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96화 〉탐식마(貪食魔) (96/429)



〈 96화 〉탐식마(貪食魔)

뻐어억! 콰지직! 섬뜩한 파열음에 무아지경에 빠져있던 화련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 덕에 깨달음에 휘둘리다 시피해서 빠져들었던 무아지경에서 빠져나왔지만, 집중 상태가 풀린 건 아니었다. 그녀는 주변이 한 없이 느리게 움직이는 것 같은 감각 속에서 리치가 허물어지는 장면을 목격할 수 있었다.

‘저게 대체 뭐야...?’


단순히 극도의 집중 상태였다면 볼 수 없었을 것이다. 리치의 텔레포트를 보고, 깨달음을 얻어서 아직 보이지도 않았던 벽을 넘지 않았다면, 그냥 리치의 두개골과 라이프 배슬이 박살나는 걸 보는  전부였을 것이다.

하지만 스스로도 어떻게 떠올렸는지 모를 정도로 방대한 깨달음은 얻은 화련은 볼 수 있었다. 리치의 두개골을 사정없이 때려 부수고 있는 류 현의 주먹에서 슬쩍 뻗어 나온 검은 기운이 부서지고 있는 리치를 갉아먹고 있다는 것을! 정확히는 본 것이라기보다도 감지했다, 라고 하는 것이 맞겠지만.


‘에너지 드레인의 응용...? 아니야 저건 그런 차원이...’

화련은 곧바로 자신의 추측을 철회했다. 류 현이 보여줬던 에너지 드레인은 보는 것만으로도 섬뜩해지는 그런 기술이 아니었다. 거기다가 저 검은 기운은 살아있는 것처럼 리치를 파먹고 있지 않는가?

화련은 거의 본능적으로 자신의 능력을 끌어올렸다. 제정신인 상태에서 왜 그랬냐고 물으면 자신도 모르겠다고, 그냥 그래야할 거 같아서 그랬다고 답할 정도로 근거 없는 행동이었다. 딱히 위험할 거 같지도 않고, 그냥 그래야할 거 같아서.

그러나 그 근거 없는 행동은 그녀의 생각과 달리 굉장한 위험을 수반한 행위였다. 그녀가 상상도 하지 못했던 정보들이 그녀의 머릿속으로, 말 그대로 쏟아져 들어왔다.

뭐든 그렇지만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과도하게 뭔가를 받아들이면 좋은 결과를 바라기 어려운 법.

마치 정보라는 이름의 못이 그녀의 머리 위로 쏟아져 내리는 것 같은 두통이 그녀를 찾아왔다. 깨질 것 같은 두통 속에서 화련은 자신이 이해할  있는 단어를 하나 찾아내었다.


‘마신? 동화? 이게 대체...’

그리고 그게 그녀가 제대로 기억하는 아프리카에서의 마지막 기억이 되었다.

화련은 불이 나가는 것 같은 느낌과 함께 정신을 잃었다.

***


승하는 세 번째로 휴대폰으로 시간을 확인했다. 앞에 놓인 음료수에는 손도 대지 않고 탁자를 검지로 톡톡 두드리고 있는 모습은 누가 봐도 기분 좋아 보이는 행동 같진 않았다. 카페 안이 텅 비어있어서 눈치  사람은 어디에도 없었지만.

‘이것들이...팀장이랑 팀원이 돌아가면서 사람을 멕이네.’


그녀를 정체를 아는 이가 들었다면 가슴이 내려앉을 만한 속내였지만, 그녀는 투덜거리는 내용과는 달리 크게 화난 상태는 아니었다. 자신이 어찌하기 힘든 상황에 오랜만에 놓인 탓에 조금 당황했고, 그로 인해서 거의 이주 째 꾸준히 스트레스를 받는 중이었지만 짜증보다는 걱정이 조금 앞서있는 상태였다.

그것도 앞으로 이주 이상 이 상태가 지속된다면 어떻게 될지  수 없는 노릇이지만, 어쨌거나 지금은 그랬다.

‘셋 다 상태가 그 모양이니 누구 하나 붙잡고 화낼 수도 없고.’


