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7화 〉탐식마(貪食魔)
거의 이 주 만에 화련과 대면하자마자 류 현은 뭔가 일이 잘 못 돌아가고 있다는 걸 느꼈다.
지난 이주 간 세아 옆에 붙어서 보낸 평안했던 시간이 뭔가 잘 못 되었던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도 그럴 것이, 간만에 보는 화련의 얼굴 표정이 누가 봐도 심각한 문제가 있는 것 같아보였기 때문이었다.
애써 부정하고 싶은 불길한 예감 속에서 류 현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희란 씨한테서 아무 말 못 들으셨습니까?”
“...? 마스터 상태가 별로라는 소리 밖에는 못 들었는데요.”
“예?”
‘...잠깐만 내가 말을 안했었나?’
아프리카 원정이 끝나고 귀국 후, 유성우를 내팽개치다시피 승하에게 맡기고 침묵한 건 류 현 나름대로의 계산이 있어서 한 행동이었다.
이미 청뢰라는 규격외의 아티펙트를 보유한 용잡이 팀이 유성우까지 보유하게 될 경우, 협회 입장에서는, 아프리카 원정 직전에 암묵적인 동의를 했던 어쩌든 견제를 할 수밖에 없다. 화장실 들어갈 때 마음과 나갈 때 마음이 다르다고들 하지 않는가?
협회 입장에서는 쉽사리 건드릴 수 없는 정도가 아니라, 건드릴 생각조차 하기 싫을 승하에게 아티펙트를 맡기고 잠수 탄 것도 그 때문이었다. 일종의 밀당이라고나 할까. 다른 일에서 전부 신경 끄고 조용히 세아와 시간을 보내고 싶다는 개인적인 바람도 적극적으로 반영한 결과였지만.
‘아니야 분명히 화련 씨 퇴원하기 전날에 말을 해뒀었는데...? 아무리 정신없었어도 그건 분명히 기억나.’
리치를 잡은 이 후 화련이 정신을 잃으면서 조금 미뤄지긴 했지만, 류 현은 계획을 포기하진 않았다. 희란에게 대강이나마 잠수 타는 이유에 대해서 미리 말을 해뒀다. 화련이 의식을 찾은 이후에 일이 꼬여서 제대로 대면하진 못했지만, 희란이 어련히 알아서 전했으려니 하고 생각하고 한가로운 한 때를 보낸 것인데. 전해듣지 못했다니?
‘...아니, 희란 씨는 그 뒤로도 꼬박꼬박 병문안도 왔잖아. 그런데 안 전했다고?’
류 현의 표정이 실시간으로 썩어 들어가자 화련이 재빨리 수습에 들어갔다.
“덧붙이자면 희란이 상태도 많이 안 좋아요.”
“많이 안 좋으시다고요? 엊그제만 해도...”
“...마스터 앞에서 티 낼 정도로 바보는 아니니까요. 안 그래도 힘드실 텐데.”
류 현은 떨떠름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러면서 속으로는 자신에게 온갖 악담을 퍼부었다.
‘이 멍청이, 얼마나 넋이 나가있으면 주변에서 그 난리를 쳐도 몰라?’
지금 생각해보면 이상한 점이 한 두 가지가 아니었다. 환자가 불편할 정도로 자주 찾아오진 않던 희란이 거의 이틀 간격으로 병문안을 찾아왔고, 화련에 대해서 물으면 대답을 얼버무렸다.
승하가 한 번도 찾아오지 않은 것도 이상했다. 성격상 맡고 있는 유성우가 거치적거린다고 한 번 징징거릴 법도 했는데 통화로 밖에서 만날 여유 생기면 연락하라고만 하고 내내 침묵 중이다. 일단 병원 앞까지 찾아와서 통화로 시위해야 정상처럼 보이는 인간이 말이다.
설마하니 누이의 소식을 듣고 완전히 넋이 나갔다고 생각해서 그랬을 줄이야. 결과적으로 주변 변화도 눈치 못챌 정도였으니 영 틀린 말도 아니었지만.
‘...그러고 보니 퇴원한 후에 연락도 안했었지.’
걱정스러운 눈초리를 보내고 있는 화련을 슥 한 번 보며 류 현은 생각했다.
리치 사냥 도중에 정신을 잃은 팀원이 정신 차리는 것만 대충 확인하고 신경을 끄다니 확실히 제정신은 아니었던 모양.
