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88화 〉탐식마(貪食魔) (88/429)



〈 88화 〉탐식마(貪食魔)

웨인은 자신의 눈앞을 가리고 있는 안대를 슬쩍 들추고 옆자리에 앉아있는 남자를 곁눈질로 살폈다. 류 현은 떨떠름한 얼굴로 보드카를 병째로 들이키려는 승하를 뜯어말리고 있었다. 그 뒤편으로 가슴을 쓸어내리고 있는 스튜어디스의 모습도 보였다.


웨인은 다시 안대를 덮고 생각에 잠겼다. 그의 눈앞에는 나이 지긋한 노신사의 모습이 떠올랐다. 액정너머의 노신사는 초췌해진 얼굴로 말했었다.

“어떻게 되던 그 아티펙트를 아프리카에서 빼내야 하네. 내버려뒀다간 유럽으로 흘러들어갈 게  보듯이 뻔해. 내 조국이 속해 있긴 하지만, 유럽연합은 지금 브레이크를 잃은 폭주기관차야. 던전을 장난감 상자 취급하고 있지. 그런 물건이 손에 들어간다면...생각만 해도 끔찍하군. 차후 회합을 가져보겠지만 다들 비슷한 의견 일 걸세. 그들에게 최소 사용권, 최대 소유권을 넘기게 되는 한이 있더라도 그걸 아프리카에 내버려둬선  되네. 유럽으로 넘어가기 전에 아프리카에 피바람이 불게 할 게야.”


‘최대 소유권이라...’


“마음 같아선 자네를 주축으로 협회팀을 꾸려서  청뢰라는 물건을 대여한 후에, 협회 자력으로 토벌하고 싶네만. 자네도 그렇고, 협회팀도 움직일 만한 상황이 아니니, 같은 급을 상대해 본 이들에게 맡기는 수밖에 없겠지. 웨인, 자네는 어디까지나 협회의 사람으로 그 자리에 참관하는 걸세. 토벌이 아니라, 참관일세. 마음 같아서는 피로한 자네 말고 다른 이를 보내고 싶네만...”
“정말 자네에게는 미안한 마음  일세.”
“아닙니다, 만약 저 말고 다른 사람을 보내려고 하셨으면 많이 서운했을 겁니다.”


웨인의 회상은 거기까지 였다.

‘....그래, 억지로 따돌려졌다면 몰래 따라왔겠지.’

협회장에게 한 대답은 한 치도 틀림이 없는 진심이었다. 이미 흐름을 바꿀 수 있는 아티펙트 하나가 나타났고, 그는 그 순간을 목격하지 못했다. 그것만으로도 아쉬운데 이렇게 가까운 기회가 있음에도 피로를 문제로 보지 못한다면 아쉬움만으로는 끝나지 않을 것이다.

‘문제는...’

웨인은 이제 안대를 완전히 벗겨내고 류 현 쪽으로 시선을 고정했다. 승하를 뜯어말린 류 현은 이제 화련에게 시달리는 중이었다. 피로로 조금 멍한 상태였기에, 웨인은 화련이라는 이름의 작은 여자가 무슨 말로  현을 저렇게 몰아붙이고 있는 건지 정확하게 들을 수가 없었다.


“일이 급하니, 시작하기도 전에 지분 문제로 진을 뺄 생각은 없습니다. 그저께 보셨다시피, 희란 씨가 저런 식으로 밖에서도 네다섯 발을 쏠  있다면, 괴수의 종류에 따라서는 열 발까지도 가능할 겁니다. 그냥 소란정도는 끝나지 않을 겁니다. 일단 가서 잡고  후에 논의하도록 하지요. 협회 측에서 정해진 바가 없다면 말입니다.”

출국 전날 덤덤한 표정으로 그리 말한 류 현 앞에서 웨인은 별다른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마치 정해진 대사를 내뱉을 수밖에 없는 인형극의 인형처럼 대답했다.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협회에도 그렇게 알리도록 하지요.”

그 말을 전해들은 협회장은 이미 힘을 가진 자의 여유라고 평했고, 웨인도 그에 동의했다. 동시에 그는 어처구니없는 기분이 들 수밖에 없었다. 강자의 여유라니.

