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3화 〉탐식마(貪食魔)
쉭! 귀로 파공음을 듣는 것보다, 눈으로 보는 것보다 빠르게 류 현은 제 육감의 경고를 들었다. 숙여! 생각하기도 전에 몸이 반응했다. 땅에 입을 맞출 것 같이 바짝 몸을 숙이자마자 검 끝이 짓쳐들어왔다.
류 현은 그대로 멈추지 않았다. 휙! 그는 엎드린 채로 두 팔을 축으로 제 몸을 채찍처럼 내휘둘렀다. 상대가 뒤로 펄쩍 뛰어 그의 공격권에서 물러섰다. 류 현은 지체하지 않고 몸을 일으켰다.
검성, 나승하는 그 모습을 가만히 보고 있다가 어깨에 걸쳤던 검을 다시 쥐며 말했다. 그녀는 땀 한방울도 나지 않은 모습이었다.
“대충 이 정도면 됐지? 방금 그거의 2배로 갈 거야.”
“예. 대충 감이 잡히네요.”
“듣던 중 반가운 소리인데? 곧 있으면 그냥 켜고 있어도 되는 수준 되는 거 아냐?”
“농담 마시죠. 그럼, 갑니다.”
류 현은 눈을 감고 내면으로 침잠해 들어갔다. 수십, 수백 번 반복했던 일이기에 조금의 어려움도 없었다. 가장 깊숙한 곳에 도달한 그는 그 중심에 자리한 검은 구체를 건드리기 시작했다. 구체는 지난 번 청뢰 레이드 때와는 다르게 그의 접근을 거부하지 않았다.
그러자,
푸홧! 코에서, 입에서, 땀구멍에서 검은 안개가 뭉클뭉클 솟아나기 시작했다. 검은 안개를 뿜어내고 있는 류 현의 눈에는 어찌할 길이 없는 살기가 가득했다. 입에서는 검은 안개와 함께 으르렁거림에 가까운 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고, 두 눈은 안광이라도 투사할 것처럼 살기로 가득했다.
승하는 왼발을 살짝 뒤로 빼며 마른 침을 삼켰다.
‘볼 때마다 생각하는 거지만 진짜 장난 아니네.’
이 마저도 최대한 누르고, 누른 것이라니. 황당하다 못해 오기가 생길 지경이었다. 저 끝을 보고 싶다! 류 현이 들었다면 친구의 정신 이상과 목숨을 걱정했을 생각이었지만, 승하가 이 훈련에 협조하고 있는 이유는 그거였다.
어떻게든 최대치를 보고 싶다!
‘솔직히 말해서 지금도 그냥 감당은 안 되지...살초를 안 쓰는 선에서는 이제 슬슬 한계야.’
그 때 그녀의 감이 그녀의 팔을 움직였다. 막아!
쿵! 팔목이 찌르르 울리는 충격을 인지했을 때는 이미 류 현은 지근거리까지 다가온 상태였다. 그의 주먹은 검에 막혔지만, 검은 안개와 마력으로 싸인 그의 주먹은 긁힌 상처하나 없었다.
다른 플레이어가 제 눈을 의심했을 광경이었다. 죽일 작정은 아니라곤 하나 검성이 제대로 된 검을 잡고 일으킨 검기를 막아내다니! 애초에 마력으로 강화했다고는 하나 주먹으로 칼을 받아내는 게 이상한 일이었다. 그 칼이 그냥 생칼도 아니고 검기를 일으킨 칼이라면.
두 남녀는 대치 상태에서 서로를 바라봤다.
승하는 억눌린 살기가 당장이라도 뛰쳐나올 것처럼 일렁거리는 두 눈을 지근거리에서 마주 보며 소름이 돋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다른 이라면 금방이라도 뛰쳐나올 것 같은 살기에 압도 되었을 테지만, 그녀는 그 뒤편을 볼 수 있었다. 이 진득한 살기마저 우습게 보일 정도의 거대한 무언가를!
‘이건 조금 난폭해지는 정도가 아니잖아. 거의 다른...’
