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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2화 〉탐식마(貪食魔) (102/429)



〈 102화 〉탐식마(貪食魔)

사각거리는 소리와 함께 종이위에 연필이 미끄러져나갔다.  현은 멈칫했다가 두어  적고, 다시 멈칫했다가 쓰는 걸 재개하는 짓을 반복하다가 종이를 반쯤 채우자 연필을 놓아버렸다.

회귀 이후에 생긴 습관이었다. 자신이 이전 생에서 겪었던 일을 바탕으로 다가올 미래 사건들을 어떻게 대처할지 적어놓는 것. 거창한 것은 아니고, 네임드 몹 이름을 적고 옆에 필요한 도구나 능력 개발 진행도를 적어놓는 수준이었다.


그 이상은 하고 싶어도 능력이 모자라기도 했고, 이상한 판단을 내릴 수도 있기에 스스로가 삼갔다.

 현은 자신에 대해서 넉넉한 평가를 내리는 이는 아니었고, 그가 가장 믿지 못하는 건 괴수 사냥 이외의 자신의 판단능력이었다. 괴수 사냥에 있어서 그는 그야말로 독불 장군이 된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이미 결과를 봤었으니 신중을 기할지언정 망설일 이유는 없었다.

그러나 그 외의 분야가 되면  현은 어지간한 근거 없이는 판단을 거부해버리는 수준이었다. 서해란이나 나승하처럼 예정 없이 불쑥 저쪽에서 접촉해온 경우가 아니라면 아무리 급해도 두 번, 어지간해서는 세 번 검토했다. 이렇게 쓰는 습관도 그런 맥락에서 나온 것이었다.

 현은 마지막으로 적은 단어 밑에 밑줄을 거듭 그어대면서 뚱한 얼굴로 그 글자를 바라봤다. ‘포탈 실험.’ 지난 나흘간 그를 혼란에 빠뜨리고 있는 주범이었다.


‘대체 언제 그렇게 진척시켜 놓은 거지? 포탈 뚫는 게 내 생각보다 쉬운 일이었나?’


제 스스로가 묻고도 무슨 개소리냐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마법적 소양이 절망적인 수준인 그라도 공간에 간섭하는 게 고난이도의 마법이라는  정도는 알 수 있었다.


리치 같은 마법적인 소양 있는 괴수들 중에서 이따금씩 장, 단거리 텔레포트를 할 수 있는 개체가 발견되기도 했지만, 인간들에게는 머나먼 일이었다. 마탑이나 강대국들이 자국의 마법사들을 모아서 연구에 힘썼지만, 진척도가 아직 수정란 수준도 되지 못했다.

이전 생에서는 그 공간 마법을 다루는 동료에게 직접 듣기도 했었다. 수식이 실시간으로 변화해서 자잘한 변화폭을 마력양으로 커버하려고 했는데, 필요양이 말도 안 되는 수준이라 그를 만나기 전에는 그냥 꿈속의 마법으로 생각했었다고. 몸 다 망가지고 나서 그 문제를 해결 해줄 수 있는 그를 만난 게 악의적인 장난 같다고, 화련이 본인 입으로 말했었다. 지금은 없던 일이 되어버렸지만.


그런 말을 들었었기에 류 현은 더욱 머릿속이 복잡했다. 화련의 성장이, 포탈의 개발속도가 너무 빨랐다. 희소식인 건 확실했다. 인원제한이 걸리든, 지속시간이 짧든 간에 이동시간이 없다시피 한 이동 수단은 어마어마한 힘이 될 것이다.

문제는 이 변화가 어떤 식으로 미래에 영향을 끼칠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아직 확정지은 건 아니었지만,  현은 윈스턴 경으로부터 들은 튜토리얼 운운이 적혀있다는 석비가 이전 생에서는 발견되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중이었다. 그도 그럴게, 터무니없는 헛소리로 취급되더라도  정도라면 기록이 남지 않을 수가 없었다. 기록이 남아있었다면 협회가 붕괴했을 때 유출이 되었을 테고, 그렇다면 어떤 식으로든 간에 이야기가 돌았을 것이다.