류 현이 각성한 건 공식적으로 2036년 1월 2일이다. 협회에 등록한 건 거의 이주일 뒤지만, 협회가 보유하고 있는 각성 정황 자료상 그가 각성한 건 1월 초보다 앞이면 앞이지 뒷일 일수는 없다. 의식이 없는 동안 각성했을 가능성도 없진 않으니까. 그 동안은 어떤 상태인지 알 수가 없으니 신중을 기해서 의식을 회복한 1월 2일쯤으로 보는 것이다. 보통은 이런 기록을 신경 쓰는 경우는 잘 없다. 보통은.

‘이제 1년하고 5개월 차 플레이어라고?’

각성한 지 일 년도 안 되서 블루 퍼플 던전을 혼자 돌파하고, 끌어모은 팀원들마저 그에 버금가는 속도로 성장시키고 있는 괴물이라면 그런 자잘한 기록도 신경 안 쓸 수가 없다.

심지어 각성한 해인 2036년 4월까지는 공식적인 기록이 거의 없다시피 하니까. ‘터주’와 접촉한 정황이나 검성과 그 때부터 만났다는 정황은 있긴 하지만, 단편적일 뿐이고 정작 알고 싶은 정보는 요만큼도 없었다.


‘대체 어디서 정보를 얻는 거지?’


그의 정보력의 바탕! 협회는 이미 그를 맨땅에서 시작한 플레이어라고 보지 않고 있었다. 배후 세력의 유무는 제쳐놓고, 그의 행보는 정보 없이는 행할 수가 없을 정도로 쾌속이었고, 실패마저 없었다. 각성한   년하고 조금  되는 기간 만에 퍼플 던전에 도전할 정도의 어마어마한 성장력도 놀랍지만, 정보력은 그 이상으로 탐날 정도다.

그가 얼마 전에 협회에 넘겨준 송장목 해독 레시피의 효용을 확인했다. 잘린 팔다리는 우습게 붙이고, 상황이 된다면 손상된 내장까지 재생시키는 약효를, 협회 높으신 분들과 웨인은 임상 실험을 통해서 확인했다. 그 효용을 생각하면 그가 요구한 로열티 비율이 이상하다고 생각될 정도.


‘청뢰도 절대 우연히 얻은 게 아니야.’

탄자니아에서 지옥을 연출하고 있는 또 다른 아티펙트에 대한 반응만 봐도 그렇다.  현은 웨인이 골머리를 썩던 지분 문제에 대해서, 너무나도 간단하게 정리했다. 우선 그거 잡고 나서 생각합시다. 청뢰가 보여준 파괴력을 생각하면 이상할 정도로 무심한 반응.


하지만 그건 어마어마한 힘에 취한 방만함이 아니었다. 협회장의 말대로 이제 조급해 하지 않아도 자신의 몫을 챙길 수 있는, 주변에서 갖다 바칠 수밖에 없는 강자의 여유였다. 그것도 이미 오래 전부터 준비된 강자.

힘에 취하고도 남을 힘을 가지고 있음에도, 그것에 익숙해질 시간조차 없었음에도 그는 취한 모습은커녕 무덤덤한 모습만 보이고 있는 것이다. 팀 동료들이나 검성을 대할 때 보여주는 소시민적인 반응은 웨인에게는 당혹스럽게 다가오기만 했다.

‘이번 토벌은 기회야. 이보다 가까이서 그가 싸우는 모습을 볼 기회는 앞으로 거의 없겠지. 아티펙트 소유권에 대한 문제는...그래, 그의 말대로 잡고 나서 생각할 일이지. 내가 결정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생각은 거기까지였다. 한국에 입국하기 전부터 계속 되어왔고, 입국 후 사흘  극대화 되었던 피로와 스트레스가 그의 머리를 마비시켰다. 웨인은 안대를 다시  생각도 하지 못하고 자신을 끌어당기는 수마 속에 파묻혀 들어갔다.

***


“생각 보다 덥진 않네요?”

생애 처음으로 아프리카 땅을 밟은 화련의 평이었다. 희란은 고개를 끄덕거리며 그에 동의했다.

그리곤 둘은 곧바로 마중 나온 차량에 올라탔다. 지난 미국행에서 둘이 얻은 교훈은 외국도 별 것 없다. 였고, 날씨마저 특별한 것 없어보이자 관심이 사라진 것이었다.


류 현은 승하가 웨인과 함께 뒤쪽 차량에 타는 걸 확인하고는 팀원들이 탑승한 차량 조수석에 앉으며 말했다.

