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6화 〉탐식마(貪食魔)
“...예. 아뇨, 그런 예정은 없습니다. 협회에서도 허락해 줄지 의문이군요. 예, 좋은 소식 기다리겠습니다. 그럼.”
전화가 끊어지자마자 류 현은 참았던 숨을 토해내는 것처럼 한숨을 내어쉬었다. 소파 위에 축 늘어진 그의 손아귀에서 휴대폰이 굴러 떨어졌지만 그는 신경 쓰는 기색이라곤 없었다.
벌써 사흘째, 류 현은 용잡이 팀 사무실에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발이 묶여있는 상태였다. 중간 중간 집에 들려 옷가지를 챙기거나, 세아의 병문안 정도는 할 수 있었지만 대부분의 시간을 사무실에서 보내야만 했다.
“...씨발.”
욕 나올 정도로 알맹이가 없는 문의의 파도 때문이었다. 전화로 공수표를 남발하는 건 양반이었고, 다짜고짜 찾아와서 지금 던전 안에 있는 인원을 X던전 원정 때 파견해 주겠다고 호언장담만 하다가 돌아가는 이도 숱하게 있었다.
그나마 원정 준비에 대한 이야기를 하러 오는 이들은 양반이었다. 뭐가 있는지도 모를 던전의 전리품 지분을 사고 싶다고 하는 석유 재벌의 대리인부터 시작해서, 어디서 주워들었는지 떡고물을 당당하게 요구하러 온 국회의원까지.
협상은커녕 평범한 회화도 피곤해 하는 류 현의 신경줄을 긁어대기에 충분한 라인업이었다.
‘차라리 맨몸으로 네임드 몹이랑 맞짱 뜨는 게 낫지...’
“그렇게 힘들면 그냥 차단하고 잠수 타는 게 낫지 않아?”
맞은 편 소파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류 현은 반쯤 썩어가는 표정이 되었다. 류 현이 돌아보자, 맞은 편 소파에 류 현처럼 반쯤 드러누워서 맥주캔을 홀짝거리고 있던 승하가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재차 말했다. 츄리닝 차림의 그녀는 누가 봐도 백수 그 자체였다.
“평소에 안하던 욕까지 해가면서 참을 필요가 있어? 아, 욕 안한 건 그 두 명 때문인가? 어쨌든 지금 오는 연락들 별 의미도 없다는 거 너도 알잖아?”
승하는 그리 말하고는 캔맥주를 단숨에 들이키더니 찌그러뜨려서 휴지통에 던져 넣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곤 냉장고를 열어서 새로운 캔맥주를 두 개 꺼내서 하나를 류 현에 던져주고는 남은 하나를 호쾌하게 들이켰다. 그런 승하를 바라보는 류 현의 표정은 명백하게 백수친구를 한심하게 바라보는 친구의 얼굴이었다.
‘‘예거즈’마스터는 어떻게 맡고 있었던 거야? 부길마가 일은 다했을 거 같긴 한데...’
전생, 현생을 통틀어도 한 손으로 셀 수 있는 친구가 전투광에 그림으로 그린 듯한 백수라니. 류 현은 괜히 저가 그런 것도 아닌데도 이래도 되나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맥주에겐 죄가 없기에 결국 그도 마셨지만.
“씹고 잠수타면. 뒷감당은 누가 합니까? 미래의 저요?”
“음...웨인?”
“...말을 맙시다.”
류 현은 승하의 대답을 듣고 맥이 탁 풀리는 기분이었다. 실컷 부려먹은 자기가 할 말은 아니었지만, 이 여자는 가면 갈수록 웨인을 무슨 도깨비 방망이쯤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본인 면전에 대고 대놓고 말하지 않는 게 그나마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류 현의 시선의 의미를 눈치 챈 것인지, 승하는 맥주를 마시다 말고 자기 변호성 발언을 시작했다.
“아니, 지금 그 전화 다 받아봐야 결국 제대로 된 투자자 노릇해 줄 인간들은 반의반의 반도 안 되잖아. 그냥 못 먹는 감이라도 한 번 찔러보자 하고 나서는 놈들인데. 다 상대해주면 손해잖아? 원정 준비에 도움이 되지도 않고, 너는 너대로 쉬지도 못하고.”“어쩌겠습니까. 외부에서 보면 전 확실한 실력자가 아니라 벼락치기 식으로 반짝하고 꺼질 수 있는 루키로 보일 텐데요. 청뢰나 유성우를 공개한 것도 아니고.”
