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8화 〉탐식마(貪食魔)
플레이어의 ‘깨달음’이라는 건 불합리함 그 자체다. 조건을 알 수 없는 건 둘째 치고, 다음 단계로 가는 조건이 능력과 연관성이 없거나, 화련처럼 첫 벽이 너무 높아서 지지부진 한 채로 체념하게 되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거기에 그 때조차 마음대로 정할 수 없다는 것도 문제였다. 대부분의 경우에는 크게 곤란할 것 없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었다.
류 현이 느끼고 있는 곤혹스러움은 그런 이유로 인한 것이었다. 다섯 마리의 샌 드래곤의 브레스에 직격당하면서 류 현은 3단계로 넘어가는 ‘깨달음’을 얻었다. 무협지에서나 나오는 시간이 현격하게 느려지고, 적의 솜털이 서는 것까지 보이는 그런 현상이 아니라,
‘크윽...’
쏟아지는 정보의 형태로 말이다.
화련과 그의 차이점이라면 그는 이 현상을 이미 겪어본 바가 있다는 것과, 자신의 역량으로 다 소화해낼 수 없는 복잡하면서 방대한 정보를 받아내야 했던 화련과 달리 류 현은 하나의 욕구를, 그 대상이 되어 정면에서 받아내는 것이 아님에도 정신이 짜부라질 것 같은 거대한 욕구를 받아내야만 했다.
[공복]
그를 짓누르고 있는 거대한 욕구의 정체는 그것이었다. 단순히 배가 주리고, 속이 따끔거리는 정도가 아니라 정신을 갉아먹는 것 같은 끝에 달한 기갈!
아무리 샌 드래곤의 브레스에 직격당해도, 인지를 하고 대비를 한다면 별 일 없는 그라지만 전투 중의 뜻하지 않은 마비 상태는 치명적이었다. 그가 아닌 그의 동료들에게.
‘에너지 드레인은 대충 넘어가지던데 왜 이건 안 되는 건데?’
역시 두 번째라서 그런지, 조금이라도 태세를 느슨히 하면 정신을 집어삼킬 것 같은 거대한 욕구 속에서 류 현은 투덜거리는 것 정도는 할 수 있었다. 그것뿐이라는 것이 문제였지만. 아직 여유가 있는 것 같은 투덜거림과는 달리 류 현은 손 하나 꿈쩍도 할 수 없는 상태였다.
조금이라도 방심하면 정신이 그대로 이 거대한 기갈에 잡아먹힐 것만 같았다. 그의 등허리로 식은땀에 쏟아졌지만, 곧바로 흔적도 없이 증발했다. 그를 막처럼 둘러싼 뒤엉킨 브레스의 열기가 틈만 나면 그의 몸을 범하려고 달려들었다.
후욱! 류 현이 의식하지도 못하는 사이에 열린 입으로 거친 숨이 새어나왔다. 날숨만 새어나온 것이 아니라 시커먼 안개도 함께였다.
에너지 드레인! 제 주인이 느끼고 있는 기갈이 중대한 위험이라는 듯이 그도 모르는 사이에 그 탐욕의 안개가 류 현의 온몸에서 스며 나오기 시작했다. 탐욕의 안개는 제 주인이 명하기도 전에 그의 몸 주변을 둘러싸고, 안으로 비집고 들어오려는 마력 덩어리-브레스-들을 갉아먹기 시작했다.
성난 벌떼처럼 일어난 탐욕의 안개가, 개미떼가 사마귀를 산채로 분해하는 것처럼 휘몰아치는 마력 폭풍을 사정없이 갉아내었다. 소리조차 없었기에 더욱 소름끼치는 광경이었지만, 목격자는 없었다.
그 성난 기세에 안에 있는 것이 무엇이든 녹여버릴 것 같던 마력의 폭풍이 사그라지기 시작했다. 실제로는 사그라진 것이 아니라 갉아 먹힌 것이었지만, 내부 사정을 알 수 없는 구경꾼들에게는 그리 보였을 것이다.
여기까지 불과 수십 여초. 류 현이 정신을 되돌리기에는 지나치게 짧은 시간이었다.
휘어잡아야할 류 현이 정신을 못 차리자 탐욕의 안개가 맹위를 떨쳤다. 지금까지 류 현이 사용할 때는 다르게 그 탐욕스러움이 여과 없이 드러났다. 끝이 보이지 않는 지저 같은 탐욕에 두 여자는 물론이고, 류 현을 둘러싸고 떠있던 여섯 마리의 드래곤 마저 멈칫했다.
“마스터...?”
흘려들어도 이상하지 않을 작은 목소리가 류 현을 현실로 끌어당겼다.
‘젠장 또 이렇게 됐네.’
