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0화 〉탐식마(貪食魔)
제대로 된 요리는 고사하고 불을 피우는 것도 온 신경을 곤두세워야하는 상태로 이슬을 막아주는 지붕조차 없는 곳에서 노숙을 일주일 지낸 이가 가장 원하는 것을 무엇일까?
목욕과 잠!
누가 묻지 않았음에도 화련은 즉답하고 싶은 기분이었다. 그녀에게 그런 기분을 들게 만든 여성기자는 거의 둔기를 휘두르는 것처럼 마이크를 들이밀며 뭐라고 소리쳤다. 화련은 멍한 머리로 그게 무슨 말인지 인지하지 못했고, 그럴 생각도 없었다.
플레이어가 되고서 수 년 간의 던전 원정 중에서 가장 피곤했던 원정을 막 끝내고 나온 차였다. 언제나 처럼 사무실 건물에 있는 욕탕에 한 두어 시간 잠겨 있다가 나와서, 꾸벅꾸벅 졸다가 정산이 끝나면 집에 가서 내일 정오까지는 일어나지 않을 생각이었다.
다른 것은 그녀의 계획에 없었다. 사무실 건물 앞에 진을 치고 있는 기자들도, 여자의 마음은 알바 아니라는 듯이 상거지꼴을 하고 있는 자신에게 쏟아지는 플래시 세례도 계획에는 없었다.
그냥 다 엎어버리고 싶은 기분이었다.
그런 그녀 앞에 커다랗고 검은 뭔가가 막아섰을 때, 화련은 잠깐 동안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파악하지 못했다. 갑자기 어두워지자 더 졸려졌고, 그래서 짜증이 조금 수그러들었을 뿐이었다.
오른쪽 팔을 살짝 잡아당기는 손에 그제야 그녀는 정신을 차렸다. 손의 주인은 화련 못지않게 험한 꼴을 하고 있는 희란이었다.
“응?”
“더 이상 다가오시면 곤란합니다.”
희란의 불안한 표정을 보고나자 앞의 검은 덩어리가 뭐라고 말하고 있음이 느껴졌다. 경호원이라고 쓰고 용역업체 직원이라고 불러도 될 것 같은 꽤나 험악한 인상의 남자들이 벽처럼 앞을 가로막고 서있었다.
‘뭐지? 이 덩어리들은 왜 이러고 있어? 빚쟁이가 이렇게 해줄 리는 없고...모르겠다...졸려...’
던전 밖에 나오니 긴장이 풀려서 그런지 머리가 영 돌아가질 않았다. 눈을 뜨고 있어도 보는 것 같지가 않고, 뭘 들어도 말을 들은 것 같지도 않은 그런 상태. 말 그대로 눈뜬 채로 자고 있는 그런 상태였다.
그런 화련을 현실로 끌어들인 건 또 다른 손이었다. 정신이 반쯤 빠져있던 화련은 왼팔이 확 당겨지자 저도 모르게 딸려갔다가 두 박자 늦게 반응했다.
“뭐, 뭐야?”
“일단 자리를 피합시다.”
거지 왕초 꼴을 하고 있는 류 현은 평소랑 다를 것 없는 무덤덤한 태도로 두 여자를 거의 끌다시피 승합차로 이끌었다.
드르륵 탕! 차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화련의 기억은 끊어졌다.
***
점원이 내려놓고 간 콜라를 몇 모금 목으로 넘기고 나서 류 현은 덤덤하게 말했다. 호텔 라운지는 그녀가 무슨 조치를 취한 것인지 손님이라고는 보이질 않았다. 귀나 눈에 대해서 신경 쓸 필요가 없었다.
“따로 부탁드리지도 않았는데 차량이며 숙소까지 수배해 주시다니, 감사합니다.”
“아뇨. 다른 거 신경 안 쓰게 해 드린다고 한건 저니까요. 그저...”
“그저?”
서해란은 제 앞에 놓인 애꿎은 아메리카노만 빨대로 휘적거렸다. 눈앞의 남자는 달변도 뭣도 아닌데도 묘하게 말을 섞으면 말려들어가는 기분이었다. 힘의 차이가 극심하긴 하지만, 그는 아직 그 차이를 어필한 적이 없었다. 들추면 안 되는 죄인 마냥 아주 조심스럽게, 자신을 숨기는 행보를 계속해온 것이다.
그런 남자가 이번 원정 이후부터 정책을 바꾸겠다고 예고했으니, 떠보고 싶었다.
