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4화 〉탐식마(貪食魔)
영상을 보는 순간 류 현은 확신했다. 이번 상대는 리치가 분명하며, 아직 아티펙트에 적응을 못한, 아무리 높아봐야 6성에 못 미치는 5성을 조금 넘어선 수준이라고. 그렇게 견적을 냈다.
‘견적을 낸다.’ 일상생활에서 꽤 흔히 쓰이는 말 중 하나다.
플레이어들에게 있어서는 흔히 쓰이는 빈도만큼 중요한 행위. 괴수를 관찰하고 그걸 기반으로 전략을 짜는 것.
말은 거창하지만 거의 감에 기댄 행위다. 보통이라면 애매모호하고 믿음직스럽지 못한 말이지만 플레이어에게 있어서 감은 중요하다. 최전선에서 싸우는 스트라이커들에게는 없어서는 안 되는 능력 중 하나다.
이 괴수에게 달라붙어도 딜을 넣어도 되는가, 어떤 무기를 써야하는가, 언제 떨어져야하는가, 배분해야할 적정 인원수는? 고려해야할 요소는 무수히 많다.
그렇게 무수히 많은 요소들을 고려해도, 물리법칙을 씹어 먹는 괴수를 상대로는 완벽할 수는 없다. 가장 큰 문제는 이것들을 확인하기 위해서 투자할 수 있는 자원이 던전 안의 플레이어들에게는 거의 없다시피 하다는 것이다. 자기 몸뚱이 이외에는 말이다.
그렇기에 이 견적을 내는 행위가 더욱 중요한 것이다. 한 번이라도 잘 못 선택했다간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을 맞이할 수도 있으니까. 완벽하진 않더라도 최대한 근사치를 찾아야만 한다.
필연적으로 이 능력을 기를 수밖에 없는 스트라이커들이 원정대장을 맡는 경우가 많은 이유기도 하다. 중요한 결정권자가, 그것도 최전선에서 자기 선택을 책임져야하는 자에게 권한이 돌아가는 건 이상한 이야기가 아니니까. 반대인 경우도 없지 않아 있었지만.
그리고 네임드 괴수 과반을 혼자 도살한 류 현은 이 견적을 내는 것에 도를 통한이었다. 아니, 견적을 내는 수준이 아니라 측정이라고 해도 될 정도였다. 네임드 괴수라는 규격외의 괴물 이외에는 그의 견적은 언제나 정확했다.
네임드 괴수의 경우에도 전에 없었던 특수능력 때문에 애를 먹는 경우는 있었어도, 결국 잡을 수 있었다. 유일하게 그가 견적 내는 걸 포기했었던 아지다하카를 제외하면, 그는 언제나 자기 견적이 맞는다는 걸 증명해왔었다.
그건 이번 생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거의 반억지로 용잡이 팀 팀원들을 블루, 블루 퍼플 던전에 밀어 넣기 시작한 것도 견적이 나와서 였다. 실제로 그녀들은 아무런 문제없이 그의 일정을 소화했다. 중간에 승하가 제동을 걸어서 멈추긴 했지만, 그 이전까지 사고가 없었다는 것만 봐도 그의 견적 내는 능력은 이견의 여지가 없을 정도였다.
그게 용잡이 팀원들이 침묵하고 있는 이유였다. 다른 이유도 있었지만 가장 큰 건 그거였다. 류 현은 틀린 적이 없으니까. 거기다가 옆에는 제동을 걸어줄 승하까지 동석하고 있다. 경력으로 보자면 나승하 본인 제외한 모두를 합쳐야 그녀와 견줄 수 있을까 말까다. 그런 베테랑이 입을 다물고 있는데 괜한 태클을 걸 필요는 없으니까.
물론 웨인은 알 수 없는 속사정이었고, 그랬기에 흔들리는 정도가 아니라 요동치는 짐칸 위에서 웨인은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청뢰가 있으니 화력상으로 대등하진 않더라도 엇비슷할 수는 있겠지. 하지만 반대가 없을 수가 있나...? 그런 팀이 있을 수가 있다고? 어중이떠중이 모임도 아닌데?’
전력 자체에 큰 불안은 없다. 협회에서 팀을 꾸린다고 해도 지금 이 팀보다 더 나을 거라는 자신을 할 수 없을 정도다. 우려되는 건 두 가지. 류 현이 묘하게 서두르는 듯 하다는 것과 주변에서 그를 말릴 기미가 보이지 않는 다는 것.
그것도 검성이 포함된 일행이다. 보통이라면 그녀가 가장 발언권이 세다고 생각할 것이다. 몇 번의 만남으로 검성이 그렇게 적극적인 성격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되었지만, 그렇다고 해도 빈말조차 없는 건 이상했다.
