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2화 〉탐식마(貪食魔)
사각거리는 소리와 함께 종이위에 연필이 미끄러져나갔다. 류 현은 멈칫했다가 두어 자 적고, 다시 멈칫했다가 쓰는 걸 재개하는 짓을 반복하다가 종이를 반쯤 채우자 연필을 놓아버렸다.
회귀 이후에 생긴 습관이었다. 자신이 이전 생에서 겪었던 일을 바탕으로 다가올 미래 사건들을 어떻게 대처할지 적어놓는 것. 거창한 것은 아니고, 네임드 몹 이름을 적고 옆에 필요한 도구나 능력 개발 진행도를 적어놓는 수준이었다.
그 이상은 하고 싶어도 능력이 모자라기도 했고, 이상한 판단을 내릴 수도 있기에 스스로가 삼갔다.
류 현은 자신에 대해서 넉넉한 평가를 내리는 이는 아니었고, 그가 가장 믿지 못하는 건 괴수 사냥 이외의 자신의 판단능력이었다. 괴수 사냥에 있어서 그는 그야말로 독불 장군이 된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이미 결과를 봤었으니 신중을 기할지언정 망설일 이유는 없었다.
그러나 그 외의 분야가 되면 류 현은 어지간한 근거 없이는 판단을 거부해버리는 수준이었다. 서해란이나 나승하처럼 예정 없이 불쑥 저쪽에서 접촉해온 경우가 아니라면 아무리 급해도 두 번, 어지간해서는 세 번 검토했다. 이렇게 쓰는 습관도 그런 맥락에서 나온 것이었다.
류 현은 마지막으로 적은 단어 밑에 밑줄을 거듭 그어대면서 뚱한 얼굴로 그 글자를 바라봤다. ‘포탈 실험.’ 지난 나흘간 그를 혼란에 빠뜨리고 있는 주범이었다.
‘대체 언제 그렇게 진척시켜 놓은 거지? 포탈 뚫는 게 내 생각보다 쉬운 일이었나?’
제 스스로가 묻고도 무슨 개소리냐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마법적 소양이 절망적인 수준인 그라도 공간에 간섭하는 게 고난이도의 마법이라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었다.
리치 같은 마법적인 소양 있는 괴수들 중에서 이따금씩 장, 단거리 텔레포트를 할 수 있는 개체가 발견되기도 했지만, 인간들에게는 머나먼 일이었다. 마탑이나 강대국들이 자국의 마법사들을 모아서 연구에 힘썼지만, 진척도가 아직 수정란 수준도 되지 못했다.
이전 생에서는 그 공간 마법을 다루는 동료에게 직접 듣기도 했었다. 수식이 실시간으로 변화해서 자잘한 변화폭을 마력양으로 커버하려고 했는데, 필요양이 말도 안 되는 수준이라 그를 만나기 전에는 그냥 꿈속의 마법으로 생각했었다고. 몸 다 망가지고 나서 그 문제를 해결 해줄 수 있는 그를 만난 게 악의적인 장난 같다고, 화련이 본인 입으로 말했었다. 지금은 없던 일이 되어버렸지만.
그런 말을 들었었기에 류 현은 더욱 머릿속이 복잡했다. 화련의 성장이, 포탈의 개발속도가 너무 빨랐다. 희소식인 건 확실했다. 인원제한이 걸리든, 지속시간이 짧든 간에 이동시간이 없다시피 한 이동 수단은 어마어마한 힘이 될 것이다.
문제는 이 변화가 어떤 식으로 미래에 영향을 끼칠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아직 확정지은 건 아니었지만, 류 현은 윈스턴 경으로부터 들은 튜토리얼 운운이 적혀있다는 석비가 이전 생에서는 발견되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중이었다. 그도 그럴게, 터무니없는 헛소리로 취급되더라도 그 정도라면 기록이 남지 않을 수가 없었다. 기록이 남아있었다면 협회가 붕괴했을 때 유출이 되었을 테고, 그렇다면 어떤 식으로든 간에 이야기가 돌았을 것이다.
