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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3화 〉탐식마(貪食魔) (103/429)



〈 103화 〉탐식마(貪食魔)

감은 눈꺼풀을 비집고 들어오는 것 같은 빛이 눈부셨다. 눈부심을 견디며 한 걸음 더 내딛자, 발밑이 꺼지는 듯한 현기증이 몰려왔다. 화련은  십번이고 겪었지만 도무지 익숙해질 것 같지 않은 현기증 속에서 발걸음을 계속 옮겼다.


몇 걸음 더 옮기자 눈꺼풀 위를 찌르듯이 내리쬐던 빛이 약해졌고, 현기증이 거짓말처럼 물러갔다.

화련은 조심스럽게 눈을 떴다. 그녀의 눈에 가장 먼저 비친 것은 우중충한 회색빛 구름과 그 위로 끝없이 펼쳐져있는, 왠지 우울한 빛의 파란 하늘이 있었다.


해는 없었으나 사위는 밝았고, 화련은 이 괴현상에 대해서는 고민하지 않았다. 밖에서야 세상이 망할 징조였지만, 던전 안에서는 크게 이상할  없는 광경이었다. 아티펙트 때문이라지만 번개가 계속 내려치는 산도  적이 있는 그녀에게는 받아들이기 힘든 광경도 아니었다.


날로 먹었든 어쩌든 간에 그녀도 퍼플 던전은 이번이 두 번째니까. 뭐든 처음이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이지 두 번째 부터는 어렵지 않은 법이다.

우울한 빛 하늘 아래에 펼쳐진 대지는 훨씬 정상적인 모습이었다. 늪지였다. 화련의 시력으로도 끝을 볼  없는 거대한 늪지가 그녀 앞에 펼쳐져있었다.

그녀가 아는 늪지와 다른 점이라면 식생이 늪지에 살 법한 것들이 아니라는 것과, 그녀를 기준으로 앞으로 나갈수록 지대가 점점 낮아져서 까마득한 싱크홀 같은 것이 자리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화련은 그대로 뒤를 돌아봤다. 그녀와 마찬가지로 싱크홀을 바라보고 있는 희란은 반쯤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한 채였다.

화련은 거기까지 확인 한  일행의 최선두에 서있는 남자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류 현은 게이트 부근 공터 끄트머리에 서서 수초 같은 것들을 손으로 쓸어보는 중이었다. 화련은  모습에 고개를 갸웃하며 던전 입장 전부터 가지고 있었던 의구심이 더 커지는 것을 느꼈다.

‘설마 저게 뭔지 아는 건가? 협회 데이터베이스에는 없던 식물인데?’


류 현이 살피고 있는 허리께까지 자란 풀들에는 공통점이라고는 없어 보였다. 바다 속도 아닌데 미역처럼 생겨서 흐느적거리고 있는 것부터, 희미하게 빛을 내뿜고 있는 것까지. 심지어 한 줄기에서 나왔더라도  모양이 다른 것들도 꽤 많았다.


공통점이라고는 줄기가 갈라져 나오는 부분에 노란 콩같이 생긴 뭔가가 달려있다는 것 뿐. 누가 봐도 독성이 의심되는, 수상하기 그지없는 모습이었지만 류 현은 스스럼없이 그것들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화련의 짐작대로 류 현은 이 풀들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살살이풀 군락있다고 듣긴 했었는데 들었던 것보다 훨씬 크네. ‘예거즈’ 이새끼들 꿀 제대로 빨고 보고는 똑바로 안 한 거구만..’

살살이풀. 이름 그대로의 효력을 지닌 보물 같은 약초다. 살이 돋아나게 하는 데 아주 특효약이다.


던전에서 나는 다른 약초들과 다른 점이 있다면 살살이풀은 부상자의 체력을 깎아먹지 않는 다는 점이다. 이유를 말할 것도 없이 이는 어마어마한 메리트다. 급하면 해독을  한 송장목 진액도 들이붓는 데, 아무런 부작용도 없는 살살이풀은  자체만으로도 같은 무게의 금보다 비쌀 수밖에 없다.


살살이풀의 효용은 거기서 그치지 않는데, 즙을 내어 송장목 진액 같은 약재와 뒤섞어서 점토 같은 되는데, 그 점토를 살이 떨어져나간 자리에 붙이면 천천히  점토가 진짜 살이 된다.

