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9화 〉탐식마(貪食魔)
팔락팔락 종이를 넘기는 소리가 용잡이 팀 사무실 안에 건조하게 퍼져나갔다. 그 외에는 아무런 소리도 없었다. 다섯 명 씩이나 되는 남녀가 자리한 것 치고는 이상할 정도로 조용한 분위기 속에서 류 현은 받아놓고는 마시지도 않은 커피잔만 만지작거렸다.
평소 같으면 주변의 반응이라도 살폈겠지만 그러기에는 그의 머릿속도 복잡한 상태였다. 아마 화련에게 말을 해두고 만난 게 아니었다면 사흘 정도는 조용히 생각을 정리하는 데 시간을 할애했을 것이다. 이틀 전 웨인과 함께 동석한 윈스턴 경과의 만남은 그 정도 위력이 있었다.
믿고 아니고를 떠나서 그냥 외면하기에는 지나치게 눈과 귀를 잡아끄는 이야기였다. 거기에 과거회귀라는 직접 겪고도 무슨 조화인지 모를 기적을 체험한 류 현으로서는 개소리라고 치부할 수도 없었다. 자신이 알고 있는 미래와는 조금씩 달라지고 있는 현실을 외면한다면 아지다하카를 이번에는 완벽하게 잡겠다고 설치는 제 행동도 의미 없는 짓이니까.
다만,
‘튜토리얼이라니 이게 무슨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도 아니고...’
그 튜토리얼이라는 단어가 그를 망설이게 했다. 너무 지나치게 친절한 단어 설정 아닌가? 뜻밖의 행운도 계속되면 의심부터 가는 것인데, ‘대소환’이라는 그의 입장에서는 악의 밖에 느껴지지 않는 거대한 재앙에 그런 친절함이라니, 말로 설명하기 힘든 꺼림칙함이 느껴졌다.
류 현은 속으로 되뇌면서 주변의 반응을 쓱 한 번 살폈다. 네 여자는 손에 쥔 서류를 유심히 뜯어보면서, 제 나름대로 어처구니없는 기분을 표출하지 않으려고 인상들을 쓰고 있었다. 그녀들로서는 류 현에게 보일 수 있는 최대한의 예의였다.
류 현이 웨인으로부터 받아서 그녀들에게 배부한 그 종이뭉치에는 이틀 전 윈스턴 경으로부터 들었던 각종 예언들이 사진과 함께 본문보다 더 긴 주석들이 달려있었다. 아마 지금 보고서가 아니라 음모론 소설을 보는 기분일 터.
물론 모두가 계속해서 그런 노력을 쏟아 부을 생각인 건 아니었다. 가장 먼저 서류에서 손을 놓은 건 승하였다.
“쓸데없이 주석만 왕창 달려 있네. 결국 하고 싶은 말은 이 예언을 확인해보고 싶으니까 협조 바란다는 소리 아니야?”
“정확히는 튜토리얼 수행 구역을 들어가 보고 싶다는 거지요.”
“하필이면 왜 한국이야? 뉴욕이랑 카이로에도 있다면서?”
원한다면 언제든 태풍의 눈이 될 수 있으면서도 정세에 무심한 승하를 보며 류 현은 쓰게 웃으며 말했다.
“아프리카 쪽은 그렇지 않아도 일이 한 번 터졌지 않습니까. 첫 습격 이후에는 별 일이 없긴 했지만 위스프에서 칼을 갈고 있을 겁니다. 그 친구들은 우리가 협회 소속 팀인 줄 알고 있는 듯 하니까요. 협회가 바보도 아니고 독이 잔뜩 오른 뱀이 가득한 항아리에 손을 넣을 이유는 없죠.”
단순 정찰도 아니고, 새롭게 발견된 최상위 던전을 공략하는 큰 행사다. 규모를 아무리 최소한으로 줄이더라도 눈에 안 뜨일래야 안 뜨일 수 없을뿐더러, 협회는 이미 아프리카 지부 라인에 커다란 구멍이 있음을 몸소 확인까지 했다.
아프리카 원정 당시에도 용잡이 팀과 두 명이라는 소규모 인원에 대한 정보조차 제대로 숨기지 못했는데, 최상위 던전 첫 공략이라는 막중한 임무를 띤 원정대에 대한 정보를 숨긴다? 턱도 없는 소리다.
“미국도 곤란하지요. 협회의 괴수 대응망 구축에 제일 비협조적인 국가 아닙니까. 저번에 웨인 씨가 미국에서 블루 던전을 구해주긴 했었습니다만, 남아도는 블루 던전이랑 새로운 최상위 던전을 비교하는 게 더 웃긴 일이죠. 이집트와 다르게 그 쪽은 스스로 대처할 수 있다는 자신감도 있을 테고요.”
검성이나 웨펀 마스터처럼 당당하게 한 손안에 꼽히는 세계구급 플레이어는 배출해내지 못했지만 미국은 미국이었다. 이전 세기부터 세계를 재패하다시피 한 국가의 저력이 어디가지 않았음을 류 현은 잘 알고 있었다.
