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85화 〉탐식마(貪食魔) (85/429)



〈 85화 〉탐식마(貪食魔)

“...그러니까요, 짬밥 되는 형들은 전부 다른 스폰 찾을 준비 중이라니까요. 우리가 뭐 기업놈들 수발들려고 플레이어 짓 하나? 누가 돈이 싫다고 합니까? 그래도 정도라는 게 있는 건데 구 마스터는 지금 선을 넘었다는 거죠.”
“예상은 했지만 좀 심하긴 하네.”
“언니가 나가시기 전에도 그런 기미가 있긴 했지만 지금은 너무 심해요. 오죽하면 스폰서 찾는 오빠들 입에서 ‘산군’얘기까지 나올 정도에요. 이게 말이 되요? ‘예거즈’가 언제부터 ‘산군’을 안중에 둬야하는 처지가 된 건지...”

 현은 바쁘게 말을 주고받는 세 사람과 동 떨어진 채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기만 했다. 승하가 불러들인 채민아가 들어와서 인사를 주고받은 이후, 류 현은 입을 꾹 다문 채 관망만 했다.


벌써 세 잔째 주스잔을 비운 류 현은, 의자 등받이에 몸을 내맡기며 생각했다.


‘원래보다 검성이 더 빨리 나와서 그런 건가? ‘예거즈’도 개판이네.’


그가 알던 ‘예거즈’는 이렇지 않았다. 체계화와는 조금 거리가 있지만, 끈끈한 유대로 이어진 노련한 사냥꾼의 무리. 그게 바로 ‘예거즈’였다. 수뇌부와의 마찰 때문에 유감스러운 감정은 없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류 현은 ‘예거즈’를 평가절하 할 생각은 없었다.

아지다하카와의 마지막 싸움을 앞두고 ‘예거즈’가 만약 무사했다면 방위선을 생각할 필요는 없었을 거라고 지금도 생각하곤 하니까. 그런 ‘예거즈’의 미래의 에이스 카드가 대놓고 부외자 앞에서 저런 신세타령을 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지금 시점에서는 ‘예거즈’보다 검성에 대한 애착이  큰 건가. 저 둘 취향 한 번 참...’

그런 기대가 없진 않았다. 이전 생에서 둘에게 이야기 들은 바로는 검성이 살해당한 후에 ‘예거즈’이탈을 심각하게 생각해봤었다고 했으니까. 남을 이들이 눈에 밟혀서 결국 그러지 못했지만.

그래서 돌발행동을 할 가능성이 높음에도 승하를 불렀다. 그 둘은 ‘예거즈’가 만들어지고 얼마 되지 않아 ‘예거즈’에 소속된 소위 말하는 길드원보다는 팬클럽 회원에 가까운 부류였다.

애초에 ‘예거즈’라는 단체가 검성에게 혹한 팬을 끌어 모아서 만든 단체였다. 틀을 잡을 정도의 인원이 모이자 정부의 압제에서 벗어난 지 얼마 안 된 플레이어들이 속속 가입을 요청했다. 검성을 비롯한 창립 핵심 멤버들은 그들을 기꺼이 받아줬다가, 기반이 잡히면 쿨하게 풀어주는 식으로 플레이어라는 존재가 사회 구성원으로  수 있게 도왔다. 그 이미지가 쌓이고, 검성의 실력을 동경한 실력자들이 하나 둘 모이면서 ‘예거즈’라는 한국 최고의 길드가 만들어진 것이다.


원래대로라면 현재 마스터인 구정아는 부길마로서 조용히 길드를 장악하고 있어야 했다. 하지만 검성이,  해보기도 전에 길드를 이탈하고, 흐름에 뒤처지지 않으려고 급하게 기업들과 발을 맞추다보니 잡음이 계속 나오는 과도기적 단계인 것이다.


‘안 풀리면 남남 될 거 각오했었는데, 그럴 걱정은 없겠네.’


류 현은 알고 있던 것보다 8살은 젊은, 승하와의 이야기에 정신이 팔려있는 동료 커플을 보고 미소 지었다.

***

처음부터 붙어있었던 것처럼 어깨를 딱 붙이고 걸어가던 남녀는 얼마 안가 뒤를 돌더니 손을 흔들었다.  현은 픽 웃으며 마주 손을 흔들어 주었다. 그런 류 현의 뒤편에서 약간 잠긴 듯한 목소리가 새어나왔다.

“고마워.”
“...뭘 말입니까.”
“그냥 나 무시하고 너 혼자서도 만날 수 있었잖아. 연락도 너한테만 갔었고. 막으려고 했으면 난 한참 뒤에 알았을 텐데.”
“무시하면 안 될  같아서 부른 것뿐입니다. 직접 연관된 당사자 중  명인데, 적이면 적인대로 적이 아니라면 아닌 대로 만나야 하니까.  번 움직이기 귀찮아서 그런 겁니다.”
“...진짜 걔 말 대로네.”


