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98화 〉탐식마(貪食魔) (98/429)



〈 98화 〉탐식마(貪食魔)

‘이런 씨발.’

류 현은 그 이상으로 자신의 심경을 잘 표현할 수 있는 말을 생각해낼 수가 없었다. 눈앞에  남자는 잊고 머리를 감싸 쥐고 싶은 그런 기분이었다.


‘이전에도 이랬었나? 아니야, 협회가 아무리 마탑 측에 입막음을 해뒀어도 3차 ‘대소환’이 터지면 입단속은 무의미해져. 애초에 그 때 협회는 괴멸상태였잖아? 아무리 비밀엄수를 한다고 해도 새어나오지 않을 수가...’

머릿속이 단박에 난장판이 되어버렸다. 미리 생각해 두었던, 아티펙트 유성우에 대한 최저한의 협상 조건이나, 협상 체결 후에 내뱉을 어르는 소리도 단박에 쓰레기가 되어버렸다.

류 현은 맹렬하게 머리를 굴려서 이전 생의 기억들을 뒤적거렸지만, 눈앞의 노인이 한 이야기 비슷한 것도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들었다면 잊었을 리가 없다. 튜토리얼이라니 협회장이라는 지위만 아니었으면 헛웃음도 안 나오는 소리 아닌가? 개소리로 듣고 넘겼더라도 이 정도로 황당무계한 소리면 기억에 남을 법도 한데 전혀 기억이 없었다.

그렇다면 남은 가능성은 하나. 이전 생에는 없었던 변수 때문에 풀리지 않았던 정보가 던전에서 풀렸다는 것! 비약이라고 해도 할 말 없을 심증뿐인 추측이었지만, 그는 이미 선례 하나를 알고 있었다. 이전보다 훨씬 빨리 등장한 블랙 던전이라는 불쾌한 변수를 말이다.

‘대체 왜...? 내가 한 일이라고 해봐야...청뢰를 예정보다 빨리 꺼낸 게 문제였나? 아니면 검성이 ‘예거즈’를 나와서? ...시발  아지다하카 그 새끼만 잡으면 된다고. 대체 왜 이렇게 꼬이는 건데?’

류 현은 저도 모르는 사이에 이마를 감싸 쥐었던 오른손으로 제 뒷머리를 헤집는 중이었다. 그 모습을 잠자코 지켜보던 노인은 류 현이 헤어 나올 기미가 보이질 않자 헛기침을 했다.

“반응을 보니 이해한 것 같아서 다행이오. 뜬구름 잡는 소리 하지 말라고 화를 내면 어찌한다 하고 고민했었지만, 아무래도 짚이는 구석이 없는 않은 모양이오.”
“...예에, 협회장씩이나 되시는 분이 뜬구름 잡는 소리를 하러 여기까지 오실 거 같지도 않고요.”

일단 대꾸는 했지만 류 현의 머릿속에 불어 닥친 폭풍은 수그러들 기미가 보이질 않았다. 상대가 이 노인이 아니었다면 당장 자리를 물리고 생각을 정리할 시간을 가졌을 것이다.

“그리 생각해주니 고마울 따름이오.  가지 묻고 싶은 점이 있는데 질문해도 되겠소?”
“말씀하시죠.”
“방금 전의 반응으로 볼 때 검성이 발표한 X던전의 소재를  현군이 공유하고 있다고 생각되는데 맞소?”
“...예.”


숨겨온 일이긴 하지만 영원히 숨길 생각도 없었기에 류 현은 순순히 대꾸했다. 노인의 말처럼 아까 반응으로 자백한 것과 다름없었고, 협회 또한 블랙 던전 원정때 손을 벌릴 스폰서 후보 중 한 곳이었다.


‘더군다나 협회가 이런 정보를 쥐고 있다면...내 패를 까서라도 협력관계를 유지해야 해.’

