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108화 〉탐식마(貪食魔) (108/429)



〈 108화 〉탐식마(貪食魔)

플레이어의 ‘깨달음’이라는 건 불합리함 그 자체다. 조건을 알 수 없는 건 둘째 치고, 다음 단계로 가는 조건이 능력과 연관성이 없거나, 화련처럼 첫 벽이 너무 높아서 지지부진  채로 체념하게 되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거기에 그 때조차 마음대로 정할 수 없다는 것도 문제였다. 대부분의 경우에는 크게 곤란할  없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었다.


류 현이 느끼고 있는 곤혹스러움은 그런 이유로 인한 것이었다. 다섯 마리의  드래곤의 브레스에 직격당하면서 류 현은 3단계로 넘어가는 ‘깨달음’을 얻었다. 무협지에서나 나오는 시간이 현격하게 느려지고, 적의 솜털이 서는 것까지 보이는 그런 현상이 아니라,

‘크윽...’


쏟아지는 정보의 형태로 말이다.

화련과 그의 차이점이라면 그는  현상을 이미 겪어본 바가 있다는 것과, 자신의 역량으로  소화해낼 수 없는 복잡하면서 방대한 정보를 받아내야 했던 화련과 달리  현은 하나의 욕구를, 그 대상이 되어 정면에서 받아내는 것이 아님에도 정신이 짜부라질 것 같은 거대한 욕구를 받아내야만 했다.

[공복]

그를 짓누르고 있는 거대한 욕구의 정체는 그것이었다. 단순히 배가 주리고, 속이 따끔거리는 정도가 아니라 정신을 갉아먹는  같은 끝에 달한 기갈!

아무리 샌 드래곤의 브레스에 직격당해도, 인지를 하고 대비를 한다면  일 없는 그라지만 전투 중의 뜻하지 않은 마비 상태는 치명적이었다. 그가 아닌 그의 동료들에게.

‘에너지 드레인은 대충 넘어가지던데  이건  되는 건데?’


역시 두 번째라서 그런지, 조금이라도 태세를 느슨히 하면 정신을 집어삼킬 것 같은 거대한 욕구 속에서 류 현은 투덜거리는  정도는  수 있었다. 그것뿐이라는 것이 문제였지만. 아직 여유가 있는 것 같은 투덜거림과는 달리 류 현은  하나 꿈쩍도  수 없는 상태였다.

조금이라도 방심하면 정신이 그대로 이 거대한 기갈에 잡아먹힐 것만 같았다. 그의 등허리로 식은땀에 쏟아졌지만, 곧바로 흔적도 없이 증발했다. 그를 막처럼 둘러싼 뒤엉킨 브레스의 열기가 틈만 나면 그의 몸을 범하려고 달려들었다.


후욱!  현이 의식하지도 못하는 사이에 열린 입으로 거친 숨이 새어나왔다. 날숨만 새어나온 것이 아니라 시커먼 안개도 함께였다.


에너지 드레인!  주인이 느끼고 있는 기갈이 중대한 위험이라는 듯이 그도 모르는 사이에 그 탐욕의 안개가 류 현의 온몸에서 스며 나오기 시작했다. 탐욕의 안개는 제 주인이 명하기도 전에 그의 몸 주변을 둘러싸고, 안으로 비집고 들어오려는 마력 덩어리-브레스-들을 갉아먹기 시작했다.


성난 벌떼처럼 일어난 탐욕의 안개가, 개미떼가 사마귀를 산채로 분해하는 것처럼 휘몰아치는 마력 폭풍을 사정없이 갉아내었다. 소리조차 없었기에 더욱 소름끼치는 광경이었지만, 목격자는 없었다.

 성난 기세에 안에 있는 것이 무엇이든 녹여버릴 것 같던 마력의 폭풍이 사그라지기 시작했다. 실제로는 사그라진 것이 아니라 갉아 먹힌 것이었지만, 내부 사정을 알 수 없는 구경꾼들에게는 그리 보였을 것이다.


여기까지 불과 수십 여초.  현이 정신을 되돌리기에는 지나치게 짧은 시간이었다.

휘어잡아야할  현이 정신을 못 차리자 탐욕의 안개가 맹위를 떨쳤다. 지금까지 류 현이 사용할 때는 다르게 그 탐욕스러움이 여과 없이 드러났다. 끝이 보이지 않는 지저 같은 탐욕에 두 여자는 물론이고, 류 현을 둘러싸고 떠있던 여섯 마리의 드래곤 마저 멈칫했다.


“마스터...?”


흘려들어도 이상하지 않을 작은 목소리가 류 현을 현실로 끌어당겼다.


‘젠장  이렇게 됐네.’


