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2화 〉탐식마(貪食魔)
검성, 나승하는 별 생각 없이 방안을 돌아보다가 거치적거리는 시선들에 그만두고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시선들에 담긴 감정들은 그녀가 수십 번, 수백 번 겪어봐도 도무지 익숙해질 수가 없는 그런 부류였다. 경계, 탐욕, 질시.
언제나 그랬다. 사람들은 그녀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고 그녀를 판단하고, 그러한 시선을 보내왔다. 거기에 대해서 짜증을 부렸다간 바로 일간지 1면에 대서특필되곤 했다.
‘예거즈’를 창립한 동료들이 살아있을 때는 가끔 떼쓰는 식으로 짜증을 부리곤 했지만, 그들이 죽고 나서는 그냥 참아 넘겼다. 짜증도 받아줄 사람이 있어야 성립하는 법이니까.
그녀의 한숨에 신경을 건드리던 시선의 주인들이 움찔했지만, 그건 그녀가 알바가 아니었다.
그녀의 관심은 한숨을 푹푹 내쉬어도 못 들었다는 듯이 제 할 말만 하고 있는 남자에게 고정되어있었다. 자신을 이렇게 꿔다놓은 보릿자루처럼 자리에만 앉혀놓고 혼자서 회담을 진행시키고 있는 남자, 류 현에게 쏠려있었다.
자기가 한숨을 쉬든, 울든 상관하지 않겠다고 말하는 것 같은 태도에 승하는 괜히 궁시렁거려봤다.
“안 어렵다더니. 완전 거짓말.”
“이게 뭐가 어렵습니까. 그냥 앉아만 있으면 되는데.”
“...이 사기꾼.”
예상과 달리 반응이 곧바로 돌아왔다. 원하던 반응은 아니었기에 조금 부루퉁해졌지만, 승하는 더 불평하진 않았다. 그가 부른 이유를 모를 정도로 바보는 아니었으니까. 그냥 입 다물고 인상만 쓰고 있어도 할 일은 다 한 셈이다.
오늘 이 ‘X던전 대책 간담회’에 참석한 이들은 검성의 무서움을 누구보다 잘 아는 이들이다. 너무나 잘 알고 있어서 그녀를 죽일 모의까지 했던 전적이 있는 조직에 소속되었던 자들이니까.
양대 산맥으로 불리는 ‘산군’과 ‘예거즈’, 거기에 ‘터주’와 ‘파이터즈’를 대표해서 나온 이들이 다 합쳐서 열 댓 명. 모두 검성에 대한 관심이 지대하다 못해 변질된 작자들이다. 아마 그녀가 참석한다는 소식 때문에 참석한 자도 없진 않을 것이다.
X던전을 관리하고 있다는 협회 측 대표는 참석하지 않은 회담이다. 당사자가 다 모이지도 않은 회담. 이런 식의 회담은 알맹이는 없고 허허 웃으며 시간만 죽일 가능성이 높다. 길드에서 대표로 내보낼 정도의 인재들이 좋아할 만한 자리는 아니었다.
그녀가 뚱한 시선으로 다시 좌중을 돌아보자 모두 찔끔하며 시선을 돌렸다. 그들은 다른 의미에서 놀라는 중이었다.
승하가 곧바로 입을 다물었지만 회담장 안에 있던 이들은 들은 만큼 들은 뒤였다. 작은 목소리로 소곤거리긴 했어도, 이 방안에 있는 이들 중에서 플레이어가 아닌 이는 단 한 명도 없으니까.
애써 표정관리를 하곤 있었지만 그들은 한마음으로 경악하는 중이었다. 웬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 같은 놈이 검성과 친분관계도 두텁다니!
방금 검성이 궁시렁거리는 모습이나 류 현의 대응은 누가 봐도 그냥 이해관계상 만나는 관계가 아니었다. 그보다 긴밀한 무언가였지. 회담장에, ‘예거즈’창립 이전부터 공식적 이라는 단어만 붙어도 얼굴을 찡그리고 보는 검성이 동석한다고 들었을 때부터 뭔가 있을 줄은 알았지만 이럴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었다.