‘임의 휴가도 끝이군.’
본의 아니게 멋대로 휴가를 내고 잠수 탄 꼴이 되어 버렸지만, 일은 이미 벌어졌으니 수습을 해야 할 터.
“화련 씨, 죄송하지만 희란 씨를 좀 불러주시겠습니까? 제가 좀 정신이 없어서 말이 전달 됐는지도 확인을 못했는데, 희란 씨도 많이 놀라신 것 같군요. 제 불찰입니다. 두 분 다 이런 토벌전은 처음이셨을텐데...살피지도 못하고.”
“...진짜 괜찮아요?”
화련의 자그마한 머리가 좌우로 갸웃거리며 그의 기색을 살폈지만, 아무리 뜯어봐도 평소의 류 현이었다.
“예, 배려해 주신 덕에 푹 잘 쉬었습니다. 누님 상태도 꽤 안정되었고요.”
“그렇게 말씀하시면...알겠어요. 부르죠. 그런데 그 여...아니 승하 씨는요?”
“...그 분은 조금 있다가 부르죠. 아마 유성우 들고 와서 저한테 패대기 칠거 같은데. 지금 웨인 씨한테 연락할 건데, 약속 일자 받은 다음에 부르는 게 낫겠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저도 그거 가지고 있기 좀 부담되거든요.”
“...아주 질색을 하던데. 나중에 그 여자가 알고 깽판 쳐도 전 몰라요?”
“뭐 친구가 물건 맡겼다고 두들겨 패겠습니까. 술이나 한 번 사면되겠지요.”
“근데 웨인 씨한테 지금 연락하셔야겠어요? 그 쪽도 보나마나 당장 찾아오겠다고 난리칠 텐데...좀 더 쉬는 게...”
화련이 말을 흐리는 의도를 류 현은 바로 읽어내었다. 진정 되었니 어쩌니 해도 세아의 상태가 호전된 아니니 꽤나 눈치가 보이는 모양. 류 현은 쓴웃음을 속으로 삼키며 그녀를 다독였다. 우습게도 세아의 병세가 어지간한 수단으로는 어떻게 할 수 없다는 걸 가장 잘 아는 건 자신이니까.
“쉴 만큼 쉬었습니다. 원래 이쯤에 연락할 생각이었고요. 시간을 더 끌면 우리 쪽에서 딴 생각하고 있다고 오해할 수도 있지 않습니까.”
“그건 그렇지만요. 그럼 희란이는 오늘? 아님 내일?”
“최대한 빠른 게 좋겠지요. 희란 씨 의향에 맞춰서요.”
“걔는 물어보면 지금 당장이라도 오려고 할 텐데...마스터부터 해보세요. 혹시 내일 보자고 할 수도 있는데 그 쪽도 내일이라고 하면 좀 그렇잖아요? 이렇게 오래 잠수 탔는데.”
“그렇게 하죠. 본국으로 돌아갔다고 들었으니 내일 오는 건 무리겠지만 말입니다.”
류 현은 별 생각 없이 휴대폰 화면을 띄우고 전화를 걸었다.
***
식기가 서로 부딪히는 소리가 건조하게 방안에 울렸다. 류 현은 면을 휘젓던 걸 멈추고 맞은편을 힐끗 살폈다. 그의 맞은편에는 낯선 노인 하나와 익숙한 청년 하나가 자리하고 있었다. 젊은 쪽은 그도 익숙한 웨인 크로이츠였고, 노인은 안면은 없었지만 한 번 소개 받는 것만으로도 잊을 수 없는 거물이었다.
중국집에는 그다지 어울리지 않는 회색과 검정의 정장차림의 나이 차이 많은 두 남자는 사전에 이러기로 입이라도 맞춘 것처럼 음식이 나온 이후 침묵을 고수 중이었다.
음식을 씹어 삼키는 소리마저 최대한 억누른 침묵 속의 식사가 계속 되었다. 서두르거나 눈에 띄게 천천히 먹는 것도 아닌 그 모습에 류 현은 한숨을 삼키며 젓가락을 식탁 위에 내려놓았다. 맞은편이 눈치 채지 못하도록 조심스럽게.
‘능력을 얻고 나서 굶어 뒈지는 일은 있어도 체할 일은 없을 줄 알았더니...’