‘...여차하면 미움 받는 역할도 하는 수밖에.’
고뇌하는 웨인에게 야속할 정도로 전장은 빠르게 가까워져갔다.
***
회귀 전, 3차 ‘대소환’ 이후 인류에게 가장 큰 타격을 입힌 게 뭐냐고 묻는 다면 류 현의 대답은 정해져 있다. 리치, 정확히는 리치가 부리는 구울과 스켈레톤들을 일으키는 마법이다.
생물은 죽는다. 인류에게 있어서 절대 명제나 다름없는 사실이다. 이 명제가 확인된 이후 인류는 오랜 기간에 거쳐서 이 문제에 대해서 골몰해왔다. 죽음이란 무엇인가? 죽음을 회피할 방법은 없는가? 혹은 죽음 이후의 세계는 존재하는가?
어찌 보면 우스꽝스럽고, 속물적이며, 어떻게 보면 심오한 철학적 문제를 내포한 이 명제는 언제나 인류의 사색거리였다.
그리고 리치의 존재는 그 오래된 사색을 음식물쓰레기를 다루는 것 보다 못한 방식으로 인류에게서 떼어냈다.
손짓 한 번에 리치는 산자와 죽은 자를 진창에 뒤섞어 놨다. 무덤에서 일어난 죽은 자의 말은 심오하면서도 간단했다. 그르륵! 덥썩!
던전에 들어가면서 자의적으로 미쳐버린 플레이어들에게는 간지러운 수준이었지만, 내성이 없던 인류라는 거대 집단에게는 어마어마한 정신적 타격이었다. 21세기에 들어섰지만 종교적 권위는 여전했고, 종교인이 아니더라도 좀비영화가 현실이 될 거라고 생각하는 이들은 매우 적었다. 혹여 그렇게 믿는 망상증 환자라고 할지라도 작년에 묻었던 할머니가 자기 팔을 물려고 달려드는 데 제정신을 유지할 수는 없었다.
그들은 죽음의 권위를 믿었고, 그 때문에 그것이 배반당했을 때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구울이나 스켈레톤에 살해당한 인원은 극히 적었지만, 오히려 그랬기에 파장은 더했다. 그 공격으로 인류는 정신적으로 살해당했으니까.
윤리와 치안이 무너지면서 국가라는 거대한 틀이 무너졌고, 그 뒤로는 말 그대로 개판이었다. 계산기 위에서 수많은 인명이 스러졌고, 그 계산기를 두들기던 자들마저 계산기 위의 숫자에 속아서 제 목을 조르는 짓을 서슴없이 저질렀다.
그리고 그런 관점에서 보자면 눈앞의 광경은 전조나 다름없어 보였다.
정작 그 일들을 모두 기억하고 있는 남자, 류 현은 그런 사실에 전혀 관심이 없었지만.
“윽...”
화련은 언덕 아래로 고개를 빼꼼 내밀려다가 입을 틀어막으며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시선 끝에는 이미 헛구역질을 하고 있는 희란의 모습이 보였다. 화련은 희란의 등을 두들겨주고 있는 승하의 모습을 멀거니 보다가 품에서 손수건을 꺼내어 입과 코를 틀어막았다. 그리고는 다시 언덕 아래로 고개를 내밀었다.
끔찍하다. 그 이상 적절한 표현이 없을 것 같은 광경이 눈앞에 펼쳐져있었다. 마을이 불타고 있었다. 당장 마을을 전소시킬 정도의 불길은 아니었지만, 그럴 필요도 없어 보였다. 마을은 이미 멀쩡한 건물을 찾기 어려울 정도로 망가진 상태였다. 특히 마을 여기저기 깊게 파인 시커먼 구덩이는, 단순한 구덩이를 넘어서 이질적인 기운까지 느껴졌다.
하지만 그런 불타는 마을 안에서도 마을 주민들은 꾸물꾸물 열심히 움직이는 중이었다. 정확히는 마을 주민이었던 시체들이, 구울이 되버린 그들이 불타고 있는 마을을 가로질러 움직이고 있었다. 배에 창이 꽂힌 임산부가, 구울에게 배를 파 먹힌 노파가, 안면 이외에는 머리가 남지 않은 아기가 꾸물꾸물 기어갔다.
어깨에, 머리에 불이 붙든 말든 그들은 꾸물꾸물 움직였다. 화학 무기나 다름없는 지독한 악취를 내뿜으면서. 화련의 비위도 거기까지가 한계였다. 손수건도 영원히 이 끔찍한 냄새를 막을 수는 없었다.