“저희가 체감할 정도로 더우면 일반인들은 못 삽니다.”


류 현은 그리 말하며 운전사에게 눈짓했고, 차가 매끄럽게 앞으로 미끄러져갔다.

“저번에 온도계 가져가 보니까 던전 안은 그렇게 온도도 높진 않던데요? 여기보다 낮으면 낮았지. 그런데도 덥던데.”
“그거야 던전 안이니까요. 숨만 쉬어도 마력이 쌓이는 곳이랑 밖이랑 같을 수가 없죠.”
“...뭔가 대충인 거 같은데 반박을 못하겠네.”


플레이어는 기본적으로 덥고, 추운 것에 강하다.  각성한 애송이도 40도가 넘는 뙤약볕 아래서 마라톤 신기록을 갈아치울 정도니 말다한 셈이다. 그럼에도 던전의 환경이 플레이어에게 악의를 드러내는 그린 정도가 되면 플레이어들도 더위를 느끼고, 추위를 탄다.


이에 대해서 수많은 논의가 오고갔지만, 연구자들을 그린 던전 이상의 던전 안에 데리고 들어갈 수는 없으니 변변한 연구조차 없었다. 그저 안에 가득 찬 마력 때문이지 않을까 하고 추측할 뿐이다.

길포장 상태가 별로인지 suv가 꽤 심하게 요동쳤다. 그래도 기사를 포함해서 불편한 기색을 한 이는 없었다. 모두 흔들리는 차안 정도는 침대 삼을 수 있을 정도로 험한 곳에서 자본 경험이 있는 이들이었으니까.


류 현은 장시간 비행 때문에 조금 굳은 목을 풀며 흘러가는 투로 말했다.

“뭐 잘 된 일 아니겠습니까. 열심히 뛰어다녀야할 팔자인데 더운  보다는  더운 게 낫지요.”
“그런데 진짜 우리 지프 타고 뛰어다녀야 해요? 미국은 블루 던전 어디 있는지도 콕콕 집어서 좌표까지 찍어줬다면서요. 여긴 퍼플 던전 보스몹도 못 찾는데요?”
“어쩌겠습니까. 블루 퍼플 이상 던전 탐지도 잘 안 되서 쩔쩔 매는 곳인데요. 제가 알기로는 아프리카 내에 아직 안 잡히고 사망추정 상태인 퍼플급 보스몹만 해도 세 마리는 됩니다. 최근에 터진 것까지 합치면 네 마리네요. 개 중 하나는 거의 확정이긴 합니다만, 괴수 상대로 시체를 못 봤으면 확신은 의미가 없지요.”
“와, 그렇게 개판인데 용케 안 망했네요.”

류 현은 화련의 말에 고소를 머금었다. 정말로 용케 망하지 않고 국가 형태를 유지하고 있는 게 현 아프리카의 주소였으니까. 그는 운전기사의 얼굴을 한  힐끔 쳐다봤다. 협회에서 고른 사람인지, 후덕한 인상의 흑인 운전기사는 그들의 이야기를 들은 채 만 채, 운전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류 현은 어깨를 으쓱하고는 대꾸했다.

“그러니까 저희한테는 기회죠.”
“그렇긴 하네요.”

대화는 그걸로 끝이었다. 화련은  이상은 제3자가 있는 곳에서 할 말이 아니라고 생각한 것인지 차창 밖 풍경에 집중했고, 희란은 목에 걸고 있는 청뢰가 영 불안한지 끊임없이 그것을 만지작거리면서 풍경구경을 했다.


끊임없이 덜컹거리면서도 멈추지 않고 길을 미끄러져 나가던 suv는 한 10층 건물 앞에 멈춰 섰다. 협회에서 수배해준 호텔이었다. 호텔 별 개수나 외관에는  관심이 없었기에 일행들은 별 말 없이 호텔 안으로 들어가, 방까지 안내를 받고 들어섰다.

류 현이 방바닥에 대충 짐을 내려놓고,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두 분은 두  방에 안 가십니까?”
“지금 가면 그 여...아니, 승하 씨가 있잖아요.”

 현이 화련의 대답에 고개를 갸웃했다. 설마 같은 방을 쓰기 싫은 것일까? 이미 던전에서 이주 가까이 같이 굴렀었는데? 거기다가 같은 방 써본 게 이번이 처음도 아니었다. 듣기로는 승하와 혜라 밑에서 수련할 때 거의 숙식을 같이 해결했었다고 들었다.