소리가 들릴 리는 없지만, 바쁘게 머리가 돌아가는 소리를 듣는 것 같은 기분 속에서 류 현은 말려 올라가려는 입가를 단속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분배율에 관한 관습을 들먹거리던 작자들이 말 한마디도 없었다.
눈요기용 병풍 하나를 세운 것 치고는 지나치게 효과가 좋았다. 그 병풍이 그에게 불평하는 것 외에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음에도 그들은 알아서 의미를 부여하고, 배배 꼬아서 생각하는 중일 것이다.
많이 가졌고, 전부 가지려고 드는 작자들 생각은 거기서 거기니까. 오늘 회담도 그들이 소속된 곳에서 해란을 통해서 계속 닦달하자 자리를 만든 것이었다. 표면적으로는 퍼플 이상의 던전이 터질 수도 있는 초유의 사태를 방지할 대비책을 강구한다. 라는 미명하에 모였지만 속내는 뻔했다.
-그 던전에 숟가락 좀 얹으려는 데 같이 견적이나 내보자.-
무슨 소리를 들을지 뻔했지만 그냥 귀를 닫고 무시할 수도 없었다. 수 틀렸다고 생각하고 언론 플레이라도 하면 괜히 일이 틀어질 테니까.
그래서 류 현은 일주일 전 약속을 빌미로 어제 내내 싫다고 투덜거리는 승하를 억지로 끌고 나온 것이다. 그들도 검성과 류 현이 어느 정도 선이 연결되어있다는 건 알고 있겠지만, 직접 보여주는 것과 그런 정보가 있다고 알고 있는 것은 천지 차이니까.
오늘 일로 그들은 X던전에 숟가락 얹기 용으로 파견하려던 인선을 다시 검토하게 될 것이다. 아직 회담 종료까지 대휴식과 3시간여가 남았지만, 류 현의 속에서는 이 회담은 이미 끝난 것과 다름없었다. 대신 그의 머릿속에는 다른 걱정이 가득했다.
‘...어떻게 변명을 한담.’
그가 오일 째 피해 다니고 있는 팀원들의 얼굴 볼 생각으로 가득했다.
***
희란은 운전에 온전히 집중하지 못하고 자꾸 옆자리를 힐끔 거렸다. 면허를 딴 지 아직 일 년도 안 된 초보 운전자답지 않은 태도였지만 그걸 지적해줄 사람은 없었다. 그걸 지적해줄 수 있는 탑승자인 화련은 조수석에 안전벨트를 빠져나갈 것처럼 밑으로 축 쳐져있었으니까.
희란은 형편없이 축 쳐져있는 화련을 계속 힐끔거리다가 말을 붙였다. 뭐라고 말을 이어가야할지 모르겠지만 일단 저지르고 보기로 했다. 희란의 성정에 맞지 않은 행동이었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다른 팀에 속해 본 적이 없는, 아니 변변한 사회생활도 해본 적이 없는 그녀지만 이 팀이 보통의 팀과는 다르다는 것 정도는 알았다.
플레이어팀 해체 이유 1순위라는 배분(돈)문제는 이 팀에서 문제조차 되지 않았다. 문제가 안 되는 걸 넘어서 무심한 수준이었다. 류 현은 탐욕과는 거리가 먼 우두머리였고, 화련은 원정 페이스가 조금 버겁긴 했지만 그래도 막 달리던 때에 비하면 양반 수준. 팀에 속한 사람들도 모두 좋았다. 그러니 분란은 최대한 피하고 싶었다.
“언니.”
대꾸는 없었다. 희란이 침묵에 슬슬 불안해 할 즈음에 불쑥 화련의 입이 열렸다.
“바보 같아.”
“네?”
“...바보 같다고. 나.”
화련은 풍선에 바람 빠지는 것처럼 길게 한숨을 푸욱 내쉬더니 더욱 축 쳐졌다. 화련은 눈을 감으면 당장이라도 잠들 것 같은 피곤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일주일 내내 아무 말 없이 피해 다니더니 기껏 연락해서 불러놓고는 얼굴도 안 비치고 바람을 맞혀? 그것도 그 여자가...으으...”
저 혼자서 중얼거리던 화련은 끝에 가서는 치밀어 오르는 짜증이 감당이 안 되었는지 두 손으로 눈을 덮었다. 무슨 말인지 도통 알아들을 수 없는 웅얼거림이 계속해서 그녀의 입 밖으로 흘러나왔다.
