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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4화 〉탐식마(貪食魔) (114/429)



〈 114화 〉탐식마(貪食魔)

화련은 실없이 찻잔을 만지작거리다가 안에 든 내용물을 멍하니 바라봤다. 밝은 갈색빛의 찻물에 그녀의 멍한 얼굴이 일렁거리고 있었다. 얼그레이 어쩌고 하던 이름의 차였다.


‘내가 지금 뭐하러 왔더라.’


평생 인연이 없을 것 같았던 차 향기를 맡으며 화련은 흐뭇함 보다는 밑도 끝도 없는 회의감을 느꼈다. 그윽한 차 향기가 그녀에게 이렇게 묻는 것 같았다.


‘이 자리에 왜 왔어요? 스스로 어울린다고 생각하지도 않으면서.’

화련의 제 망상의 말에 진심으로 고개를 끄덕여주고 싶은 기분이었다. 커피 말고 딱히 마실 줄 아는 차도 없는데 자신이 왜 이런 곳에 있는 걸까. 세상에 다시없을 멍청이가 된 기분이었다.

‘희란이가 말릴 때 들을 걸...왜 멍청하게...’


협회와, 웨인 크로이츠에게 접촉해서 정보를 얻자고 한 자신을, 조곤조곤하게 그녀를 설득하려 애쓰던 희란의 얼굴이 떠오르자 기분이 더 가라앉았다. 모레, 마스터에게 연락해보고 그러고도 원하는 답을  들으면, 그 때 찾아가겠다고 약속까지 해놓고는 몰래 빠져나왔으니까.

거짓말이라곤 못할 것 같은 희란에게  거짓말이었기에 더욱 찔렸다. 지금쯤 자신의 휴대폰이 꺼져있다는 걸 알았을 텐데 어쩌고 있을까. 마스터한테 바로 연락하진 않겠지. 별의  생각들이 그녀의 머릿속을 들쑤셨다.

화련은 자괴감에 매몰되기 전에 분노를 표출할 대상을 찾아내었다. 그녀가 이런 어울리지도 않는 자리에 나와서 무슨 맛인지도 모를 차나 홀짝이게 만든 장본인을 말이다.


‘아무 말도 안했는데 지레 짐작해서 입을 다물고 잠수 타 버리는 게 어디 있어? ...좀 노골적으로 째려보긴 했지만. 그리고 누가 물어보면서 잡아먹나? 조금 미심쩍은 부분을 해결보고 싶은 것뿐인데...’


화련은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헤집으며 생각하는 걸 그만두었다. 더 했다가는 짜증이 감당이  될  같았다. 요즘 들어 자신답지 않게 밑도 끝도 없이 감정이 격해지는 경우가 잦았다.

‘...전부 그 인간 때문이야.’

화련이 그에 대한 원망을 토해내려고 하던 때에 문이 열리며 테라스로 사람이 들어섰다. 화련은 일어서서 맞이하려다가 그만 두었다.


‘마스터 동행도 없는데 덥썩 만나겠다고 하는  보면...꿍꿍이가 있어.’


화가 나서 연락을 거부하고 있는 상태였지만, 화련은 자신이 용잡이  소속이라는 걸 잊어본 적이 없었다.

그리고 그런 사고관하에서, 사람 좋아 보이는 미소를 지으며 다가오고 있는  남자는, 그녀에게 최소한 류 현의 동행여부를 물어봤어야 하는 인물이었다. 그와, 협회와 계약을  건 그녀가 아니고 용잡이 팀의 대장인 류 현이었으니까. 연락할 일도 없는 관계인 것이다.

그렇다고 만나지 못할 관계는 아니지만, 이런 뒤숭숭한 시기에는 따로 만나는 건 그리 좋은 일은 아니었다. 그녀가 만나서 묻고 싶은 게 있다는 용건을 전하자마자 즉답할 일은 더더욱 아니었고.

‘...근데 그 쪽에서 나한테 얻을  있나?’

화련의 시선에 너머에 도사리고 있는 의심은 까맣게 모른 채, 정장차림의 남자. 웨인 크로이츠는 과장되게 허리를 숙여 보이는 인사와 함께 맞은편에 자리했다.