짧은 기간이지만 ‘광대들’ 때문에 비상이 걸렸을 때는 화련의 집에서 셋이서 지내기도 했었다.


“혹시 방을...”
“아니, 같이 방을 쓰기 싫은 건 아니고요. 그게...”

화련은 옆머리를 비비 꼬더니 갑자기 한숨을  내쉬었다.  현은 의구심이 더욱 깊어지는 기분이었다. 그가 재차 물으려고 했을 때, 희란이 불쑥 말했다.

“그, 그게 승하 언니는 여자 끼리 있을  호, 홀랑 벗고 다니셔서.”
“예? 어, 그러니까. 홀랑? 전부?”
“미, 밑에는 입긴 하세요...다른 사람이 있으면.”


류 현은 그 부분에서 할 말을 잃었다. 왜 자기 주변에 친구라고 칭하던 인간은 전생이나 현생이나 정상이 없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어, 음. 그러면 진작 말씀을 하시지 그랬습니까.  하나 더 잡는  그렇게 힘든 일도 아닌데.”
“아니,  정도는 아니에요. 뭣보다  여자랑 같이 있는 게  안전한 건 사실이니까. 그리고  벗고 다닐 수도 있죠. 이모도 그 정도는 아니어도 비슷하게 그러고 다니셨으니까. 그런데 말이죠...”
“그럼 왜...?”


화련이 말을 하다 말고 입을  다물어 버리자 류 현이 물었지만, 화련은 대답할 기색 없이 입을 꾹 다문 채였다.  현이 대답을 얻기 위해서 희란을 돌아봤지만, 희란 또한 시선을 회피하며 대답을 거부했다.


 현이 뒷머리를 긁적거리며 한 숨으로 이야기를 끝내려던 찰나, 대충 흘려들으면 알아듣지도 못할 정도로 화련이 작게 중얼거렸다.

“...보고 있으면 자존심 상해.”


 짧은 말에 담긴 울분이 남자인 그 조차 고개가 끄덕여질 정도라 류 현은 도저히 웃어넘길 수가 없었다.

〈 88화 〉탐식마(貪食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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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인은 자신의 눈앞을 가리고 있는 안대를 슬쩍 들추고 옆자리에 앉아있는 남자를 곁눈질로 살폈다. 류 현은 떨떠름한 얼굴로 보드카를 병째로 들이키려는 승하를 뜯어말리고 있었다. 그 뒤편으로 가슴을 쓸어내리고 있는 스튜어디스의 모습도 보였다.


웨인은 다시 안대를 덮고 생각에 잠겼다. 그의 눈앞에는 나이 지긋한 노신사의 모습이 떠올랐다. 액정너머의 노신사는 초췌해진 얼굴로 말했었다.

“어떻게 되던 그 아티펙트를 아프리카에서 빼내야 하네. 내버려뒀다간 유럽으로 흘러들어갈 게  보듯이 뻔해. 내 조국이 속해 있긴 하지만, 유럽연합은 지금 브레이크를 잃은 폭주기관차야. 던전을 장난감 상자 취급하고 있지. 그런 물건이 손에 들어간다면...생각만 해도 끔찍하군. 차후 회합을 가져보겠지만 다들 비슷한 의견 일 걸세. 그들에게 최소 사용권, 최대 소유권을 넘기게 되는 한이 있더라도 그걸 아프리카에 내버려둬선  되네. 유럽으로 넘어가기 전에 아프리카에 피바람이 불게 할 게야.”


‘최대 소유권이라...’


“마음 같아선 자네를 주축으로 협회팀을 꾸려서  청뢰라는 물건을 대여한 후에, 협회 자력으로 토벌하고 싶네만. 자네도 그렇고, 협회팀도 움직일 만한 상황이 아니니, 같은 급을 상대해 본 이들에게 맡기는 수밖에 없겠지. 웨인, 자네는 어디까지나 협회의 사람으로 그 자리에 참관하는 걸세. 토벌이 아니라, 참관일세. 마음 같아서는 피로한 자네 말고 다른 이를 보내고 싶네만...”
“정말 자네에게는 미안한 마음  일세.”
“아닙니다, 만약 저 말고 다른 사람을 보내려고 하셨으면 많이 서운했을 겁니다.”