도무지 음식이 넘어가질 않았다. 이름을 말하는 것만으로도 혀가 돌아갈 것 같은 생소한 이름의 중국음식들은 병실에 누워있을 누군가가 떠오를 정도로 훌륭한 맛이었지만, 천하의 진미도 마음이 불편하면 종이 씹는 것보다 못한 법이었다. 지은 죄가 없진 않으니 불평하기도 뭣했다.
‘...이럴 작정으로 여기로 부른 건가?’
설마하니 그런 유치할 짓을 할 리가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한 편으로는 그런 생각마저 들 정도였다. 의심으로 그칠 수밖에 없는 상대였지만.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면서 류 현은 냅킨으로 입가를 훔치고 있는 노인을 곁눈질 했다.
‘설마 협회장이 바로 날아올 줄이야.’
잘 쳐주면 50대 끄트머리에 집어넣어 줄 수 있을 것 같은 이 노신사야 말로, 류 현이 생전 느껴본 일이 없는 체증을 느끼게 만든 원인 중 하나였다.
클라우드 윈스턴 경. 플레이어 협회의 협회장이자, 협회가 설립되기 이전 2차 ‘대소환’으로 인한 난장판을 수습하는 데 지대한 공을 세워 작위 수여까지 받은 유명인이다. 유명세 치고는 대외활동이 극단적으로 적은 터라, 중절모를 푹 뒤집어쓰고 다니면 보통사람이 볼 때 양복 차림의 노신사로 보일 뿐이지만, 류 현이 일상복귀를 선언한 지 이틀 만에 만날 수 있는 인물은 아니었다.
‘노인네 상대는 질색이라고 젠장.’
누가 봐도 벼르고 있다가 소식이 들리자마자, 입국해 들어온 상황. 류 현이 느끼는 거북함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이었다.
‘그냥 검성한테 짬 때리고 모른 척 할 걸 그랬나. 안 그래도 그거 써먹으려면 한참 걸릴 거 같은데...’
자청한 고생이었지만 그런 생각마저 들 정도였다.
류 현이 이런 저런 생각을 하는 동안 두 남자는 식사를 마쳤다. 말문을 튼 건 역시 웨인이었다.
“입에 맞지 않으신가 봅니다.”
“아니요, 요 근래 들어서 한 끼에 이만큼 먹은 게 언제인지 기억도 안날 정도입니다. 원래라면 제가 괜찮은 가게를 소개해야하는 데, 입장이 반대가 되어버렸군요. 이것 참.”
거짓말은 아니었다. 분위기가 거북해서 중간에 식사를 중단하긴 했지만, 이주가 넘는 기간 동안 류 현은 세아가 먹는 정도만 먹었으니까. 하루 종일 침대에 누워있는 환자의 식사량이라고 해봐야 뻔한 것이다.
도저히 더 먹을 기분도 아니었고, 이런 분위기가 달갑지도 않았기에 류 현은 먼저 운을 떼었다.
“급하게 오시게 해서 죄송하지만 식사가 끝나셨다면 슬슬...”
“그렇지 않아도 어떻게 운을 떼야할까, 고민 중이었소. 어디서부터 시작을 해야 할까...”
말을 받은 것은 노인이었다. 웨인은 나는 병풍이요 라고 말하는 것처럼 아무 말 없이 깍지 낀 제 손만 만지작거렸다. 다행히 노인의 침묵은 길지 않았다. 노인은 더없이 진중한 어조로 말했다.
“내가 하는 이야기가 조금 진부하게 들리거나 노여울 수도 있겠지만, 중간에 끊지 말고 들어주었으면 좋겠소. 도발하거나 조롱하고자 하는 의도는 전혀 없다는 것을 미리 밝혀두는 바요. 시작해도 되겠소?”
“예, 그러시지요.”
“우리는, 그러니까 협회는 ‘대소환’이 단순한 사고나, 누군가의 악의로 일어난 것이 아니라고 추측하고 있소. 사실 추측정도가 아니라 거의 확신에 가깝지. 더 나아가서 우리는 이 일련의 사건들이 인류를 괴롭히는 것보다는 단련시키는 것에 중심을 두고 있다고 보고 있소.”