짙푸른 남색 계통의 정장은 그의 밝은 금발과 잘 어울려서 가만히 웃고만 있어도 상대의 호감을 살 법 했지만, 화련에게는 해당 사항이 없는 일이었다. 그녀는 무덤덤하게 이 후에 어디 중요한 약속이 있나보다 하고 넘어갔다.


그녀에게는  여러모로 불편한 자리에서 빨리 벗어나고 싶은 마음 뿐이었다.

“거두절미하고 바로 본론으로 들어갈게요.”

화련은 ‘가방’을 조작해서 제 상반신만한 길이의 풀을 꺼냈다. 살살이풀. 아직 이름이 붙지 않은 풀이었다. 마치 선인장 마냥 가시가 돋쳐있었고, 다른 살살이풀들과의 공통점이라고는 줄기에 붙어있는 노란 방울같은  뿐이었다.

화련이 탁자 위에 올려놓은 살피던 웨인 크로이츠는 고개를 갸웃했다. 화련은  반응을 보고 확신을 얻었다. 방금 전까지 자책하던 것이 무색하게 그녀는 이 자리에 잘 나왔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보시면 아시겠지만, 던전 내에서 자생하던 식물이에요. 이것 말고도 세 뿌리 정도 더 있는데...”

화련은 ‘가방’을 다시 열어 살살이풀을 두 뿌리 더 꺼내놓았다. 처음 것과 달리 하나는 미역같이 줄기 옆으로 잎이 푹 펴진 형태였고, 나머지 하나는 잎이라곤 없고 줄기가 마치 쐐기처럼 끝이 바짝 서있었다.

어느 것 하나도 서로 같은 식물 같아 보이는 공통점이 없었다. 줄기에 매달려있는 노란 방울을 제외한다면 말이다. 그것을 포함하더라도 같은 과의 식물이라고는 믿기 힘들 정도.


“제가 묻고 싶은 건 이게 협회 데이터베이스에 등록이...”
“안 되어 있습니다. 우리 팀이 최초 발견이니까요.”


대꾸하는 음성은 웨인의 것이 아닌 거친 중저음이었다. 이런 목소리를 거의 매일 같이 들어온 화련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발원지로 시선을 돌렸다. 테라스로 들어서는 문에 한 남자가 서있었다.


그녀를  자리로 오게 만든 원흉, 류 현이었다.

“...어떻게?”


저도 모르게 새어나온 의문이 화련의 심경을 대변해주었다.

류 현은 그 물음 아닌 물음에 대꾸하지 않고 성큼성큼 탁자까지 다가왔다. 그는 탁자 위에 펼쳐진 살살이풀들을 보고 콧김을 길게 내뿜더니, 자기 ‘가방’을 열어 챙겨넣었다.


“어떻게는 뭘 어떻게 입니까. 승하 씨한테 연락처를 물어봐놓고 제 귀에 안 들어갈 줄 아셨습니까?”
“하지만...”


연락처를 물었다는  만날 약속을 잡는다로 치환될 수도 없고, 설사 그런 비약을 했다고 한들 오늘 둘이 만날  알고 있는 건 당사자인 둘 뿐이었다. 사실 애초에 만날 생각도 별로 없었다. 희란과 약속한 후에 혼자서 상황을 곱씹다가 화가 나서 지르고  것이지.

화련이 혼란해 하고 있자 웨인이 답을 내뱉었다.


“생각보다 빨리 오셨군요. 오랜만에 뵙습니다. 류 현님.”
“정보만 홀랑 집어 먹힐까봐 싶어서 좀 달렸습니다. 말씀하시는 걸 보니 기우가 아니었던 모양이군요. 귀하에 대한  평가가 틀렸었나 봅니다.”

류 현은 그리 말하고는 대놓고 눈을 흘겼다. 웨인이 이렇게 책잡힐 만한 행동을  건 아니었지만, 그렇지 않아도 팀원들의 의심 때문에 골머리가 아픈 류  입장에서는 웨인은 거드는 시누이 같은 격이었다. 웨인은 부추긴 것도 뭣도 없었지만, 그가 느끼기에는 그랬다.

“그럴 리가요. 귀한 정보라면 상응하는 값을 치를 생각이었습니다. 단지 이번 기회에 백화련 씨와 안면을 터놓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싶어서요. 아름다운 여성분과 대화를 나누고 싶다는 사심도 없잖아 있었고요.”

