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6화 〉탐식마(貪食魔)
2차 ‘대소환’이 터지고 공무원이 가장 불행해진 나라가 어디냐고 묻는다면, 국제 정세에 관심이 많은 이들은 하나같이 한국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플레이어가 등장하고, 그 존재를 국제적으로 은폐하면서 각국이 추진하던 슈퍼 솔져 프로젝트는 결국, 2차 ‘대소환’으로 인해서 흔적도 없이 쓸려나갔다. 연관되었던 자들은 행여나 그 이야기를 건드리지 않기 위해서 애를 썼지만, 그 피해자들의 입을 다물게 할 수는 없었다.
북한은 그 피해자들이 가장 극단적인 방식으로 억압에 대한 울분을 풀어헤친 나라 중 하나였다. 그 결과 북한은 초기 괴수 진압은커녕, 수뇌부를 제거하는 데 성공한 플레이어들까지 날뛰는 생지옥이 되었다.
그 생지옥을 수습해야 했던 건 남한 정부와 플레이어들이었다. 주변 나라들은 그럴 여력이 전혀 없었다. 특히 공공연하게 북한에 침을 발라놨던 중국은, 불안해진 정세를 기회를 보고 독립운동을 시작한 소수민족들을 수습하기 바빴다.
이 북한 안정에 공헌한 것은 ‘예거즈’의 대표 업적 중 하나였다.
하지만 ‘예거즈’와 그들을 이끄는 검성이 아무리 용맹하다고 한들 용맹함만으로 싸울 수는 없었고, 그 뒤에는 과로사 직전까지 쥐어 짜이며, 그들을 지원한 군인과 공무원들이 있었다.
특히 후방에서 서류 업무를 보는 공무원들의 혹사가 심해서, 한동안은 사무직 공무원보다는 차라리 군인이 돼서 북한 파견 수당을 받는 게 낫다는 식의 공무원 기피 현상마저 일어날 정도였다.
이렇듯 한국이 이런 식으로 성공적으로 인접국가의 혼란까지 수습한 예시라면, 아프리카는 그 정반대에 서있는 예시였다.
가장 먼저 무너진 것은 이집트였다. 사막에서 튀어나온 블루 급 괴수들을 막지 못하자, 그 뒤로는 접근 불가지역이 된 사막에 자리 잡은 던전들이 괴수 공장처럼 괴수들을 쏟아내었다. 그렇게 사하라 사막을 중심으로 괴수들이 아프리카 대륙전체로 사방팔방 퍼져나갔다.
괴수 무리를 일소하는 폭격? 그런 건 불가능했다. 괴수 무리는 군대가 아니라 배고픈 들개 무리에 가깝다. 인가가 근처에 있으면 귀신같이 알고 몰려가서 분탕질을 쳐대는 데 거기다가 폭격을 때린단 말인가?
아프리카 대륙의 각국 정부들은 사막에서 튀어나오는 숫자라도 줄이기 위해서 사막을 틀어막고 전선을 펼쳤다. 하지만 저급 괴수들의 물량 공세를 어떻게든 수습한 듯하면, 그린 이상의 던전에서 튀어나온 괴수가 전선을 완전히 휘저어놓는 일이 반복되면서, 전선은 붕괴. 아프리카는 지옥이 되었다.
이 후 플레이어들의 수준이 올랐음에도 사태는 호전되지 않고, 오히려 악화일로만 걸었다. 플레이어들이 군벌과 결합해서 쿠데타를 일으키는 등 괴수와의 전쟁 외에도 내전이 끊이질 않았다.
이런 아프리카에 대한 강대국들의 대응은 간단했다. 유럽은 괴수 군단이 자신들의 앞마당에 들이칠 걸 우려해서, 어떻게든 아프리카가 완전히 붕괴하지 않게 만들기 위해, 그나마 전선 유지를 하고 있는 군벌과 뒤에서 손을 잡았다. 미국은 세계 경찰 노릇을 완전히 놓지 않기 위해서 간간히 군대와 플레이어 길드 몇을 파견하는 것으로 생색만 냈다.
그리고 그게 정상적인 대응의 한계 범위였다. 2차 ‘대소환’초기에 이미 괴수 천국이 된 사막지역은 이미 플레이어를 투입한 사냥이나, 그냥 폭격 한 두 번으로는 답이 안 나왔다. 하려면 계산기를 아예 놔버리고 인류애 하나만 믿고 밀고 나가야하는 상황.
