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3화 〉탐식마(貪食魔)
밤새 찌르륵 거리는 풀벌레도, 밤이면 깨어나는 야행성 조류도 없는 던전의 밤은 고요하기만 했다. 던전의 주인인 라가들조차 야행성이 아닐뿐더러, 로드가 사라진 지금 같은 상황에서 초소에서 밤을 지셀 일도 없으니 이 고요함이 깨질 일은 없어보였다.
던전에 대해서 연구하는 연구자들이 봤다면, 라가 마을에서 발견된 건육의 존재를 가지고 의문을 제기했겠지만 류 현은 그런 것에 관심이 없었다.
그저 류 현은 그 고요함에 감사하며, 바위 위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있었다.
“후읍...”
들이마신 숨의 행적을 뒤쫓듯이 류 현은 자기 내부로 침잠해 들어갔다. 한두 번 해왔던 일이 아니었기에 명상상태에 들어가는 건 수월했다. 류 현은 어렵지 않게, 자신의 중심으로 침잠해 들어갔다. 검은 마력이 가득 들어찬 내부로.
검은, 그의 주변에 드리운 어둠보다 훨씬 더 검은 구가 그의 중심에 자리하고 있었다. 주변의 검은 마력을 빨아들이고 있는 것 같은 검은 구체는 끊임없이 불길한 위압감을 뿜어내며, 그 안으로 파고드는 것을 거부했다. 마치 류 현에게 아직 때가 아니라고 말하는 것처럼.
류 현은 그 저항을 뚫는 걸 포기했다. 이전에도 거쳐 온 과정이었고, 이번에는 혹시나 조건이 갖춰지기 전에 뚫어볼 수 있을까 하고 해본 것에 불과했다. 무리할 생각은 애초부터 없었다. 스승이나 능력으로 인한 인도조차 없는 류 현은 본의 아니게 개척자 정신을 발휘하면서 성장할 수밖에 없었고, 그 경험을 쌓으며 얻은 교훈은 애매하면 빼는 게 낫다 였다.
더욱이 구체의 너머는 3단계, ‘강림’의 영역. 그 이상은 그도 알지 못하는 미지의 영역이다. 류 현도 결국 ‘강림’의 초입을 조금 넘어선 상태에서 목숨을 담보로 악룡을 죽인 것뿐이었으니까. 어지간해서는 손대고 싶진 않지만, 악룡은 그런 식으로 몸을 사리고 잡을 수 있다고 장담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두 번째 기회가 왔는데 첫 번째랑 똑같은 준비를 하면 그건 병신이지.’
결국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지만.
‘어떻게 해도 날로 먹게는 안 두네.’
류 현은 뒷머리를 긁적거리다가 몸을 일으켰다. 명상은 이미 충분히 했다. 낮 동안에도 집중력이 바닥 날 때까지 명상에 잠겼다가 쉬었다가를 반복했으니까. 이렇게까지 했는데도 안 되는 걸 보면 그냥 안 하는 게 맞다. 아쉽긴 하지만 손을 떼야하는 상황.
류 현은 몸을 풀면서 자신이 아닌 다른 곳으로 생각을 돌렸다. 그는 발걸음을 떼어 분지 끄트머리까지 걸어갔다. 산 때문에 시야가 거의 가려지긴 했지만, 구릉지가 어슴푸레한 달빛 아래에서 조용히 물결치고 있었다.
‘둘이서 잘 하고 있으려나?’
생존 훈련이랍시고 구릉지까지 내보낸 팀원들이 조금 걸렸다. 화련은 던전 안에서 숙식을 해결한 경험이 있긴 하겠지만, 어디까지나 오렌지, 레드 수준이고 희란은 아예 경험이 없었다. 그래서 승하에게 부탁하긴 했지만, 그런다고 걱정이 없어지진 않았다.
라가 전사만 남은 던전에서 숙식을 해결하는 데 고생을 한다면, 그 위쪽인 블랙이나 화이트에서는 고생하는 정도로는 안 끝날 테니까. 안다고 한 들 지금 당장 해결 할수도 없다는 게 문제였지만. 천부적인 재능이 있는 게 아니라면, 급하게 어떻게 할 수 있는 게 아니라 시간을 들여서 경험을 쌓으면서 해결해야하는 부분이었다.