3차 ‘대소환’ 이후 협회가 괴멸된 상태에서 미국은 그동안 플레이어와 관련해서 폐쇄노선을 고수하며, 숨겨두었던 발톱을 드러내었다. 그가 기억하는 미국은 완전한 아군은 아니었어도 유능한 협력자였다. 아지다하카와의 일전도 바다 건너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저력을 유감없이 발휘한 미국의 도움이 있었기에 가능했었다.
“그래서 제일 만만한 한국에 비벼보겠다는 건가?”
“그런 면도 없진 않겠습니다만, 아마 승하 씨를 노리고 이러는 거겠지요. 겸사겸사 아티펙트도 빌리고 말입니다.”
류 현의 말을 들은 승하는 미간을 찌푸리며 시선을 아래로 향했다. 류 현이 고심하기 시작한 그녀를 멀거니 바라보고 있자, 승하의 오른 편에 앉아있던 백혜라가 이어받듯이 말했다.
“그것뿐이었나요?”
“그것뿐이라니요?”
“용잡이 팀에 대한 협조 요청은 없었나요?”
류 현은 신기한 걸 보는 기분으로 백혜라를 한 번 마주 보았다. 어두운 녹색빛의 눈이 흔들림 없이 그를 직시했다.
‘주변에 보고 배울 어른은 저 상태인데 어떻게 이렇게 똑 부러지게 큰 건지.’
꽤나 실례가 되는 감상을 품으며 류 현은 대꾸했다.
“따로 요청받은 건 없었습니다. 그냥 승하 씨한테 말이나 잘 전해달라고 하더군요. 어지간히 승하 씨가 어려운 모양이던데요.”
류 현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고개를 숙이고 있던 승하가 투덜거렸다. 순식간에 사무실에 자리하고 있던 이들의 시선이 그녀에게로 쏠렸다. 그녀의 성정을 아는 이들이 모여있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지들끼리 수군덕거려서 합의보고, 멀쩡한 사람 이상한 사람 만들어 놓고 부탁을 하고 싶대?”
“솔직히 그 쪽이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이해 못할 것도 없죠. 저랑 처음 만났을 때만 해도...”
“...너 진짜 내 친구 맞아?”
“친구라고 생각하니까. 이런 말도 하는 겁니다.”
“말 놓으라고 해도 자꾸 존댓말 하고, 지금 봐도 협회 편들고, 너 진짜 수상해.”
“그럼 앞으로 수상한 놈 집에 술 마시러 오시진 마시죠.”
한 번에 승하를 격퇴하는 데 성공한 류 현은 혜라에게로 다시 시선을 되돌리곤 말을 이었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협회 측에서는 승하 씨보다 우리 팀이 더 꺼림칙할 겁니다. 스폰서가 있긴 하지만 성장속도에 대한 의문을 해소해 줄 정도로 엄청난 스폰서도 아니고.”
류 현의 말 몇 마디로 태양그룹이 별거 아닌 스폰서가 되었다.
“그런데도 검성과의 커넥션에, 출저를 알 수 없는 레시피를 내놓는 데 들어맞으니 아마 제가 외계인을 잡아다가 고문했다고 해도 믿을 겁니다. 거기다가 청뢰와 유성우까지 보유하고 있으니, 상황만 오면 대놓고 견제각을 보겠죠. 아마 승하 씨만 아니었으면 저랑 이런 식으로 이야기를 진행할 생각도 안 했을 거라고 봅니다.”
아티펙트 부분에서 혜라가 돌연 옆에 앉은 승하를 째릿 노려봤다. 유니크 아티펙트 두 점에 대한 지분문제는 아무래도 혜라와 상의를 거치지 않고 승하가 독단으로 정한 모양.
하지만 노려보는 게 전부였다. 뒷말은 없었다.
“그렇게 잘 아시면서 뭐하러 협회를 도와요? 그 치들이랑 연관 되서 좋았던 기억도 없는데.”
화련이 뾰루퉁한 얼굴로 말했다. 그녀의 머릿속에는 위스프의 공격과 그 이전에 있었던 ‘광대들’의 공격이 재생되고 있었다. 후자는 협회 탓이라고 볼 수 없었지만, 사람 마음이라는 게 제 일이 되면 이성적이기 어려운 법이었다. 류 현도 그걸로 타박할 생각은 없었다.
“협회를 돕는 다기보다도 겸사겸사 협회한테서 좀 뽑아먹자는 거죠. 어차피 X던전은 우리끼리 조용히 해결할 수 없으니까요. 이 후 협력관계도 유지하고 말입니다.”
그의 말에 켕기는 구석이 있었던 승하가 뒷머리를 긁적거리다가 좌중의 반응을 살폈다. 그녀를 노려보거나, 멋대로 X던전 발표 기자회견을 한 것에 대해서 한 소리하는 이는 없었다. 머쓱해진 승하는 한 번 헛기침을 했다.
