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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5화 〉탐식마(貪食魔) (95/429)



〈 95화 〉탐식마(貪食魔)

콰릉! 우레가 하늘을 찢고,

콰콰! 돌의 비가 내렸지만 류 현은 개의치 않고 바쁘게 발을 놀렸다. 현재 진행형으로 폐허가 되어가고 있는 마을의 참혹한 모습이 스쳐지나갔지만 류 현은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의 머릿속은 한 가지 생각으로 가득할 뿐이었다. 얼른 정리하고 최대한 빨리 귀국하자.


머리로는 떼어놓고 생각해야한다고 계속 생각했지만, 결국 머릿속을 가득 채우는  어찌할 길 없는 누나 걱정이었다. 지시 같지도 않은 지시를 내뱉고 일단 돌격부터 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평소였다면 리치 주변에는 얼씬도 하지 말라고 주의를 주고, 다짐까지 받아낸 후에야 움직였을 것이다. 그러고 나서도 그녀들이 접근하기 어려운 환경을 조성한 후에 맞붙었을 것이다.

행여나 저주 맞고 정신적인 문제가 생길 경우, 언제 회복할 수 있을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리치의 저주는 계산이  되니까. 리치의 마음인 것이다.


물론 리치도 바보가 아닌 이상, 자신에게 더 위협적인 쪽에  가능성이 높겠지만, 그건 어디까지 가능성에 불과했다. 희란의 요청이 있었다고는 하나, 이런 강행결정은 평소의 그라면 생각하기 어려운 일.

그 대신, 이라고 하기는 뭣하지만 류 현은  보는 것은 관두고 처음부터 전력을 펼칠 생각이었다. 숨김  따위는 남겨두지 않을 생각이었다.

‘여기까지 와서  숨기는 것도 등신 같지.’

푸확! 그의 의지에 응하듯 시커먼 안개 같은 것들이, 그의 몸 주변에 생겨나더니 그를 감싸는 것처럼 움직이기 시작했다. 에너지 드레인! 재습득한지  년도 채 되지 않은  능력을 류 현은 이미 자유자재로 다뤘다. 당장 체내에 축적된 마나의 양만 받쳐준다면 전성기, 그 이상도 넘볼  있는 성취였다.

실체화한 탐욕이나 다름없는 그것을 두른 류 현에게,

짜자작! 땅을 기듯이 달리며 날아온 뇌전 마법이 직격했다. 마법의 여파가 사방으로 튀며 흙먼지를 일으켰다.


“마스터!”

뒤따라오던 화련의 입에서 경악성이 터져 나왔지만, 그녀의 경악성은 채  울리기도 전에 입안에 갇히는 신세가 되었다.

지직!  다음 순간 류 현 흙먼지 구름을 가르며 아무 일 없다는 듯이 뛰쳐나왔다. 남은 뇌전의 기운은 그의 주변을 떠다니던 시커먼 탐욕의 안개가 삼켜버렸다. 그는 뇌전마법의 존재조차 모르고 있다는 듯이 오직 한 곳만을 응시하고 있었다.

자신을 덮친 뇌전마법의 주인. 리치를!


리치는 그 이름값이라도 하려는 것처럼 폐허가 된 마을 한가운데에 그야말로 유령처럼 서있었다. 키가 3미터는 됨직한 리치는 1층 이상의 건물이 남아있질 않은 마을에서 가장 높은 탑처럼 멀리서도 훤히 보였다. 분명히 500미터 이상 떨어져있음에도 기묘하게 리치의 존재가 가깝게 느껴질 정도로 존재감이 유별났다.

리치는 마름모꼴로 진형을 이루고 달려오는  현 일행을 느긋하게 바라보다가, 별안간 왼손을 들어올렸다. 검지만  그 왼손을 들어 올리자,


쿠구구! 우르릉! 다시금 유성의 그림자가 그의 일행 위로 드리우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가 외칠 필요도 없었다.

콰릉! 다시금 우레가 천공을 뒤흔들며 유성우들을 찢어발겼다.


 때였다. 전장에서 한가로워 보이기까지 하던 리치가 안구가 없는 시커먼 눈구멍을 빛냈다.

‘역시 청뢰에 반응하나?’


류 현은 속으로 혀를 차며, 슬쩍 무릎을 굽히고 땅에 딛었던 발에 힘을 더했다. 대퇴부가 한계까지 부풀어 오르자, 퍼엉!  현의 몸이 총알처럼 쏘아져나갔다.


뒤에서 화련이 어어 하는 소리를 내었지만 류 현은 가볍게 무시했다. 놈이 청뢰에 반응하는 것까지 확인 했는데 사고  빌미를 제공하고 싶은 마음은 털끝만큼도 없었다. 승하가 놀라는 기색 없이 따라붙고, 웨인이 남은 팀원들에게 붙는 것까지 확인한 류 현은 팀원들에 대한 생각을 머리 한 구석으로 밀어놓았다.

용잡이 팀장이 아니라 사냥꾼으로 돌아갈 시간이다.