거기에 시간을 투자하기도, 시간들 들여서 훈련시킬 장소도 마땅치 않았다. 무조건 던전의 넓이가 난이도에 비례하는 건 아니지만, 이렇게 넓은 던전은 최소 블루 퍼플 이상에서나 볼 수 있다.
‘오버페이스이긴 해. 여태 안 미끄러진 게 신기할 정도니까.’
승하의 브레이크로 한 번 쉬어가긴 했지만, 그래도 여전히 페이스가 빠르다는 건 부정할 수 없다. 자신의 미래상을 알고 있는 류 현조차 그렇게 느끼는 데, 다른 팀원들은 말은 안 해도 부담감이 없진 않을 것이다.
‘언제 한 번 이야기를...나눠보긴 해야 하는데...’
화련의 악동 같은 미소를 떠올린 류 현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청뢰 문제도 있고...’
거기에 생각이 도달하자 류 현은 머리를 감싸 쥐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청뢰. 류 현이 그토록 확보하고 싶어서 조바심까지 내게 만든, 그 유니크 급 아티펙트는 첫 만남부터 그를 곤혹스럽게 만들었다. 아티펙트를 보고 식욕을 느끼게 될 줄은, 말 그대로 괴수를 뜯어먹고 살아온 그조차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대체 그게 뭐였지? 마력 같은 건 딱히 느껴지지 않았는데?’
그건 여태껏 류 현이 생각하고 있었던 능력의 가이드라인을 벗어나는 일이었다. 마력을 품고 있는 것도 아닌, 무정물에 식욕을 느끼다니? 청뢰가 아니라 운 좋게 다른 유니크 급 아티펙트를 얻은 것이었다면, 입에 넣는 것까지는 아니었어도 에너지 드레인 정도는 써봤을 지도 모를 일이었다. 만에 하나 아티펙트만 파손되는 불상사가 벌어지더라도 소재를 알고 있는 청뢰가 있으니까.
하지만 지금 보유한 아티펙트는 그것뿐이고, 류 현은 아무리 자신의 능력에 대해서 궁금하더라도 청뢰를 가지고 실험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희란에게 후다닥 떠넘기듯이 사용권을 넘겨준 것도 그 때문이었다. 원래 그녀에게 사용권을 줄 생각이기도 했지만.
근처에 뒀다가 다시 정신이 나가서 입안에 털어넣는다고 해도 이상할 건 없으니까. 그리고 류 현의 위장은 반드시 그걸 소화해 버릴 것이다. 핵을 맞고도 멀쩡하던 화룡의 비늘도 소화시켜버린 그의 위장이 반지하나 해결 못할 거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류 현은 자신의 손바닥을 내려다보다가 에너지 드레인을 발동시켰다. 검은 아지랑이 같은 것이, 탐욕 그 자체라고 해도 좋을 힘이 그의 손아귀에서 꿈틀거렸다.
‘대체 날 어디까지 끌고 가려는 거야?’
류 현이 뜬눈으로 지새우는 밤이 좀 더 길어질 듯 했다.
***
내리쬐는 햇볕이 던전 안이라고는 믿기 힘들 정도로 눈이 부셨다. 류 현은 살짝 찡그린 표정으로 세 여자가 걸어오는 것을 바라봤다. 그녀들의 표정을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가까워졌을 때, 류 현은 고개를 갸웃했다.
‘뭐지? 뭔가 분위기가 좀...’
콕 집어 말하긴 힘들지만, 이야기를 나누며 걸어오고 있는 세 여자의 분위기가 묘했다. 정확히는 이야기를 하다 말고 그쪽으로 한 번 힐끔 볼 때 잠깐 동안 느껴지는 분위기가.
“세 분 다 고생하셨습니다.”