웨인의 회상은 거기까지 였다.

‘....그래, 억지로 따돌려졌다면 몰래 따라왔겠지.’

협회장에게 한 대답은 한 치도 틀림이 없는 진심이었다. 이미 흐름을 바꿀 수 있는 아티펙트 하나가 나타났고, 그는 그 순간을 목격하지 못했다. 그것만으로도 아쉬운데 이렇게 가까운 기회가 있음에도 피로를 문제로 보지 못한다면 아쉬움만으로는 끝나지 않을 것이다.

‘문제는...’

웨인은 이제 안대를 완전히 벗겨내고 류 현 쪽으로 시선을 고정했다. 승하를 뜯어말린 류 현은 이제 화련에게 시달리는 중이었다. 피로로 조금 멍한 상태였기에, 웨인은 화련이라는 이름의 작은 여자가 무슨 말로  현을 저렇게 몰아붙이고 있는 건지 정확하게 들을 수가 없었다.


“일이 급하니, 시작하기도 전에 지분 문제로 진을 뺄 생각은 없습니다. 그저께 보셨다시피, 희란 씨가 저런 식으로 밖에서도 네다섯 발을 쏠  있다면, 괴수의 종류에 따라서는 열 발까지도 가능할 겁니다. 그냥 소란정도는 끝나지 않을 겁니다. 일단 가서 잡고  후에 논의하도록 하지요. 협회 측에서 정해진 바가 없다면 말입니다.”

출국 전날 덤덤한 표정으로 그리 말한 류 현 앞에서 웨인은 별다른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마치 정해진 대사를 내뱉을 수밖에 없는 인형극의 인형처럼 대답했다.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협회에도 그렇게 알리도록 하지요.”

그 말을 전해들은 협회장은 이미 힘을 가진 자의 여유라고 평했고, 웨인도 그에 동의했다. 동시에 그는 어처구니없는 기분이 들 수밖에 없었다. 강자의 여유라니.

류 현이 각성한 건 공식적으로 2036년 1월 2일이다. 협회에 등록한 건 거의 이주일 뒤지만, 협회가 보유하고 있는 각성 정황 자료상 그가 각성한 건 1월 초보다 앞이면 앞이지 뒷일 일수는 없다. 의식이 없는 동안 각성했을 가능성도 없진 않으니까. 그 동안은 어떤 상태인지 알 수가 없으니 신중을 기해서 의식을 회복한 1월 2일쯤으로 보는 것이다. 보통은 이런 기록을 신경 쓰는 경우는 잘 없다. 보통은.

‘이제 1년하고 5개월 차 플레이어라고?’

각성한 지 일 년도 안 되서 블루 퍼플 던전을 혼자 돌파하고, 끌어모은 팀원들마저 그에 버금가는 속도로 성장시키고 있는 괴물이라면 그런 자잘한 기록도 신경 안 쓸 수가 없다.

심지어 각성한 해인 2036년 4월까지는 공식적인 기록이 거의 없다시피 하니까. ‘터주’와 접촉한 정황이나 검성과 그 때부터 만났다는 정황은 있긴 하지만, 단편적일 뿐이고 정작 알고 싶은 정보는 요만큼도 없었다.


‘대체 어디서 정보를 얻는 거지?’


그의 정보력의 바탕! 협회는 이미 그를 맨땅에서 시작한 플레이어라고 보지 않고 있었다. 배후 세력의 유무는 제쳐놓고, 그의 행보는 정보 없이는 행할 수가 없을 정도로 쾌속이었고, 실패마저 없었다. 각성한   년하고 조금  되는 기간 만에 퍼플 던전에 도전할 정도의 어마어마한 성장력도 놀랍지만, 정보력은 그 이상으로 탐날 정도다.

그가 얼마 전에 협회에 넘겨준 송장목 해독 레시피의 효용을 확인했다. 잘린 팔다리는 우습게 붙이고, 상황이 된다면 손상된 내장까지 재생시키는 약효를, 협회 높으신 분들과 웨인은 임상 실험을 통해서 확인했다. 그 효용을 생각하면 그가 요구한 로열티 비율이 이상하다고 생각될 정도.


‘청뢰도 절대 우연히 얻은 게 아니야.’