“너무 낙관하는 거 아냐? 나 같으면 너랑 나 따돌리고 지들끼리 해먹으려고 할 텐데.”
“누구를 따돌린다고요?”
류 현은 되물으며 이를 드러내며 호전적인 미소를 지어보였다. 드문 그의 모습에 화련과 희란은 움찔했지만, 술친구 하면서 별 괴상한 소리도 주고받은 승하는 낄낄거리면서 앞에 내버려둔 서류를 뒤적거리다가 한 면을 손가락으로 짚었다.
“이 팀 구성이 사실이면 만만치는 않을 걸? 솔직히 네 팀이 세긴 해도 공식기록은 없잖아? 퍼플 던전 원정은 비공식이라고 하지 않았어?”
“예, 비공식이었죠. 승하 씨까지 끼어있는데 공식 데뷔전 삼기는 좀 그렇잖습니까. 누가 봐도 검성의 덤이라고 생각할 텐데. 그런 인식 박힐 바에야 차라리 알 사람만 아는 게 낫지요.”
“그렇게 말하니까 왠지 서운하네.”
“뭐가 서운합니까. 어차피 따로 팀 꾸리실 거면서. 그 두 사람한테서는 연락 안 왔습니까?”
“누구? 아, 민아랑 수혁이? 뭐 연락이 오긴 했는데 당장은 나오기 힘들다고 하더라고.”
“...나오는 걸로 결정했답니까?”
“뭐 지들은 나오고 싶어 하던데 그게 마음대로 되나. 구정아가 바보 등신도 아니고. 걔들 정도면 아무 곳에나 가도 길마급 대우 받을 수 있을 정도인데 그냥 놔줄 리가 없잖아?”
전혀 모르는 이름들이 언급되기 시작하자 뭐라고 나서려던 화련은 입을 꾹 다물고 희란과 같이 눈알만 데룩데룩 굴려서 둘을 번갈아가면서 바라보았다.
혜라는 아는 이름이 나오자 움찔했지만, 이어지는 뒷내용에 입을 꾹 다물었다. 아무래도 지금 이 자리에서 끼어들어서 짧게 묻고 끝낼 이야기 같진 않았기 때문이었다.
“나오더라도 아마 해가 바뀌어야 정식 탈퇴가 가능할 걸. 그 때 까지는 이야기 해봐야 별 소용없어. 그래서 어쩔 셈이야? 지금 상태로는 억지 부리기도 좀 그렇잖아? 너네 협회 가서 레이팅 레벨 갱신도 안했다면서? 뭐 협회도 네 팀이 퍼플수준은 되는 거 알긴 하겠지만...”
“확실히 공식 기록이 없으면 억지 쓰기도 좀 그렇죠. 그래서 만드려고요.”
“응? 어떻게? 한국에 노는 퍼플 던전 같은 거 없잖아?”
그녀의 말대로 현재 확인된, 한반도 내에 존재하는 퍼플 던전은 두 곳이다.
원래 세 곳으로 일 년 넘게 유지되었지만 류 현의 일행들이 한 곳을 클리어하면서 두 곳이 되었다. 그리고 그 남은 두 곳은 한참 전부터 주인이 정해진 던전이었다.
‘예거즈’, ‘산군’과 ‘터주’의 연합팀이 그 던전 문을 두드리기 위해서 준비 중이었다. 김수혁과 채민아가 당장 발을 빼려는 엄두를 못내는 것도 이 때문이었다. 그 둘은 위험한 전장으로 가는 전우들을 못 본채 할 만큼 독하지 못했다.
어쨌든 오랜 시간 주인을 못 찾고 무기한 보류 상태였던 정선의 퍼플 던전과는 달리, 남은 두 곳은 협회의 입김으로도 어떻게 할 수 없는 곳들이었다. 다른 국가의 퍼플 던전은 논할 대상조차 되지 못한다.
하지만 류 현은 아무런 문제도 없다는 듯이 미소 지었다. 뜬금없는 미소에 당황하는 다른 이들과 달리 화련은 그 미소 속에서 불길한 예감을 느꼈다. 본 적이 있는 미소였다.
‘그 때, 블루 던전 처음 끌고가서 우리 굴릴 때...!’
“노는 던전을 찾아서 들어가겠다고 하면 되지요.”
“퍼플 던전이 무슨 오백원짜리 동전도 아니고...”
“있습니다. 저희 누나가 지내는 병원 뒤편에.”
“뭐?”
얼빠진 얼굴로 류 현을 바라보는 승하를 곁눈질 하며 화련은 의심이 확신이 되는 것을 느꼈다. 그녀의 대장에게 곱게 죽지 못하게 만드는 살이 끼어있는 게 분명하다고. 그리고 그 살이 자신에게도 단단히 틀어박혔다는 것 또한.
‘진짜 이 인간 숨기고 있는 게 대체 뭐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