그녀들을 돌아볼 것도 없이 어떻게 되었을지 대충 짐작이 갔다. 괴수놈들이 그를 배려해서 멈춰서있는 건 아닐 테니, 있는 대로 에너지 드레인을 전개했을 거라고 류 현은 짐작했다. 이전에도 3단계에 올라서면서 꽤 화려하게 날뛰었었다. 아마 3차 ‘대소환’이 일어난 상태가 아니었으면, 다짜고짜 민가를 때려 부순 미치광이라고 쫓겼을 것이다.


자신의 주변에서 일렁거리는 탐욕의 안개를 거둬들인 류 현은 볼 것도 없이, 자신과 제일 가까이 떠있는 보스몹에게로 달려들었다.

‘일단 너부터 족치고 생각해야겠다!’


아니, 달려들려고 했다.


“어?”


류 현이 몸을 앞으로 날리려는 순간, 의식이 끊기기 전만해도 발밑에서 느껴지던 보이지 않는 바닥이 밟히지 않았다. 다음 순간 쑥하고 발밑이 내려앉았다.

‘젠장, 설마 마법 걸린 것도 다 흡수한 건가? 씨발, 하필이면!’

새삼 자신의 먹성에 욕지거리가 튀어나왔다. 이대로 추락한다 한 들 부상당할 위험은 없었다. 남산 타워에서 목부터 떨어져도 찌뿌둥하다고 하고 말 정도다.

문제는 이 대치구도가 깨진다면 퇴각해야한다는 것!

류 현 본인의 문제가 아니라 팀원들의 체력문제다. 지금까지  드래곤이 여섯 마리 이상 들러붙지 못하게 견제하는 것만으로도 그녀들은 체력을 꽤나 소진했을 것이다. 이대로 대치구도가 깨지고  드래곤 일곱 마리 대 용잡이 팀 구도가 되면 그녀들은 버티지 못할 것이다.

지금 싸움이 되는 것도 어디까지나, 용잡이 팀 대  드래곤 일곱 마리가 아니라 류 현 대 샌 드래곤 여섯 마리였기에 가능한 일이었으니까.


보스를 제외한 다섯 마리는 그에게는 위협은커녕 정신 놓고 있는  아니라면, 긁힌 상처 이상을 주는 게 불가능한 잔챙이였지만, 그녀들을 타겟으로 삼으면 골치 아파진다. 이번 던전 사냥의 일등공신인 채찍을 버려가면서 까지 보스몹을 기습했기에 만들 수 있었던 대치 구도였다.

기습 한 번으로 호위였던 여덟 마리 중 두 마리가 우두머리를 감싸느라 저항도 못해보고 참살 당했다. 호되게 당했으니 두 번은 없을 것이다. 필요한 채찍도 없었다. 하나 더 만들기에는 시간이 부족했었다.


 이상의 기습은 불가. 퇴각하면 훨씬 지루하고 짜증나게 싸워야 할 터.

류 현이 막 다시 깨우친 ‘강림’까지 고려대상에 두려던  때였다.

‘...지금 쓰면 변명도  하는데.’

우웅! 주변대기가 진동하는 듯하다가, 갑자기 밑 없이  꺼져 들어가던 발밑에 발판이 생겨났다. 당연히 류 현은 그 발판을 볼 수가 없었다. 화련이 만든 것이었으니까.

발판의 존재를 느끼자마자 류 현은 뒤돌아보지 않고 앞으로 몸을 날렸다. 이 던전의 주인을 향해서!

[캬아악!]


갑작스러운 돌격에 놈이 당황하며 거리를 벌리려고 했지만, 류 현이 거리를 좁히는 것이 훨씬 빨랐다. 손을 뻗으면 닿을 것 같은 거리까지 다가가는데 성공하자,  현은 지체 없이 에너지 드레인을 펼쳤다.


평소처럼 두 발이나 두 손이 국한시키지 않고 온몸을 감싸듯이! 방금 전처럼 탐욕의 안개가 폭발적으로 뿜어져 나왔다. 그것만으로 눈에 보이는 효과가 있었던 건 아니었다. 잠깐의 멈칫거림.

하지만 그 정도도 류 현에게는 넘치다 못해 충분한 틈이었다.


푸욱!

우두머리의 가슴팍에 매달리는 데 성공한  현은 그대로 왼손을  가슴팍에 쑤셔넣었다. 다른  드래곤들과 달리 붉고 뱀보다는 악어에 가까워 보이는 비늘과 겉가죽이 두부 마냥 뚫렸다.

[오오옹!]

샌 드래곤 몸 전체로 보면 치명상까지는 아니었지만, 그에게는 무생물이든 생물이든 치명적으로 작용하는 기술이 있었다.