말은 그렇게 했지만, 사실 투자고 뭐고 다 집어치우고 싶은 심정이었다. 적극적으로 투자 유치를 해야 할 만큼 태양 그룹의 지원이 형편없는 것도 아니니까. 정 돈이 고프면 협회와 거래를 하면 된다.
문제는 류 현이 의도하는 바는 추가 투자 유치가 아니라 이미지 구축이라는 점이다. 거래할 수 있는 상대라는 이미지.
플레이어는 처음부터 또라이였거나, 던전 플레이를 거듭하면서 돌아버린 작자들이 상위권에 자리하고 있곤 하니까. 제대로 된 거래가 가능한 상위권 플레이어는 어디에서라도 환영할 만한 존재인 것이다. 길드 마스터를 길드 내 최고 실력자가 꿰차지 않는 방향으로 변화하고 있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굳이 외압을 넣어서 협상 테이블에 앉게 만드는 일 없이 거래가 가능한 상대. 류 현에게 꼭 필요한 이미지였다.
전생에서 네임드 몹을 무상으로 아무리 때려죽여도 그를 향하던 의심의 눈초리를 피할 수 있을 테니까. 우습게도 그들은 전생의 그와 어떻게 거래할지 모르겠다는 이유로 그를 의심했었다. 다른 이유들도 복합적으로 작용했겠지만, 류 현이 그나마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은 이 부분이었다.
류 현이 성미에도 맞지 않는 전화상담원 노릇을 자처하고 있는 이유였다. 사람을 상대하는 화술이 부족하니 첫인상이라도 좋게 남기는 게 중요했다.
그 대척점에 서 있다고 해도 좋을 친구는 류 현의 속을 아는지 모르는 지 다시 태평한 소리를 늘어놨다.
“에이, 눈이 있으면 그렇게 생각 못하지. 협회도 이제 대놓고 티내고 있잖아. 우리가 먼저 침 발라놨다고.”
“말을 꼭 그렇게 해야 합니까.”
무슨 동네 건달도 아니고. 류 현은 뒷말을 삼켰다. 플레이어 중에서 정상인은 없고, 그런 정신 나간 작자들이 입이 좀 험하다고 대놓고 면박 주는 간 큰 작자는 없었다.
하지만, 류 현은 입만 다물고 있으면 멀쩡하다 못해 헌팅 대기표를 뽑고 남자들이 들이댈 것 같은 친구가 그러고 있으니 한 마디 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해봤자 반응이 너무 뻔했기에 매번 하다 말지만.
“옆에서 속 긁어대러 오셨으면 그거 마시고 돌아가시죠. 옆에서 안 보태주셔도 안 그래도 정신없습니다.”
“에이, 내가 아무리 심심해도 훼방 놓으러 왔겠어?”“그럼 뭐하러 오셨습니까. 술 상대가 필요한 거면...”
“그건 아니고, 부탁할 게 있어서.”
“부탁...이요?”
예상치 못한 말이 승하의 입에서 나오자 류 현은 고개를 갸웃했다. 부탁이라는 단어와 가장 거리가 먼 것 같은 여자가 무슨 일일까. 수틀리면 칼부터 뽑아든 뒤에 생각할 것 같은 이가 부탁 운운을 하다니, 류 현은 불안감보다는 호기심이 앞섰다.
“내일이나 모레 시간 좀 있어?”
“예? 시간요? 딱히 일정 잡힌 건 없긴 합니다만...”
그렇다고 여유로운 것도 아니었다. 오늘처럼 예정에 없던 전화상담을 할 수도 있고, 이 주 넘게 둘이서만 던전을 돌고 있는 팀원들이 연락해올 수도 있다.
거기에 던전에 가있는 동안 무슨 일이 터질까 싶어 밤에만 들어가고 있는 처지였다. 이제 슬슬 퍼플 블루급이 아니면 던전 안에 있는 걸 전부 털어 넣어봐야 별 티도 안 나는 경지까지 올랐기에 감수하는 불편함이었지만, 여유 시간이 없다는 건 변함이 없었다.
그럼에도 류 현은 어지간한 요청은 들어줄 생각으로 대꾸했다.
“...무슨 일 때문에 그러십니까?”
“어? 응 뭐, 별 건 아니고 구정아가 한 번 보자고 하네.”
“구...예?”
어디서 들어본 듯한 이름에 류 현은 머리를 맹렬히 굴렸다. 구정아. 분명히 들어본 적 있는 이름이었다. 흔한 성도 아니어서 류 현은 금방 누구였는지 떠올릴 수 있었다.
그리고 자신이 찾아낸 답에 대해서 부정하고 싶은 기분이 되었다.