“기자들을 사전에 차단 못 했다고 화내실 줄 알았거든요. 다른 곳도 아니고 던전에서 나오자마자 사무실 앞에서...”
“뭐 해란 씨가 제 매니저도 아닌데 어떻게 그런 걸로 화내겠습니까. 조금 궁금하긴 했었습니다만.”
“네?”
“그 경호원들 하며, 차, 호텔 예약까지 다 예상하셨던 거 같은데 일부러 기자들과 만나게 한 후에 도움의 손길을 뻗으신 이유가 오는 내내 궁금하더군요.”
“아, 그건 죄송하게...”
류 현은 손을 내저었다.
“아뇨, 사과 듣자고 꺼낸 말이 아닙니다. 방금 전에 말씀드렸지만 해란 씨가 제 매니저도 아닌데 꼭 그렇게까지 할 의무가 있는 건 아니니까요. 저희가 언제 나올지 알 수도 없는 상황인데, 그럼 꽤 전부터 준비하셨다는 얘기고. 그런 노력을 들이고도 딴소리가 나올 여지를 남기신 이유가 궁금해서 말입니다. 제가 생각할 수 있는 이유는 생색내고 싶어서...정도인데, 생색내고 싶어 하실 분이면 진작에 그랬을 거 같아서요.”
류 현의 말을 들으며 해란은 속이 뜨끔 하는 기분이었다. 어마어마한 통찰력이나 달변은 없었지만, 방금 던전에서 나와서 목욕을 하고 내려온 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그는 또렷한 정신을 유지하고 있었다. 플레이어인 그녀였기에 더더욱 그의 평정이 놀라웠다.
던전에서 나온 플레이어들이 보이는 방만함이라고는 없었다. 술에 취한 것도 아니었고, 전투의 흥분을 떨쳐내지 못한 어수선함도 없었다. 던전에서 나온 게 아니라 그냥 관광지에 놀러온 투숙객이라고 해도 믿겠지.
폄하할 생각은 없었지만 그의 팀원들이 호텔에 도착하자마자 목욕 후에 저녁이고 뭐고 생략하고 곯아떨어진 것과는 비교되는 모습이었다. 그게 정상이었지만 눈앞에 이리 멀쩡하게 행동하는 이가 있으니 비교되어 보이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그녀는 지나치게 멀쩡해 보이는 그의 모습에 일말의 의구심마저 느꼈다.
‘설마 계측이 엉터리로 돼서 실제로는 블루 급이었다거나...’
제 스스로가 내놓았지만 터무니없는 망상이었다. 협회가 나서서 한 정밀 계측이었다. 모든 일에 100프로는 없겠지만, 다른 곳도 아니고 협회가 던전에 관해서는 누구보다 권위자여야만 하는 곳에서 그렇게 오차가 심하게 날정도로 대충 계측했을 리가 없는 것이다. 실수가 있더라도 그 정도 차이는 날 리가 없었다.
“이렇게 따로 자리를 만들고 싶었어요. 더불어 이번 기회에 발을 걸치고 있는 곳들 중에서 소식을 빼돌릴만한 곳도 파악해두고 싶었고요. 불쾌하셨다면 사과드리겠습니다.”
“딱히 불쾌하진 않았으니 사과하실 필요까진 없습니다만...찾으셨습니까? 저희 소식을 빼돌린 곳 말입니다. 안 그래도 사무실 문제 생각하면 골치가 아픈데...”
“네, 이렇게 해놓고 못 찾았다면 뵐 면목이 없죠. ‘예거즈’에요.”
해란은 대꾸하면서 일말을 기대를 가지고 류 현의 표정을 살폈다. ‘예거즈’라는 단어가 어떤 식으로든 그를 자극해 줄 거라는 기대에서였다. 그녀 본인도 기자들에게 흘러들어간 정보의 출처가 ‘예거즈’라는 걸 알았을 때 떨떠름함을 감출 수가 없었으니까.
어찌 보면 부외자인 그녀조차 ‘진짜 다 해먹고 싶어서 이렇게 나오는 건가?’라는 생각이 들 정도인데, 이래저래 엮인 게 많은 그라면 어떤 식으로든 간에 반응을 보이리라.
그리 생각했었다.
‘뭐야? 예상이라도 했다는 거야?’
하지만 가면을 뒤집어 쓴 것처럼 무표정을 고수하고 있는 류 현에게서는 어떤 감정의 기색조차 읽어낼 수가 없었다.