탄자니아에서 지옥을 연출하고 있는 또 다른 아티펙트에 대한 반응만 봐도 그렇다.  현은 웨인이 골머리를 썩던 지분 문제에 대해서, 너무나도 간단하게 정리했다. 우선 그거 잡고 나서 생각합시다. 청뢰가 보여준 파괴력을 생각하면 이상할 정도로 무심한 반응.


하지만 그건 어마어마한 힘에 취한 방만함이 아니었다. 협회장의 말대로 이제 조급해 하지 않아도 자신의 몫을 챙길 수 있는, 주변에서 갖다 바칠 수밖에 없는 강자의 여유였다. 그것도 이미 오래 전부터 준비된 강자.

힘에 취하고도 남을 힘을 가지고 있음에도, 그것에 익숙해질 시간조차 없었음에도 그는 취한 모습은커녕 무덤덤한 모습만 보이고 있는 것이다. 팀 동료들이나 검성을 대할 때 보여주는 소시민적인 반응은 웨인에게는 당혹스럽게 다가오기만 했다.

‘이번 토벌은 기회야. 이보다 가까이서 그가 싸우는 모습을 볼 기회는 앞으로 거의 없겠지. 아티펙트 소유권에 대한 문제는...그래, 그의 말대로 잡고 나서 생각할 일이지. 내가 결정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생각은 거기까지였다. 한국에 입국하기 전부터 계속 되어왔고, 입국 후 사흘  극대화 되었던 피로와 스트레스가 그의 머리를 마비시켰다. 웨인은 안대를 다시  생각도 하지 못하고 자신을 끌어당기는 수마 속에 파묻혀 들어갔다.

***


“생각 보다 덥진 않네요?”

생애 처음으로 아프리카 땅을 밟은 화련의 평이었다. 희란은 고개를 끄덕거리며 그에 동의했다.

그리곤 둘은 곧바로 마중 나온 차량에 올라탔다. 지난 미국행에서 둘이 얻은 교훈은 외국도 별 것 없다. 였고, 날씨마저 특별한 것 없어보이자 관심이 사라진 것이었다.


류 현은 승하가 웨인과 함께 뒤쪽 차량에 타는 걸 확인하고는 팀원들이 탑승한 차량 조수석에 앉으며 말했다.

“저희가 체감할 정도로 더우면 일반인들은 못 삽니다.”


류 현은 그리 말하며 운전사에게 눈짓했고, 차가 매끄럽게 앞으로 미끄러져갔다.

“저번에 온도계 가져가 보니까 던전 안은 그렇게 온도도 높진 않던데요? 여기보다 낮으면 낮았지. 그런데도 덥던데.”
“그거야 던전 안이니까요. 숨만 쉬어도 마력이 쌓이는 곳이랑 밖이랑 같을 수가 없죠.”
“...뭔가 대충인 거 같은데 반박을 못하겠네.”


플레이어는 기본적으로 덥고, 추운 것에 강하다.  각성한 애송이도 40도가 넘는 뙤약볕 아래서 마라톤 신기록을 갈아치울 정도니 말다한 셈이다. 그럼에도 던전의 환경이 플레이어에게 악의를 드러내는 그린 정도가 되면 플레이어들도 더위를 느끼고, 추위를 탄다.


이에 대해서 수많은 논의가 오고갔지만, 연구자들을 그린 던전 이상의 던전 안에 데리고 들어갈 수는 없으니 변변한 연구조차 없었다. 그저 안에 가득 찬 마력 때문이지 않을까 하고 추측할 뿐이다.

길포장 상태가 별로인지 suv가 꽤 심하게 요동쳤다. 그래도 기사를 포함해서 불편한 기색을 한 이는 없었다. 모두 흔들리는 차안 정도는 침대 삼을 수 있을 정도로 험한 곳에서 자본 경험이 있는 이들이었으니까.


류 현은 장시간 비행 때문에 조금 굳은 목을 풀며 흘러가는 투로 말했다.

