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4화 〉탐식마(貪食魔)
용잡이 팀. 이 이름이 류 현에게 가지는 의미는 매우 각별하다.
원수라고 할 수 있는 아지다하카에 대한 원한을. 악룡을 죽이겠다는 목표를 표방하는 의미에서 지은 이 팀명은, 회귀를 류 현에게 있어서 떼놓을 수 없는 무언가가 되어버렸다.
천운이 따랐지만 악룡을 죽이는 데 성공한 과거와의 연결고리이자, 목숨을 함께한 동료들을 기리는 비문 같은 존재가 되어버린 것이다. 당장 아지다하카가 존재하지 않음에도, 일말의 고민도 없이 팀명을 정한 건 그 때문이었다.
류 현은 아지다하카에 대한 기억을, 동료들과 함께한 고락의 순간을 잊지 않고 싶었다. 그것이 없던 일이 되어버렸을 지라도.
그런 생사고락을 함께한, 과거의 팀원 중 한 명인 김수혁과 만나는 건 여러모로 의미심장한 일이었다. 같은 팀원이었던 화련과 희란은 다시 같은 팀이 되었지만, 김수혁의 경우는 달랐으니까.
만나고 싶은 마음이 없진 않았지만, 덥썩 만나자고 청하기에는 애매한 위치였던 것이다. ‘예거즈’가 악룡의 기습으로 소멸하기 전까지만 해도 김수혁은 검성의 계보를 잇는, ‘예거즈’의 에이스 카드로 이름을 날리고 있었으니까.
거기에 다른 팀원들이 소속되었던 곳에 대한 미련이 크게 없는 것에 반해, 김수혁과 채민아는 소속되었던 단체에 대한 소속감을 넘어 가족애마저 느꼈기 때문에, 용잡이 팀에 들어온 그런 경우였다. 누구보다 확실한 ‘예거즈’의 사람인 것이다.
청뢰 건 때문에 ‘예거즈’에 유감을 느끼고는 있었지만, 원한관계까지는 아니었던 류 현은 두 사람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유감의 대상이었던 ‘예거즈’는 소멸했고, 같은 원수를 치겠다는 데 이전 소속 같은 걸 따질 정도로 멍청하진 않았다. 그것도 시대의 한 축이었던 대형 길드의 에이스 카드와 그와 한 짝인 실력자를 거를 여유도 없었다.
그리고 류 현의 인선은 정확했다. 그 둘은 제 실력을 내기 힘든 건강 상태임에도 류 현과 악룡의 1:1 무대를 만드는 데 일조하고, 죽었다.
‘지금 시점이면...막 사귀기 시작했겠네.’
그 둘은 팀 내 유일한 기혼자이기도 했다. 그 당시 팀 내의 대화 지분 반 이상을 차지할 정도로 시끄러웠던 그 부부를 떠올린 류 현은 저도 모르게 픽 웃고 말았다.
‘그런데 아직 정치질 할 기반도 없을 텐데 어떻게 ‘사냥개’팀 대장을 먹은 거야? 채민아도 그런 재주는 없었는데?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예거즈’놈들 테스트 때도 그런 얼빠진 놈을 보낸 거 보면 뭔가 다른 데 정신 팔려 있는 건 맞긴한데...’
서해란이 전달해 준 김수혁의 무례하다면 무례한 요청에 응해서, 손님 하나 없는 이 카페에 앉아있는 이유였다. ‘예거즈’내부가 그가 알고 있는 것과 조금 다르게 돌아가고 있는 게 확실했으니까. 과거 동료였고, 기회만 되면 포섭하고 싶은 이를 봐두고 싶다는 이유도 있었지만.
‘그나저나 이 인간 성격은 그 때나, 지금이나 별로 다를 게 없네. 돌직구 정도가 아니라 아주 칼로 쑤시는구만. 쑤셔.’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나 지금이나 감당하기 힘든 성격이라는 건 이미 확인했지만.
‘이제 슬슬 올 시간인데...’
그 때, 카페 문이 열리며 익숙하지만 조금은 어색한 얼굴이 나타났다. 왼쪽 눈 아래부터 오른쪽 턱까지 이어지는 인상적인 흉터나, 눈썹 위쪽을 가득채운 문신은 없지만 그가 기억하는 남자 김수혁이었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정장차림을 한 김수혁은 텅 빈 카페 안을 휘 돌아보다가 류 현을 발견하고는 일직선으로 다가왔다.
그리곤,
“무리한 요청에 응해주신 것 정말 감사드리고, 또 미안합니다!”
받는 이가 부담감에 도망쳐도 이상하지 않을 90도 인사를 했다. 그 둘을 제외하곤 소리를 낼 사람이라곤 없는 카페 안이라서 그런지, 김수혁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이 인간 진짜 그 때랑 다를 게 하나도 없네...진짜 대단하다, 대단해...’
