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7화 〉탐식마(貪食魔)
조용히 눈을 감은 채, 희란은 오른손 검지에 끼워진 푸르스름한 빛을 띄는 반지에 집중했다. 그녀는 반지가 몸의 연장이라도 되는 양, 자연스럽게 마력을 흘러 넣었다. 이전 같은 거부반응은 없었다. 청뢰는 탐욕스럽지만 서두르지 않고 그녀가 흘려 넣는 마력을 받아먹었다.
그리고 그녀가 정한 임계점에 도달했을 때,
[콰릉!] 우레가 하늘을 찢으며 대지를 희롱했다.
희란은 영원히 계속 될 것 같던 굉음과 번쩍임이 멎자, 한숨을 몰아쉬며 들었던 오른팔을 아래로 내렸다. 오른손아귀가 약간 저릿했지만, 그녀는 애써 표정을 감췄다.
“후우...”
“수고하셨습니다.”
희란이 뒤돌아서자 류 현이 반기며 손을 불쑥 내밀어왔다. 희란은 거절하지 않고 그 손을 잡고 바위틈을 사뿐히 건넜다. 그녀는 자신이 만든 광경에 조금도 관심 없다는 듯이 제 손만 만지작거렸다. 다른 일행들은 희란이 만들어놓은 자연재해 현장을 느긋하게 감상했다.
산 아래 펼쳐져있는 평원은 자연재해 그 자체였다. 나무들은 하늘을 저주하는 것처럼 뿌리를 하늘로 향한 채로 잎은 불타고 있었다. 몇 천 년이고 그 자리를 지킬 것 같이 당당하던 바위는 자리를 지키기는커녕, 산산조각 나는 신세가 되었다. 던전 안이 아니라면 다음날 일간지 1면에 대서특필 될 만한 광경.
그런 재해의 현장을 목도한 것 치고 그들의 반응은 태연하기 그지없었다.
“그 때보다 좀 작은 거 같은데...희란아?”
“범위를 조금 줄여봤어요. 그럼 파괴력이 좀 더 나올 거 같아서...이, 이 정도는 다섯 발 정도 더 쏠 수 있어요.”
“벌써 이런 식으로 응용하실 줄은 몰랐군요. 혼자서 연습하셨습니까? 그런데 레드 던전 두 번 외에는 기록이 없던데요.”
“처, 처음에는 무작정 많이 써보려고 했어요. 그런데 마스터가 안 계시면 저 혼자서는 몇 발 못 쏘고 관둬야 해서...그래서 이미지 트레이닝이라도 열심히...”
희란의 자신 없는 대꾸에 승하가 어처구니 없다는 듯이 말했다.
“...쟤 각성한지 이제 1년 된 애 맞아? 마법사도 아니면서 무슨 이미지 트레이닝으로 마법을 다뤄...?”
“15개월인가, 그 쯤 됐을 겁니다.”
“진짜 괴물이야, 괴물...”
웨인은 그 태연한 반응에 더욱 놀랄 수밖에 없었다.
‘이 정도라고? 이건 아티펙트 수준을 넘어섰다. 대체 어디서...그 퍼플 던전에서 얻은건가?’
거듭된 과로로 머리를 굴릴 때마다 삐걱거리는 환청이 들리는 듯 했지만, 웨인은 생각하는 걸 멈추지 않고 거듭 생각했다. 저 아티펙트는 위험하다. 그 자체의 파괴력도 그렇지만, 몰고 올 파급력이 더 엄청날 것이다!
단순히 현대 과학으로 해명이 안 되는 신기한 도구를 넘어서, 현대화기에 버금가는 위력이 개인의 손에 쥐여진 것이다.
‘그리고 저런 게 지금 아프리카에...’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웨인의 머릿속이 엉망진창으로 헝클어졌다.
***
화련은 반지를 던졌다가 공중에서 잡아채며, 소파에 자리를 잡았다. 그녀는 반지를 던졌다, 받았다 하는 행동을 반복하며 말했다. 유니크 아티펙트를 대하는 것 치고는 불순하다고 해도 좋을 만큼 무성의한 태도였지만, 지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근데 저대로 그냥 보내도 되겠어요? 거의 다 죽어가는 얼굴이던데. 저런 상태로 아무 말도 안하고 그냥 보내는 건 좀...”