“뭐 잘 된 일 아니겠습니까. 열심히 뛰어다녀야할 팔자인데 더운  보다는  더운 게 낫지요.”
“그런데 진짜 우리 지프 타고 뛰어다녀야 해요? 미국은 블루 던전 어디 있는지도 콕콕 집어서 좌표까지 찍어줬다면서요. 여긴 퍼플 던전 보스몹도 못 찾는데요?”
“어쩌겠습니까. 블루 퍼플 이상 던전 탐지도 잘 안 되서 쩔쩔 매는 곳인데요. 제가 알기로는 아프리카 내에 아직 안 잡히고 사망추정 상태인 퍼플급 보스몹만 해도 세 마리는 됩니다. 최근에 터진 것까지 합치면 네 마리네요. 개 중 하나는 거의 확정이긴 합니다만, 괴수 상대로 시체를 못 봤으면 확신은 의미가 없지요.”
“와, 그렇게 개판인데 용케 안 망했네요.”

류 현은 화련의 말에 고소를 머금었다. 정말로 용케 망하지 않고 국가 형태를 유지하고 있는 게 현 아프리카의 주소였으니까. 그는 운전기사의 얼굴을 한  힐끔 쳐다봤다. 협회에서 고른 사람인지, 후덕한 인상의 흑인 운전기사는 그들의 이야기를 들은 채 만 채, 운전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류 현은 어깨를 으쓱하고는 대꾸했다.

“그러니까 저희한테는 기회죠.”
“그렇긴 하네요.”

대화는 그걸로 끝이었다. 화련은  이상은 제3자가 있는 곳에서 할 말이 아니라고 생각한 것인지 차창 밖 풍경에 집중했고, 희란은 목에 걸고 있는 청뢰가 영 불안한지 끊임없이 그것을 만지작거리면서 풍경구경을 했다.


끊임없이 덜컹거리면서도 멈추지 않고 길을 미끄러져 나가던 suv는 한 10층 건물 앞에 멈춰 섰다. 협회에서 수배해준 호텔이었다. 호텔 별 개수나 외관에는  관심이 없었기에 일행들은 별 말 없이 호텔 안으로 들어가, 방까지 안내를 받고 들어섰다.

류 현이 방바닥에 대충 짐을 내려놓고,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두 분은 두  방에 안 가십니까?”
“지금 가면 그 여...아니, 승하 씨가 있잖아요.”

 현이 화련의 대답에 고개를 갸웃했다. 설마 같은 방을 쓰기 싫은 것일까? 이미 던전에서 이주 가까이 같이 굴렀었는데? 거기다가 같은 방 써본 게 이번이 처음도 아니었다. 듣기로는 승하와 혜라 밑에서 수련할 때 거의 숙식을 같이 해결했었다고 들었다.


짧은 기간이지만 ‘광대들’ 때문에 비상이 걸렸을 때는 화련의 집에서 셋이서 지내기도 했었다.


“혹시 방을...”
“아니, 같이 방을 쓰기 싫은 건 아니고요. 그게...”

화련은 옆머리를 비비 꼬더니 갑자기 한숨을  내쉬었다.  현은 의구심이 더욱 깊어지는 기분이었다. 그가 재차 물으려고 했을 때, 희란이 불쑥 말했다.

“그, 그게 승하 언니는 여자 끼리 있을  호, 홀랑 벗고 다니셔서.”
“예? 어, 그러니까. 홀랑? 전부?”
“미, 밑에는 입긴 하세요...다른 사람이 있으면.”


류 현은 그 부분에서 할 말을 잃었다. 왜 자기 주변에 친구라고 칭하던 인간은 전생이나 현생이나 정상이 없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어, 음. 그러면 진작 말씀을 하시지 그랬습니까.  하나 더 잡는  그렇게 힘든 일도 아닌데.”
“아니,  정도는 아니에요. 뭣보다  여자랑 같이 있는 게  안전한 건 사실이니까. 그리고  벗고 다닐 수도 있죠. 이모도 그 정도는 아니어도 비슷하게 그러고 다니셨으니까. 그런데 말이죠...”
“그럼 왜...?”


화련이 말을 하다 말고 입을  다물어 버리자 류 현이 물었지만, 화련은 대답할 기색 없이 입을 꾹 다문 채였다.  현이 대답을 얻기 위해서 희란을 돌아봤지만, 희란 또한 시선을 회피하며 대답을 거부했다.


 현이 뒷머리를 긁적거리며 한 숨으로 이야기를 끝내려던 찰나, 대충 흘려들으면 알아듣지도 못할 정도로 화련이 작게 중얼거렸다.

“...보고 있으면 자존심 상해.”


 짧은 말에 담긴 울분이 남자인 그 조차 고개가 끄덕여질 정도라 류 현은 도저히 웃어넘길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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