넣으시죠. 리치 잡았으니 이제 상황 해제라고.”
“네이, 네이. 잘 알겠습니다. 여기는 소리매, 여기는 소리매. 시치미 나와라 오버.”


장난스럽게 경례를 올려붙이는 모습을 보고 류 현은 콧김을 훅 뿜고는 휴대폰을 꺼내서 웨인에게로 전화를 걸었다. 승하에게 말은 그렇게 했지만 류 현도 큰일이라고는 생각하진 않았다. 소집 문자가 오자마자 다짜고짜 전화를 걸어서 작전에 참여해달라고 요청한 걸로 봐서는 큰일인가 싶었는데, 정작 리치는 퍼플급 조차 아니었으니까. 직접 마법을 몸으로 받아본 그의 견적이니 이보다 정확할 수는 없을 터. 그저 뭔가 착오였겠지 싶었다.

‘아니지, 퍼플 던전이 터질 때까지 몰랐던 것 자체가 큰 일이긴 하네.’

류 현이 그런 느긋한 심정으로 전화를 걸었다. 발신음이 제대로 울리기도 전에 웨인이 전화를 받았다.


-예, 웨인입니다.-
“웨인 씨, 요청하신 대로 방금 막 리치 잡았습니다. 무슨 일인지 이제 좀 들을  있겠습니까?”
-...류 현님, 정말 죄송합니다만. 협회 본부로 와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하지만 느긋한  현과 달리 웨인은 다급하기 그지없었다. 마치 쫓기는 듯한 목소리에  현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지금 당장 말입니까?”
-예, 비행편을 준비해놓았으니 바로 출발하실 수 있을 겁니다. 정말 죄송하지만...-
“아니, 사과는 나중에 하셔도 됩니다만. 대략적인 이유라도  수 없는 겁니까?”
-...석판의 내용이 바뀌었습니다.-
“석판?”

류 현은 왠지 물으면 안 될 것 같은  물은 기분이었다. 엮이면 골깨진다. 그의 감이 그에게 경고했다. 하지만 물음은 그의 입 밖으로 나간 뒤였다.


-튜토리얼에 대해 적힌 그 석판의 내용이 바뀌었습니다. 아니, 지금도 바뀌는 중입니다.-
“...알겠습니다. 곧바로 출발하지요. 인천 공항으로 가면 됩니까? 예, 예. 조금 있다가 뵙지요.”

전화를 끊은 류 현은 어느새 무전기를 귀에서 떼고 자신을 빤히 쳐다보고 있는 승하에게 말했다.

“한 잔 사는 거 좀 뒤로 미뤄야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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