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7화 〉탐식마(貪食魔)
뜨득 으적으적
철판이라도 뜯어낼 것 같은 날카로운 이빨을 가진 샌 드래곤이 살살이풀을 뜯어 먹는 광경은 이상하다 못해 경이로워 보이기까지 했다. 용종 괴수 특유의 조형미와 소를 통째로 삼켜도 티가 안날 것 같은 거대한 몸이 고작 풀 뜯어먹는 걸로 유지가 되는 게 신기할 법도 하건만, 용잡이 팀은 근처 수풀에 엎드린 채로 덤덤하게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던전에 들어온 지 벌써 닷새째였으니 무슨 신기한 광경을 봤어도 이젠 신기함보다는 지루함이 느껴질 법한 시간이었다. 그 신기한 것과 목숨을 걸고 싸웠으니 지루함정도가 아니라 진절머리가 날 지경이었다.
화련은 이젠 신기함보다는 짜증스러움이 더 큰 광경에서 눈을 돌려 일행의 최선두에 있는 류 현을 힐끗 바라봤다. 류 현은 눈을 돌리면 그곳에 있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조용하게 풀을 뜯어먹는 샌 드래곤을 노려보고 있었다. 미동조차 없는 그 모습은 그대로 돌이 되어버렸다고 해도 믿겨질 정도였다.
샌 드래곤은 간간히 고개를 들어 주위를 살피며 풀을 계속 뜯어먹었다. 이틀 전만해도 찾아볼 수 없는 모습이었다. 던전 안에서 적수가 없었던 샌 드래곤이 경계를 할 필요가 뭐가 있겠는가. 그것도 거의 10미터에 달하는 척 봐도 다 큰 게 분명한 놈이 말이다.
샌 드래곤이 경계를 하는 모습을 발견한 건, 만 하루 전인 어제 저녁부터였다. 그 날 목표치를 달성해서 야영지로 돌아왔더니 갑자기 놈이 날아오더니 풀을 뜯어먹기 시작했는데 평소와 달리 중간 중간 주변을 살피는 게 아닌가. 류 현에게 미리 이야기를 들었던 화련과 희란은 떨떠름한 얼굴로 그 모습을 바라봤었다.
“이놈들이 우리 존재를 확실하게 인지한 거 같군요. 이제부터 좀 빡세질 겁니다.”
경계하던 놈에게 화련이 마법으로 주의를 끌고, 류 현이 올라타서 평소처럼 요절을 낸 다음에 그는 그렇게 말했었다.
그 뒤로 정말로 빡세긴 했다. 오늘만 해도 샌 드래곤을 두 마리 잡았는데, 두 놈이 함께 딱 붙어 다녔었다. 사흘째 때처럼 두 마리가 같이 다녀도 제각각 행동하는 게 아니라 서로의 사각을 살펴주는 식으로 움직였다. 누가 봐도 뭔가를 잔뜩 경계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그 결과 여태껏 잘 써먹었던 기습은 하지도 못하고 정면 힘 싸움을 해야 했다. 기습으로 인한 위가 사라진 건 생각보다 많이 컸다.
화련은 당연히 방전되었고, 희란까지 청뢰를 남발해서 방전 직전까지 몰렸었다. 류 현은 팔이 떨어지지 않은 게 이상할 정도의 부상을 입었다. 희란의 틈을 커버해주다가 브레스를 정통으로 얻어맞기 때문이었다.
팔 문제가 아니라 안 죽은 게 이상한 상황이었지만, 자기네 대장이 그 정도로 다치는 걸 처음 본 두 여자는 기겁했다. 송장목 진액을 들이부어서 상처는 바로 봉했지만, 류 현은 두 여자의 만류에 못 이겨 저녁까지 쉬어야만 했다. 그녀들의 소모가 극심해서 어차피 쉬어야 한다는 이유도 있었다.
자꾸 상처 회복 여부를 의심하는 두 여자를 끌고 나와서 겨우 발견한 게 눈앞에서 풀을 뜯고 있는 저놈이었다. 평범한 퍼플 던전이었다면 보스몹이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의 덩치.
