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1화 〉탐식마(貪食魔)
갑작스러운 류 현의 반응에 강 찬이 고개를 갸웃했지만, 류 현은 설명해 줄 생각이 없었다. 대신 류 현은 신중을 기하는 차원에서 재차 물었다.
“엘릭서라고요? 많이 들어본 이름이군요.”
“그렇지. 사람 부끄럽게스리. 확실한 건 이름에 걸맞게 들어가는 재료들이 지랄 맞다는 걸세. 이중 삼중으로 재처리를 해야 하니 원...솔직히 레시피를 봐도 레시피가 아니라 암호문을 해독하는 기분이야. 이제 초입인데 들어가는 재료들을 보면 완성만 되면 효과가 굉장하겠지만 닿을 수 있을는지...”
던전에서 나온 모든 게 그렇지만, 던전에서 튀어나온 레시피는 요리법처럼 그냥 그대로 따라할 만한 물건이 아니었다.
재료들이 그대로 적혀있는 게 아니라 재료들을 한 번 가공한 것들을 재료로 삼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 경우에는 대부분 1차 가공물을 만드는 법은 없고 그 안에 들어가는 재료들의 특징을 딴 이름들이 적혀있을 뿐이었다. 거기에 재료들을 전부 확보해도, 털어 넣고 대충 휘젓는 물리적 혼합뿐만 아니라, 마법적 처리가 필요했다.
이전 생에서 브류나크가 완전해지기까지 그토록 오래 걸린 이유가 이거였다. 그리고 유명 공방의 주인들이 땀내 나는 기술자들이 아니라 마법사인 이유 또한 이 때문이었다.
‘황금손’은 마법사에 가까운 존재였지 정식 마법사는 아니었다. 결국 그는 자기가 쥐고 있는 레시피를 해독하는 한 편 팔자에도 없는 마법 공부까지 해야했다. 마법사로 각성하지 못했으니 수고는 이중 삼중으로 들었다. 마탑과 거래를 하는 와중에 레시피를 흘리지 않으려는 노력까지 들었다. 강 찬이 자신 없어 하는 것도 큰 무리는 아니었다.
하지만 류 현은 눈앞의 남자가 도달하지 못할 거라고 추호도 생각하지 않았다. 도달한 미래를 알고 있을뿐더러, 도달해주지 않으면 곤란했다. 그렇게 되도록 전력으로 그를 밀어줄 것이다.
류 현은 힘주어 말했다.
“그리 말씀하시니 완성본이 더 기대되는 군요. 제가 도울 일이 있으면 사양 말고 말씀해주십쇼. 그리고 이것도 제가 시험해 보고 싶은데 되겠습니까? 아무래도 제 스타일 상 잔부상이 많은지라. 드는 비용은 제가 감당하도록 하지요.”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류 현은 회귀 이후 다친 적은 있지만, 부상을 던전 밖으로 끌고 나온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플레이어들의 비정상적인 회복력조차 압도하는 괴물 같은 회복력으로 어쩌다가 생긴 까진 상처마저 전부 회복해버리고 나왔다. 그 과정에서 물약을 쓴 경우는 정말 한손으로 꼽을 정도였다.
그마저도 던전을 나온 후 빨리 병문안을 가고 싶어서 버리는 기분으로 두어 번 들이부은 게 전부였다.
그 사실을 알 리가 없는 강 찬은 안 될 것 없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왜 안 되겠는가. 내가 오히려 부탁하고 싶네.”
류 현은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억누르며 조용히 미소 지었다.
‘이제 됐어. 빌어먹을 악룡 새끼만 신경 쓰면 돼.’
***
류 현은 자신에 대해서 평가가 박한 편이었다. 류 현이 스스로를 엄격하게 평가하는 자기 성찰적인 인간이라서가 아니라, 이전 생에서 겪은 사건들 때문이었다.
이전 생에서 류 현은 직접 협상에 나섰다고 좋은 꼴을 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협상에 결렬되는 건 양반이요. 그 자리에서 무력충돌이 일어나는 게 일상이었다. 그렇게 된 게 전부 그의 탓은 아니었지만, 사태를 진정시키는 데 적극적이지 않았던 것도 사실이었다.
사건 당시에는 그런 생각을 할 겨를이 없었지만, 용잡이 팀을 모으고 나서 동료들에게 들은 핀잔과 회귀한 후 시간이 지나면서 그 때 일들을 조금 객관적인 시각으로 볼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나서 류 현이 얻은 결론은 이거였다. 내 성격이 생각보다 개차반이구나. 세기말 같은 환경적인 부분도 영향이 컸지만, 본바탕을 뒤엎을 정도는 아니었다.