독자적인 정보라인을 가지진 못했지만 이전 생에서 류 현은 한발 늦더라도 국가 기밀급 정보를 접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취급이 좋지 못해서 거의 강압으로 뜯어내는 식이었다지만, ‘대소환’에 직접적으로 관련된 정보를, 그것도 이미 망한 단체가 쥐고 있었던 정보를 접하지 못했을 확률보다는 아예 그 사실 자체가 없었을 확률이 더 높아보였다.
그리 잠정 결론 내리고 나자, 온갖 것들이 신경 쓰이고 거슬리기 시작했다. 스스로가 미래를 바꾸겠답시고 설치고 있다지만, 예상치 못한 곳에서의 변화가 달가울 수는 없었다.
류 현이 희소식을 접하고도 고민하고 있는 이유는 이 때문이었다. 류 현은 이전 생에서는 아예 제대로 시도조차 되지 못했던 포탈 개발이 대체 어떤 식으로 변수로 작용할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젠장, 적극적으로 지원해줘도 모자랄 판에.’
류 현은 신경질적으로 제 뒷머리를 헤집어대었다. 그 때 책상 한 켠에 놓여있던 휴대폰이 울기 시작했다. 류 현은 화면에 떠오른 화련이라는 글자를 보고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화면 상단에 표시된 시간은, 오늘의 포탈 실험 시간까지 불과 30분도 남지 않은 상태였다.
아무래도 실험 장소에 제일 먼저 가서 기다리는 게 일상이던 그가 코빼기도 보이질 않으니 걱정 되서 전화를 한 모양.
‘그래, 이만하면 꿀은 빨만큼 빨았지. 미래가 바뀔 수 있다는 건 오히려 내가 반겨야할 일이고. 내가 불안하다고 팀원 성장을 억제할 수도 없잖아.’
그럼에도 새어나오려는 한 숨을 삼키며 류 현은 방을 나섰다. [팀장실]이라는 명패가 달린 문을 뒤로하고, 용잡이 팀 사무실을 나서면서 류 현은 미련이 남은 것 같이 생각했다.
‘그래도 네임드 몹 라인업이 바뀌거나 하진 않겠지?’
***
끄트머리에 달했어도 여름은 여름이라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 주변은 온통 녹색 빛이었다. 여름 특유의 풋내가 어디에도 가득 차있었다. 얕은 호흡에도 끈적거리는 것 같으면서도 상쾌한 풋내가 폐부를 가득 채웠다.
류 현은 별 재미도 없던 풀잎색 구분을 관두고 일행들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세 여자가 옹기종기 모여서 때 아닌 담소 시간을 갖고 있었다. 그녀들의 차림새만 아니었다면 카페 내부에서 흔히 볼 법한 모습이었다.
류 현은 그 자연스러운 광경에 깊은 의문을 느꼈다.
‘언제 저렇게 친해졌지?’
동료들이 서로 친해지는 건 권장할 만한 일이었지만, 류 현은 저 셋이 무슨 과정을 거쳐서 친해졌는지 도무지 추측조차 가질 않았다.
성격이 정 반대라고 해도 좋을 희란과 화련이 친해진 건 그래도 납득할 만 했다. 서로 부딪히는 쪽으로 반대가 아니고, 희란의 소극적인 태도를 반대편에 선 화련이 상쇄하는 모습을 자주 봤었으니까.
하지만 류 현은 화련과 승하가 저렇게 이마를 맞대고 이야기 하는 모습을 보게 될 거라고는 꿈에도 상상하지 못 했었다.
둘의 성격 차이 문제가 아니라, 화련이 거의 일방적으로 승하에게 틱틱 거리는 관계였으니까. 그렇게 된 원인이 될 만한 일이 한 두 가지가 아니라, 류 현은 대놓고 으르렁거리지 않는 이상 한동안은 지켜볼 생각이었다.