능글맞게 응대하는 웨인을 보며 화련은 어이가 없었다.  남자가 그럼 류 현에게 이 약속을 알리고, 티도 안내고 대화를 진행시키려고 했다는 소리 아닌가?

화련이 이 감정을 무슨 단어로 표현해야할까 골몰하고 있자, 류 현이 냉랭한 어조로 상황을 정리했다.


“그건 다음 기회로 미루셔야겠습니다. 상황이 조금 그렇군요.”
“이거, 아쉽군요.”

웨인은 어깨를 으쓱이며 미련 없이 물러섰다. 화련은 웨인 크로이츠라는 자에 대한 내부 평가를 대폭 수정해야할 필요성을 느꼈다. ‘절대 희란이랑 단 둘이 못 있게 해야겠다.’ 웨인이 들으면 억울해할 소리였다.

웨인을 물리치는 데 성공한 류 현은 그대로 웨인을 없는 사람 취급하듯이 등을 돌렸다.


“화련 씨, 죄송하지만 자리를 좀 옮겨야할 것 같군요. 같이 가주시겠습니까? 혹시, 오늘이 안 내키시면...”
“아뇨, 가요. 가. 사무실로 가요? 아, 그리고 희란이도 부르고요. 희란이한테는 제가 연락하죠.”

그토록 기다렸던 자리였다. 화련은 그의 마음이 바뀔 새라 냉큼 대답했다. 류 현은 고개를 끄덕이다가 덧붙였다.

“사무실은 좀 그렇고, 임대한 체육관으로 가도록 하죠. 승하 씨도 불러야하는 데, 괜찮으시겠습니까?”

승하 라는 말에 화련의  꼬리가 꿈틀했지만 대놓고 우거지상이 되진 않았다. 화련은 속으로 참을 인을 그리며 말했다.


“알겠어요. 그렇게 하죠.”
‘아니 그 여자는 왜 또?’

쿨한 대답과는 달리 그녀의 속은 재점화를 준비하고 있었다.

***


쿵! 콰칵! 뻐억! 최소 수십. 어쩌면 수천 년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지 모를, 집채만 한 바위가 ‘폭풍’에 휩쓸려 하늘 위로 떠올랐다가 말 그대로 갈려나갔다. 회오리바람처럼 보일 정도로 농밀하게 뒤엉킨 마력이, 검격이, 권각이 바위를 베고, 부수고, 으깨어 놓았다.

콰릉! 빠각! 바위 조각들이 사방으로 비산했다. 그럴 필요도 없었지만, 화련은 제 주변을 우선순위를 높인 공간으로 에워쌌다. 그녀를 향해서 바위조각들이 콩 튀기는 것 같은 소리와 함께 튕겨져 나갔다.


집채만 한 바위를 갈아버리는 걸로는 모자란 지, ‘폭풍’은 밀림 속으로 뛰어들었다.


빠지직! 카캉! 뿌아악! 바위가 당한 험한 꼴은 곧바로 나무들의 불행이 되었다. 아름드리나무들이 수수깡처럼 꺾이고, 뿌리 채 뽑혀 나가는 초현실적인 광경 속에서 할  있는 말은 별로 없었다. 화련의 반쯤 열린 입에서 그 말이 흘러나왔다.

“세상에...”
“......”

화련의 말을 들었는지, 밀림을 갈아버리던 ‘폭풍’은 얼마가지 않아 멈췄다. ‘폭풍’은 움직임을 멈추자마자 두 남녀로 나뉘어졌다.


서로 뒤엉켜서 파괴의 폭풍이 되었던 두 남녀는 대치를 풀지 않은 채로 서로를 노려보고 있었다. 사실, 양쪽이 서로 노려본다기보다도 남자가 살기를 풀풀 풍기고 있어서 여자가 기 싸움에 휘말려든 모양새였다.

여자, 나승하는 숨을 길게 내어 쉬고는 남자에게 핀잔을 주듯이 말했다.


“팀원들 앞이라서  잡고 싶은 건 알겠는데. 이 상태에서 더 올라가면 너나 나나,  다 거덜 나거든? 우리 오늘만 벌써 두 번째야.  쯤 하면 충분한 거 같은데.”


화련은 승하의 말에 무슨 개소리냐는 시선을 보냈지만, 승하의 맞은편에 서서 살기를 풀풀 풍기던 류 현이 고개를 끄덕임으로서 그녀를 당혹케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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