자각을 하고 나니 고치지 않을 수 없는 문제점이었다. 이전 생처럼 독행을 계속 하다가 용잡이 팀을 만나서 아지다하카에게 도전할 것도 아니니 고쳐야만 했다. 보잘 것 없는 정도가 아니라 스펙자체가 없는 상태에서 팀원을 끌어 모아야 하는 판인데, 스펙이 넘치다 못해 압도적일 때도 더럽다는 소리 듣던 태도를 유지하는 건 고집이 아니라 바보짓이었으니까.
원래 상대가 짜증날 정도로 무뚝뚝하긴 했어도 말종 수준은 아니었기에 친절함을 가장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롤모델로 삼을 대상도 가까이 있었다. 그냥 누나인 세아가 사람들에게 하던 어투를 최대한 따라했다. 그 결과 친절한 류 현씨 소리는 못 들었어도 개차반 소리는 면할 수 있었다.
그리고 화련은 류 현의 그런 가면을 뒤집어 쓴 듯한 태도를 가장 오래 봐온 이였다. 만난 건 승하가 더 빨랐지만, 만나는 횟수는 그녀가 훨씬 잦았다.
만나는 순간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가 가면을 뒤집어 쓰고 행동하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와, 진짜 안 어울린다. 라는 감상과 함께.
화련은 류 현이 팀원들 앞에서 가끔 보이는 본성의 편린 같은 모습을 보면서, 대체 왜 어울리지도 않는 태도를 유지하는 건지 의문을 가졌지만 말로 표현하진 않고 있었다. 상대를 속이려는 것보다 상대를 배려하려고 애 쓰는 것 같은데 거기다가 대고 찬물을 뿌릴 이유가 없었다. 가면이 깨질 때마다 드러나는 표정이 조금 귀엽다는 생각도 있었고.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기에 화련은 류 현의 태도를 보고 더욱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화련은 눈 비비적거리는 대신 몇 번 깜빡이고는 맞은편에 앉은 남자를 유심히 살폈다. 두 번 세 번 거듭 봐도 그녀의 대장이 맞았다.
그것도 ‘나 좋은 일 있어요.’라고 광고하는 것처럼 미소가 입가에서 떨어질 생각을 안 하고 있는 류 현이었다.
‘뭐야 갑자기 왜 이래? 뭐 잘못 먹었나?’
소집일이 돼서 팀 사무실로 와봤더니 이 상태였다. 화련은 웃는 얼굴이 무섭게 느껴질 수 있다는 말을 지금 이 순간 완벽하게 이해했다.
위스프가 뜬금없이 청와대를 날려버려도 무덤덤하게 ‘미친놈들이 드디어 일을 쳤군요.’ 라고 상황을 정리할 거 같은 인간이 다 풀어진 얼굴로 웃고 있었다. 과장 보태서 조금만 더 풀어지면 녹아서 흘러내릴 것 같았다.
자신이 대체 왜 이래야 하는지 스스로도 몰랐지만 화련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좋은 일 있으신가 봐요...? 마스터.”
“예? 그래 보이십니까?”
대꾸하면서도 류 현은 표정을 수습하질 않았다. 화련은 웃는 얼굴을 보면서 불안함을 느껴야하는 자신의 처지의 불합리함에 대해서 토로하고 싶은 기분이었다.
“네에...뭐 그래 보이네요. 통 안 웃던 분이...”
“아, 일이 좀 있었습니다. 지금 말씀드릴 건 아니고, 조만간 아시게 될 겁니다.”
그의 대답에 화련의 한쪽 눈썹이 쓱 올라갔다. ‘내가 알 게 될 일? 그런 게 뭐가 있지?’ 엘릭서에 대해서 알 수가 없는 화련은 그의 대꾸에 의문이 더 깊어질 뿐이었다.
화련이 뭐라 다시 묻기 전에 현관문이 열리며 두 사람이 사무실로 들어섰다. 희란과 승하였다.
“어? 벌써 다 와있네?”
“아, 안녕하세요. 마스터.”
희란의 인사에 대꾸하며 류 현은 헛기침을 한 번 흠 하더니 표정을 대충 수습했다. 그럼에도 풀어진 분위기는 그대로였지만.
승하가 류 현의 오른편에 자리를 잡고, 희란이 언제나처럼 화련의 옆에 붙자 류 현은 슬며시 운을 떼었다.
“전에 말씀 드렸던 던전에 대한 협회의 정밀 계측이 끝났습니다. 최소 퍼플, 혹은 그 이상일 수도 있다더군요.”
“어? 그럼 X던전 급이야?”
“아니요. 그 급은 아니고 굳이 따지면 퍼플이랑 X던전 사이급이겠지요. 뭐 정확한 수치가 나오는 것도 아니니 들어 가봐야 아는 일이겠지만요.”