그녀들을 돌아볼 것도 없이 어떻게 되었을지 대충 짐작이 갔다. 괴수놈들이 그를 배려해서 멈춰서있는 건 아닐 테니, 있는 대로 에너지 드레인을 전개했을 거라고 류 현은 짐작했다. 이전에도 3단계에 올라서면서 꽤 화려하게 날뛰었었다. 아마 3차 ‘대소환’이 일어난 상태가 아니었으면, 다짜고짜 민가를 때려 부순 미치광이라고 쫓겼을 것이다.
자신의 주변에서 일렁거리는 탐욕의 안개를 거둬들인 류 현은 볼 것도 없이, 자신과 제일 가까이 떠있는 보스몹에게로 달려들었다.
‘일단 너부터 족치고 생각해야겠다!’
아니, 달려들려고 했다.
“어?”
류 현이 몸을 앞으로 날리려는 순간, 의식이 끊기기 전만해도 발밑에서 느껴지던 보이지 않는 바닥이 밟히지 않았다. 다음 순간 쑥하고 발밑이 내려앉았다.
‘젠장, 설마 마법 걸린 것도 다 흡수한 건가? 씨발, 하필이면!’
새삼 자신의 먹성에 욕지거리가 튀어나왔다. 이대로 추락한다 한 들 부상당할 위험은 없었다. 남산 타워에서 목부터 떨어져도 찌뿌둥하다고 하고 말 정도다.
문제는 이 대치구도가 깨진다면 퇴각해야한다는 것!
류 현 본인의 문제가 아니라 팀원들의 체력문제다. 지금까지 샌 드래곤이 여섯 마리 이상 들러붙지 못하게 견제하는 것만으로도 그녀들은 체력을 꽤나 소진했을 것이다. 이대로 대치구도가 깨지고 샌 드래곤 일곱 마리 대 용잡이 팀 구도가 되면 그녀들은 버티지 못할 것이다.
지금 싸움이 되는 것도 어디까지나, 용잡이 팀 대 샌 드래곤 일곱 마리가 아니라 류 현 대 샌 드래곤 여섯 마리였기에 가능한 일이었으니까.
보스를 제외한 다섯 마리는 그에게는 위협은커녕 정신 놓고 있는 게 아니라면, 긁힌 상처 이상을 주는 게 불가능한 잔챙이였지만, 그녀들을 타겟으로 삼으면 골치 아파진다. 이번 던전 사냥의 일등공신인 채찍을 버려가면서 까지 보스몹을 기습했기에 만들 수 있었던 대치 구도였다.
기습 한 번으로 호위였던 여덟 마리 중 두 마리가 우두머리를 감싸느라 저항도 못해보고 참살 당했다. 호되게 당했으니 두 번은 없을 것이다. 필요한 채찍도 없었다. 하나 더 만들기에는 시간이 부족했었다.
더 이상의 기습은 불가. 퇴각하면 훨씬 지루하고 짜증나게 싸워야 할 터.
류 현이 막 다시 깨우친 ‘강림’까지 고려대상에 두려던 그 때였다.
‘...지금 쓰면 변명도 못 하는데.’
우웅! 주변대기가 진동하는 듯하다가, 갑자기 밑 없이 쑥 꺼져 들어가던 발밑에 발판이 생겨났다. 당연히 류 현은 그 발판을 볼 수가 없었다. 화련이 만든 것이었으니까.
발판의 존재를 느끼자마자 류 현은 뒤돌아보지 않고 앞으로 몸을 날렸다. 이 던전의 주인을 향해서!
[캬아악!]
갑작스러운 돌격에 놈이 당황하며 거리를 벌리려고 했지만, 류 현이 거리를 좁히는 것이 훨씬 빨랐다. 손을 뻗으면 닿을 것 같은 거리까지 다가가는데 성공하자, 류 현은 지체 없이 에너지 드레인을 펼쳤다.
평소처럼 두 발이나 두 손이 국한시키지 않고 온몸을 감싸듯이! 방금 전처럼 탐욕의 안개가 폭발적으로 뿜어져 나왔다. 그것만으로 눈에 보이는 효과가 있었던 건 아니었다. 잠깐의 멈칫거림.
하지만 그 정도도 류 현에게는 넘치다 못해 충분한 틈이었다.
푸욱!
우두머리의 가슴팍에 매달리는 데 성공한 류 현은 그대로 왼손을 그 가슴팍에 쑤셔넣었다. 다른 샌 드래곤들과 달리 붉고 뱀보다는 악어에 가까워 보이는 비늘과 겉가죽이 두부 마냥 뚫렸다.
[오오옹!]
샌 드래곤 몸 전체로 보면 치명상까지는 아니었지만, 그에게는 무생물이든 생물이든 치명적으로 작용하는 기술이 있었다.