그녀는 시선을 돌렸다. 시선을 돌리자, 류 현은 무덤덤한 얼굴로 마을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한다라고 불린 이곳은 오늘부로 이름을 바꾸거나, 지도에서 아예 지워질 가능성이 커보였다. 그와는 별로 상관없는 이야기였다. 류 현은 뒤를 쓱 돌아보고는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차라리 그냥 두고 올 걸 그랬나.’
평소라면 리치의 존재를 확인하자마자 이 생각을 했을 것이다. 현실로 뛰쳐나온 리치가 하는 행동은 뻔하다. 어딘가 숨어서 던전 안의 성에 버금가는 요새를 세우거나, 적극적으로 군세를 꾸리거나. 보통은 전자를 택하지만, 이 리치는 아티펙트의 영향인지 군세를 꾸리는 쪽을 택했다.
문제는 언데드의 머리라고 해도 좋은 리치가 군세를 꾸릴 경우 좋은 꼴은 보기 힘들다는 것이다. 던전 안에서 만나는 언데드 괴수와는 비교도 하기 힘들 정도로.
웃긴 이야기지만 던전 안의 언데드 괴수들은 현실에서 만나는 구울보다 훨씬 깨끗하다. 썩은 것 같은 모양새를 띄고 있긴 해도 풍기는 냄새는 그럭저럭 견딜만한 수준이다. 가장 중요한 부분은 사람과 가까운 형태가 거의 없다는 것이다.
리치야 과학실 해골 모형꼴을 하고 있긴 하지만, 걸어 다니는 뼈와 걸어 다니는 썩은 시체는 혐오도가 차원이 다르다. 방금까지 걸어 다니던 인간의 시체라면 말할 필요도 없다.
거기에 시체 썩는 냄새를 뛰어넘는 현실에서 생성된 구울 특유의 냄새까지.
‘차라리 성을 짓는 쪽이 나았을지도.’
예상외의 장해에 류 현은 스스로도 말도 안 되는 푸념과 함께 완전히 뒤돌아섰다. 여기까지 끌고 와놓고 이런 소리를 하고 싶진 않았지만, 이번 싸움은 경험을 늘려주기에도 곤란한 측면이 크니 승하와 둘이서만 잡을 생각이었다. 싸우다가 악취에 토하는 그런 경험을 굳이 늘려주고 싶진 않았다.
류 현이 입을 떼려던 순간이었다.
“...가요.”
“예?”
류 현이 의아한 시선을 보낸 끝에는 희란이, 방금 전까지만 해도 헛구역질하기 바빴던 여자가 서있었다. 아직 꺼림칙함을 다 떨쳐낸 건 아닌지 안색이 하얗게 질린 채였지만, 눈빛만은 형형했다.
“저 괘, 괜찮으니까...”
“...아니 그 얼굴로 그렇게 말씀하셔도.”
그 때 언제 다가온 것인지 승하가 류 현의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
“저렇게 노력하는데 해달라는 대로 해줘도 괜찮잖아? 뭐 어려운 일도 아닌데, 호위는 저기 저 밥값 못하는 인간한테 맡기면 그만이고.”
지목당한 웨인은 어색하게 웃었지만, 류 현은 떨떠름한 기색을 떨치지 못했다. 일 년 이상 던전에서 굴렀다고는 하나, 이런 상황에서 그녀가 바득바득 나서는 게 걱정될 따름이었다. 화련이 스리슬쩍 희란의 옆에 붙어서 빤히 쳐다보자 류 현은 졌다는 듯이 고개를 내저으며 말했다.
“토하는 순간 그걸로 전장 이탈하시는 겁니다. 웨인 씨, 두 분의 엄호를 부탁드리겠습니다. 저랑 승하 씨는 리치를...”
꾸르릉! 하늘을 울리는 굉음에 류 현의 시선이 하늘로 향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맑던 하늘은 회색빛으로 물든 채 신음 같은 굉음을 토해내고 있었다. 류 현은 안력을 끌어올려 구름 너머에서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는 거대한 물체를 발견했다. 유성우다.
“희란 씨!”
되묻는 것도 없이 희란은 곧장 오른손을 점점 가까워지고 있는 그림자를 향해서 조준했다. 그러자,
콰릉! 우레가 하늘을 찢으며 뛰쳐나갔다. 쾅! 콰콰! 거칠 것 없이 솟아오르던 우레가 유성우를 사정없이 바스러뜨렸다. 그게 신호였다. 류 현은 돌덩이가 쏟아져 내리고, 하늘이 뒤집어지는 굉음 속에서 목청을 높이는 취미는 없었기에 손짓으로 신호했다. 갑시다.
그 직후 다섯의 인영이 언덕 위를 미끄러지듯이 뛰어 내려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