류 현은 저도 모르게 눈썹을 꿈틀했다. 전에도 웨인의 입을 통해서 들었던 이야기다. 이전 생에서도 제법 설득력 있게 보인 가설 중 하나였다. 그 때의 화련처럼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이는 피해자들 때문에 주류가 되진 못했지만, 그렇다고 설득력이 없어지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그것도 협회장의 입에서, 이토록 확고하게 이야기가 나오니 달리 들을 수밖에 없었다. 티를 안내서 그렇지 류 현 또한 ‘대소환’의 피해자라면 피해자니까.
“추측의 재료들은 어디든 널려있었지. 던전의 포화대기 기간부터, 당시 최상위 던전들이 도전자를 받아들이기 전에는 포화까지 대기기간이 줄어들지 않는다는 점. 그리고 가장 빨리 ‘대소환’을 접한 플레이어들의 변화까지 말이오. 평생 젓가락질을 해본 적 없는 이가 첫 젓가락 사용 때 능숙하게 젓가락질 하는 것도 놀라운 일인데, 낫으로 풀도 제대로 베어본 적 없는 사람들이 각성하자마자 괴수를 썰다니 너무 노골적이지 않소.”
호응을 바라는 것 같지도 않았기에 류 현은 침묵을 유지했다. 노인은 주변의 침묵에도 개의치 않고 말을 계속했다.
“그 외에도 습득과 동시에 사용이 가능한 아티펙트 같은 예가 있소만 가장 결정적인 건. 이런 것들이지.”
노인은 그리 말하며 사진을 세장을 탁자위에 올려놓았다. 류 현이 제 쪽으로 사진을 끌어당겨 보았다. 사진 속에는 유적에서 떼어온 것 같은 거대한 돌기둥이, 지렁이가 기어간 듯한 글자가 새겨진 기둥이 찍혀있었다.
뭐라고 쓰여있는 건지는 알 수 없었지만, 류 현은 이 글자가 무엇인지는 알 수 있었다. 룬 어. 마법사들의 언어다.
“룬 어 같아 보이는데...맞습니까?”
“맞소. 협회 결성 초기에 처음으로 나선 그린 던전 원정에서 얻은 기록이오. 당시에는 ‘가방’아티펙트도 없어서 원정대가 꽤 고생을 했었지.”
“제가 룬 어를 몰라서 그런데 내용을 알 수 없겠습니까?”
“큰 비밀도 아닌데 안 될게 뭐가 있겠소. 그 기둥에 적힌 건 마나 운용법과 예언 한 구절이오.”
“예언이요?”
마나 운용법이 내용인 건 놀랄만한 일은 아니었다. 각성과 동시에 알게 되는 고유 마법이 아닌, 모든 마법사들이 익힐 수 있는 공용 마법들은 이런 식으로 던전에서 발견되었으니까. 계산할 머리만 있으면 마법사가 아니라도 쓸 수 있다. 류 현에게는 해당 사항이 없는 이야기였지만.
류 현의 관심을 끈 건 예언 쪽이었다. 이전 생에서는 그런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없었다.
“거창하게 말했지만 발견 당시에는 예언이라기보다도 뜬구름 잡는 소리였소. 물레를 돌리는 손을 쉬게 하지 마라 뭐 이런 내용이었소. 안일하게 있지 말고 미래를 대비하라는 전형적인 노인네 잔소리였지.”
눈앞의 노인이 그리 말하자 실소가 비어져 나올 것 같았다. 류 현은 실소가 새어나오는 걸 억누르며 물었다.
“지금은 뭐가 달라졌습니까?”
“이게 끝이 아니었으니 말이오. 유적형 던전에서 이런 식의 뜬구름 잡는 소리가 계속해서 발견 되었소. 던전의 난이도가 높아질수록 더 노골적으로, 함축적인 어구로 바뀌었지. 하지만 결국 말하는 건 한가지였소. 다가올 미래를, 끝을 대비하라.”
“...멸망론자들이 들으면 좋아할 법 한 이야기군요. 그런데 룬 어로 쓰인 것 치고는 이야기가 널리 퍼지지도 않았고요.”
“마탑과 거래를 했소. 소문을 억눌러 주는 대신, 협회가 발견한 마법을 공급해주고 문구를 발견한 마법사에게 보상을 했지. 워낙 뜬구름 잡는 소리뿐이라서 어쩌다 소문이 돌아도 한 두 달 뿐이었던 탓도 컸소. 솔직히 우리도 이렇게 조치하면서도 이게 의미 있는 일인가 의심이 들 정도였으니 말이오. 정확히 한 달 전까지는 그랬소.”