“지금 붙잡고 말해봐야 말의 반도 제대로 전달 안 될 겁니다. 어차피 하루 정도 유예를 줄 생각이기도 했고요. 협회가 생각 이상으로 그를 쥐어짜나 봅니다.”
연락을 취한 지 하루 만에 한국으로 날아온 웨인은 누가 봐도 과로사 직전의 모습이었다. 그가 플레이어가 아니었다면, 그것도 세계적으로 손꼽히는 플레이어가 아니었다면 이미 관에 들어가 있었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
솔직하게 말하자면 화련은 웨인이 류 현이 한 설명의 절반은 알아들었을지 조차 의심스러웠다.
“협회 소속 잘 나가는 플레이어면 명령만 내리고 거드름 피울 줄 알았는데, 환상이 좀 깨지는 기분이네요.”
“잘 나가는 플레이어는 대부분 국가나 길드 소속이니까요. 협회 소속 플레이어 중에서 이름을 날리는 이라고 해봐야 웨인 말고 누가 있습니까.”
“확실히 그렇긴 하죠. 돈도 기업체나 길드 소속인 거 보다 못 벌 텐데 대단하네요. 나 같으면 출국하는 척하고 도망갈 텐데.”
“뭐, 제가 아는 사람 중에는 목숨 내놓고 더 위로 가고 싶어 하는 사람도 있으니, 명예욕 정도는 이해 못할 건 없지요.”
그의 말에 화련이 반지를 던졌다, 받았다 하는 동작을 우뚝 멈췄다. 공중에 떠있던 반지는 사정없이 추락했고, 옆에 앉아서 조용히 커피를 홀짝이고 있던 희란이 기겁하며 반지를 받아내었다.
“뭔가 비꼬는 거 같은 기분인데요. 마스터?”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순수하게 감탄하는 것 뿐 입니다.”
“아아, 그 이후는 둘이서 있을 때나 하고. 어쩔 거야?”
류 현과 화련의 시선이 사무실 현관 쪽으로 몰렸다. 나승하는 문을 툭 밀어 닫고는 소파 쪽으로 휘적휘적 걸어왔다. 그녀가 자신의 맞은편에 자리를 잡자 류 현이 물었다.
“웨인 씨 말입니까?”
“그 인간 말고 오늘 다른 일이 있었어? 반쯤 넋이 나가긴 했어도 협회 꼰대들한테 제대로 전할 거야. 용잡이 팀은 현재 청와대를 건물 채로 날려버릴 수 있는 아티펙트를 보유 중. 주의 요망.”
“뭐 사실이니까. 걱정할 일도 아니지 않습니까. 청와대를 날리는 데 그렇게 까지 할 필요는 없겠지만요.”
“내 말은, 무슨 생각으로 이 시점에 알렸냐는 거야. 기본적으로 소유권은 너희 팀에 있고, 나야 사용권만 있는 거니까. 어떻게 하든 상관할 바는 아니지만, 아프리카에 있는 그게 청뢰랑 비슷한 급이라고 밝힐 이유는 없잖아?”
“맞아요. 그 쪽이 우리가 청뢰를 가지고 있는 걸 알고 알려준 것도 아니고, 단순히 긴급 소집에 대비해서 먼저 알려준 것 뿐 이잖아요? 거기다가 우리는 긴급소집 될 만한 인지도도 없는데. 승하 씨 쪽이면 모를까.”
류 현은 이 때다 하고 입을 맞춰둔 것처럼 호응해오는 화련의 기세에 밀린 것처럼 몸을 뒤로 젖히며, 소파에 몸을 묻었다.
“이왕이면 하나 보다는 둘이 낫지 않습니까.”
“네?”“뭐?”
류 현은 다시 몸을 앞으로 향하며, 반쯤 장외자가 된 희란에게 손짓해서 그녀를 끌어들였다.
“청뢰에 대해서는 영원히 비밀로 할 수는 없습니다. X던전에 우리들끼리 들어가겠다면 가능하겠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그런 건 불가능 하지요.”
승하는 류 현에게 브레이크를 넣기 위해서, X던전의 존재를 밝혔다. 그 결과 협회와 용잡이 팀원들, 승하와 혜라가 X던전의 위치를 알고 있다.
중요한 건 알고 있는 이의 숫자가 아니라, 이젠 조용히 들어가서 해먹고 나온다는 선택지를 선택할 수 없다는 점이다.