아프리카 원정에서 리치를 때려잡은 게 벌써 이주도 전 이야기다. 그 이후 12일간 승하는 용잡이 팀원들이 제정신이 붙어있는 꼴을 한 번도 보지 못했다.   하나는 귀국 후에 얼굴은커녕 목소리도 듣지 못했다. 병원에 실려 가고, 퇴원 후에는 칩거 상태에 들어갔으니까.


그녀가 짜증을 억누르고 있는 이유였다.

승하가 아무리 막무가내라도 넋이 나가있는 사람들을 붙잡고 히스테리 부릴 정도로 막나가진 않았다. 그녀 본인도 정신없이 바빴다는 이유도 있긴 했지만, 그게 전부였다면 오늘 이렇게 갑작스러운 자리에 나와 주지도 않았을 것이다.


정작 어제 밤에 갑자기 약속을 잡은 이는 약속 시간이 30분이 지난 지금도, 코빼기도 보이질 않았지만.


승하는 뚱한 얼굴로 후드를 슬쩍 들추고 입구 쪽을 바라봤다. 5분만 더 기다려준다 라고 속으로 되뇌이면서.


그 때였다. 그녀의 되뇜이 텔레파시로 전달된 것일까. 카페 문이 열리며 그녀가 기다리고 있었던 이의 얼굴이 보였다.


늦었다는 건 아는 지, 카페로 들어선 여자는 거의 뛰는 듯이 잰걸음으로 승하의 자리로 다가왔다. 그리고 곧바로 허리를 숙였다.

“미안해요. 갑자기 연락해서 약속 잡은 걸로 모자라서...”
“됐어, 됐어. 시간 더 버리기 싫으니까. 그냥 앉아.”
“그, 그래도...”
“얼굴  보니까. 잠도 제대로 못 잔거 같은데. 이야기 빨리 끝내야  가서 잘 거 아냐.”

승하의 권유에 화련은 가슴을 쓸어내리며 자리에 앉았다. 자리에 앉자마자 화련은 자기 볼을 쓸어내리며 물었다.

“티 많이 나요?”
“평소에 거의 생얼로 다니면서 오늘은  밑에 그렇게 떡칠을 했는데 눈치  채는 게 이상하지. 차라리 모자를 뒤집어쓰든가.”
“윽...”

자기 볼을 더듬던 화련의 손이 석상처럼 굳더니, 스르르 미끄러져 내려갔다. 승하는 속으로 픽 웃으며 말했다.


“그 꼴로 진짜 병문안 가게? 이야기까지 끝내고 가면, 병문안이 아니라 입원 수속 밟을 거 같은데.”
“그, 그 정도는 아니거든요?”
“하긴 뭐, 그 상태 류 현이면 눈치 못 챌 수도 있겠다.”
“...그 정도로 안 좋아요?”


화련이 갑자기 목소리를 내리깔며 묻자, 승하는 더는 속으로만 웃지 않고 킥킥 웃었다. 늦은 벌로 조금 골려줄 생각이었는데, 반응이 이러니 그럴 마음도 녹아 없어져 버렸다.

“본인 상태가 안 좋다기보다도, 누나 밖에 신경을 안 쓰고 있지. 이걸 나한테 팽개쳐둔 것만 봐도 훤하잖아?  주 동안 잘 가지고 있는지 묻지도 않던데.”

승하는 후드티 주머니에서 작은 가죽 주머니를 꺼내더니, 아무렇게 휙휙 흔들어보였다. 안에 뭐가 들어있는지 짐작이 가는 화련은 뜨악한 얼굴로 승하를 바라봤다. 그저께 희란에게 대충 들어뒀었다. 승하가 아티펙트를 맡고 있다고.

주머니 안을 직접 보지 않아도 뻔했다. 그녀들이 팔자에도 없을 아프리카 원정까지 가게 된 원인인 유성우가 들어있을 것이다. 가격을 매기는 게 무의미 할 정도로 괴물같은 스펙을 가진  아티펙트 말이다.

“계속 그렇게 보관했어요?”
“던전 밖에서  주렁주렁 매달고 다니는 취미는 없어서. 솔직히 말하면 내가 이거 제대로 쓸 수 있는 것도 아니고.”


표정관리를 한다고 했지만, 승하의 천연덕스러운 말에 화련의 표정이 시시각각 무너져 내렸다. 자기가 약속을 잡아놓고도 지각해서 생긴 미안함은 이미 저편으로 떠난 지 오래였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그럼 네가 보관할래?”
“그건 싫어요.”