하지만 이놈도 보스는 아니었다.
‘이거 원정 기록 써서 내놔도 믿긴 하려나 몰라.’
살살이풀 덕택이겠지만 던전 내의 샌 드래곤 덩치가 평균적으로 커도 너무 컸다. 같은 개체라면 특이 케이스가 아닌 이상 덩치가 클수록 강하다는 사실을 생각해보면, 던전 내에서 본 사실 그대로 보고서를 작성하더라도 믿을 줄지나 의심될 정도.
‘대뜸 믿어주면 그건 또 그것대로 곤란한 일이고...사실을 사실대로 말하면 안 된다니...젠장, 이게 무슨 사서 고생이야.’
여러모로 복잡한 머릿속을 억지로 정리하며 류 현은 왼손에 둘둘 말아서 쥐고 있던 채찍을 슬쩍 풀었다. 채찍이 살살이풀에 스치는 소리에 샌 드래곤의 고개가 번쩍 들렸고, 류 현은 쏜살같이 뛰쳐나갔다.
그를 신호로 여섯 번째 샌 드래곤 사냥이 시작되었다.
***
콰릉! [꾸오오!] 푸화학!
우레가 하늘을 찢으며 뛰쳐나가자 그에 응하듯 샌 드래곤의 표효와 함께 마력의 폭풍이 대지를 후려쳤다. 대지에 긴 상흔을 남기던 마력의 폭풍은,
콰릉! 다시금 터져 나온 우레와 함께 사그라졌다. 하지만 공격은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연이은 공격은,
[캬아아아!] 한계까지 가속한 샌 드래곤의 육탄 돌격!
몸 전체 길이가 10미터에 육박하고 용적은 자신과 몇 십 배 단위로 차이 나는 거대 생명체가 날아드는 건 돌진해오는 트럭에 비할 박력이 아니었다. 그에 대한 화련의 응답은 두 눈에 빛을 띄우는 것이었다.
“죽겠네. 진짜!”
쒸이익! 마치 바람에 채인 비닐봉투처럼 두 여자는 샌 드래곤의 돌진 궤도에서 휙하고 딸려나가 듯이 벗어났다. 표적을 놓친 샌 드래곤이 접었던 날개를 펴며 공중에서 멈춰 섰지만, 때는 이미 늦어있었다.
희란은 망설이지 않고 샌 드래곤을 향해서 손을 뻗었다. 총구처럼 뻗친 오른 손 검지에는 청뢰가 끼워져 있었다.
콰릉! 소리보다 빠르게 우레가 샌 드래곤을 관통했다. 작살에 맞은 물고기 마냥 몸이 훽 젖혀진 샌 드래곤은 곧바로 추락했다. 쿠웅!
저 정도 충격에 죽진 않았을 테지만 희란은 추락하는 샌 드래곤에게서 시선을 떼었다.
희란은 화련의 허리를 감고 있는 왼손으로 화련의 허리를 톡톡 건드렸다. 어깨로 숨을 쉬고 있던 화련이 샐쭉한 얼굴로 눈을 흘겼다.
[꾸오옹!][캬아악!] 그녀들의 머리보다 높은 곳에서 고막을 긁어내는 것 같은 샌 드래곤들의 포효에 연발해서 터져 나오자 희란은 다시 닦달했다. 아무리 괴물보다 괴물같은 이라고는 하나 그가 걱정되었다.
“언니.”
“마스터 아직 멀쩡해 보이는 데 한 숨 돌리고 끼면 안 될까?”
화련이 간곡한 어조로 물었지만 희란은 단호했다. 그녀는 다시금 힘주어 말했다.
“언니.”
“아 진짜, 여기서 나가기만 해봐 한두 달은 잠수 탈거야.”
한숨을 내쉬는 것까지가 불평의 끝이었다. 화련은 집중력을 끌어올렸다. 그녀의 눈동자에 여느 때처럼 하얀 빛이 어리기 시작했다. 그녀의 눈에만 보이는 무형의 장막이 두 여자를 감싸고,
쉭! 중력을 거부하는 것처럼 둥둥 떠 있던 두 여자의 몸이 위로 솟구쳤다.