결국 보다 못한 희란은 차를 도로변에 세우고 화련을 달래기 시작했다. 희란은 그 날 난생 처음 해보는 뒷담화와 뒷담화 호응을 온종일 해야만 했다.
***
드르륵
문을 열자 체육관 안을 가득 채우던 어둠이 물러났다. 나승하는 체육관 안을 두리번거리다가 대자로 드러누운 남자를 찾아내었다. 그녀가 체육관을 나설 때와 같은 자리, 같은 자세로 남자는 누워있었다. 허공을 멍한 눈으로 보고 있는 남자를 보며 승하는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
“일단 시킨 대로 말하긴 했는데...엄청 화난 거 같던데 괜찮겠어?”
“안 괜찮으면 어쩌겠습니까. 이 꼴로 나갈 것도 아니고.”
류 현은 그리 말하며 오른 손을 들어 보이더니 휘휘 저어보였다. 그럴 때마다,
푸확! 후욱! 검은 안개가 구멍 난 증기관에서 새어나오는 것처럼 뿜어져 나왔다. 단순히 검은 게 아니라 승하마자 움찔할 정도로 불길한 기운이 담겨있는 안개였다.
에너지 드레인! 그 불길하면서 강력한 능력이 지금 절제 없이 내뿜어져 나오고 있는 것이다. 그나마 억누르고 있어서 이 정도였다.
지금 그냥 누워있는 것 같아 보여도 류 현은 굉장히 집중해서 자신을 억누르고 있는 상태였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냥 합판으로 만들어진 체육관 바닥은 진작에 문드러졌을 것이다.
승하는 그 모습을 보고 잠시간 말이 없다가 불쑥 내뱉었다.
“미안.”
“괜찮습니다. 뭐 제가 자초한 것도 있고...슬슬 진정되는 것도 같고요.”
류 현은 몸을 일으키더니 고쳐 앉았다. 동작마다 그의 몸에서 검은 안개가 배어나왔지만 승하는 애써 무시했다.
“그래도 집에는 못 들어갈 거 아냐.”
“예, 그렇죠. 어디 던전 하나 잡고 들어가서 거기서 자야할 것 같은데. 뭐 한잠 자고 나면 가라앉을 테니 하루만 땅바닥에서 자면 되겠죠.”
“...같이 가줄까?”
진심으로 미안해하는 기색이 역력한 물음에 류 현은 조금 떨떠름한 표정이 되었다.
‘갑자기 죽을병이라도 걸렸나. 왜 이래?’
“아뇨, 그냥 근처 레드 던전에서 몸만 풀고 자면 되는데요. 뭘. 애초에 제가 부탁해서 한 대련인데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그래도 혼자 보내기가 좀 그런데...”
“따라오시면 제가 불편해서 잠 못 잘 겁니다.”
별 생각 없이 한 짓이 이렇게 될 거라고는 그도 생각하지 못했다.
‘멍청하게 대체 왜 갑자기 대련하자고 해서...하필이면 오늘...’
정말 별 생각 없이 한 대련 제의였다. 일주일동안 거의 피해 다니다 시피 하며 팀원들과의 대면을 거부하다가 팀원들을 불렀다. 약속 시간까지 불안해하는 것보다는 뭐라도 생산적인 일을 해보자 하다가 생각해낸 게 대련이었다.
류 현은 이번 생에서 ‘강림’을 숨길 수 있다고도 보지도 않았으며, 숨길 생각도 없었다. 애초에 이 능력이 없으면 뒤에 나타나는 네임드 몹은 상대하기가 힘들다. 문제는 밝히는 타이밍.
각성 직후처럼 제어가 안 되서 불길한 기운을 풀풀 풍기며, 광기에 눈이 뒤집어진 그런 단계에서 밝힐 수는 없었다. 이전 생에서도 끝까지 다 제어하지 못했지만, 마냥 휘둘리기만 한 것도 아니었다.
확실한 건 제어 시도가 늘어날수록 눈이 뒤집어지는 게 덜해진다는 것.