에너지 드레인! 그녀들에게 알려준 것과 달리 단순히 에너지를 흡수하는 것이 아니라 생기 그 자체를 흡수하는, 그 악몽 같은 능력이 발동된 상태였다. 우두머리 샌 드래곤이 발작하는 것처럼 몸을 뒤챘다.
하지만 이미 놈의 몸에 왼손을 박아 넣은 류 현은 요지부동이었다. 뒤늦게 당황한 다섯 마리 샌 드래곤들이 몰려들었지만, 방금 전 상황처럼 류 현의 떼어내기에는 우두머리의 움직임이 너무 사나웠다. 주변을 둘러싼 샌 드래곤들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자, 류 현은 고통스럽다는 듯이 몸을 비트는 놈을 보며 사납게 미소 지었다.
“덕분에 나가서 변명하기도 곤란해졌어. 답례로 넌 제일 나중에 족 쳐주마.”
류 현은 그리 말하고는 놈의 몸에 박힌 왼손을 축으로 한 바퀴를 돌았다. 빈 오른 손으로 위쪽 비늘을 움켜쥔 류 현은 박고 있던 왼손을 쑥 뽑아내고는, 그대로 암벽등반을 하는 것처럼 놈의 몸을 오르기 시작했다.
발광하는 움직임은 여전했기에, 암벽등반이 아니라 요동치는 롤러코스터 위를 돌아다니는 것에 가까웠지만, 류 현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슥슥 올라가더니 놈의 어깨를 나고 등 뒤로 넘어갔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우두머리가 발광을 멈추고 부하들을 불러들였지만, 등판에 매달린 류 현의 막기에는 이미 늦은 상태였다.
부욱! 지이익! 날개 죽지에 걸터앉은 곧바로 류 현은 양 손을 양 날개 피막을 향해서 내질렀다. 피막만 따로 가공해도 가죽 갑옷으로 쓰고도 남을 내구도를 가지고 있었지만, 에너지 드레인을 펼치고 있는 류 현의 손속 앞에서는 창호지나 다름없었다. 피막에 구멍이 뚫리자, 그의 주먹에 일렁거리던 탐욕의 안개가 미쳐 날뛰기 시작했다.
마른 낙엽이 타들어가는 것처럼 검은 안개에 닿은 피막이 쪼그라들기 시작했다. 주먹만한 구멍이 순식간에 류 현의 상체보다 더 크게 벌어졌다. 그 영향은 곧바로 나타났다. 우두머리의 의지와는 별개로 놈의 몸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오오옹!]
죽음을 직감한 우두머리가 서글픈 울음을 토해냈지만, 류 현은 그런 것에 관심이 없었다. 놈이 더 이상 떠있지 못하자 류 현은 그대로 날개에 감고 있던 다리를 풀고 훌쩍 뛰어올랐다. 쿠웅! 곧바로 화련의 보조가 뒤따랐음은 말할 것도 없었다.
풍선의 기분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은 움직임으로 류 현은 가장 가까이 있던 샌 드래곤의 뒷목에 올라탔다. 추락하는 우두머리에 정신이 쏠려있던 놈은 류 현이 올라탔음에도 제대로 반응하지 못했다. 놈에게 주의를 주거나, 도움을 줄 놈들도 주변에 없었다. 우두머리의 추락에 놈들은 우루루 지상으로 내려섰으니까.
류 현은 이 틈을 마음껏 즐길 생각이었다. ‘가방’을 조작해서 단창 하나를 꺼낸 류 현은 단창에 마력을 밀어 넣었다.
부우웅! 단창이 황금빛과 함께 진동하기 시작하자, 류 현은 이를 악물고 집중력을 끌어올렸다. 단창을 갉아먹지 않게 조심하며, 그는 천천히 탐욕의 안개를 단창 위에 덮어씌웠다.
‘전생에서는 쓸 것도 모자라서 실험할 여유가 없었지만...’
지금은 사양할 이유가 없다. 아직 그가 기억하는 수준이 아니긴 해도 ‘브류나크’의 제작자가 그의 편이었으니까. 대금을 거부하고 실험만 해달라고 부탁할 정도다.
류 현은 그대로 단창을 내질렀다.
푸욱! 부우웅! [캬아아악!]
‘브류나크’라는 위명이 아깝지 않게 단창은 거의 끄트머리만 남기고 거의 다 들어갔다. 기도를 찔린 샌 드래곤이 피 섞인 비명을 내질렀지만, 류 현의 관심사는 그런 것이 아니었다.
‘에너지 드레인을 너무 억눌렀나? 상쇄된 건가?’