결정체 반응 색을 이용한 던전 난이도 측정은 여러 모로 문제가 많았다. 블루 던전이라도 다 같은 파랑색이 아니라 옅거나 짙은 색의 차이가 있었고, 그렇다고 채도를 기준으로 수치를 내자니 의미 있을 정도의 차이도 아니었다.
결국 던전에 들어가는 플레이어들이 최대한 대비를 해서 조심하는 수밖에 없었다.
퍼플 던전이 최상위 던전이었던 반 년 정도 전이라면, 색깔이 진하든 말든 그냥 퍼플 던전이라고 했겠지만 지금은 퍼플 던전의 상위 던전의 존재가 알려졌으니 딱 잘라 말하기도 뭣했다. 더군다나 류 현에게 이것저것 부탁한 협회는 최대한 신중을 기해야하는 입장이었다.
“허가는 내준데?”
“예, 뭐 협회에서는 그럴 거라더군요. 일주일 안에 허가증을 내주겠다고 했었습니다.”
“와, 통 크게 나가네. 뭐 다른 이야기는 안했어? 청뢰 이야기라든지.”
“전혀요. 어지간히 눈치를 보고 있는 건지 정부에도 이야기를 해주겠다고 하던데요.”
“속 보이긴 하지만 나쁘진 않네. 그래서 넌 어쩔 거야?”
류 현은 대화에 낄 생각을 안 하는 팀원들을 한 번 슥 돌아봤다. 화련은 류 현의 얼굴만 빤히 쳐다보고 있었고, 희란은 화련의 행동이 당황스러운지 둘을 번갈아보며 눈치를 보고 있었다.
“지금 당장 정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솔직히 정부가 아무리 빨리 움직여도 결판나려면 최소 삼주는 걸릴 텐데요. 그러고 나서도 서류 절차 밟는다고 또 이주 정도 보낼 테고요.”
강원도 정선의 퍼플 던전에 들어갈 때도 그랬다. 팀원들 몰래 절차를 진행시키면서 정부 청사로 쳐들어가고 싶었던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허가가 떨어진다고 당장 들어갈 생각도 없었다.
다른 팀들이 퍼플 던전 같은 고위 던전을 들어가는 텀이 짧으면 반년에서 길게는 일 년이라는 걸 감안하면, 한 두어 달 늘어지게 쉬고 나서 들어가도 오버페이스 소리를 들을 정도다. 거기에 류 현은 요즘도 못해도 이틀에 한 번은 블루 이상의 던전 솔플을 계속하고 있었다. 체력문제가 아니라 던전을 구하기가 힘들어서 매일 가기 힘들 정도였다.
“하기야 뭐, 지금도 충분히 오버페이스니까. 좀 쉰다고 문제될 건 없겠네. 그런데 용케 쉴 생각을 했네? 이번에도 바로 들어가겠다고 하면 뭘로 깽판 쳐야 하나 했었는데.”
“사양하죠. 그런 건 한 번으로 충분합니다.”
그 때였다. 승하와 희란이 들어오고 나서부터 류 현의 얼굴만 빤히 보던 화련이 슬쩍 손을 들었다. 아닌 척 하면서 팀원들을 살피고 있었던 류 현은 곧바로 반응했다.
“예, 화련 씨. 말씀하시죠.”
“당분간은 또 휴식이라는 거네요?”
“그렇게 될 거 같습니다만.”
“그럼 마스터한테 부탁드리고 싶은 게 하나 있는데요.”
“부탁이요?”
류 현은 고개를 갸웃했다. 화련은 가끔 우는 소리를 내긴 했어도, 직접적으로 뭔가를 요구한 적은 거의 없었다. 그마저도 개인적인 것도 아니었다.
“실험하고 싶은 게 하나 있는데, 마스터 도움이 꼭 필요해서요.”
“제 도움이요?”
“네. 마력이 아주 많이 들어서요. 제 용량으로는 다 들이부어도 꿈쩍도 안 하더라고요.”
들으면 들을수록 류 현은 의문이 깊어지는 기분이었다. 류 현이나 승하에 비해서 작다 뿐이지 그녀의 용량도 결코 작다고 할 수준이 아니었다. 이전 생에서 화련은 오렌지 던전이 한계였다지만, 던전 플레이로 마력을 쌓아서 마력 용량을 넘어서는 데 사년을 넘게 소모했을 정도였으니까.
그런 그녀가 모든 마력을 퍼 부어도 안 되는 일이라니?
“무슨 실험인지 들을 수 있겠습니까?”
“저번에 말씀 드렸었던 거에요.”
“저번에?”
“포탈. 간이 포탈 실험이요.”
류 현은 윈스턴 경에게서 튜토리얼 이야기를 들으면서 자신이 일으킨 변화가 미비한 수준이었다고 생각했던 걸 수정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가 슬쩍 물꼬를 틀어줬다고 생각한 작은 물줄기가 그도 모르는 사이에 쏟아지는 강물이 되어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