승하가 소리 죽여 웃기 시작하자, 류 현은 이미 저만치 멀어진  사람의 뒷모습에서 시선을 떼고 그녀를 돌아봤다. 승하는 이제 사양하는 기색도 없이 대놓고 웃고 있었다.


“화련 걔가 그러더라. 너 고맙다는 말 들으면 어색해서 말이 길어진다고.”
“제가 언제...됐습니다. 말을 말지요.”

류 현의 반응에 승하의 반응은 웃음에서 거의 폭소가 되었다. 류 현은 시선을 돌려 이제 거의 형체만 알아볼  있을 정도로 멀어진  사람을 바라보다가 말했다.


“그래서 거두실 겁니까?”
“,,,글쎄? 그런데 거둔다니 뭔가 되게 거창하게 들리네. 나 쟤들보다 나이도 적거든? 쟤들이 멋대로 누님, 언니 하는 거거든?”


알고 있던 사실이긴 했지만 당사자가 이렇게 나오니 어이없을 따름이었다. 류 현은 떨떠름한 얼굴로 맞장구 쳐주었다.

“...예, 어려보이십니다. 제 또래 같네요.”
“농담을 그렇게 받아치면 내가 뭐가 돼? 어쨌든 아직은 뭐라고 확정하기가 힘들지. 솔직히 지금 내가 어디에 자리 잡은 것도 아니고.”
“그렇긴 하죠. 번듯한 직장 있고, 출세가도도 보장된 사람들이니.”

승하는 류 현의 말에 말없이 그를 빤히 쳐다봤다.  현이 옆으로 슬쩍 물러났다.


“왜 그러시는지?”
“거기서 제가 책임져 드리죠! 라고 해줄 거라고 믿었는데.”
“...말이 되는 소리를 좀 하십쇼. ‘예거즈’랑 총원 달랑 셋인 팀이랑 비교가 됩니까? 거기다가 명성도 없는 뉴비들 뿐인데. 그리고 제 사람들도 아닌데 제가  그런 소리를 합니까?”
“딱딱하긴. 쟤들도 명성은 별 관심 없어. 나랑 퍼플 던전 들어갔을 때도 개인정보 철저히 가려달라고 하던 애들인데 뭐.”
“....저 사람들이 ‘예거즈’ 나오면 승하  때문에 나오는 건데 제가 왜 책임집니까. 꿈도 꾸지마시죠.”
“돈도 많으면서 쩨쩨하긴. 쟤네 밥 먹어봐야 얼마나 먹는다고.”
“다른 사람이 그런 소리 들으면 웃습니다. 웃어요.”
“나 진짜 돈 없는데? 칼 자꾸 부러뜨려먹고, 애들 뭐 좀 사주고 해서 저금 같은  안 했어.”


승하의 대꾸에도 류 현은 떫은 표정을 풀 생각을 안했다. 그도 그럴 것이, 검성이 스폰서를 필요로 한다! 라고 하면 태도를 바꿔서 전력으로 스폰 해줄만한 곳이 당장 떠오르는 것만 해도 두 손으로 꼽기 어려울 수준이었기 때문이었다. 반쯤 장난에 어울려주는 기분으로  현은 높낮이 없는 어조로 말했다.

“돈 없으면 후원자를 찾으시죠. 아니면 협회에서 뜯으시던가.”
“어떻게 된 게 동생이랑 누나랑 하나도 안 닮았어.”
“...누나랑 만나셨습니까?”


류 현의 눈썹이 꿈틀하더니, 확 티가 날정도로 치켜 올라갔다. 다른  몰라도, 류 현이 무덤덤하게 넘어갈  없는 이야기였다. 승하는 류 현의 반응이 맥이 빠질 정도로 간단하게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설마, 나도 보호자 동의도 없이 환자 만나러 불쑥 찾아갈 정도로 경우가 없진 않아. 그냥 저번 퍼플 던전에서 둘한테서 들었어. 같은 유전자 풀에서 나왔다고 믿기지 않을 정도로 예쁘다, 살갑다 그런 소리만 잔뜩 들었었지.”
“...하라는 훈련은 안하고 쓸데없는 소리를.”
“에이, 그렇게 딱딱하게만 굴면 인기 없다?”
“멀쩡한 사람들 꼬드겨서 직장 나오게 하는 사람보다는 낫겠지요.”
“꼬드기다니 너무하네. 그냥 예전 동료들이랑 직장이 어떻게 돌아가는 지 얘기한 것뿐인데.”
“그런 것 치고는 꽤 진지하시던데요.”
“...그래 보였어?”


승하는 쓰게 웃으며 고개를 숙이고는 말이 없었다. 류 현은  반응에서 이야기를 나누는 내내 표정을 풀지 않던 그녀의 모습을 떠올렸다. 감정을 억누르려는 기색이 역력했지만, 그랬기에 굳은 표정은 풀어지는 일없이 대화 내내 지속되었다.

‘하기야 아무렇지 않으면 그게 이상한 일이지.’