“‘예거즈’마스터 구정아...말입니까?”
“응, 맞아. 내가 아는 구정아는 걔뿐인데. 다른 구정아도 알아?”
무슨 동네 슈퍼 아줌마를 지칭하는 것처럼 가볍게 대꾸하는 승하의 얼굴에는 어떤 꾸밈도 없었다. 그녀의 속 내가 어떻든 간에, 류 현의 눈에는 그래보였다. 그야말로 아무 생각이 없어보였다.
“...아니, 대체...”
류 현은 다시금 자신의 교우관계에 대해서 절망하고 싶은 기분을 느꼈다. 왜 하나같이 제 친구라는 작자들은 나사가 한두 개 빠진 수준으로 그치지 않는단 말인가?
‘아니, 그 인간이 자기 죽이려 했다는 것도 이제 알잖아?’
현 ‘예거즈’의 길드 마스터와 승하는 원수라고 지칭해도 좋을만한 관계다. 그것도 구정아가 일방적으로 백조생활을 영위하고 있던 승하를 죽이겠다고 날뛰었었다.
비록 미수조차 아니고 모의수준에서 그쳤지만, 물증을 대체할 수준의 심증과 증언들이 널려있으니 그냥 모의만 했다고 얼버무릴 상황은 옛 저녁에 지난 것이다.
그런 원수를 만나러가는 걸 편의점에 담배 사러간다는 듯이 말하는 그녀의 태도에 류 현은 질려버릴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 쪽에서 먼저 말했다고요? 만나자고?”
“응.”
“며칠 전에요?”
“흠...한 나흘 됐나?”
“아니 왜 그걸 이제야 말하는 겁니까!”
류 현은 저도 모르게 소리쳤다. 승하는 두 귀를 막는 시늉을 하다가 히히 웃으며 얼버무렸다.
“어, 그게 너 그 때 꽤 바빠 보였거든. 그 둘 상담하면서 전화통화도 계속 했었잖아? 그래서 뒤로 미루다보니...”
“그렇다고...아니, 됐습니다. 이 부분은 나중에 따지기로 하고, 그래서 저도 대동하라고 합디까?”
“아니, 동행인 제한만 안 했지 다른 말은 안했어. 칼도 차고와도 된다던데.”
승하의 대답에 류 현은 속으로 안도의 한 숨을 내어쉬었다. 그래도 말도 없이 혼자 찾아가지 않은 게 어디냐 싶었다. 이런 부분에서 위안을 찾는 자신의 처지에 눈물이 날 것 같았지만.
“이유.”
“응?”
“그 쪽에서 만나자고 할 만한 이유. 짐작 가는 거 없으십니까?”
“글쎄, 있다면 엄청 많고, 없다고 하면 하나도 없지 않을까. 솔직히 말해서 난 아직도 걔네가 나 잡겠다고 왜 날뛰었는지도 모르겠는데. ‘예거즈’ 나온 지 하루 이틀 된 것도 아닌데 이제 와서 보자는 이유도 모르겠고.”
승하는 아무렇지도 않게 어깨를 으쓱였지만, 류 현은 그 행동에서 위화감을 읽어냈다. 애초에 별 신경을 안 썼다면 쿨하게 제안을 거부하고 한참 뒤에나 류 현에게 말했을 것이다. 그리고 류 현은 뒤늦게나마 구정아의 저의를 읽기 위해서 골머리를 썩혔을테지. 평소의 승하라면 말이다.
‘아닌 척하긴...신경 엄청 쓰고 있구만...하긴 신경 안 쓰이는 게 이상하지.’
뭐라고 말하든 ‘예거즈’는 그녀의 아군이었고, 동료였다. 동료가 뒤에서 칼 박아 넣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는데 어떤 식으로든 간에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다. ‘예거즈’를 나오고 나서 그녀가 분노하지 않은 건 조금 의외였지만, 아주 무시하고 있는 것도 아니었던 모양.
‘뜬금없이 부르는 게 좀 불안하긴 하지만...주 전력이 다 던전 들어가 있는데 수작질은 못 부리겠지. 이 타이밍에 부르는 것도 아마 그래서 인 거 같고.’
‘맘 같아서는 한 번 거절하고 간 보고 싶은데...’
별일 아닌 양 말하더니 전에 없이 불안한 눈으로 저를 빤히 쳐다보고 있는 친구를 보자니 그런 말을 꺼내기도 힘들었다.
‘에이, 안 되면 둘이서 ‘예거즈’ 갈아엎지 뭐.’
친구 욕은 다하면서 물은 다 든 류 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