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1화 〉탐식마(貪食魔)
승하는 류 현의 소식을 서해란에게서 반 협박해서 전해들을 때만 해도 별 생각이 없었다. 던전을 다녀온 플레이어를 사흘 정도 방치하는 건 업계의 불문율이었고, 그녀의 경우에는 아주 잠수를 일주일 간 타버릴 정도였다.
그런 그녀가 용잡이 팀이 묵고 있다는 호텔에 나타난 건 정말 변덕 그 이상 이하도 아니었다. 집안에 퍼져 있자니 살림을 도맡아 해주는 혜라의 눈치가 보이고, 어디 던전 들어가서 몸을 풀자니 시기가 별로 좋지 못했다.
‘예거즈’는 거의 2년 전부터 예약해뒀던 퍼플 던전 원정을 시작하려고 시동을 걸고 있었고, 용잡이 팀의 첫 단독 퍼플 던전 행에 나머지 대형 길드들의 이목이 쏠린 상황. 괜히 긁어 부스럼 내고 싶진 않았다. 솔직히 말하자면 X 던전이 있는데 퍼플 이하 던전이 눈에 찰 리가 없다.
할 일도, 갈 곳도 없어 빈둥거리다가 산책하는 기분으로 찾아온 것. 아무런 생각도 없이 그냥 충동적으로 저지른 일이었다. 라운지에서 식사를 시켜서 먹고 나자, 왜 왔는지 조차 기억 못할 정도로 지루해졌지만.
던전에서 나온 게 어제일이니 오늘 보기는 힘들어보였고, 볼 수 있더라도 말 그대로 얼굴만 보고 끝일 것이다. 승하가 식사용 나이프를 만지작거리며 돌아갈지 말지 고민하고 있을 때, 익숙한 얼굴이 회전문 너머로 보였다. 류 현이었다.
그대로 벌떡 일어난 승하는 피곤한 이를 귀찮게 해서 한 소리 들을 수 있다는 사실도 잊고 그에게로 다가갔다. 저도 모르게 쥐고 일어난 나이프는 손안에 쥐여진 채였다.
그리고 거리가 열 걸음 안으로 좁혀졌을 때,
‘어? 뭐야?’
그녀의 감이, 당당하게 육감이라고 칭하고 다녀도 될 만한 그 날카롭기 그지없는 감이 위화감을 붙잡아 내었다. 달랐다. 몸 주변에 아슬아슬할 정도로 압축되어있는 마력 형태나 플레이어답지 않은 특유의 느슨한 분위기는 여전했지만 그럼에도 달랐다.
눈앞의 류 현은 열흘 전과의 그와는 전혀 다른 존재라고. 이제 충분히 위협적인 존재가 되었다고, 그녀의 감이 말했다.
나승하는 태어나서 단 한 번도 제 감을 의심해본 적이 없었다. 플레이어가 되기 전부터 그녀는 머리로 내린 결론 보다는 감을 더 믿었다. 남들이 보면 그게 사람의 행동이냐고 하겠지만, 그녀에게는 상관없는 이야기였다. 그녀의 감은 틀린 적이 없으니까.
‘...던전 안에서 깨달음이라도 얻었나?’
분위기 변화 정도로 봐선 아마도 큰 깨달음이겠지. 그리 결론이 나자 그녀의 입가가 슬쩍 말려 올라갔다.
실로 오랜만에 느껴보는 감정이었다. 그가 급속도로 강해지는 걸 보고 조만간이라고 생각은 했지만, 이렇게 빠르게 호승심을 느낄 상대가 될 줄은 예상하지 못했었다.
아무리 빨라도 일 년 더. 그리 잡고 있었다. 기분 좋은 오산이었다.
‘시험해보자. 아주 조금만. 닿기 전에 거둬들이면...화는 내도 얼굴 안 보겠다고는 안하겠지?’
당사자인 류 현이 들으면 그게 무슨 시험이냐며 기겁할 만한 생각이었지만, 이미 가속 페달에 발을 올린 승하에게는 이성의 브레이크 따윈 듣지 않았다.
또 마침 좋은 물건이 손에 쥐여져있었다. 맨손으로 검기 흉내를 내면 브레이크가 걸기 어렵지만, 살상용이 아니지만 날붙이를 쥐고 있으면 검기 흉내가 훨씬 수월하니 도중에 멈추기도 쉽다.
마음을 굳히자마자 그녀 안에 웅크리고 있던 마력이 오른 손으로, 오른 손에 쥐고 있는 나이프에 모여 형태를 이루었다. 소리도, 어떤 마력적인 전조도 보이지 않는 자연스러운 검기 형성.