국가나 ‘예거즈’에 선을 대고 싶어도 그녀 때문에 뭘 하기가 힘들었던 기업 입장에서는, ‘예거즈’는 고위 던전이라는 보물창고로 가는 열쇠 같은 존재일 뿐이겠지만, 그녀에게 있어서는 인생의 한 축을 이루는 그런 존재였을 것이다.

민증도 나오지 않았던 미성년 소녀가 국가를 대표하고, 플레이어라는 존재를 대표할 수 있는 존재로  정도의 시간이 지났다.  동안 ‘예거즈’는 쭉 그녀의 등 뒤를 지켜주는 아군이었다. 죽은 동료들의 유지가 남은 그런 공간이었다. 그 아군이 등 뒤에서 칼을 겨누고, 그 일로 그곳을 등지고 나왔는데 아무렇지 않을 리가 없는 것이다.

실제로 이전 생에서 그녀는 죽을 때까지 ‘예거즈’를 나오지 않고 있다가, 그들 손에 죽었다. 류 현은 위로의 말을 속으로 곱씹어보다가 이내 포기했다. 아무리 세월이 지나도 이런 일에는 능숙해 질 자신이 없었다.

대신 그는 평소처럼 그녀를 대하기로 했다.

“꿀꿀한 소리는 이쯤 하고, 가서 한 잔하죠. 돈 없다고 하시니 오늘은 제가 삽니다. 맥주나 잔뜩 챙겨서...”
“...보드카.”
“...아니 술 마시고 불쇼 할 겁니까? 대체 왜 그렇게 보드카에는 집착합니까?”
“집에 가서 방에 틀어박힌 뒤에 울 거야. 혜라가  그러냐고 물어보면...”
“젠장, 알겠습니다. 입에 불붙을 정도로 사드리죠. 됐습니까?”


승하가 히죽히죽 웃으며 고개를 들자, 류 현은 떨떠름한 얼굴로 그 미소를 외면했다.

‘생긴 거랑 하는 행동이랑 매칭이 전혀  되는 걸 보면, 신은 분명히 없어.’

***


승하의 위로회를 빙자한 폭음을 계속하던 류 현이 손에서 술병을 놓은 건 새벽 3시가  되어서였다. 슬슬 잘 타이밍을 보고 있었던  현은 소파위에 내팽개쳐두었던 휴대폰이 외로이 울고 있는 걸 발견했고, 번호를 확인하자마자 전화를 받았다.


“예,  현입니다. 웨인 씨, 무슨 일이십니까? 급한 게 아니면 제가 지금...”
[류 현님, 죄송합니다. 굉장히 급한 일이라서 새벽인 걸 알고도 전화 드렸습니다. 검성님과 함께 계신지요?]


 현은 우울모드와 술주정뱅이 모드를 오락가락 하고 있는 승하를 돌아보았다. 그녀는 이제 마시는 것도 질렸는지 반쯤  병을 탁자 위에서 굴리면서 놀고 있었다.


“같이 있긴 합니다만. 어떻게...?”
[검성님께 연락이 닿질 않아서 백혜라님께 여쭤봤더니 아마 두 분이 같이 계실 거라고 하시더군요.]
“연락이 안 된다고요?”
[검성님 휴대전화를 백혜라님이 받으셨습니다.]


류 현은 탁자 위에 병을 굴리고 있던 승하를 째릿 노려보았다. 이게 도대체  번째인지 헤아리는 게 무의미  정도로, 승하는 이런 식의 사고를 자주 쳤다. 그리고 그 때마다 류 현에게 와있어서  현이 곤란했던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래서 그 급한 일이라는 게 뭔지 들을 수 있겠습니까?”
[예, 류 현님. 아프리카 리비아에 퍼플 던전이 터진 일은 알고 계신지요.]
“예,  안에 있던 라가 부락이 쏟아져 나와서 난리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아직 소탕을 못한 걸로 알고 있습니다만.”
[예, 맞습니다. 지금은 터졌던 리비아 보다 다른 지역에 더 많이 퍼졌을 정도지요. 그런데 오늘 한 곳이 더 터졌습니다.]
“예?”

류 현의 놀라움은 퍼플 던전이 터졌다는 것보다, 벌써 그걸 알아차렸다는 쪽에 치중되어 있었다. 괴수들은 급수가 높아질수록  해괴한 능력을 지니게 되며, 퍼플 쯤 되면 현실로 뛰쳐나온 괴수를 추적하는 건 굉장히 어려운 일이다. 라가 부락 같은 게 아닌 이상에는 말이다.


2차 ‘대소환’과 함께 괴수 천국이 된 아프리카에서는 거의 불가능 한 일이나 다름없다.

[탄자니아의 킬리만자로 화산이 터졌습니다. 정확히는 안쪽에서 터진 게 아니라, 바깥쪽에서 가해진 충격으로 터졌지요. 영상을 지금 보내드리겠습니다.]

웨인의 말에 류 현의 머릿속에는 한 가지 가능성이 떠올랐다.

‘설마...벌써 유성우가?’

유니크 아티펙트의 등장이라는 가능성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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