그의 의문에 응하듯 창에 꽂힌 곳을 기점으로 비늘이 눈에 띄게 메말라가기 시작하더니,
[캬악!][컥컥!] 피를 토해가며 기운차게 소리를 꽥꽥 지르던 샌 드래곤이 목이 막힌 것처럼 켁켁거리기 시작했다. 눈에 보이진 않았지만 류 현은 놈의 기도 안이 어떤 꼴일지 눈에 선했다. 공기로 가득한 공중에 뜬 채로 질식해가는 샌 드래곤의 모습에 류 현은 환희를 느꼈다.
‘먹히는 군! 보통은 에너지 드레인에 잡아먹히던데 미완성이라도 ‘브류나크’라는 건가.’
삐죽 튀어나온 단창의 끝을 움켜쥔 류 현은 다시금 마력을 밀어 넣었다. ‘브류나크’는 단순히 꽂혀서 출혈을 내는 게 끝인 그런 물건이 아니었다.
부우우웅! 류 현의 마력에 감응하듯 단창이 미친 듯이 진동했다. 무한히 더 강해질 것 같던 단창의 진동은 류 현이 손을 놓자마자,
뻐어엉! 폭발하며 황금빛 분진을 흩날렸다. 그 빛의 입자를 바라보며 류 현은 속으로 휘파람을 불었다. 그는 이 분진이 뭘 의미하는 지 알고 있었다.
‘벌써 이것도 구현했어? 진짜 물건은 물건이네. 붙잡혀서 공장 돌리게 안하고 연구만 계속 시키면, 나중에 아지다하카도 뚫는 거 아냐?’
괴수의 처리를 곤란하게 만드는 쉴드의 순간적인 무력화! 쉴드를 제하고도 괴수의 방어력은 상당한 수준이지만, 두 개의 방어력 중 하나가 없애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일이었다. 강산의 ‘브류나크’ 이외에는 비슷한 수준도 흉내 내지 못했으니까!
등장하는 괴수의 수준이 높아지면서 무력화는 약화로, 뒤로 갈수록 약화 시간도 줄어들었지만 류 현은 그 정도로 ‘브류나크’의 효용을 폄하할 생각은 없었다. 그가 봤던 ‘브류나크’의 마지막 버전은 아지다하카의 쉴드를 뚫진 못했지만, 그 악룡이 신경을 쓸 정도로 쉴드를 중화시키는데 성공했었으니까.
그리고 지금 그가 상대하고 있는 건 퍼플 던전을 좀 벗어난 수준의 괴수들이다. 완벽한 무력화까지는 아니어도 지금 그가 올라탄 놈의 쉴드는 없는 것과 다름없는 수준이 되기에는 충분했다.
류 현은 ‘가방’에서 도끼를, 제 어깨만한 너비를 가진 양날 도끼를 끄집어내었다. 샌 드래곤의 목을 휘감은 두 다리에 힘을 꽉 준 그는,
퍼억! 있는 힘껏 도끼를 내려쳤다. 탐욕의 안개에 감싸인 도낏날에 비늘이 부러져나가고, 가죽이 찢어지며 붉은 속살이 입을 벌렸다. 검은 안개에 노출된 상처부위가 썩어 들어가는 것처럼 살이 말려들어갔다.
푸홧! 퍼억! 용혈이 솟구치며 류 현의 얼굴을 때렸지만, 그는 개의치 않고 도끼를 사정없이 내려쳤다. 두 번째 도끼질만에 목뼈가 드러났다. 류 현은 허옇게 드러난 목뼈를 별 감흥 없이 내려 보며 도끼를 끌어당겼다.
[캬르륵][커어억!] 샌 드래곤의 몸이 발작하는 것처럼 움찔거렸지만, 그건 류 현이 가한 폭력에 대한 저항이 아닌 단말마와 같은 움찔거림이었다. 류 현이 다섯 번째 도끼질을 가하자,
퍼억! 목뼈와 함께 숨통이 끊어진 샌 드래곤의 몸이 추락하기 시작했다. 류 현은 미련 없이 도끼를 내버리고 다시 허공으로 훌쩍 뛰어올랐다. 우웅! 화련의 ‘공간’이 기다렸다는 듯이 그를 감싸 안았다.
쿠웅! 추락하기까지 과정이 무색하게, 지상과의 충돌은 격렬했다.
날개를 잃은 우두머리를 돌보느라 정신이 팔려있던 샌 드래곤들의 시선이 하늘을 향했다. 그들에 비하면 미약하다 못해 덧없어 보이기까지 한 작은 인간에게 다섯 마리 용의 시선이 몰렸다.
동포를 잃은 분노에 이글거리고 있는 그 눈동자들을 마주한 류 현은 콧방귀를 뀌더니 손을 까딱였다.
“너희 다 죽일 건데 그렇게 분하다는 듯이 봐서 뭐 어쩌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