그러면서도 둘의 관계가 호전될 거라는 기대는 하지 않았다. 그렇게 되더라도 년 단위 시간이 필요할 거라고 봤었다. 호의든 적의든 간에 일방통행적인 관계는 그 말로가 좋을 수가 없다. 승하의 성격상 다툼으로 번질 가능성은 크지 않아보였지만.
거기에 희란에 이르러서는 대놓고 승하를 어려워했다. 대놓고 눈치 보는 건 예삿일이고, 승하가 부르면 화들짝 놀라서 화련 뒤에 숨는 일도 잦을 정도였다.
그런 그의 예상을 깨고, 세 여자가 머리를 맞대고 수군거리는 모습은 그에게 충격을 주었다.
‘아니 최근에는 붙어 있을 시간도 없었잖아? 따로 만났나?’
첫 퍼플 던전 원정 직후 저런 모습을 보였다면 그런대로 납득했을 것이다. 원수로 시작한 것도 아니고, 생사고락을 함께한 이와 친해지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었으니까.
그런데 그 던전 원정은 벌써 세 달은 더 된 일이고, 그 뒤로 두 달간 셋의 관계는 호전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기미가 보였던 건 아무리 멀리 잡아도 포탈 실험을 막 시작했던 삼 주 전쯤이었다.
실험 장소에 이 자리에 없는 백혜라까지 해서, 넷이서 같이 오는 경우가 꽤 있었다. 바뀐 미래 걱정하느라, 퍼플 던전 우선권을 확보하느라, 또 강 찬의 엘릭서 제조에 신경 쓰느라 별 신경을 쓰지 않았지만 분명히 눈에 띄는 변화였다. 그렇다곤 해도 이렇게 급격하게 변한 모습을 보여주리라고는 생각지 못했었다.
그것도 용잡이 팀의 두 번째 퍼플 원정이자, 공식 데뷔전을 치르는 오늘에 말이다.
‘그런데 아까 전부터 무슨 이야기를 저렇게 길게 하는 거지? 응? 왜 날 힐끔거려?’
류 현의 궁금증을 유발하는 광경을 연출하고 있는 세 여자는,
“...알겠지? 만약 던전 안에 샌 드래곤이 있으면, 뒤로 슥 빠져. 적어도 열 걸음 이상. 그 안이면 백프로 피어 영향권 안이야. 류 현 성격상 분명히 너희는 달려들지 말고 뒤로 빠져있으라고 하겠지만, 빠질 준비는 해두라고. 조금이라도 영향 받으면 제대로 볼 수가 없으니까. 조심하는 게 좋지. 그리고 뒤에서 잘 보라고. 류 현이 피어에 반응 하는 지 안하는 지.”
“그런데 피어에 잘 저항하는 체질도 있다면서요?”
“그거야 어디까지나 한 번 겪고 나서의 일이고. 체질에 따라서 두 번 만에 적응하는 사람이 있고, 열 번 해도 안 되는 사람이 있는 거지. 처음은 무조건 굳게 되어있어. 나도 샌 드래곤 처음 만났을 때 피어 때문에 죽을 뻔 했었다니까.”
“저어, 그런데 마스터는 응룡 때도 반응 안하셨던 거 같은데...”
“그러니까, 확실히 해두자는 거지. 솔직히 응룡은 제대로 된 피어라고 하기도 뭣한 수준이라서 얼버무리려고 들면 따지고 들기도 힘들어. 어쨌든, 겪어보면 내가 무슨 말 하는지 알게 될 거야.”
“으엑...그건 싫은데. 진짜 지금도 그 때 떠올리면 밥맛 떨어진다고요.”
“어차피 겪어야할 거고 너네 마스터가 어련히 알아서 모실까. 솔직히 말해서 류 현은 너무 싸고도는 데...”
“아아, 또 잔소리. 던전 안에서 마스터한테 실컷 들을 거니까. 밖에서는 사양하죠.”
조용히 아니, 대놓고 음모 모의 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