여행 불가 정도가 아니라, 정부 관료조차 업무상 방문을 할 때도 말도 못할 정도의 복잡한 절차를 밟아야하는 현세의 지옥. 그것이 현재의 아프리카였다.
‘설마 하니 진짜 아프리카에서 나온 물건 일 줄이야.’
류 현은 승하가 벌써 세 번째 돌려보고 있는 영상을 보며 생각했다. 영상에는 한 산이 비치고 있었다. 하얀 모자를 뒤집어쓴 것처럼 눈이 내려앉아있는 산봉우리는 사위가 어두움에도 한 눈에 보일 정도로 눈에 띄었다.
그런 산에 갑자기 검은 그림자가 어리더니,
[쿠구구!][콰릉!]
산 뒤쪽이 폭발했다. 카메라가 비추고 있는 정반대 쪽이었기에 바위가 튀어오르는 것 정도만 보일 뿐, 무엇이 그렇게 했는지는 알 수 없었다.
[꾸르릉!]
뒤이어 천지가 뒤흔들리는 굉음이 터져 나왔다. 마치 불의의 일격을 얻어맞은 산이 노호성을 토해내는 것 같은 모습이었다.
[우르릉!][콰릉!]
주변이 흔들리는 통에 영상을 촬영하던 카메라가 마구잡이로 흔들려서 그 뒤의 영상은 볼 필요도 없을 수준이었다. 하지만, 류 현은 카메라가 엎어지기 직전 산이 토해내는 시뻘건 핏물 같은 용암을 토해내는 것을 보았다.
‘확실해. 네임드 몹이 4년 이상 빨리 기어 나온 게 아니라면, 유성우 짓이 확실하다.’
류 현은 그 시점에서 이마를 부여잡았다. 그리곤 짧게 한 숨을 몰아쉬었다. 승하는 네 번째로 영상을 재생해보고 있어, 류 현의 한숨 소리를 듣지 못했다.
‘유럽 놈들, 아프리카에 이래저래 침 발라놨다는 걸 알고 있긴 했지만...유니크 아티펙트를 빼돌릴 정도였단 말이야?’
어느 정도 예상하긴 했지만, 맞지 않길 바랐던 예상이 들어맞았기 때문에 나오는 한숨이었다.
이전 생에서 유성우를 보유했던 건 유럽 연합 소속의 ‘유로파’였다. 가장 늦게 공개된 유니크 아티펙트로, 이래저래 구린 이야기가 많이 엮인 아티펙트이기도 했다.
웨인 크로이츠 사후에 내세울만한 카드가 없었던 유럽이 유니크 아티펙트라는 카드를 보유하고도, 그토록 오랫동안 침묵했던 건 유성우를 아프리카에서 빼돌렸기 때문이다! 라는 루머가 가장 대표적인 것으로, ‘유로파’ 측에서는 이에 대해 침묵으로만 일관했다.
근거가 아주 없진 않았다. 아프리카 내에서 유성우가 동원된 것으로 짐작되는 괴수 피해현장이 한 둘이 아니었다. 개 중에서는 흐릿하긴 하지만, 하늘에서 돌덩이들이 떨어지는 장면이 찍힌 영상도 있었다. 유니크 아티펙트의 존재가 드러나기 전에는 5성이상의 리치가 등장했겠거니 했지만, 유성우가 등장하자 그 쪽으로 의심의 추가 기울었던 것.
류 현이 이 루머를 기억해둔 건 단순히 유니크 아티펙트에 대한 아쉬움 때문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그런데 그 루머가 사실이었을 줄이야.
‘진짜 골 때리네. 그새끼들 대체 돈을 얼마나 쳐 먹였길래. 그걸 빼 돌린 거지?’
사실 그 부분을 골몰하는 건 아니었다. 당시 유럽 연합이 얼마를 먹여서 국가 내에서 전략물자 취급하는 유니크 아티펙트를 빼돌렸는지 그가 알게 뭐란 말인가. 도덕적인 문제를 논하기에는 류 현은 본인이 봐도, 도덕과는 담을 쌓은 인간이었다.
문제는,
‘이걸 가야 해? 말아야 해? 지금 아프리카 꼬라지 생각하면 일단 개고생은 확정이고, 문제는 빼돌리는 건데...그냥 유럽새끼들 빼돌리면 그 때 가로챌까? 네임드 몹 뜨고 나서...빌리고 안 내뱉으면 지들이 어쩔 거야? 지들도 삥땅 친 거나 다름없는데.’
유럽 연합과 협상하는 것보다 훨씬 골 때리는 조건을 완수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것!
류 현의 고민이 깊어졌다.