승하는 그대로 두 걸음을 더 내딛고,
쉭! 빠르게 손을 내미는 것처럼 손바닥에 붙인 나이프를 휘둘렀다. 일반인은 물론이고, 그저 그런 플레이어라면 인지조차 못하고 목이 떨어질 기습!
텁-
“오-”
“뭐가 오- 입니까. 대체 이건 또 무슨 짓입니까?”
하지만 그 기습은 승하가 손을 멈추기도 전에 류 현의 손에 막혀, 나이프 끝조차 보이지 않게 되었다. 류 현은 그대로 손을 내려서 악수하는 것처럼 손을 몇 번 흔들고는 그녀의 손을 놓아주었다. 나이프 앞쪽은 철판을 들이받은 것처럼 찌그러들어 있었다.
승하는 그대로 류 현이 나이프를 받아낸 오른손을 붙잡고, 손바닥을 펴보았다. 상처하나 없이 말끔했다.
‘어? 까진 상처도 없다고?’
무기가 무기인 만큼 미약했지만, 검성이라 불리는 그녀가 검기를 끌어올려서 한 기습을 까진 상처조차 나지 않고 받아낼 줄이야?
그녀가 손바닥을 관찰하고 있자 류 현이 손을 끌어당기며 평소보다 더 무뚝뚝한 어조로 말했다.
“들어. 가서. 얘기. 하죠.”
어금니를 꽉 깨문 궁서체였다.
***
류 현은 아이가 벌 받는 것처럼 두 손을 번쩍 들고 있는 여자를 보고 한숨을 삼키려다, 결국 내뱉고 말았다. 생긴 것과 그 사람의 행동이 서로 상관관계에 있다고 믿는 쪽은 아니었지만, 그게 전혀 상관이 없다는 걸 이런 식으로 확인하게 되길 원하진 않았다.
‘저 얼굴로 갑자기 나이프를 휘둘렀다고 하면 철창신세는 내가졌겠지.’
지은 죄가 있다는 건 아는지 승하는 그의 방으로 들어온 이후에는 말이 없었다. 말이 없을 뿐 아니라, 그가 가만히 노려보고 있자 시키지도 않은 벌까지 자청해서 서고 있는 것이다. 지금 이 호텔 옥상에서 떨어져도 두 발로 착지하고도 남는 인간에게 두 팔 들고 꿇어앉는 게 벌이 되는 지는 의문이었지만.
‘...보기에는 검기는 진짜였는데 알맹이는 없었지.’
류 현이 그대로 치고 받는 게 아니라, 조용히 방으로 끌고 들어온 이유였다. 나이프에는 검기가 둘러져있었지만, 그 외에는 살기도 뭣도 없었다. 그녀를 아는 누군가가 옆에서 봤다면 공격궤적이 검성 답지 않다고 한마디 거들었을 정도.
제대로 두른 것 같은 검기마저 그의 몸을 뚫지 못했다. 류 현은 정확하게는 몰라도 승하의 검기가 대비를 한 자신도 정면에서 받아낼 수 없다는 것 정도는 알았다. 제대로 된 무기가 아닌 식사용 나이프라서 그랬을 거라는 건 고려대상조차 되지 못한다. 적수공권 상태로 검기를 발현하는 걸 청뢰를 얻었던 원정에서 봤었다.
정황을 고려해보면 해칠 마음 같은 건 없었다는 결론이 나온다. 문제는,
‘장난...이겠지. 장난인데...아니 왜 내 친구라는 것들은 자꾸 이런 미치광이들만 모이는 거야?’
그리 결론을 내리자 어이가 없어서 화낼 생각조차 들지 않을 정도라는 것!
류 현은 이전 생을 통틀어서 단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는, 제 인간관계에 대한 회의감마저 들었다. 던전 원정이 끝난 다음날, 하루 종일 늘어져 있어도 모자란 날에 찾아와서 다짜고짜 검기 담은 공격을 날리는 친구라니.
류 현은 반쯤 포기하는 심정으로 물었다. 새어나오는 한 숨은 억누르지 못했다.
“하아, 그래서 왜 그러셨습니까? 제 목숨이 탐났으면 병원으로 쳐들어오거나 방에서 잠복하셨으면 됐을 텐데.”
“에이, 날 뭘로 보고 친구를...잘못했어.”
히히 웃으며 대꾸하던 승하는 류 현이 눈을 흘기자 다시 시선을 떨구고는 입을 꽉 다물었다. 그 모습을 보며 류 현은 없던 두통이 생겨나는 기분이었다.
“...왜 그러셨습니까? 설마하니 장난친답시고...”
“장난? 에이, 나도 그런 장난은 막 안 쳐. 화낼 게 뻔한데. 조금 시험해 볼까하고...”
“시험...?”
류 현이 관심을 보이자 승하는 눈치를 살피며 손을 슬쩍 내리더니 설명했다.