에너지 드레인! 그녀들에게 알려준 것과 달리 단순히 에너지를 흡수하는 것이 아니라 생기  자체를 흡수하는, 그 악몽 같은 능력이 발동된 상태였다. 우두머리 샌 드래곤이 발작하는 것처럼 몸을 뒤챘다.


하지만 이미 놈의 몸에 왼손을 박아 넣은 류 현은 요지부동이었다. 뒤늦게 당황한 다섯 마리 샌 드래곤들이 몰려들었지만, 방금  상황처럼 류 현의 떼어내기에는 우두머리의 움직임이 너무 사나웠다. 주변을 둘러싼 샌 드래곤들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자,  현은 고통스럽다는 듯이 몸을 비트는 놈을 보며 사납게 미소 지었다.


“덕분에 나가서 변명하기도 곤란해졌어. 답례로 넌 제일 나중에  쳐주마.”


 현은 그리 말하고는 놈의 몸에 박힌 왼손을 축으로 한 바퀴를 돌았다.  오른 손으로 위쪽 비늘을 움켜쥔 류 현은 박고 있던 왼손을  뽑아내고는, 그대로 암벽등반을 하는 것처럼 놈의 몸을 오르기 시작했다.


발광하는 움직임은 여전했기에, 암벽등반이 아니라 요동치는 롤러코스터 위를 돌아다니는 것에 가까웠지만,  현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슥슥 올라가더니 놈의 어깨를 나고  뒤로 넘어갔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우두머리가 발광을 멈추고 부하들을 불러들였지만, 등판에 매달린  현의 막기에는 이미 늦은 상태였다.

부욱! 지이익! 날개 죽지에 걸터앉은 곧바로 류 현은 양 손을 양 날개 피막을 향해서 내질렀다. 피막만 따로 가공해도 가죽 갑옷으로 쓰고도 남을 내구도를 가지고 있었지만, 에너지 드레인을 펼치고 있는 류 현의 손속 앞에서는 창호지나 다름없었다. 피막에 구멍이 뚫리자, 그의 주먹에 일렁거리던 탐욕의 안개가 미쳐 날뛰기 시작했다.


마른 낙엽이 타들어가는 것처럼 검은 안개에 닿은 피막이 쪼그라들기 시작했다. 주먹만한 구멍이 순식간에  현의 상체보다 더 크게 벌어졌다.  영향은 곧바로 나타났다. 우두머리의 의지와는 별개로 놈의 몸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오오옹!]


죽음을 직감한 우두머리가 서글픈 울음을 토해냈지만, 류 현은 그런 것에 관심이 없었다. 놈이  이상 떠있지 못하자 류 현은 그대로 날개에 감고 있던 다리를 풀고 훌쩍 뛰어올랐다. 쿠웅! 곧바로 화련의 보조가 뒤따랐음은 말할 것도 없었다.


풍선의 기분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은 움직임으로 류 현은 가장 가까이 있던  드래곤의 뒷목에 올라탔다. 추락하는 우두머리에 정신이 쏠려있던 놈은 류 현이 올라탔음에도 제대로 반응하지 못했다. 놈에게 주의를 주거나, 도움을 줄 놈들도 주변에 없었다. 우두머리의 추락에 놈들은 우루루 지상으로 내려섰으니까.


류 현은 이 틈을 마음껏 즐길 생각이었다. ‘가방’을 조작해서 단창 하나를 꺼낸 류 현은 단창에 마력을 밀어 넣었다.


부우웅! 단창이 황금빛과 함께 진동하기 시작하자, 류 현은 이를 악물고 집중력을 끌어올렸다. 단창을 갉아먹지 않게 조심하며, 그는 천천히 탐욕의 안개를 단창 위에 덮어씌웠다.

‘전생에서는  것도 모자라서 실험할 여유가 없었지만...’


지금은 사양할 이유가 없다. 아직 그가 기억하는 수준이 아니긴 해도 ‘브류나크’의 제작자가 그의 편이었으니까. 대금을 거부하고 실험만 해달라고 부탁할 정도다.

류 현은 그대로 단창을 내질렀다.

푸욱! 부우웅! [캬아아악!]

‘브류나크’라는 위명이 아깝지 않게 단창은 거의 끄트머리만 남기고 거의 다 들어갔다. 기도를 찔린 샌 드래곤이 피 섞인 비명을 내질렀지만, 류 현의 관심사는 그런 것이 아니었다.

‘에너지 드레인을 너무 억눌렀나? 상쇄된 건가?’