그렇다고 다짜고짜 캐물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기에, 류 현은 선선히 셋을 환영했다. 세 여자의 기묘한 분위기도 막상 대면하게 되자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류 현의 말에 대표로 대꾸한 건 이틀 사이에 노숙 3년차 거지꼴에서 노숙 1년차로 강등된 모습으로 나타난 승하였다.
“수고는 뭘. 오늘 출구 쪽 안 가봤지? 일단 거기부터 가보자.”
“예? 아직 안 열렸을 텐데요.”
“어쩌다보니 서로 만나서, 셋이서 이틀 동안 그냥 라가 잔당 소탕이나 했어. 땅굴파고 들어간 게 아닌 이상 다 잡았을 거야. 자세한 이야기는 나가서 하자구.”
2주간의 용잡이 팀 퍼플 던전 첫 원정이 막을 내리는 순간이었다.
***
플레이어가 문명과 격리된 던전이라는 공간에서 생사를 다투는 사냥을 하는 것에 대해서 수많은 비유가 존재한다.
어떤 이는 보급도, 지원도 끊긴 상태로 참호전을 하는 것과 같다고 했고, 어떤 이는 로마 시대의 검투사가 사자 대신 더 흉포한 상대를 연속으로 상대하는 것과 같다고 했다.
그에 대한 플레이어들의 의견은 훨씬 단순하다. 생각만 해도 거지같으니까 그 이야기는 하지 말죠. 자 여기 이 술이나 마십시다.
아무리 많은 미사어구를 갖다 붙여도 던전 사냥은 플레이어들에게 있어서, 온갖 욕구를 제한 당한 채 목숨까지 위협받는 말 그대로 거지같은 상황이다.
그러니 온갖 욕구를 제한 당하고, 목숨까지 위협받는 상황을 벗어난, 던전을 나온 플레이어가 도착적 집착을 보이는 건 크게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런 플레이어들을 대상으로 하는 탈법과 불법의 영역을 넘나드는 서비스업이 성행하는 건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플레이어에 대한 이미지가 나쁜 것도 이런 부분이 한 몫을 했다. 아무리 법적인 제재를 강화한 들, 눈이 뒤집힌 이들이 법을 고려하고 행동할 리가 없으니까.
그러니까, 류 현이 던전 밖으로 나오자마자 근처에서 대기하고 있던, 검은 양복의 남자들을 보고 누나에게로 갈 차를 준비해달라고 했을 때, 그들 중 몇몇이 의아한 표정을 지은 건 당연했다.
류 현은 그 뒤에 씻을 곳과 옷이 필요하다고 하긴 했지만, 의아함을 희석시키기에는 부족했다. 그의 팀원들과 승하는 미묘한 미소를 지을 뿐이었지만.
남자들이 의아해 하거나 말거나, 류 현은 급하게나마 던전에서 찌든 때를 벗겨내고 병원으로 향했다. ‘광대들’ 사건 이후 협회와 서해란의 배려로 옮긴, 협회 소속 플레이어들의 전용 병원이었다.
그리고 지금 세아와 두 손을 맞잡고, 그녀의 내부를 엿보는 상황에 이른 것이었다. 류 현은 눈을 감은 채로 조심스럽게, 마력을 거둬들였다. 보는 이가 있었다면 조급증이나서 보채었을 정도로 천천히.
이윽고 눈을 뜬 류 현은 물끄러미 세아의 눈을 봤다. 그냥 슥 보면 알 수 없지만, 자세히 보면 초점이 아주 약간 이상한 그 눈을. 이제 테두리도 구분하기 힘들어진 시력을 가진 그 눈을. 울컥하는 기분이 들기 전에 류 현은 고개를 숙였다.
“불편한 건 없어? 필요한 건 없고? 전에 있던 곳이 더 편하면 말해. 당장 옮겨줄 테니까.”
이상한 기색을 읽었는지 세아는 한 번 고개를 갸웃하고는 대답했다. 최대한 밝게 말하려는 기색이 역력해서, 류 현은 다시 울컥하는 기분이었다.
“선생님도 신경 많이 써주시고, 아주머니도 친절하셔. 병원밥 맛없다고 하던데 난 오히려 체중이 늘었다니까? 그러니까..누나 걱정은 안 해도 돼. 현아.”