***
“으뜨뜻”
류 현은 기지개를 켜며 맑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따사로운 햇살이 이마를 더듬는 것 같은 감각에 그는 실없이 미소 지었다. 잠자리가 썩 편한 건 아니었지만, 근 이주 만에 푹 자고 일어났기에 미소가 절로 지어졌다.
말려 올라간 입가를 문지르며 류 현은 호텔 입구를 향해서 터덜터덜 걸어갔다.
류 현이 용잡이 팀원들이 묵고 있는 호텔에서 나오는 게 아니라 돌아가는 이유는, 던전에서 나온 어젯밤 그는 호텔에서 묵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해란과의 이야기를 마친 류 현은 그녀에게 병원으로 갈 차량을 수배해달라고 부탁했고, 떨떠름한 얼굴로 자신을 배웅하는 그녀를 뒤로 한 류 현은 곧바로 세아를 찾았다. 그리고는 그대로 병원에서 하룻밤을 묵은 것이다.
빈말로도 편한 잠자리라고 하긴 어려웠지만 세아가 외로워하는 기색을 내비치니 도저히 그냥 두고 호텔로 돌아올 수가 없었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동생에게 떼를 부렸던 게 부끄러워진 세아가 거의 쫓아내듯이 쉬러 가라고 해서 예정보다 빨리 나오게 되었지만.
그런 과정을 거쳐서 류 현은 지금 숙소로 돌아온 것이다.
‘방에 가서 다시 자기도 애매하고...팀원들은...내일 아침까지는 못 본다고 생각하는 게 낫겠지.’
자신이 굴리긴 했어도 류 현은 이번 원정에서 그녀들을 심하게 굴렸다고 자각하고 있다. 다른 팀 같으면 보조형 아티펙트를 둘둘 말고도 시선 끄는 게 전부인 용종 괴수를 마법사 둘이서 붙들어 놓으라고 했으니 지치지 않았다면 그게 이상한 일일 것이다. 체력적으로 지친 건 물론이고, 정신적 피로가 상당할 터.
맘 같아서는 그냥 휴가 주고 한 이주 동안은 먼저 연락 안하고 내버려둘 생각도 했지만, 어제 사무실 건물 앞에 진을 치고 있는 기자들을 보고서 생각을 바꿨다. 당장은 휴가를 줄 수가 없다. 정식으로 기사를 내기도 전에 정보를 흘려준 ‘예거즈’ 덕택에 소문을 제어하는 게 힘들어졌으니까.
‘‘예거즈’이새끼들은 조용하다 싶더니 대체 왜...아니, 검성이 그렇게 나갔는데 내부 정비가 아니라 밖으로 눈이 돌아가나?’
아마 아무런 조치 없이 그녀들에게 휴가를 줬다간, 기자회견은커녕 유능한 변호사를 소개시켜줘야 할 것이다. 연예인들에게 따라붙는 파파라치 보다 더 지독한 게 플레이어를 대상으로 하는 파파라치들이니까. 이 작자들은 합법 불법 같은 걸 따지지 않는다.
같이 모여 있는 다고해서 없는 방법이 생겨나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기자들이 접근하는 걸 막기는 쉬울 것이다.
‘이게 무슨 팔자에도 없는 뻘 짓이야 진짜... 맘 같아서는 다 까발리고 내가 악룡 잡아줄 테니까 나 좀 냅두라고 하고 싶다니까.’
오죽하면 그런 생각마저 들었다.
‘개소리지. 그딴 소리 했다간 정신병원 직행 루트야. 지랄 말고 화련 씨한테 뭐라고 변명할 지나 생각해보자.’
요즘 가면 갈수록 화련의 눈초리가 매서워지는 것이, 이유를 묻지 않아도 왜 그러는지 짐작이 갈 정도였다. 그녀는 류 현이 살살이풀이나 샌 드래곤을 채찍으로 가지고 놀 때 뚫어져라 그를 쳐다봤다. 이 쯤 되면 둔한 류 현도 모를 수가 없었다.
‘이젠 확신하고 있겠지. 내가 가진 정보가 조금 앞서나간 수준이 아니라는 걸.’
회귀 이후 그를 줄곧 괴롭혀 온 문제였다. 류 현이 가진 정보는 힘이다. 그가 알고 있는 것과는 미래가 점점 바뀌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가진 괴수에 대한, 던전에 대한 정보는 굉장한 가치를 가지고 있다.
이 정보들을 틀어쥐고 장사를 시작하면 아마 회장소리 들을 정도의 부를 쌓을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류 현은 그러지 않았다. 그래서야 의미가 없으니까.