딸깍, 머릿속 스위치를 넣는 것과 동시에 류 현의 눈동자가 이전과 비교도  수 없는 흉흉한 빛을 품었다. 리치와의 거리는 그의 기준에서 이미 지척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리치는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 저주를 발동시키는 것도, 숨겨두었던 구울이나 스켈레톤을 일으키지도 않았다. 손가락조차 그를 향하고 있지 않았다. 마치 모든 것을 포기한 듯한 모습.


‘혹시 저주 패시브라도 달고 있나?’


시답잖은 망상이었다. 그런 게 있든 말든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네임드 몹이 건 저주도 그를 죽이진 못했으니까.

두 번째 도움닫기를 한 류 현은 빨려 들어가는 것처럼 리치와 거리를 좁혔다. 이미 뒤로 한껏 장전된 그의 주먹은 무슨 일이 있든 그가 멈출 의사가 없음을 보여주고 있었다. 거기에 그의 좌측 상단에서 검을 내려치고 있는 승하의 존재는 이미 어떻게  도리가 없는 사형선고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그 절체절명의 위기를 리치는,


슈슉! 비웃는 것처럼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뻐엉! 쉭! 뒤늦게 도달한 참격과 파쇄권에 허공을 부수고 갈라놓았지만, 그래봤자 리치에게는 닿을 수가 없었다. 주먹에 아무런 감촉도 느껴지지 않자  현은 아차 했다.


‘미친, 이새끼 텔포 리치...’


류 현은 생각보다 빠르게 고개를 돌렸다. 그의 시선 끝에는 잇따른 청뢰사용으로 지쳐서 허리를 굽히고 있던 희란과 그녀의 앞을 막아서서 호위하고 있던 웨인, 최후미에서 류 현과 승하가 리치를 합격하는 모습을 보고 있던 화련. 그리고 그 사이로 막 전이하고 있는 리치의 모습이 있었다.

리치는 그를 비웃듯이 붉게 달아오른 오른손을, 자신에게 등을 보이고 있는 희란에게로 내뻗었다. 리치는 류 현과 승하의 공격에 반응하지 못하거나, 포기한  아니었다. 둘 보다 더 가치 있는 사냥감을 확실하게 잡기 위해서 그런  한 것일 뿐! 청뢰라는   조차 조바심을 느끼게 만든 그 사냥감을.


웨인이 뒤늦게 갑자기  뒤에 등장한 기척에 반응했지만, 고개가 돌아가는 것마저 늦은 상황. 류 현은 그녀들에게 달려가면서도 늦었다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야말로 그림 같은 기습.

류 현조차 늦었다고 생각한 상황에서 반응한 건, 다른 누구도 아닌 일행 중에서 육체능력이 가장 떨어지는 화련이었다. 화련은 잴 것도 없이 자신의 오른팔을 리치의 손아귀로 쑥 내밀었다.

치익!

“아악!”

가는 팔뚝이 더 해진다고 3미터가 넘는 리치의 손아귀가 다 찰리는 없었지만, 멈칫거림 정도는 만들어낼  있었다.


그리고 그녀들을 호위하고 있던 이에게는 그 멈칫거림 정도면 충분했다.


쒜엑! 리치는 자신의 진로를 가로막은 것에 제대로 당황하기도 전에, 두개골을 향해서 날아드는 창극을 보고는 기겁하며 다시 텔레포트를 시도했다.

창극은 허무하게 허공을   후벼  후 주인의 품으로 되돌아갔다. 두 번째 공격은 없었다. 웨인은 그대로 창도 내버리고, 팔을 움켜쥐며 쓰러진 여인에게 달려들었다.

“화련 님!”

웨인의 외침에 류 현은 갑자기 제동이 걸린 것처럼 덜컥 멈춰 섰다. 동료가 무사하단  확인하자, 사냥꾼으로 활동해온 경력이 그의 머릿속에서 기억하나를 끄집어내었다. 반지에 텔레포트 마법을 두 개 이상 담은, 일명 텔포 리치를 현실에서 잡을 때의 대원칙.


감지계를 포함하지 못한 파티가 텔포 리치와 조우했을 경우, 첫 접촉 때 잡지 못하면 그냥 손 터는 게 낫다!

던전에서 현실로 쫓겨난 리치는 라이프 배슬을 몸 안에 가지고 있기 때문에, 던전 안에서 보다 훨씬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이니까. 겁이 많아서 텔레포트로 도배를 한 리치의 경우에는 현실로 나오면 더 해진다. 술래잡기만 몇 달 동안 계속하다가 적응을 끝낸 리치에게 역으로 잡아먹히는 경우가 대다수!


 현은 주변을 바쁘게 살폈지만, 리치는 보이지 않았다. 일부러 패를 숨기고, 적을 끌어들여서 역으로 허를 찌를 줄 아는 놈이 기습이 실패했는데 모습을 드러낼 리가 없을 터. 이  많은 놈이 은신마법을 반지나, 뼈 속의 결정에 잔뜩 보유하고 있을 수도 있다.


‘후퇴? 아니면 이대로 강행?’