괴수와, 인간과의 싸움으로 점칠 된 이전 생에서 그가 배운 교훈 중 하나였다. 그에게는 정보가 너무 부족했다. 능력의 특성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솔플로 힘을 키우고, 타고난 성정 때문에 어느 곳에 소속되는 것조차 거부한 그의 발목을 번번이 잡은 건 수적 열세와 정보 부족이었다.

남들보다는 앞서지 못하더라도 비슷한 수준으로는 알아야만 한다.  정도로 충분하다. 그에게는 이미 한 번 세계 최강을 찍어봤던 경험이 있으니까. 그리 생각했었다. 극히 단편적이긴 해도 미래를 알고 있다는 것에서 오는 자신감과 악룡을 상대로는 장담할 수 없지만, 그 이하의 상대에게는 먹힌다고 장담할 수 있는 무력에 대한 자신감이었다.

승하가 발견한 블랙 던전을 보게 되었을 때도 당황하긴 했지만, 이 믿음은 흔들리지 않았다. 지금 당장 블랙 던전이 터져도 대처할 자신이 있었으니까. 아무리 빨리 수습하더라도, 블랙 던전이 있는 파주는 개판이 되겠지만 그런 걸 신경 쓸 정도로 자애심이 넘치진 않았다.

그런 잡다한 것들을 생각할 시간에 엘릭서에 대한 수소문에 신경 쓰는  낫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노인의 말은 그 오만을 깨부쉈다. 미래가 바뀔 수 있다는, 아니 이미 바뀌었다는  이야기를 듣자 류 현은 자다가 찬물을 뒤집어 쓴 기분이었다. 기묘한 불쾌감은  오한으로 바뀌었다.

‘...그래도 설마 갑자기 다 건너뛰고 아지다하카가 바로 튀어나오진 않겠지?’


놀라다 못해 오죽하면 그런 생각이 들 정도였다. 표정으로 드러내진 않았지만.

류 현이 무표정 속에 그런 복잡한 심사를 감추고 있다는 걸  방도가 없는 노인은 계속해서 말했다.

“류 현군을 찾아온 이유는 그에 대해서 부탁하고 싶은 것이 두 가지 있기 때문이오.”
“하나는 알  같군요. 검성을 설득해 달라는 말씀입니까?”
“맞소. X던전의 존재를 공개하고도 그 소재지를 밝히지 않은 걸로 봐서는 검성은 외부세력의 지원을 받을 생각이 없어 보이더군. 그녀가 처한 입장을 생각해보면 이해 못할 일은 아니지만, 방금 류 현군도 봤다시피 개인의 고집을 들어줄 만한 사안이 아니오.”
“예,  그렇지요. 그 부분은 제가 설득해보겠습니다.”
“우리도 되도록 그녀를 자극하고 싶지는 않지만...뭐라고 하셨소?”
“제가 설득해보겠다고 말씀드렸습니다만.”
“...정말로 그래  수 있소?”
“어려운 일도 아니고  한마디 전하는 게 전부인데 못할 이유가 뭐 있겠습니까. 다만 확실히 설득한다고는 확언을 못 드립니다만...”
“그거면 충분하지. 고맙소. 이 부분은 확실하게 보답을...”
“아직 확정되지도 않은 걸로 보답 운운하는 건 조금 아닌 것 같고...다른 부탁은 뭔지 듣고 싶군요.”


노인은 얼떨떨한지 떨떠름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류 현은 승하에 대해서 대외적인 이미지와 실제 그녀가 얼마나 뒤틀려있는지 생각해보며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다. 그렇게 소탈하다 못해, 생각하는 것도 귀찮아하는 이가 어쩌다가 이런 이미지가 된 건지, 어이없을 따름이었다.


‘알아서 검성 교섭창구로 생각해준다면야 나야 좋지만.’

노인은 할 말을 고르느라 꽤 오래 머뭇거렸다. 류 현이 무슨 부탁이기에 저렇게 머뭇거리나 하고 상상해보기 시작했을  노인은 입을 열었다.