그의 의문에 응하듯 창에 꽂힌 곳을 기점으로 비늘이 눈에 띄게 메말라가기 시작하더니,

[캬악!][컥컥!] 피를 토해가며 기운차게 소리를 꽥꽥 지르던  드래곤이 목이 막힌 것처럼 켁켁거리기 시작했다. 눈에 보이진 않았지만 류 현은 놈의 기도 안이 어떤 꼴일지 눈에 선했다. 공기로 가득한 공중에 뜬 채로 질식해가는 샌 드래곤의 모습에 류 현은 환희를 느꼈다.


‘먹히는 군! 보통은 에너지 드레인에 잡아먹히던데 미완성이라도 ‘브류나크’라는 건가.’

삐죽 튀어나온 단창의 끝을 움켜쥔 류 현은 다시금 마력을 밀어 넣었다. ‘브류나크’는 단순히 꽂혀서 출혈을 내는 게 끝인 그런 물건이 아니었다.


부우우웅!  현의 마력에 감응하듯 단창이 미친 듯이 진동했다. 무한히  강해질 것 같던 단창의 진동은  현이 손을 놓자마자,

뻐어엉! 폭발하며 황금빛 분진을 흩날렸다.  빛의 입자를 바라보며 류 현은 속으로 휘파람을 불었다. 그는  분진이 뭘 의미하는 지 알고 있었다.


‘벌써 이것도 구현했어? 진짜 물건은 물건이네. 붙잡혀서 공장 돌리게 안하고 연구만 계속 시키면, 나중에 아지다하카도 뚫는 거 아냐?’

괴수의 처리를 곤란하게 만드는 쉴드의 순간적인 무력화! 쉴드를 제하고도 괴수의 방어력은 상당한 수준이지만, 두 개의 방어력 중 하나가 없애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일이었다. 강산의 ‘브류나크’ 이외에는 비슷한 수준도 흉내 내지 못했으니까!

등장하는 괴수의 수준이 높아지면서 무력화는 약화로, 뒤로 갈수록 약화 시간도 줄어들었지만 류 현은  정도로 ‘브류나크’의 효용을 폄하할 생각은 없었다. 그가 봤던 ‘브류나크’의 마지막 버전은 아지다하카의 쉴드를 뚫진 못했지만, 그 악룡이 신경을 쓸 정도로 쉴드를 중화시키는데 성공했었으니까.


그리고 지금 그가 상대하고 있는 건 퍼플 던전을  벗어난 수준의 괴수들이다. 완벽한 무력화까지는 아니어도 지금 그가 올라탄 놈의 쉴드는 없는 것과 다름없는 수준이 되기에는 충분했다.


 현은 ‘가방’에서 도끼를,  어깨만한 너비를 가진 양날 도끼를 끄집어내었다.  드래곤의 목을 휘감은 두 다리에 힘을 꽉  그는,


퍼억! 있는 힘껏 도끼를 내려쳤다. 탐욕의 안개에 감싸인 도낏날에 비늘이 부러져나가고, 가죽이 찢어지며 붉은 속살이 입을 벌렸다. 검은 안개에 노출된 상처부위가 썩어 들어가는 것처럼 살이 말려들어갔다.


푸홧! 퍼억! 용혈이 솟구치며 류 현의 얼굴을 때렸지만, 그는 개의치 않고 도끼를 사정없이 내려쳤다. 두 번째 도끼질만에 목뼈가 드러났다. 류 현은 허옇게 드러난 목뼈를 별 감흥 없이 내려 보며 도끼를 끌어당겼다.
[캬르륵][커어억!] 샌 드래곤의 몸이 발작하는 것처럼 움찔거렸지만, 그건 류 현이 가한 폭력에 대한 저항이 아닌 단말마와 같은 움찔거림이었다.  현이 다섯 번째 도끼질을 가하자,


퍼억! 목뼈와 함께 숨통이 끊어진 샌 드래곤의 몸이 추락하기 시작했다. 류 현은 미련 없이 도끼를 내버리고 다시 허공으로 훌쩍 뛰어올랐다. 우웅! 화련의 ‘공간’이 기다렸다는 듯이 그를 감싸 안았다.

쿠웅! 추락하기까지 과정이 무색하게, 지상과의 충돌은 격렬했다.

날개를 잃은 우두머리를 돌보느라 정신이 팔려있던 샌 드래곤들의 시선이 하늘을 향했다. 그들에 비하면 미약하다 못해 덧없어 보이기까지 한 작은 인간에게 다섯 마리 용의 시선이 몰렸다.

동포를 잃은 분노에 이글거리고 있는  눈동자들을 마주한  현은 콧방귀를 뀌더니 손을 까딱였다.

“너희  죽일 건데 그렇게 분하다는 듯이 봐서 뭐 어쩌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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