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90화 〉탐식마(貪食魔) (90/429)



〈 90화 〉탐식마(貪食魔)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 사람은 일이 풀리지 않을 경우 자신 이외의 원인을, 핑계를 찾기 마련이다. 그게 편하니까.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그런 행위가 정신적으로 안정감을 주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이 개인을 넘어서서 백을 넘기고, 천을 헤아리는 집단의 행위가 될 경우에는 그건 핑계를 넘어서 그 집단에게는 하나의 사실이 된다. 전후관계나 도덕 따윈 가볍게 무시할 정도의 믿음의 대상이!

위스프는 그런 너무나도 평범한 생각들이 모여서 만들어졌다. 역사가 한결같이 말해주고 있지만, 처음부터 뒤틀린 생각으로 시작된 조직은 중간 따윈 없다. 그 생각대로 세상을 바꾸든, 스스로 파멸하든 둘 중 하나!


위스프의 시작은 특별한 건 없었다.  전신은 2차 ‘대소환’과 함께 해방된 플레이어들이 만든 작은 집단 중 하나였다. 운 좋게 살아남은  집단은, 전 세계 플레이어들이 한 목소리를 내서 플레이어 협회를 만들 때 소외되어있었다. 누군가의 의도가 아니라 그들의 처한 환경이, 조국의 상황이 그런 목소리를 낼 여유를 주지 않았다.

그게 모든 일의 시작이었다. 몇몇 강대국, 특히 플레이어 인권을 강하게 탄압했던 미국이 주도권 싸움에서 밀리자 최선두에는 유럽 연합이 서게 되었다. 유럽의 주도하에 플레이어 협회는 성립되었고, 플레이어 협회가 설립된  채  년이 지나지 않아서 유럽의 수탈이 시작되었다.

싹이 보이는 플레이어를 거금을 주고 귀화시키거나, 그 당시 트렌드 최선두에 있었던 옐로우 던전을, 아프리카에 내에 있는 던전을 포화 방지를 운운하며 털어가는 식이었다. 유럽의 수탈이 없었어도 옐로우 던전에 도전할 만한 여력은 없었지만, 아프리카 입장에서는 유럽이 세계대전 이전의 제국주의 시대처럼, 자국을 식민지 삼아 수탈하는 걸로 밖에 느껴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 식의 불만들이 한계치까지 쌓였을 때, 위스프가 등장했다. 그것도 독일 대사관을 폭파시키는 화려한 데뷔전과 함께!

[현 아프리카 대륙의 고통은 유럽을 비롯한 돼지들의 수탈과 모략으로 인한 것이다! 우리는 형제들의 고통을 더 이상 좌시하지 않겠다!]

정말 그 말대로 위스프는 바쁘게 이곳저곳을 들쑤시고 다녔다. 특히 대놓고 언급한 유럽연합 소속 국가들은 한 달이 멀다하고 대사관이 급습당하고, 자국 내의 호텔이 테러를 당하기도 했다. 덕택에 아프리카 국적의 플레이어들은 때 아닌 수난을 당해야만 했다.

가장 골 때리는 건 위스프의 최대 장기가 폭탄 테러가 아닌, 플레이어를 사냥이라는 점이었다. 위스프가 출범하고 반년이 지났을 무렵을 일이었다.

아프리카에 원정 던전 사냥을 나와 있던 유럽 국적의 플레이어들이 하나  실종되더니, 한 달도  지나지 않아 시체가 돼서 전파를 타기 시작한 것이다. 위스프는 덤으로 사냥 영상까지 보내주었다.

그것도 플레이어 팀 하나당 중대급 인원을 쏟아 붓는 인해전술이 아닌, 아프리카 각국들이 작성한 교범에 맞춰서 플레이어를 사냥하는 영상을 말이다. 위스프 측 플레이어는 개입하지도 않고, 던전에서 막 나온 플레이어들을 사냥하는 그 영상은 플레이어 입장에서는 악몽이나 다름 없었다. 유럽 각국에는 비상이 걸렸고, 원정을 나가 있던 플레이어들은 대거 귀국하게 되었다.

그러고 나서 위스프의 테러행위가 근절되었냐면 그건 또 아니었다. 유럽출신 플레이어들이 아프리카에서 사라지자, 위스프는 외국출신 플레이어 전체를 대상에 집어넣기 시작했다. 목적에서 이탈한지는 오래 되었고, 잡자고 손을 대면 던전으로 기어들어가서 짱 박혔다가 다시 기어 나오는 영리한 미친놈들. 그게 바로 위스프에 대한 세간의 평이었다.

플레이어라면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는 위험분자들. 그런 자들에 대한 논의가 오고갈 방안 분위기가 거북할 정도로 무거운 건 당연한 일이었다.