“그게... 확 달라져 보여서.”
“...제가 말입니까?”
“응. 이주도 안 됐는데 확 달라져서 나타나니까. 헤헤, 호기심에 져버렸네.”
‘바뀐 게 티가 난다고? 내가?’
넉살 좋게 웃어넘기려는 태도를 지적할 여유도 없이 류 현의 머리는 바쁘게 돌아가는 중이었다. 그도 그럴게 승하가 지적한 부분은 전생과 현생을 통틀어 그 누구도 지적한 적이 없는 것이었으니까.
류 현의 능력은 겉보기에 단순해 보이지만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괴수 고기를 먹어서 마력양을 늘린다.’ 라고 정의한 1단계도 그가 그렇게 단순하게 정의했을 뿐, 그렇게 정한 류 현 본인조차 그게 다 일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1단계에서는 그것뿐일지 몰라도, 2단계, 그를 넘어서 3단계에 도달하게 되면 괴수 고기를 먹는 건 단순히 ‘먹어서 흡수한다.’라고 넘어갈 만한 일이 아니게 되니까.
류 현은 적절한 말을 찾아봤지만 결국 ‘편입시킨다.’정도로 만족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가 찾을 수 있는 말 중에서 그 기묘한 감각을 설명할 수 있는 말은 없었다. 아주 틀린 말도 아닌 것이, 경지가 진행되면 될수록 괴수고기를 먹을 때마다 단순히 마력량만 늘어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확장’되는 느낌이었으니까.
그것도 공간 자체가 확 늘어나는 느낌보다는 커다란 방 하나에 옆으로 셋방이 조금씩 늘어나는 그런 감각이었다.
어쨌든, 류 현의 능력은 저 자신도 확실하게 정의하지 못할 정도로 변화의 경계가 애매모한 것이었다. 경지가 어찌되었든 계속해서 마력양이 늘어나긴 하지만, 그 정도도 못 감출 류 현이 아니었다.
결국 경지가 높아진다고 해도 깨달음을 얻은 그 당시가 아닌 이상, 다른 플레이어들이 깨달음을 얻고 나서 겪는 변화에 비하면 그 스스로가 봐도 겉으로는 별 변화가 없는 그의 변화를 눈치 채는 건 보통일이 아니었다.
“...티 많이 납니까?”
“응? 어, 내가 보기에는 확 사람이 바뀐 그런 느낌인데. 아마 눈 가리고 누가 왔냐고 물어봤으면 못 알아봤을지도?”
“좀 더 자세히.”
“음...그러니까, 던전 들어가기 전에는 조금만 더 기다리면 되겠네. 라는 느낌이라면 지금은 당장 붙어도 되겠다. 그런 느낌?”
별로 유도신문을 한 것도 아닌데 본심을 술술 불어버리는 승하의 태도에 류 현은 질려버릴 것 같은 느낌이었지만, 그녀의 말에서 느낀 놀라움이 그를 억눌렀다.
‘그 정도로 명확하게 차이를 잡아낸다고? 이게 인간이야 짐승이야...’
“말씀하시는 걸 들어보니 다른 건 모르겠지만 방금 그 공격이 단순히 장난은 아니었다는 건 잘 알겠네요. 네, 아주 잘 알겠습니다.”
“야아, 닿기 전에 멈추려고 했거든? 검기만 거둬도 그냥 칼로는 생채기도 안 나면서.”
“그래서, 잘 하셨다는 겁니까?”
류 현이 밀어붙이자 승하는 찔끔하며 물러났다. 평소에도 그랬지만, 오늘 따라 그의 존댓말이 더욱 부담스러웠다.
“미안하다니까. 응? 사과의 의미로 부탁 한 가지 들어줄 테니까...응?”
응? 응? 거리며 무릎으로 슬금슬금 다가오는 그녀를 보며 류 현은 잠깐 생각에 빠졌다가 금세 현실로 되돌아왔다. 마침 그녀에게 부탁할까 하던 게 있긴 했다.
“부탁드릴 게 하나 있긴 합니다만...”
“어? 진짜? 뭔데?”
“어려운 건 아닙니다. 하루만 시간 내주시면 됩니다.”
류 현은 비어져 나오려는 웃음을 억눌렀다. 어렵지 않다고 말은 그렇게 했지만, 내용을 알면 그녀는 차라리 괴수 써는 걸 시키라고 소리칠 테니까.
***
일주일 후.
“안 어렵다더니. 완전 거짓말.”
“이게 뭐가 어렵습니까. 그냥 앉아만 있으면 되는데.”
“...이 사기꾼.”
일주일 전 부탁 수락을 얻어내면서 그가 한 예상은 정확하게 맞아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