기다렸다는 듯이 승하가 묻자, 화련은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단칼에 잘랐다. 승하는 우거지상이 돼서는 등을 등받이에 기대며 우는 소리를 내었다.

“내가 무슨 분실물 보관소도 아니고.”
“...마스터도 그 쪽을 믿으니까. 맡긴 거잖아요. 좀 더 의욕을 가져보시죠?”
“믿어서 맡기긴. 지금 신경 쓰고 싶지 않으니까. 짬 때린 거지.”


어휘선택이  깨는 감이 없잖아 있었지만, 화련은 차마 태클을 걸  없었다. 그녀가 보기에도, 류 현은 지금 저 가죽주머니 안에 들어있는 아티펙트에 신경 쓰고 싶지 않아서 승하에게 맡긴  분명해보였으니까.

‘희란이도 비슷한 말을 했었지.’

화련은 자기를 무슨 아파트 경비원으로 아느니 어쩌니 하며 투덜거리는 승하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그녀의 투덜거림이 잦아들 때  입을 열었다.


“마스터가 진짜 그래서 맡겼는지 아닌지는 이야기를 다 듣고 나서 판단하고 싶네요. 그쪽도 편들어줄 사람이 있어야 마스터한테 다시 떠넘길 거 아니에요? 이 주간 이야기만 성실하게 해주면...”
“그냥 네가 가져가면 안 될까?”
“내 입으로 이런 말하고 싶진 않지만...내가 그걸 지킬 힘이 있어 보여요?”
“어차피 이게 존재하는 지 아는 인간은 열 명도  될 텐데 무슨 상관이야? 협회 쪽에 정보가 새었어도 어떻게 생겼는지 알지도 못할 텐데. 희란이 걔는 청뢰 잘만 가지고 다니잖아?”
“희란이는 쓰고 나서 반납하거든요? 어쨌든 전 싫어요. 마스터랑 해결 봐요.”
“...악독한 것들.  마스터 닮아가는 거봐.”
“이야기 안 해줄 거면 일어날게요. 마스터한테 가서 승하 씨가 반지 아주 물고 빤다고 말해주러 가야겠네요. 너어무 좋아해서 떼놓고 싶어하지 않는다고.”
“해 주면 되잖아. 해 주면.”

속이 타들어가는  승하는 앞에 놓인 음료수를 원샷 하고는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리치 잡고 나서 네가 떡실신...”

승하의 말에 화련이 눈을 흘겼다. 어찌나 힘을 줬는지, 눈꼬리가 파르르 떨릴 정도였다. 아무리 승하라도 그렇게 눈치 주는 걸 무시할 수는 없는지, 재빨리 말을 고쳤다.

“......”
“아니, 기절. 기절하고 나서부터 시작하자.”
“좋아요.”
“네가 기절하고서 한바탕 뒤집어졌었어. 안 그래도 리치한테 공격당해서 원정 끝나고 정밀검사 확정이었는데, 2차 공격도 없는 상태에서 기절했었으니까. 일단 너부터 살리고 보자고 위스프고 나발이고 신경 끄고 협회 지부에 연락부터 때렸는데...”

화련은 방금 전과는 다른 방향으로 눈에 힘을 주었다. 승하가 지적한 대로 그녀는 퇴원한 이후 거의 잠을 자지 못했다. 피로하지 않을 리가 만무. 그녀의 피로감을 증명이라도 하듯, 눈 밑의 다크써클은 수험생 시절보다 더 맹위를 떨치고 있는 상태.

뒤통수에 돌멩이라도 받쳐주면 바로 곯아떨어질 자신이 있었다. 그런 그녀가 무리를 무릎 쓰고 움직이는 이유는 별 거 없었다.


‘...그 인간이 혼자서 털고 일어나서 교통정리 하는 걸 기다리면 못해도  달은 걸릴 거야. 그렇다고 희란이한테 맡길 수도 없으니까.’

‘진짜 보모든 뭐든 이런 거 처리해  인간을 영입해야...안 그럼  인간이나 나 중 하난 과로사  거야.’

그녀가 이런 상황을 방관하지 못하는 성격이기 때문.


‘정신 차리기만 해봐. 내가 이거 이자까지 쳐서...’

사심도 없잖아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