낮에 있었던 테러가 신경 쓰이는지, 샤워를 하고 나온 이후에도 코트차림을 고수하고 있는 남자 웨인 크로이츠는 조금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조금 더 조사를 해봐야 알겠습니다만. 그 행동대장이라는 자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협회의 개들이 살아서 조국을 밟을  따위는 없을 거라고요.”
“똥 밟았네. 그것도 아주 제대로.”

승하는 거의 반쯤 탁자에 얼굴을 묻은 채로 불평하듯 말했다. 모두가 그녀의 말에 말없이 동의했고, 눈총을 보내는 이는 한 명도 없었다. 그래봤자 멀쩡한 정신으로 있는 건 셋뿐이었지만. 화련과 희란은 욕조에 몸을 담근 걸로 놀란 가슴이 풀어졌는지, 아까 전부터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급하게 이 호텔에 방을 잡고, 원래 숙소에서 웨인을 기다리고 있으면서 류 현은 그녀들에게 미리 말해두었다. 이렇게 움직일 생각이니 다른 의견이 있으면 지금 말해두라고. 반대의견은 없었고, 그래서 류 현은 구태여 그녀들을 깨우지 않았다.

승하의 간략한 평에 고개를 끄덕이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며 류 현은 말했다.


“우리가 온다는 정보가 조금 이상하게 샌 모양이군요.”
“뭐라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아무리 아프리카가 내부적으로 썩었다고는 해도 이렇게 정보가 샐 줄은...죄송합니다.”
“괜찮습니다.  유쾌한 기분은 아니지만 딱히 실질적인 피해는 없으니, 이미 벌어진 일 가지고 지금 이러쿵저러쿵 할 생각은 없습니다. 그런다고 해서 상황이 나아지는 것도 아니고요. 중요한 건,”

류 현은 말을 끊고 탁자 밑으로 손을 뻗쳤다. 그리곤 꽉  보스턴 백을 쑥 들어 올리더니,

텅. 묵직한 소리를 울리는 그것을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현은 그대로 가방 입구를 열고는 말을 이었다. 가방 안에는 달러가, 그것도 막 조폐기에서 뽑아낸 것 같은 달러가 가득했다.


“앞으로의 일이니까요. 뭐 우리가 테러리스트들이랑 노닥거리려고 여기   아니지 않습니까.”
“류 현님, 이게 대체...?”


웨인이 당황하며 가방 안의 내용물을 가리켰다. 류 현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비상금입니다. 제 스폰서 중 한 분이 아프리카가 생각보다 더 개판일 테니, 이런 거라도 챙겨주고 싶다고 하시더군요. 개인적으로는 그대로 돌려줄 수 있게 되기를 기원했습니다만, 상황이 이래서야 그러긴 힘들겠군요.”

 스폰서, 서해란의 곤란해 하는 얼굴을 잠깐 떠올린 류 현은 금세 그 얼굴을 지우고 웨인의 표정변화를 주시했다.

“여기 오시는 걸 알리셨습니까...?”
“예, 사전에 말씀드렸던 대로 필요한 추가 인원 후보에게 접촉해봤습니다만, 그 분이 개인적인 일로 바빠서 거절당했습니다. 대신 이걸 챙겨주시더군요. 정확히는 여기 와서 수령한 거지만요.”

전부 다 알리진 않고, 아프리카 원정에 참가할 예정인데 동행 가능하겠냐고 만 물었다. 서해란의 능력이 있으면 유용할 거라는 생각에서였다. 그녀를 첫 퍼플 던전 원정에 끼워가려고 생각했을 정도로 류 현은 그녀를  높이 사고 있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들러리로라도 데리고 가겠다는 생각은 아예 안 했을 테니까.

아프리카가 지옥이 된 건, 곳곳에 숨어있는 고위급 던전에서 튀어나온 괴수들 탓도 있지만, 지금도 그 숫자가 불어나고 있을 땅돼지 같은 저급 괴수들 지분이 지대했다. 이런 아프리카에서, 고위급 괴수 상대로는 힘들어도, 저급 괴수 다수의 방어막을 벗겨낼 수 있는 해란의 ‘파도’가 정말 유용할 테니까.

청뢰를 보유함으로서 다수에 대한 화력도 확보하긴 했지만, 최대한 조용히 유성우만 확보한  후 돌아가야 하는 상황에서 청뢰까지 모습을 드러내고 싶진 않았다. 유성우를 가진 보스 몹을 상대할 때라면 모를까. 결국 그녀는 오지 못했지만.


어쨌거나 해란이 챙겨준 비상금이 의미를 찾을 만한 상황이 온 것이다. 협회 지부에 접촉해서 자금을 지원받을 수도 있겠지만, 위스프의 타겟이  상황에서 추적당할 만한 여지는 두고 싶지 않았다. 이미 정보가 새고 있다는 걸 몸으로 확인했고, 자금도 넉넉한 상황에서 파리떼가 엮이는  사양하고 싶었다.