‘조용히 해먹고 나오는 것도 나쁘진 않았겠지만...블랙 던전이 그거 하나만 있는 것도 아니고 나중에 실컷 해먹을 테니까.’
개체 하나하나가 독립되어있고 유일한 네임드 몹이면 모를까, 곧 있으면 지겹게 맞닥뜨리게 될 블랙 던전을 가지고 모험을 할 생각은 그에게는 없었다. 그럴 실력이 있다고 해도, 이미 존재가 밝혀진 마당에 그들끼리 조용히 해먹고 나와 버리면 어떤 식으로든 간에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다. 그냥 널린 던전이 아니라 현 시점에서는 유일한 최상위 던전이니까.
악룡과 싸우기 이전에는 독보 그 자체였던 이전 생과는 달라야한다. 상대가 불만을 느끼지 않을 정도로 손해 보는 거래를 할 생각은 없지만, 괜히 긁어 부스럼 만들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
‘제대로 된 데뷔 기회도 필요해. 거기다가 유성우를 완전히 우리 소유로는 못해도 유럽 놈들이 빼돌리는 것 정도는 막아야 한다.’
그리고 유성우의 유럽 유출을 막는 것! 류 현이 청뢰의 존재를 예정보다 일찍 드러낸 이유 중 하나였다.
협회 소유가 될지언정, 사용권은 확보할 수 있을 터. 유니크 아티펙트의 보유는커녕 사용 요청마저 못해서 쩔쩔 매던 이전 생과는 이미 차원이 다른 유리함이다. 무엇보다도 류 현은 유럽 연합에 좋은 감정은 없었다. 이전 생에서 그들이 유니크 아티펙트로 직접 전쟁질을 하진 않았지만, 그걸로 그 비슷한 짓은 했었으니까.
‘차라리 협회가 쥐고 있는 게 나아. 강대국들이 알아서 견제도 해줄 거고, 협회 쪽이 사용권 협상도 훨씬 편해.’
“어차피 까발려 질 거, 뭔가를 더 얻을 수 있을 때 까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협회가 바보가 아닌 이상, 청뢰 같은 아티펙트 없이 저 괴수를 잡는 것보다는 사용권 배분을 해주더라도 우리 손을 빌리고자 할 겁니다. 우리 쪽에서 거절하든, 그 쪽에서 내켜하지 않든 간에, 적어도 청뢰의 대여 정도는 요청하겠지요.”
청뢰를 쥐고 있던 희란이 화들짝 놀라며 반응했다. 두 손으로 아스러지게 청뢰를 움켜쥐는 그 모습을 보고 류 현은 옅게 미소 지었다.
“...그리고 협회에서 요청을 하면 마스터가 그걸 가지고 갈 생각이고요?”
“멋대로 말을 꺼낸 건 저니까요.”
“이럴 때 마다 생각하는 거지만, 마스터는 아닌 척 하면서 은근히 독불장군이라니까.”
“그 부분에 대해서는 별로 할 말이 없군요. 하하.”
화련은 류 현이 웃어젖히자 어깨를 늘어뜨렸다가, 자세를 바로하며 말했다.
“됐어요, 말해봐야 뭐해. 이런 사람인 거 진작 못 알아채고 사인한 내 잘못이지. 비행기 표 세장 끊어놓으라고나 해주세요.”
“세 장이요?”
“마스터가 청뢰만 들고 아프리카로 날아가면 희란이는 아마 울어버릴 걸요. 그리고 이런 식으로 줬다 뺏는 게 어디 있어요?”
“아니, 뺏는 게 아니라...”
“쟤 표정이나 보시죠.”
류 현의 시선이 향하자 희란은 내저을 수 있는 신체부위 전부를 다 흔들며 부정을 표했다. 그 때문에 거의 말을 알아들을 수 없는 지경이었지만, 류 현은 한 가지 의사만큼은 분명히 읽을 수 있었다.
“알겠습니다. 세 장. 그렇게 하지요.”
훈훈하게 마무리 될 분위기 속에서 따돌려져 있던 승하가 불쑥 말했다.
“난 왜 빼? 나 지금 왕따 시켜?”
“전 승하 씨네 팀장 아닙니다.”
류 현의 대꾸에 화련이 폭소를 터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