그의 목표는 생존이다. 세아의, 자신의. 더 나아가서 둘이 생활을 영위할 수 있는 인류 문명이 유지될 수 있는 수준의 인류의 생존. 그가 이전 생에서 배운 건 아무리 날고 기어도 혼자서 하는 일에는 한계가 있다는 것이었다.
이전 생에서 류 현이 아무리 열심히 네임드 괴수들을 쳐 죽여도 인류의 쇠퇴도는 수직상승 했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지도자라는 작자들은 계산기 위의 숫자와 현실을 구분하지 못했고, 네임드 괴수에게 위협적인 적은 류 현 뿐이었다. 한 대 똘똘 뭉쳐서 대항해도 모자랄 적들을 두고 내분을 벌인 거나 다름없었다.
그러니 적장의 목을 아무리 쳐날려 버려도 전쟁에서는 지는 상황이 반복되는 것이다.
류 현은 다가올 3차 ‘대소환’을 이겨내기 위해서는 두 가지가 필요하다고 결론 내렸다. 인류의 선봉장이라는, 인류의 힘을 모을 수 있는 상징성과 그가 네임드 괴수를 쳐 죽이러 달려갈 동안 전선을 유지해 줄 인원.
혼자 강해져서는 의미가 없다. 그가 가진 정보가 힘이라면 그것들이 빨리 풀릴수록 인류가 3차 ‘대소환’에 저항할 힘도 더 쌓일 것이다. 송장목 해독 레시피를 협회에 제공한 건 그래서였고, 살살이풀도 곧 그렇게 풀 것이다.
하지만 류 현은 이에 대한 변명은 준비해두지 못했다. 이 정보를 어디서 얻었는가에 대한 질문이 나올 거라고 생각 못한 건 아니었지만, 제 스스로도 납득시키기 어려운 대답 외에는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있지도 않은 뒷배를 세우기에는 거짓말에 자신이 없었다. 사실대로 말하자니 증명이 곤란했다. 그가 기억하는 것들은 죄다 던전에 관련된 것들뿐이고, 검성의 죽음이나 3차 ‘대소환’발발 같은 게 아니라면 결국 던전에 들어가서 확인해야하는 것들이 대부분이다. 그것도 퍼플 이상의 것뿐이다.
즉 증명을 위해서는 그의 말을 들은 자도 같이 목숨 걸고 던전에 들어 가야하는데, 가족에게 들었어도 헛소리 하지 말라고 등짝을 후려칠 소리를 목숨 걸고 증명에 참여해 줄 이가 어디 있단 말인가?
자신의 성장력이나 사냥 숙련도로 증명할 수도 있겠지만, 능력을 설명하는 부분에서 미친놈 취급받을 가능성이 더 높았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류 현은 이전 생에서 가족 이외에 신뢰관계 라고 할 만한 관계를 맺었던 적이 없었다. 그렇게 될 뻔했던 남자는 그의 실수로 죽어버렸다.
이전 생에서 용잡이 팀은 동료이긴 했지만, 인간적 교감을 통해서 맺어진 관계가 아니라 악룡이라는 원수를 중심으로 연결된 관계였다.
그렇게 시작했어도 교감이 깊어지고 신뢰가 쌓이는 것도 가능하겠지만, 용잡이 팀원들 간에는 그런 기류가 없진 않았지만, 그 당시 류 현은 그런 것에 관심도 없었고 그가 그 유대에 끌려들어갈 새도 없이 모두 죽었다.
누구도 제대로 믿어본 적이 없는 작자가 누군가에게 신뢰를 강요하는 것만큼 웃긴 일도 없을 것이다. 적어도 그가 생각하기에는 그랬다.
‘사서 고생이지 진짜...’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동안 그의 발 끝에 회전문이 걸렸다. 류 현은 쓰게 웃으며 호텔 라운지로 들어섰다.
“이제와?”
그러자 생각지도 못한 얼굴이 그를 반겨왔다. 검성, 나승하였다. 그녀는 언제나 처럼 추리닝 차림으로 나른하게 미소 짓고 있었다. 휘적휘적 다가오는 그녀를 보며 류 현은 반가움을 느꼈고, 그 사실에 조금 놀랐다.
‘그 인간 말대로 내 취향이 진짜 정상은 아닌가 보다. 저런 인간이 친구라고 반가운 걸 보면...’
승하가 네 다섯 걸음 거리까지 접근 했을 때였다.
쉭! 섬뜩한 궤적을 그리며 검격이 날아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