‘‘광대들’때처럼 미친 개 마냥 덤비면 한 번에 끝나기라도 할 텐데 말이야.’

류 현이 위스프를 상대로 사리는 건 그게 가장 큰 이유였다. 귀찮은 상대인데, 단 번에 다 때려잡을 자신은 없었다. 단체로 광견병에 걸린 게 아니면 ‘광대들’처럼 적극적으로 달려들 리가 없으니까. 기껏 해봐야 오늘처럼 중화기로 견제질 하는 게 전부  것이다.

위스프는 미친놈들이지만, 연관도 없는 일반 국민이나 플레이어를 상대로 테러를 일삼는 미친놈들이지만 여태껏 그 많은 일소 작전을 피해서 자리를 지키고 있을 정도로 영리한 놈들이다.


‘광대들’이 플레이어라는 장점을 사람을 죽이는 방향으로 최대한 발휘한 예시라면, 위스프는 플레이어가 결국 사람이라는 부분을 최대한 이용해서 죽이는 예다.


상대를 그냥 실력으로 찍어 누르는 ‘광대들’과 달리 정예 플레이어도, 대 플레이어 장비도 없는 위스프는 기습과 장기전이 전문이다.


뭔가 매칭이 안 되는  같은 조합이지만, 위스프는 그 전술을 적절히 조합해서 여태껏 기백에 이르는 플레이어들을 사냥해왔다. 살해당한 이들은 인지도로 따지면 자국 뉴스에도 나와 본적 없는 이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플레이어와 일반인 간의 격차가 없어지는 것도 아니다.

물론 지금 자리해 있는 이들은 세계구급의 괴물들이지만, 큰일을 앞두고 날파리가 그것도  잡을 수도 없는 날파리가 귀찮게 하는 게 좋을 리는 없다. 더욱이 류 현은 사람 상대는커녕, 사람에게 제대로 공격 받은 게 이번이 처음인 팀원까지 데리고 있다. 어떻게 보면 대인전 경험의 기회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무슨 좋은 경험이라고 일부러 달려들어서 시켜. 괴수 잡는  도움 되는 것도 아닌데.’


이전 생에서 뉴스에 나오는 살인마 수준이 아니라, 정말 괴물 취급받아 마땅한 정도로 피를 묻혀본 그였지만 단 한 번도 그 경험이 유용했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어찌됐거나, 이걸로 활동 자금은 확보 되었으니 정보고 샐 수도 있는 곳에 접근하지 않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이쪽 지부에서 받을 수 있는 도움이 그리 많을 거 같지도 않고. 그리고 잡아  넣을 대상이긴 하지만, 그놈들에게 그걸 보여주고 싶진 않군요. 우리를 계속 쫓아오다가 우연히 본다는 가능성도 없지는 않으니까요.”
“그렇긴 합니다만...”

웨인은 입술을 짓씹으며 말을 찾는  했지만,  말이 쉽게 나올 만  상황은 아니었다. 인세의 지옥 소리를 듣는 아프리카 내이긴 해도 협회  라인에 구멍이 뚫렸다는  확실했으니까.


얼마나 큰 구멍일지는 지금의 웨인으로서는  수 없는 노릇. 오늘 습격으로 봐서는 이 팀의 라인업을 전혀 모르는 것 같았지만, 지부를 방문하면 그마저도 장담할 수가 없게 된다.


거기다가 류 현의 말처럼 지부에서 지원을 받는다고 해봐야 차량 수배나 묵을 곳 제공 정도가 전부였다. 무장병력을 움직인다는 건, 킬리만자로를 점화시킨 아티펙트 가칭 유성우를 공개하는 것과 다름없는 일이니까.

위치 추적에 이곳 지부 도움을 받고 싶어도, 유성우는 첫날 이후로 계속 침묵하고 있는 중이다. 아티펙트 자체 쿨타임인지, 아니면 착용 중인 괴수의 변덕인지 알 길은 없다.

문제는 그 뒤로 걸리는 흔적이 딱히 보이지 않는다는 것. 아프리카 대륙 전체에 감시 카메라 같은 게 깔린 게 아니니, 무인지대에서 터뜨린다면 알게 되는 건 아무리 빨라도 사흘은 걸린다.

그리고 그 쯤 되면 지부에 정보가 들어가는 것보다 협회 본부 쪽이 더 빠르다. 간자가 심겨져있을 가능성이 큰 이곳 지부와 접촉할 메리트가 없는 상황.

결국 웨인이 내놓을 대답은 낮의 습격 때부터, 정해져 있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알겠습니다. 말씀대로 하도록 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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