독자적인 정보라인을 가지진 못했지만 이전 생에서 류 현은 한발 늦더라도 국가 기밀급 정보를 접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취급이 좋지 못해서 거의 강압으로 뜯어내는 식이었다지만, ‘대소환’에 직접적으로 관련된 정보를, 그것도 이미 망한 단체가 쥐고 있었던 정보를 접하지 못했을 확률보다는 아예 그 사실 자체가 없었을 확률이 더 높아보였다.


그리 잠정 결론 내리고 나자, 온갖 것들이 신경 쓰이고 거슬리기 시작했다. 스스로가 미래를 바꾸겠답시고 설치고 있다지만, 예상치 못한 곳에서의 변화가 달가울 수는 없었다.

류 현이 희소식을 접하고도 고민하고 있는 이유는 이 때문이었다. 류 현은 이전 생에서는 아예 제대로 시도조차 되지 못했던 포탈 개발이 대체 어떤 식으로 변수로 작용할지 상상조차   없었다.


‘젠장, 적극적으로 지원해줘도 모자랄 판에.’


류 현은 신경질적으로 제 뒷머리를 헤집어대었다.  때 책상 한 켠에 놓여있던 휴대폰이 울기 시작했다. 류 현은 화면에 떠오른 화련이라는 글자를 보고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화면 상단에 표시된 시간은, 오늘의 포탈 실험 시간까지 불과 30분도 남지 않은 상태였다.


아무래도 실험 장소에 제일 먼저 가서 기다리는 게 일상이던 그가 코빼기도 보이질 않으니 걱정 되서 전화를 한 모양.


‘그래, 이만하면 꿀은 빨만큼 빨았지. 미래가 바뀔 수 있다는 건 오히려 내가 반겨야할 일이고. 내가 불안하다고 팀원 성장을 억제할 수도 없잖아.’


그럼에도 새어나오려는  숨을 삼키며  현은 방을 나섰다. [팀장실]이라는 명패가 달린 문을 뒤로하고, 용잡이  사무실을 나서면서 류 현은 미련이 남은 것 같이 생각했다.

‘그래도 네임드 몹 라인업이 바뀌거나 하진 않겠지?’

***


끄트머리에 달했어도 여름은 여름이라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 주변은 온통 녹색 빛이었다. 여름 특유의 풋내가 어디에도 가득 차있었다. 얕은 호흡에도 끈적거리는  같으면서도 상쾌한 풋내가 폐부를 가득 채웠다.


류 현은 별 재미도 없던 풀잎색 구분을 관두고 일행들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여자가 옹기종기 모여서 때 아닌 담소 시간을 갖고 있었다. 그녀들의 차림새만 아니었다면 카페 내부에서 흔히 볼 법한 모습이었다.


류 현은 그 자연스러운 광경에 깊은 의문을 느꼈다.

‘언제 저렇게 친해졌지?’

동료들이 서로 친해지는 건 권장할 만한 일이었지만, 류 현은 저 셋이 무슨 과정을 거쳐서 친해졌는지 도무지 추측조차 가질 않았다.

성격이 정 반대라고 해도 좋을 희란과 화련이 친해진 건 그래도 납득할 만 했다. 서로 부딪히는 쪽으로 반대가 아니고, 희란의 소극적인 태도를 반대편에 선 화련이 상쇄하는 모습을 자주 봤었으니까.


하지만  현은 화련과 승하가 저렇게 이마를 맞대고 이야기 하는 모습을 보게 될 거라고는 꿈에도 상상하지 못 했었다.

둘의 성격 차이 문제가 아니라, 화련이 거의 일방적으로 승하에게 틱틱 거리는 관계였으니까.  그렇게 된 원인이 될 만한 일이 한  가지가 아니라, 류 현은 대놓고 으르렁거리지 않는 이상 한동안은 지켜볼 생각이었다.