“다른 게 발견 되었나 봅니다.”
“맞소. 아주 인상적인 문구에, 아주 인상적인 방식이었지. 웨인 군, 그걸.”
‘가방’에 넣어뒀던 것인지 서류가방 하나 없던 웨인의 손에는 어느새 30cm보다 조금 굵은 돌덩이가 들려있었다. 그냥 돌덩이가 아니라 표면에 빛으로 쓰여진 글자가 꿈틀거리는 돌이었다. 물론 류 현은 그 글자를 알아보지 못했다. 알수 있는 거라고는 룬 어 같아 보이는 데 조금 이상하다는 느낌 뿐.
“가장 최근 협회 팀이 나선 퍼플 던전 원정에서 발견한 석비의 일부요.”
“석비요?”
“사진을 찍으면 글자가 나오질 않으니 어쩔 수 없었소. 아무 글자도 안 보이는 사진을 증거라고 내놓을 수는 없지 않겠소. 뭐 이것도 이렇게 부숴도, 다시 제자리에 얹어놓기만 해도 스스로 알아서 붙으니 할 수 있는 짓이지.”
“스스로 붙는다고요...?”
던전이 아무리 별의 별 괴상한 일이 벌어지는 곳이라곤 해도, 부서졌다가 다시 붙는 돌은 듣도 보도 못한 것이다. 그 비슷한 짓을 하는 골렘은 아직 등장할 시기가 아니었다. 류 현이 고개를 갸웃하자 노인은 웨인에게 턱짓했다.
카칵! 웨인은 언제 꺼냈는지도 모를 손칼로 돌덩어리 귀퉁이를 깎아내었다. 웨인은 그 깎아낸 돌조각을 돌덩어리 위에 올려놓고는 손을 떼었다. 그러자,
“어?”
돌덩어리가 조각을 흡수하는 것처럼 스물스물 그대로 붙어버렸다. 웨인은 보라는 듯이 돌조각을 얹어놓았던 부분을 손으로 툭툭 쳐보였다.
“보시다시피 이렇소. 거기에 쓰여 있는 글귀는 더 재미있었지.”
“무슨 말씀이신지.”
“튜토리얼 종료 퀘스트 수행지역.”
“예?”
류 현은 고장 날 리가 없는 제 청각을 의심했다.
“말한 내용 그대로요. 이전에 그렇게 노래를 불러대던 미래나 끝에 대한 대비는 하나도 적혀있질 않았소. 처음에는 우리가 잘못 해석한 게 아닐까 하고, 각지에서 마법사들을 초대해서 해석을 시도했소만은 다들 내놓는 답이 비슷했었소. 특정 장소 세 곳과 제한시간이 적혀있더군. 참고로 제한 시간부분은 너무 커서 가지고 오질 못했지만, 실시간으로 변화하고 있소. 그것도 순차적으로 줄어드는 게 아니라 아주 제멋대로요.”
“아니 그러니까...그 튜토리얼이라는 게 제가 아는 그거 맞습니까?”
“너무 노골적이라서 다른 의미로 해석하기 힘들 정도지.”
“...만에 하나라도 마법사들이 전부 엉터리로 해석했을 가능성은 고려해보셨습니까?”
“왜 안 그랬겠소. 유감스럽게도 그렇진 않았소.”
“어떻게 확인하셨는지...?”
“최근에 석비가 가리키는 장소 중 두 곳을 확인했소. 이집트의 카이로, 미국의 뉴욕. 그리고 그곳에서 부정할 수 없는 증거를 발견했지. 남은 한 곳은 이곳 한국에 있소. 파주라고 하던가?”
류 현은 그 말에 등골이 섬뜩해지는 기분을 느꼈다. 자신의 추측이 틀리길 빌며 류 현은 가슴에 담긴 의문을 내뱉었다.
“설마 그 증거라는 게...?”
“벌써 눈치를 챘나보군. 맞소, 지금 장비로는 감지할 수도 없고, 포화 대기 기간도 표시되질 않으며, 퍼플 던전 슬레이어들마저 움츠러들게 만드는 새로운 상위 던전. X던전이라고 칭해지고 있는 그 던전 말이오.”
확인 사살이나 다름없는 그 말에 류 현은 이마를 부여잡았다.
‘이런 씨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