안타깝게도 송장목 이상으로 보기 힘든 존재라 살살이풀의 수혜를 받은 플레이어들은 극히 드물다. 살살이풀이 퍼플 이상에서만 등장하기에, 길드들이 독점하게 되었다. 한국에는 ‘예거즈’ 뿐이었고, 전세계를 통틀어도 그런 길드는  열이 넘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보물 밭을 발견했음에도 류 현의 표정을 밝지가 못했다.

왜냐하면, 살살이풀이 그가 아는 것보다 많다는 건 이 던전에 대한 정보도 사실과 다를 거라는 이야기였으니까. 살살이풀은 그 효과에 걸맞게 영양이 풍부한 식물이었고, 영양이 풍부한 식물이 많이 있다면, 그걸 뜯어먹고 사는 포식자는 필연적으로 늘어날 수밖에 없었다.


이 던전에서 살살이풀 군락을 독점하는 포식자의 이름을 그는 알고 있었다.

‘빌어먹을 용새끼들 나랑 원수졌나. 어지간하면 피하려고 해도 자꾸 마주치네.’


 드래곤! 류 현과 그의 팀이 일전에 마주쳤던 응룡보다 훨씬 먼저 세상에 알려진 대표적인 용종 괴수였다. 그리고 응룡과 비교하기가 민망할 정도로 용종 괴수의 강력함을 잘 보여주는 괴수 중 하나였다.

‘살살이풀이 이만큼 있으면 저안에는...두 사람 피어 적응은 확실히 시켜줄  있겠네. 그냥 승하 씨랑 같이 올 걸 그랬나?’


점점 낮아지다가 결국 커다란 싱크홀로 연결되는 늪지대를  번 슥 건너본 류 현은 등을 돌렸다. 그리고 그의 등만 빤히 보고 있던  여자에게 말했다.


“땅부터 팝시다. 이전 원정처럼 설렁설렁 못 하니까. 정신 바짝 차리셔야 할 겁니다.”


왠지 불만에 차있는 것 같은  현의 말에 두 여자는 괜시리 억울한 기분이 들었다.


***

쿵쿵 거리는 발소리는 없었다. 짐승 특유의 거친 숨소리도 없었다. 마치 물뱀이 물위를 미끄러져 나가는 것처럼 고요했다. 그 거체가 움직일 때마다 나는 소리는 살살이풀들이 스러지는 소리뿐이었다. 그마저도 바람에 나부끼는 소리라고 생각될 정도로 요란스럽지 않았다.


그저 언뜻언뜻 살살이풀 사이로 보이는 하얀 비늘들이 칼날이 살아서 움직이는 것처럼 섬뜩했다.

빠르게 멀어져가는 바스락거리는 소리와 자신을 짓누르던 위압감에 화련은 천천히 바짝 엎드렸던 몸을 일으켰다.


긴장이 좀 풀어진 화련은 저도 모르게 마른 침을 삼켰다가, 목울대가 움직이는 소리에 놀라서 양손으로 제 입을 틀어막았다.


그 고요한 움직임이 감지할 수 없을 정도로 멀어지자, 화련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마음 같아서는 소리라도 지르고 싶었지만 그랬다간 저만큼 멀어진 괴물이 되돌아와서 달려들 것만 같았다.


“흠...성체는 아무래도 저 구멍 안에 다 모여 있는 모양이군요.”


화련은 믿을  없다는 표정으로 왼쪽을 돌아봤다. 거지 왕초 꼴을 하고 있는 남자, 류 현은 이미 거슬거슬하다 못해 살색이 보이질 않는 턱을 쓰다듬으며 다시 중얼거렸다.

“저 안에 청뢰로 폭격이라도 때려야 한 마리라도 나오려나.”

그 이상 내버려뒀다간 류 현이 자기 말을 정말 시행할 것 같았기에 화련은 재빨리 말을 붙였다.


“저게 다 큰 게 아니라고요?”
“개체 마다 차이가 있긴 합니다만 방금 그놈은 잘 쳐줘야 3미터 수준 아니었습니까. 성체 최소 기준은 5미터부터 시작이라서요.”


‘미친.’ 화련은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었음에도 좌절하고 싶은 기분이었다. 말이 3미터고 5미터지, 협회가 제공해준 괴수 데이터베이스에 적힌 괴수 스펙은 솔직히 실감이 나질 않았다. 그리고 그게 맞았다.