***
“와 미친...와...와...”
류 현은 감탄사 보다 비속어를 더 많이 내뱉는 것 같은 화련의 옆모습을 빤히 보면서, 언제 한 번 제대로 된 호러물을 보여줘야겠다고 생각했다. 입에서 비명보다 비속어가 더 많이 튀어나오는 진귀한 광경을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 류 현의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화련은 그 짧은 영상을 두 어 번 더 돌려본 후에 휴대폰을 내려놓았다.
“우리 청뢰랑 같은 게 또 있었네요?”
“같은 거...라고 하기에는 좀 그렇죠. 아직 확정 난 건 없으니까요. 영상에 보이는 것도 그냥 산 뒤쪽이 갑자기 터진 것 밖에 안 나오지 않았습니까.”
“이거면 충분하죠. 그 여자...아니, 승하씨도 그랬잖아요. 이건 5성 리치는 절대 아니고, 리치 본인이 한 거면 최소 7성짜리 라고.”
화련이 그 여자, 라고 칭하려다가 찔끔하게 만든 장본인. 승하는 화련에게 휴대폰을 받아들더니 산 뒤쪽이 폭발하는 장면을 멈춰놓고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말이 7성짜리지, 7성짜리도 죽을 똥 살 똥 쥐어짜야 이 정도 위력 나올 걸. 애초에 리치가 가진 반지는 대대급 화력에 미치는 것도 없어. 이건 거의 미사일이잖아. 청뢰를 못 봤으면 최대 8성까지도 불렀겠지만, 솔직히 그건 너무 비약인거 같고.”
‘왕관 빼면 7성인 놈이 이 이상이었는데 너무 단정하시는구만.’
지금 시점에서는 당연히 알 수 없는 정보이기에, 류 현은 속으로만 중얼거리고 말았다. 지금 샘플이라고 해봐야 5성리치가 전부이니, 5성이후로 반지 하나가 늘어날 때마다 기하급수적으로 강해지는 리치의 특성을 모르는 건 당연한 일이다.
류 현은 아까 전부터 청뢰 반지만 만지작거리고 있는 희란을 힐끗 보고는 말했다.
“희란 씨는 어떠십니까.”
“네?”
“열 번도 안 되긴 합니다만, 이 중에서 청뢰를 제대로 사용 해보신 유일한 분 아니십니까. 청뢰로, 이 정도가 가능하시다고 보십니까?”
류 현의 머릿속에서는 이미 결론난 일이지만, 현 시점에서 그렇게 추론할 근거가 굉장히 빈약하니 이런 식으로라도 말을 만들어내야만 했다.
희란은 이리저리 눈알만 데룩데룩 굴리다가, 청뢰를 낀 속을 꼭 쥐고는 고개를 숙였다. 류 현이 자신이 뭔가 말을 잘못했나 하고 발언을 곱씹고 있자, 희란이 불쑥 말했다.
“...할 수 있어요.”
“예?”
“하, 하루에 세 번 정도는 가능해요...밖에서요.”
생각지도 못한 이야기였다. 류 현은 청뢰를 발동하는 데 마력이 얼마나 드는지 알지 못했으니까.
쥐고 있으면 입에 털어 넣고 싶은 생각밖에 안 드는데, 어떻게 느긋하게 그러고 있겠는가? 라가 로드를 상대로 몇 번 맞아보긴 했지만, 던전 안에서 아티펙트를 사용하는 것과 밖에서 사용하는 건 차원이 다른 문제다. 공기 중의 마력 농도가 차원이 다르니까.
“정말이십니까? 그러니까, 던전 밖에서요?”
“네에...하고 나면 탈진해서 아무것도 못하지만...세 번까지는 가능해요.”
‘설마 그럼...’
그 때였다. 류 현의 바지주머니에 있던 휴대폰이 맹렬하게 울어대었다. 류 현은 재빨리 휴대폰을 꺼내서 번호를 확인하고는 좌중을 돌아봤다. 그녀들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류 현은 전화를 받았다.
“예, 류 현입니다. 웨인 씨, 혹시 보내주신 것과 비슷한 영상이 또 잡혔습니까?”
[웨인 입...예? 예, 맞습니다. 어떻게 아셨습니까?]
“전화로 할 만한 이야기는 아니고...협회 한국 지부 내에 믿을 만한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전해줄 발이 필요합니다.”
[...제가 가지요. 그렇지 않아도 검성님 때문에라도 한국에 갈 예정이었습니다.]
“예, 그럼 그 때 뵙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