그러면서도 둘의 관계가 호전될 거라는 기대는 하지 않았다. 그렇게 되더라도 년 단위 시간이 필요할 거라고 봤었다. 호의든 적의든 간에 일방통행적인 관계는  말로가 좋을 수가 없다. 승하의 성격상 다툼으로 번질 가능성은 크지 않아보였지만.

거기에 희란에 이르러서는 대놓고 승하를 어려워했다. 대놓고 눈치 보는  예삿일이고, 승하가 부르면 화들짝 놀라서 화련 뒤에 숨는 일도 잦을 정도였다.


그런 그의 예상을 깨고, 세 여자가 머리를 맞대고 수군거리는 모습은 그에게 충격을 주었다.


‘아니 최근에는 붙어 있을 시간도 없었잖아? 따로 만났나?’


첫 퍼플 던전 원정 직후 저런 모습을 보였다면 그런대로 납득했을 것이다. 원수로 시작한 것도 아니고, 생사고락을 함께한 이와 친해지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었으니까.

그런데 그 던전 원정은 벌써 세 달은  된 일이고, 그 뒤로  달간 셋의 관계는 호전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기미가 보였던 건 아무리 멀리 잡아도 포탈 실험을 막 시작했던 삼 주 전쯤이었다.

실험 장소에  자리에 없는 백혜라까지 해서, 넷이서 같이 오는 경우가 꽤 있었다. 바뀐 미래 걱정하느라, 퍼플 던전 우선권을 확보하느라, 또 강 찬의 엘릭서 제조에 신경 쓰느라 별 신경을 쓰지 않았지만 분명히 눈에 띄는 변화였다. 그렇다곤 해도 이렇게 급격하게 변한 모습을 보여주리라고는 생각지 못했었다.


그것도 용잡이 팀의 두 번째 퍼플 원정이자, 공식 데뷔전을 치르는 오늘에 말이다.

‘그런데 아까 전부터 무슨 이야기를 저렇게 길게 하는 거지? 응?  날 힐끔거려?’

 현의 궁금증을 유발하는 광경을 연출하고 있는 세 여자는,


“...알겠지? 만약 던전 안에 샌 드래곤이 있으면, 뒤로 슥 빠져. 적어도 열 걸음 이상. 그 안이면 백프로 피어 영향권 안이야.  현 성격상 분명히 너희는 달려들지 말고 뒤로 빠져있으라고 하겠지만, 빠질 준비는 해두라고. 조금이라도 영향 받으면 제대로 볼 수가 없으니까. 조심하는 게 좋지. 그리고 뒤에서 잘 보라고.  현이 피어에 반응 하는 지 안하는 지.”
“그런데 피어에 잘 저항하는 체질도 있다면서요?”
“그거야 어디까지나 한 번 겪고 나서의 일이고. 체질에 따라서  번 만에 적응하는 사람이 있고, 열 번 해도 안 되는 사람이 있는 거지. 처음은 무조건 굳게 되어있어. 나도 샌 드래곤 처음 만났을 때 피어 때문에 죽을 뻔 했었다니까.”
“저어, 그런데 마스터는 응룡 때도 반응 안하셨던 거 같은데...”
“그러니까, 확실히 해두자는 거지. 솔직히 응룡은 제대로 된 피어라고 하기도 뭣한 수준이라서 얼버무리려고 들면 따지고 들기도 힘들어. 어쨌든, 겪어보면 내가 무슨 말 하는지 알게 될 거야.”
“으엑...그건 싫은데. 진짜 지금도 그 때 떠올리면 밥맛 떨어진다고요.”
“어차피 겪어야할 거고 너네 마스터가 어련히 알아서 모실까. 솔직히 말해서 류 현은 너무 싸고도는 데...”
“아아,  잔소리. 던전 안에서 마스터한테 실컷 들을 거니까. 밖에서는 사양하죠.”

조용히 아니, 대놓고 음모 모의 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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