쿵! 대지를 단단히 딛고 있던 류 현의 두 발 중 왼발이 뒤쪽에서 포탄처럼 쏘아져 나왔다. 그녀의 동체시력으로도 따라잡기 힘든 속도였지만, 승하는 인지와 동시에 뒤로 뛰어 대치 구도에서 빠져나왔다. 그 직후 사냥감을 덮쳐드는 뱀처럼 날아오는 발차기를을 검면으로 받아내었다. 쩡! 그녀는 다섯 걸음 가량 물러난 뒤에 멈출 수 있었다.
‘응? 바로 안 오네? 벌써 제어하는 데 성공했나?’
그의 다음 공격을 대비하고 있었던 승하는 다음 공격이 바로 들어오지 않자 고개를 갸웃하며 류 현을 바라봤다. 그의 몸에서는 여전히 검은 안개가 뭉클뭉클 배어나오고 있었지만, 사나운 기세는 한풀 꺾여있었다.
승하가 아니라면 눈치 챌 수 없는 미묘한 변화였지만, 그냥 눈대중으로도 그의 ‘깨달음’을 눈치 챈 그녀에게는 어려울 것도 없는 일이었다. 한 두 번 보는 것도 아니고 벌써 세 번째 일이니까.
승하는 그 모습을 보며 혀를 내둘렀다.
‘와 벌써 억누를 수 있어? 괴물이네. 괴물.’
그렇지 않아도 기본적으로 뚱한 류 현의 표정이 썩어 들어갈 만한 생각이었지만, 승하는 별 거리낌이 없었다. 그녀의 기준에서도 괴물 같은 성장속도를 보이고 있었으니까.
‘억누르고도 이 정도면...다 풀고 붙으면 진짜 끝내주겠는데...음, 생각해보니까. 감당 안 될 수도 있겠다. 수련 열심히 해야겠네.’
거친 숨을 몰아쉬면서 힘겹게 자신을 억누르고 있는 친구를 보며 할 생각은 아니었지만, 그녀는 즐겁게 청사진을 그려봤다.
하지만 승하의 감탄과 달리 류 현은 썩 좋은 상태는 아니었다.
‘빌어먹을...진짜 죽겠다.’
안쪽에 성한 곳이 없었다. 승하가 두들겨 패서가 아니라, ‘강림’의 마력을 억누르는 과정에서 입은 내상이었다. 네임드 괴수들도 노출되면 기겁하며 떼어놓으려고 하는 그 힘을 억지로 찍어 누르려고 했으니, 반발이 없을 리가 없는 것이다. 보통 사람이었다면 내부가 진탕돼서 세 번은 죽었을 내상이었다.
‘...그래도 성과가 있긴 하네.’
화련과 희란을 바람맞히게 만든 첫 대련으로부터 일주일. 그 첫날에 섣부르게 행동한 덕에 일이 많이 꼬였지만, 소득이 없었던 건 아니었다.
그날, 제대로 ‘강림’을 사용했다고 하기 민망한 수준이긴 했어도, ‘강림’의 마력을 끌어올린 상태에서 제대로 억누르는 데 성공했으니까.
반작용이 꽤 커서 그 날은 병문안도 거르고 던전에서 자는 수밖에 없었지만, 류 현에게는 그리 심각한 반작용은 아니었다. 그는 ‘강림’이 기존의 자신의 능력과는 궤를 달리하는 능력이라는 걸 모르진 않았다. 자고 일어나니 다시 몸의 통제권을 되찾기도 했었고.
승하가 알 수 없는 일이지만, 이전 생에서 ‘강림’을 끌어올릴 때마다 네임드 괴수를 죽이고 그 육을 취하거나, 정말 드물게 마력이 동이 나거나, 그도 아니면 자신이 빈사 상태가 되어서 ‘강림’이 풀렸다는 걸 생각해보면 장족의 발전 수준이 아니었다.
이전 생에서는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다. 이전 생에서 ‘강림’의 발동은 그에게 활동정지를 의미했다. 싸움에서 지든 이기든 ‘강림’의 대가는 혹독했다. 불멸자라고 불리고, 그 이상의 마력 회복력을 가진 그 조차 ‘강림’을 발동시킨 이후에는 정신적 후유증뿐만 아니라 육체적 후유증 때문에 한동안 요양해야할 지경이었으니까.