이럴 걸 예상하고 있었던 류 현은 그의 뒤통수를 빤히 보며 담담하게 말했다.
“괜찮습니다. 응한 건 저고, 거기에 아직 사과를 받기에는 이른 것 같군요. 들어야 할 이야기가 많을 테니까요.”
김수혁이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이 허리를 펴고 자리에 앉았다. 류 현은 앞에 놓인 주스 잔을 만지작거리다가 입을 떼었다.
“우선은 저를 만나고 싶어 하신 이유를 듣고 싶군요. ‘예거즈’와 인연이 전혀 없는 건 아닙니다만, 한 팀을 이끄시는 분이 ‘예거즈’를 통해서가 아니라, 그쪽 라인으로 접촉한 게 조금 그렇군요.”
“‘예거즈’를 통하면 곤란할 일이라서 말입니다. 다른 루트는 제가 알지를 못하고...여기저기 알아본다고 하다 보니...본의 아니게 이렇게 떼쓰듯이 요청을 하게 됐습니다.”
“...곤란할 일이요?”
“X던전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류 현은 입을 다물고 김수혁을 빤히 바라봤을 뿐이었지만, 김수혁은 말을 끝마치자마자 가슴에 쇳덩이를 올려놓고 있는 듯한 착각에 빠졌다. 범정도가 아니라 대적 불가능한 괴수의 아가리가 눈앞에 있는 것 같은 그런 느낌.
‘퍼플에 누님이랑 같이 갈 필요도 없는 괴물이었군...’
류 현은 길게 침묵하지 않고, 곧바로 그의 말을 부정했다.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군요. X던전은 검성과 협회의 관리 하에 있지 않습니까.”
공식적으로는 그렇게 알려져 있었다. 승하가 류 현에게 브레이크를 넣기 위해서 X던전의 존재를 공표한 이후, 그녀는 위치를 공개하라는 여론에 압박당할 수밖에 없었고, 결국 협회에 알리는 식의 타협안을 제시했다. 공증인은 웨인 크로이츠. 협회 대표로 나서기에는 부족함 없는 인물이었다.
졸지에 승하의 변호사 꼴이 된 웨펀 마스터는 매일같이 기자회견에 시달리다가, 시커멓게 죽어가는 얼굴로 귀국했다. 그 뒤로도 아주 얘기가 안 나온 건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X던전은 대한민국 영토 안에 있고, 플레이어 협회는 대한민국 소속도 아니었으니까.
문제는 상대가 검성이라는 것과, 검성이 ‘예거즈’를 탈퇴한 소란이 아직 수습된 게 아니라는 점이었다.
검성의 해외 망명설도 공공연하게 돌고 있는 상황에서 X던전의 존재가 공개되었고, 망명설은 X던전과 결합해, 검성이 ‘예거즈’를 탈퇴한 건 감당할 수 없는 X던전을 피하기 위해서, 망명의 밑작업이다! 라는 루머가 되었다.
그리고 명확한 사실이 밝혀지지 않는 이상 루머를 없애는 건 굉장히 힘든 일이다. 그런 검성이 입만 열면 그게 폭탄이 되는 상황에서 그녀를 건드리려고 드는 이는 없었다.
거기에 협회에서 X던전이 최초의 퍼플 던전과 같이 제한 시간 카운트가 되지 않는다고 발표한 사실도 큰 영향을 주었다. 그러니 김수혁이 한 말은 세간에 알려진 사실과 맞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음모론자나 믿을 법한 헛소리였다.
“누님 성격상, 아 죄송합니다. 누님이라고 부르는 게 입에 붙어서. 검성의 성격상 그냥 그런 짓을 할 리가 없습니다. 그 양반 성격이면 죽이 되던 밥이 되던 유서 써놓고 혼자 거기 들어가고 볼 테니까요. 유서도 자기 하고 싶은 말이 아니라 던전 위치나 적어놓고 말겠지요. 믿을만한 동료가 없는 이상 말입니다. 누님이 키우던 애가 하나 있긴 한데, 걔는 동료라기보다도 여동생 같은 거라서...”
“마치 검성이 자살하고 싶어서 안달 난 것처럼 말씀하시는군요.”
“그럴 리가요. 불가능에 집착하지 않는 쪽이지요. 퍼플 던전의 상위 던전이 나타났다고 해서, 기다리면 올스타 팀이 꾸려질 거라고 망상하지 않고, 가장 현실적인 방법은 찾은 거지요. 진짜 위험이 다가오기 전에 말입니다. 자기 재미도 찾고요.”
“‘예거즈’에서는 죽으러 가는 길을 현실적인 방법이라고 합니까? 이해할 수가 없군요.”