희란이 화련의 팔 화상에 송장목 진액을  바르는  보고 있던 류 현이 입술을 짓씹으며 고민하던 때였다.


“마스터!”“마스터!”

화련과 희란  여자가 동시에 외쳤다. 두 여자는 같은 곳을 가리켰다.


류 현은 되묻지 않고 그녀들이 가리키는 곳 끝을 봤다. 구울이, 누가 봐도 썩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은 것 같은 구울이 다리를 질질 끌며 걸어가고 있었다. 다음순간, 류 현은 쏜살이 되었다.

뻐엉! 우지직!

구울이 그를 인지하기도 전에 파쇄권이 구울의 머리통에 작렬했다. 구울의 머리통은 예상과 달리 터지지 않았다. 그러기는커녕 구울은 기우뚱 넘어가는 듯하다가,

슈슉! 꺼진 것처럼 모습을 감췄다. 리치가 그랬던 것처럼! 그 모습을 보고 류 현은 실망하지 않았다.

가장 중요한 첫 유효타를 제대로 넣었으니까. 류 현이 뒤돌아서 리치를 찾기도 전에 두 여자가 다시 동시에 외쳤다. “마스터 뒤!” 이번 지령 대상은 승하였다.


줄곧 전투태세를 풀고 있지 않았던 그녀의 반응은 더욱 빨랐다. 승하는 곧장 날아올랐다. 류 현의 머리 위로 텔레포트한 리치를 향해서.

쉭! 뭔가를 베는 소리도 아니었다. 뭔가를 베었다고 믿기 힘들 정도로 가벼운 소리. 공기를 가르는 소리.  뿐이었다.


그럼에도,

투툭- 리치의 왼팔을 앗아가기에는 충분했다. 리치에게는 치명상이라는 개념은 없지만, 이걸로 유성우를 잃었으니 치명상이라고 불러도 무방한 수준!


리치는 당황스러운  안광을 한 번 내뿜고는 다시금 텔레포트 했다. 류 현은 리치의 왼팔이 떨어진 걸 보자마자,  사람에게로 내달렸다. 그녀들이 다음 포인트를 지적하기도 전에.


생각하고 한 행동은 아니었다. 류 현의 감이, 오랜 경험으로 연마된 그것이 그 쪽을 가리켰다. 유성우를 잃었으니 다 뒈져가는 놈이 기댈 곳은 처음부터 눈독들이던 청뢰뿐이다! 말로 설명하자면 그랬다. 논리적인 근거라고는 없었다.


지직! 그의 감이 맞다고 증명이라도 하듯이 리치가, 방금 전까지와는 달리 괴상한 노이즈와 함께  사람의 머리 위로 모습을 드러내었다.  현은 터질 것 같은 대퇴부의 통증을 무시하며 다시 펄쩍 뛰어올랐다.

그 순간 리치가 약속이라도 한 듯이 류 현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류 현은 그 순간 일이 더럽게 꼬일 것이라고 직감했다. 그는 아직 사정거리가 확보되지 않았다. 그녀들에게 위해를 가하진 못하겠지만, 리치가  번 더 텔레포트 하고도 남을 거리.


이렇게까지 몰렸으니 리치는   더 텔레포트로 몸을 빼낸 후에 몸이 망가지든 말든, 장거리 텔레포트를 시도할 것이다. 몸 안 어딘가에 있는 라이프 배슬에 데미지가 가는 걸 감수하더라도!


그렇게 되면 정말로 진지하게 철수도 생각해봐야 한다. 희란이 아무리 예민해도 본격적인 감지계도 아닐뿐더러, 리치도 바보가 아니니 류 현 일행을 인지하고 피하기 시작할 테니까.


뼈만 남은 리치의 오른손에 끼워져 있던 다섯 개의 반지 중, 중지에 끼워진 것이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현은 알지 못했지만, 승하와  현의 공격을 흘린 첫 텔레포트를 시전한 반지가 이 반지였다.

소수점 이하로 표시될만한 짧은 순간,  현의 머릿속에 수많은 생각들이 스쳐지나갔다. 그런  현의 고민을 비웃듯이 화련은 리치의 숨통을 거머쥘 것처럼 손을 펼쳤다. 손을 펼치는 그녀의 눈동자는 하얀 빛이 어리는 정도가 아니라, 하얀빛 외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덜컥! 리치의 오른손 중지에서 터질 것처럼 빛을 발하던 반지가 거짓말처럼 빛을 잃었다. 리치는 텔레포트 마법 특유의, 어딘가로 빨려 들어가는 듯한 느낌이 갑자기 사라지자, 당황하며 중지를 살피려했지만,


뻐어억! 콰지직! 류 현의 파쇄권이 그 찰나를 부수고 들어왔다. 그냥 파쇄권이 아니었다. 주먹이나 팔의 상태를 생각하지 않은 그야말로 몸을 불사르는 일격! 리치의 두개골과 함께  안에 있던 라이프 배슬이 사정없이 터져나갔다.

시작부터 꼬였던 아프리카 원정을 단숨에 정리하는 깔끔한 일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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