[캬아악!][오오옹!] 그녀들의 난입을 샌 드래곤들이 흉성을 터뜨렸지만, 희란은 위축되는 기색 없이,
콰릉! 청뢰를 하늘에 풀어놓으며 진형을 미친 듯이 휘저어놓았다. 그 덕에 샌 드래곤 다섯 마리가 짠 원형진이 무너졌다. 그러자 두 여자는 그녀들의 대장의 모습을 볼 수 있게 되었다.
콰직! 뻐억! 류 현은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다섯 마리의 샌 드래곤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한 놈에게 매달렸다가 튕겨져 나왔다가를 반복하는 중이었다.
보스몹에게 달라붙어서 도끼질을 한 번 하면 꼬리에 맞고 튕겨져 나가고, 다시 달라붙으면 주변에 떠있던 다섯 마리중 하나가 달려들어서 그를 떼놓고 하는 식이었다. 유용하게 써먹었던 채찍은 이미 끊어진지 오래.
그를 떼어내기 위해서 달려든 놈을 처리하려고 하면, 가장 큰 놈이 류 현의 공격을 받아내며 위의 상황이 계속 반복되었다. 곧 죽어도 보스몹이라는 걸 증명하는 것처럼 제대로 힘을 실어서 정타를 넣지 않는 이상 놈의 비늘은 꿈쩍도 하질 않았다.
‘진짜 던전 난이도 설정 미스라니까. 이게 어딜 봐서 퍼플 범주 내야?’
샌 드래곤들과 달리 류 현은 제 힘으로 떠있는 것이 아니라 순전히 화련의 힘이었기에, 반응이 더욱 더뎠다. 화련은 허공에서 조금 허우적거리는 듯한 류 현의 움직임을 보고 그를 향해서 손을 뻗었다.
그녀의 눈동자에 어린 하얀빛이 더욱 진해졌다. 방금 전 두 여자에게 일어났던 일이 류 현의 주변에 그대로 일어났다. 장막의 존재를 보진 못했지만, 변화를 느낀 류 현이 그녀들을 돌아봤다.
그 틈을 샌 드래곤들은 놓치지 않았다.
후와악! 화아악! 기다렸다는 듯이 다섯마리의 샌 드래곤들이 브레스를 토해내었다. 제각기 푸르고, 노란빛을 띄는 마력의 폭풍이 류 현을 덮쳐들었다.
“마스터!”
콰앙! 화련의 찢어지는 듯한 목소리가 닿기도 전에 부딪힌 폭풍들이 폭발했다. 뒤엉킨 마력이 용광로처럼 끓어오르며 주변의 대기가 미친 듯이 팽창하며 열풍을 토해내었다. 마치 작은 태양이라도 생긴 것 같은 광경이었다.
화련은 곧바로 희란과 제 몸을 띄우고 있는 공간을 가속시켰다. 전투 전 그가 주지시켰던 안전거리 개념은 사라지고 없었다.
그리고 뒤엉킨 브레스 때문에 흐려졌던 시야가 서서히 확보되기 시작하자 화련은 멈칫하는 수밖에 없었다. 아니, 그녀는 눈에 뭔가가 보이기 전에 본능적으로 멈춰 섰다.
물러서! 가까이 가지마! 좀처럼 들을 일 없던 본능의 호소였다. 화련은 왜 라는 의문을 느끼기도 전에 자신의 턱이 떨리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뭐지?’
마력의 장막이 걷히고, 시야가 완전히 확보되었지만 화련은 자신의 의문이 충족되었다는 느낌을 받을 수가 없었다. 오히려 이유를 알 수 없는 공포감만 더 해졌다. 그 때 희란이 귀신에 홀린 것처럼 중얼거렸다.
“마스터...?”
‘마스터라고...? 저게?’
희란의 목소리를 듣고 간신히 떠올렸다. 저 검은 아지랑이 같은 것에 둘러싸여서 불길한 기운을 흩뿌리고 있는 괴물이 그녀들의 대장이라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