“‘예거즈’에서 누님을 축출하려던 움직임이 있다는 걸 최근에 알았습니다.”
“무슨 말씀이신지...갑자기 다른 소리를 하시면...”
“됐어, 류 현. 그만 해도 돼.”
류 현의 자리 뒤쪽 기둥에 드리운 어둠이 갑자기 꿈틀거리더니, 불쑥 인영 하나가 튀어나왔다. 김수혁이 놀란 눈으로 류 현을 돌아보자, 류 현은 이마를 짚으며 한 숨을 몰아쉬었다. 보험이자, 이 일의 당사자이기 때문에 류 현이 불러서 숨어있게 한 승하였다.
“...지금 나오시면 어떻게 합니까.”
“백 날 말해봐야 쟤가 가진 확신은 못 물려. 너랑 나랑 연관이 있다고 확정짓고 왔는데 무슨 설득이야. 쟤 진짜 꼴통이라니까. 응룡 용혈이 정력에 좋을 거라고 처리도 안하고 그냥 쳐 먹고 배탈 나는 놈이야. 그것도 퍼플 던전 안에서.”
류 현은 그 소리를 듣고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처음 듣는 김수혁의 흑역사였다. 김수혁은 자신의 흑역사를 사정없이 까발리는 승하를 보고 입만 뻐끔거리다가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아, 아니. 누님?”
승하는 김수혁을 제대로 보지도 않고 콧방귀를 뀌고는 대꾸했다.
“내가 왜 네 누님이야. 나이도 그 쪽이 더 많고, 나 이제 ‘예거즈’소속도 아니거든요? 김수혁 씨.”
“에이, 제가 누님이 ‘예거즈’소속이라서 누님으로 모셨습니까. 누님으로 모실만 하니까 그랬지. 우리가 한 두 번 던전 돈 사이도 아니고, 섭섭하게 왜 그래요?”
“하나도 안 반가우니까. 쉰소리 그만하고, 누가 보냈어?”
김수혁은 전혀 알아듣지 못했다는 듯이 양손을 들고 어깨를 으쓱 해보이더니, 류 현과 승하가 아무 말이 없자 그 손으로 자신을 가리키며 물었다.
“나 말이우?”
“그럼 여기 너 말고 누가 또 있는데?”
“아니 그러니까, 내가 누구 첩자 노릇하러 왔다?”
“그럼 순수 니 머리로 추리했다고 할래? 민아도 그런 소리는 안 믿을 거 같은데. 거기다가 갑자기 팀장으로 벼락출세? 이야기 끝난 거지.”
“말이 좀 심하시네...‘예거즈’나가고 던전은 안가고 화법 공부 하셨나.”
“네 의지로 말하기 싫으면 안 해도 돼. 곧 입을 열고 싶게 만들어 줄 테니까.”
승하가 허리춤에 매달고 있던 칼을 슬쩍 흔들어보였다. 김수혁은 바로 떨떠름한 얼굴이 되었다.
“민아가 누님 족치는 모임에 연루됐었어.”
“뭐?”
김수혁은 뒷머리를 신경질적으로 벅벅 긁다가, 한숨을 쉬고 다시 뒷머리를 긁적거리길 반복하다가 말을 이었다.
“처음에는 지도 몰랐다고 하더라고요. 한달 전쯤에 지금 마스터, 그러니까 구정아 마스터가 걔를 불러서 대리자격으로 어디 좀 갔다 오라고 했다던데. 가보니까, 그런 자리였다는 거지. 누님도 알다시피 걔가 구정아 마스터가 부길마일 때부터 꽤 이쁨 받았잖소? 공공연하게 후임자 소리도 했었고.”
“...그러니까 거기서, 내 이야기도 듣고, 류 현 이야기도 들었다? 그리고 넌 류 현한테 접근한 거고?”
“...예. 류 현씨, 이런 식으로 접근한 건 정말 미안하게...”
“사과는 나중에 정식으로 둘이서 같이 찾아와서 따로 하고, 일단 민아 불러.”
“아니, 걔 지금 수련하느라 연락도 안 될 텐데...”
“수련은 무슨 얼어 죽을 수련. 밖에 숨어있더만. 맞지도 않는 닌자 놀이 그만하고 들어오라고 해.”
“예? 아니 걔는 왜 따라오지 말고 기다리라고 하는 걸...”
“니가 얼마나 못 미더우면 그러겠어?”
류 현은 두 남녀가 주거니 받거니 하는 꼴을 잠자코 지켜보다가, 떨떠름한 얼굴로 생각했다.
‘거 참, 본의 아니게 출세가도를 막게 생겼군.’
하지만 곧이어 그의 입가에 걸린 미소는 전혀 사양하는 기색이라고는 없었다.
‘생각보다 재소집이 빨라지겠는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