“검성이 X던전 원정에 합류를 허가했을 때 이야기오만은, 그렇게 되었을 경우 아티펙트 유성우를 대여를 해주었으면 하오.”
“유성우를 말입니까...?”

류 현은 턱을 긁적거리며 고개를 기울였다. 류 현의 반응을 어떻게 해석한 것인지 잠자코 있던 웨인이 끼어들어왔다.

“대여비에 대한 보상은 할 섭섭하지 않게 챙겨 드릴 생각입니다. 아티펙트의 존재에 대한 비밀엄수는 물론이고요.”
“아니, 곤란하다는 뜻이 아니라 제 독단으로 결정할 만한 문제가 아니라서 그렇습니다. 온전히 용잡이 팀 소유가 아니라, 원정에 참여한 검성 또한 지분을 가지고 있으니까요.”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류 현은 전혀 딴 생각을 하는 중이었다. 승하는 류 현이 협회에 빌려주길 원한다고 하면 흔쾌히 까지는 아니어도 반대는 하지 않을 것이다.

청뢰 때도 그랬지만, 그녀는 유니크 아티펙트에 대한 정말 최소한의 권리만 가져가고 그 뒤로는 관심도 보이질 않고 있었다. 그 본인이 아티펙트를 적극적으로 사용하는 부류가 아니라서 그런지는 몰라도 눈에 보이는 반응은 집착과는 거리가 멀었다. 엊그제 화련을 만나서 전해들은 반응만 봐도 그랬다. 유성우에 정말 관심이 있었다면 대놓고 귀찮은 짐 취급은 안했을 것이다.

 현을 놀라게 한 것은 협회장이 용잡이 팀의 소유물을 빌리겠다는 투로 부분이었다.

‘대놓고 지분 내놓으라고 하는  까지는 아니어도 견제는   알았는데 뭐지? 이렇게 순순히 소유권을 인정해준다고?’


보통 물건이 아니라는 건 최초로 발견한 협회 측이 모를 리가 없을 것이다. 거기다가 웨인 크로이츠라는 경험 많고 협회의 핵심전력인 플레이어도 청뢰와 유성우가 부딪히는  장면을 봤었다.


법을 뜯어고치는 식으로 어거지를 부릴 수 있는 국가와는 입장이 다르긴 하지만, 억지를 부릴 수 있는 여지가 아주 없는 것도 아니었다. 마음만 먹으면 던전에서 나온 수상하기 그지없는 환각 작용을 일으키는 식물들을 통제하는 것처럼, 위험물로 지정해서 압류한 뒤에 억지를 부릴 수도 있는 것이다.

그래서 승하에게 유성우를 떠넘기다 시피하고 잠수  것인데, 이렇게 순순히 소유권을 인정하는 발언을 할 줄이야.

‘어지간히 급한 건가? 아니 그럼 청뢰 쪽을 비비는 게 낫지 않나?’

머릿속은 복잡했지만 호재인  확실했다. 협회가 인정해준다고 귀찮은 일이 안 생기진 않겠지만, 귀찮은 일이 발생할 수 있는 상대가 하나 줄어든 건 확실했으니까.


“확실히 그렇군. 그럼 그 부분에 대해서도 검성에게 말을  전해줄 수 있겠소?”
“어려운 일도 아니고  몇 마디 더 전하는 건데   건 없지요. 그런데 말씀하시는  듣다보니 의문점이  가지 생겨서 말입니다.”
“어려운 부탁을 들어준다는  그까짓 질문을 사양하겠소. 마음껏 물어보시오. 대답할 수 있는 한도 내에서 성의껏 대답해 드리겠소.”
“그럼 우선 빛의 글자가 새겨진  석비에 대한 이야기입니다만...”


 현에게 있어서 어렵지도 않고, 거절은 상상도 안 가는 그냥 친구에게 건네는 단순한 부탁에 불과했지만 상대가 알아서 착각하고 주겠다는  사양할 생각은 없었다.


 현은 속으로 비어져 나오려는 웃음을 삼키며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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