온전히 ‘강림’을 발동하고도 그럴 수 있을 지는 미지수였지만, 시간을 투자해보기에 충분한 가치가 있는 문제였다. 일부라고 하더라도 제대로 사용할 수 있다면, 초반에 등장하는 네임드 몹은 전력공백이라는 위험을 감수하지 않고 상대할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그는 이미 퍼플 던전 수준을 넘어섰다. 이제부터는 던전에 들어갈 수 있다고 마음대로 들어갈 수 있는 것도, 하위 던전이 성장에 큰 도움이 되는 것도 아닌 상황. 결국 가지고 있는 걸 더 다듬는 것 밖에는 없는 것이다.
더욱이 그의 옆에는 훌륭한 대련 상대도 있지 않은가. 대련 상대라기보다도 눈이 뒤집혔을 때 적당히 상대하다가 때려눕혀줄 안전장치였지만. 그는 그런 걸로 자존심을 챙기는 부류도 아니었다.
문제는 합리성이라고는 요만큼도 보이질 않는 무식함의 결정체라고 할 수 있는 훈련이라는 점이었다. 말이 훈련이지 제어도 안 되는 힘을 발동시키고 그걸 제어할 때까지 덮어놓고 때려눕혀달라고 하는 건 훈련이라고 할 수도 없는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그의 부탁을 승하는 시원스럽게 수락했고, 맡은 역할도 기대이상으로 잘 해주었다.
‘강림’을 발동하고 억누르는데 실패하여 눈이 뒤집히는 순간 때려눕혀질 걸 각오했었는데, 승하는 류 현이 정신 차릴 때까지 꾸준히 버텨주었다. 그녀와 치고받으면서 소모되는 마력이 상당했기에 그녀가 버틸수록, 류 현이 ‘강림’을 억누르기도 편했다.
너무 열심히라 류 현이 미안함을 느낄 정도.
‘그냥 입 닦아버릴 수도 없고...딱히 대놓고 뭘 요구할 것 같지도 않고, 뭘 해줘야 하나...’
고민하는 그에게 승하가 지나가는 투로 말했다.
“근데 슬슬 연락해야 되는 거 아냐?”
“...그렇죠.”
류 현은 속으로 신음을 삼키며 대꾸했다. 승하가 말하는 연락해야하는 대상을 그도 모르진 않았다. 류 현이 본의 아니게 바람맞힌 뒤로 연락을 거부하고 있는 화련얘기다. 덤으로 계속 붙어 지내고 있는 희란마저 화련의 벽에 가로막혀서 연락이 되지 않고 있는 상황.
일주일 동안 피해 다니고, 기껏 불러내서 바람맞힌 걸 복수라도 하겠다는 듯이 화련은 지난 일주일 간 먼저 연락은커녕 류 현이 연락하면 침묵으로 거부해왔다. 그녀의 화가 좀 누그러들 때까지 지켜본다는 게 벌써 일주일이나 되었다. 화련의 침묵은 여전히 깨질 기미가 보이질 않았다.
‘사실대로 다 고해바칠 수도 없는데 어쩐다...’
골몰하는 그에게 승하는 다시 별것 아니라는 듯이, 그냥 저기 사람하나 지나간다는 투로 말했다.
“오늘 아침에 화련한테서 연락 왔었어. 웨인 크로이츠 연락처를 물어보던데.”
“아니 그걸 이제야 말씀하시면 어떻게 합니까? 연락처는? 주셨습니까?”
“응? 어, 줬지. 어차피 오늘 당장 둘이 만날 수 있는 것도 아니잖아.”
“젠장, 그 인간 지금 한국에...아니 됐습니다. 오늘 훈련은 여기까지 하고...”
“어어? 걔 한국에 와있어?”
“제가 불렀으니까. 와있죠. 아니 그런 얘기는 빨리 해주셔야...”
류 현은 바쁘게 말하면서도 나갈 채비를 했다. 제 3자인 승하가 보기에는 별 의미도 없이 몸을 털거나 하는 당황한 사람의 전형이었지만, 당사자가 그걸 알 턱이 없는 것이다.
‘둘이 만나서 이상한 걸 주워듣기라도 하면...’
진땀나게 변명하는 정도로는 끝나지 않을 것이다. 자신의 상상력이 이 정도였나 싶을 정도로 화수분같이 쏟아져 나오는 최악의 상황들에 류 현의 속이 타들어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