가장 좋은 훈련방법은 던전에서 어떻게 때려 부숴도 상관없는 괴수를 상대로 ‘강림’을 발동시키고 제어훈련을 하는 것이겠지만, 이미 궤도에 오른 류 현에게 하급 던전에 들어가서 훈련한다는 선택지는 최대한 미루고 싶은 그런 것이었다.
아무리 그의 마력량이 방대하고, 던전 출입으로 인한 피로도가 다른 플레이어들에 비해서 잘 안 쌓인다지만 아예 없는 건 아니었으니까.
거기에 주변 시선도 신경 쓰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아닌 척하지만 양대 길드와 ‘터주’, 협회에서 눈과 귀를 여기저기 뿌려두었을 터.
그래서 류 현은 자신의 변화를 본 것만으로 눈치 챈 승하에게 기대를 걸어본 것이다. 본격적인 것도 아니고 그냥 시험해보는 차원이었지만.
‘던전안에서 깨달음을 얻었는데 이게 잘 제어가 안 됩니다. 좀 도와주실 수 있겠습니까.’ 이것저것 생략한 구멍투성이의 설명이었지만 승하는 반색하며 승낙했다.
처음 계획을 짰을 때는 대련이라고 부를 필요도 없는 수준이었다. 류 현이 ‘강림’을 살짝 맛보여 주는 수준으로 발동해보이고, 승하가 그 기운을 관찰해보는 걸로 끝이었으니까. 만약을 대비해서 그녀가 칼을 뽑아들고는 있었지만, 휘두를 일은 없었다. 그럴 거라고 생각했었다.
그리고 그런 전망은 ‘강림’을 시전한 류 현이 눈이 제대로 뒤집어지면서 박살이 났다. 칼을 뽑고 선 승하의 투기에 반응한 것인지, 아니면 1,2단계를 너무 빨리 뛰어넘은 탓인지. 대체 무슨 조화인지 몰라도 제대로 ‘강림’이 발동되기 힘들 정도로 소량의 마력만 제공했음에도 눈이 제대로 뒤집어진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류 현의 현재 경지가 ‘강림’을 오래 발동할만한 것도 아니고, 완전히 정신줄을 놓은 것도 아니었기에 피를 보는 일은 없었지만 문제가 발생했다.
아무리 불완전했다곤 하지만 ‘강림’상태의 류 현의 투기는 진짜였고, 불붙으면 봐주는 게 없는 승하도 호응하듯이 제대로 불이 붙었었다. 살초는 쓰지 않았지만 실전을 방불케 둘은 치고받았고, 그 과정에서 류 현이 ‘강림’상태를 억눌렀음에도 불붙은 상태가 유지되었던 것.
그 결과, 스위치를 내렸음에도 검은 안개가 계속 새어나오는 상태가 된 것이다.
팀원들과의 이야기는커녕 길에 나다니기만 해도 경찰이 쫓아올 그런 상태.
류 현은 요즘 갈수록 화련의 눈초리가 매서워지는 이유를 알고 있음에도, 일주일 만에 불러들인 그녀들을 돌려보는 수밖에 없었다. 그것도 자신이 직접 말하는 게 아니라 승하에게 말을 전해 달라고 시키는 방식으로.
바람맞히는 걸로는 최악의 방식이라는 걸 그도 모르진 않았지만, 이 상태로는 변명은커녕 더 큰 의심을 살판이었으니까.
‘병문안도...안 되겠네.’
주먹을 쥐었다 펴자 검은 안개가 뭉클뭉클 피어올랐다. 그 광경을 보며 류 현은 한숨을 삼켰다. 매일 일과가 되어버린 병문안도 오늘은 걸러야 할 듯 했다.
‘누나한테 전화하고...화련 씨랑 희란 씨한테도...해야겠지.’
세아는 속으로는 허전해 할지언정 별 말은 하지 않을 것이다. 매일 찾아갈 때마다 매일 올 필요 없다고 손사래를 치니까. 문제는 바람맞힌 두 사람에게도 연락해야 한다는 것.
‘뭐라고 하지...누나가 아파서? 아니야...셋이 톡방도 파놨던데. 바로 확인 할 거야.’
“진짜 괜찮겠어? 자다가 갑자기 눈 뒤집히기라도 하면...”
어울리지 않게 과도한 걱정을 보이는 친구를 달래고 나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