데이터베이스에는 괴수가 가진 위압감은 등재되어있지 않으니까. 화련은 방금 전 스쳐지나간 샌 드래곤 새끼에게서 느낀 위압감을 떠올리고는 몸을 잘게 떨었다. 어느새 뒤로 다가온 희란이 그녀의 손을 거머쥐었지만 별 위로가 되진 않았다. 오히려 다른 의문만 생겼다.

‘나보다 민감한 애가 별 반응이 없네?’

응룡의 피어에 처음 노출되었을 때 희란은 그 날을 거의 통으로 날렸었다. 식사를 통하지 못하고, 좀 가라앉았다 싶으면 몸을 떨어서 이러다가 애가 어떻게 되는 거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그런데 그 때 상대적으로 멀쩡했던 화련조차 몸서리 쳐지는 위압감에 같이 노출되었음에도, 희란은 멀쩡해보였다. 나쁜 일은 아니었지만 의문부호가 생길 수밖에 없는 상황.


“...희란아 너 괜찮아?”
“조금 놀랐지만 괜찮아요. 언니는요?”
“응? 어 뭐 나도  놀라긴 했는데...”

왠지 저만 바보가  거 같아 화련은 대충 얼버무렸다. 그녀가 고뇌를 정리하기도 전에 류 현이 다시 내뱉었다.

“이것 참 곤란하군요. 새끼부터 쳐 내자니 다 몰려나올 수도 있고, 그렇다고 두 분의 피어 적응을 건너뛸 수도 없는 노릇이고.”

화련은 그런 거  해도 되요! 라고 소리치고 싶은 기분이었다. 던전에 들어온 지 벌써 나흘째. 첫날에 던전에 자리 잡고 있는 괴수가 샌 드래곤이라는 걸 확인한 류 현은, 그녀들에게 아프리카 부족이나  법한 풀과 흙 마사지를 명령했다. 그녀들이 닳고 닳은 거지꼴이 되고나자 피어 체험이랍시고 다 큰  드래곤을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반대는 없었다. 응룡 때 제대로 곤욕을 치른 두 여자는  끔찍한 경험이 진짜 제대된 전투상황에서 벌어졌다면 어떻게 되었을지 잘 알고 있었다. 죽는 것보다는 두 번째 곤욕이 낫다. 그녀들의 판단은 그랬다.

그 탐색이 시작된 지 나흘째, 그들은 방금 것으로  드래곤 새끼만  마리째 구경한 참이었다. 불행하게도 화련은  세 마리를 보는 동안 자신이 샌 드래곤의 피어에 적응하지 못할 거라는 확신이 굳건해지는 중이었다. 생각 못한 건 아니었지만 응룡과는 격이 달라도 너무 달랐다.

응룡이 포스 있는 거대 도마뱀이었다면,  드래곤은 다 자라지도 못한 놈을 보고도 경외심을 느낄 수 있을 정도였다. 담백하게 말하자면 네 발 달린 흰 뱀 같은 외형이었지만, 그 당당한 자태는 단순히 강력한 포식자를 넘어서 조형미마저 느껴질 정도였다.

그리고  조형미를 덮어버릴 정도의 강렬한 위압감은 끔찍한 수준이었다.

직접 마주하고 적의를 맞부딪힌 것도 아닌데도, 뱀 앞에 놓인 개구리의 심정이 십분 이해가 갈 정도였다. 던전 난이도가 계측된 것 이상으로 높아서 샌 드래곤이 성체가 몇 마리 있을  같다는 말을 들었을 때는 정말 기절하고 싶은 기분이었다. 새끼만 해도 마주하기 버거울 정도인데 성체가 몇 마리나 있다니.


‘진짜 그 괴물이 죽을 뻔 했다고 할 만해. 마스터는 대체 무슨 자신감으로 피어 적응시켜주겠다는 거지? 아니 그 이전에 자기가 아무렇지 않을 거라는 보장도 없잖아?’

부담감과 공포 때문에  돌아가지 않는 머리로도 거기까지 생각한 그녀였지만, 이어지는 류 현의 말에는 아무런 생각도 할 수가 없었다.


“...별  없죠. 벌써 나흘째고, 이대로 세월아 네월아 할 수도 없으니, 아까 그 새끼 잡아다가 족친 다음에 미끼라도 삼아야겠습니다. 뭐 제 새끼가 제 시간에 안 돌아오면 알아서 나올 거 같긴 합니다만.”
“네?”


화련의 새된 목소리가 늪지에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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