류 현은 뭐라 말할 거리를 찾다가, 결국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응.”
병실에 들어오기 전에 만났던 담당의사의 말이, 누나분이 굉장히 잘 적응해서 이제 정신과 상담은 필요 없을 거라고 한 그 말이 그의 목구멍을 틀어막는 기분이었다.
류 현에게 있어서 그건 긍정적인 신호가 아니라 절망의 반복일 뿐이었다. 전생의 세아 또한 그러려고 노력하다가 약해지는 몸을 견디지 못하고 무너졌으니까. 위안거리라고는 세아의 몸이 쇠약해지고 있다는 신호는 아직 없다는 것 정도였다.
그리고 세아의 내부에 자리 잡은 마력이 조금 늘어났다는 의외의 소식도 있었다. 세아와 같은 증상을 보이는 병자들은 공통적으로 괴수 사체와 가까이 하는 일을 한 일반인이라는 공통점과 발병 이후에 마력이 감지된다는 두 가지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체내의 마력이 늘어난 사례는 없었다. 체내에 마력을 쌓아나갈 수 있는 건 플레이어뿐이다. 그런데 세아의 몸 속의 마력은 원정을 떠나기 이 주전 보다 조금이나마 늘어나있었다. 남들은 할 생각도 안하는 마력의 수치화까지 한 류 현이 잰 것이니 확실했다.
이전 생에는 없었던 일이고, 그래서 류 현은 이 사실을 알리는 걸 유보하고 있었다. 알린다고 한 들 현대 의사들이 어떻게 해 줄 수도 없다는 현실적인 이유도 있었지만.
‘대체 뭐지? 마력이 늘어날 수 있는 외부 요인 같은 건 없는데...송장목 진액 타서 먹였을 때도 그런 변화는 없었어.’
류 현이 자신의 세계로 빠져 들어가려던 그 때였다.
[...‘예거즈’는 ‘사냥개’팀을 가칭 X던전에 도전할 지원자로 구성하였다고 밝히며, X던전 공략에 참여의사를 검성에게 타진할 예정이라고...]
“빨리 공략 됐으면 좋겠네. X던전. 현아 그 네가 다니는 사냥터가 어디라고 했었니?”
“이번에는 정선. X던전 위치는 아직 검성 측에서 안 밝혀서 모르...”
“응?”
류 현은 세아의 물음에 대꾸하며 심드렁하게 티비 쪽으로 시선을 돌리다가 저도 모르게 멈칫했다. 아는 얼굴이, 그가 너무나도 잘 아는 남자의 얼굴이 화면에 비춰지고 있었다. 이전 생에서 마지막 싸움을 함께한 동료가 그곳에 있었다. 신창 김수혁이.
‘벌써 ‘사냥개’ 팀 출범? 검성이 좀 빨리 이탈하긴 했지만...아냐, 순서는 맞아. 조금 앞당겨졌지만. 그래, 살아있긴 하지만 검성은 이탈한 거고, ‘예거즈’는 준비한 카드를 내놓은 뿐이지. 그런데 저 인간 포텐 터지기 전인데 어떻게 팀 대장을 먹은 거야?’
그 때였다. 류 현의 휴대전화가, 너무 급하게 병실까지 달려오느라 끄는 걸 잊었던 것이 울어대었다. 류 현은 세아의 눈치를 슬쩍 봤고, 보이지 않지만 동생의 성격을 잘 아는 세아는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예, 류 현입니다.”
[서해란이에요. 류 현씨, 던전에서 방금 나와서 피곤하실 텐데 연락드리게 돼서 죄송하지만, 급하게 전할 소식이 있어서요. 전달 받은 지 좀 오래된 말이라서...]
“괜찮습니다. 말씀하시죠.”
[방금 나오셔서 아실지 모르겠지만, ‘예거즈’의 ‘사냥개’팀 팀장인 김수혁이 류 현 씨와 회동을 가지고 싶다고 말을 전해달라고 요청했어요. 검성도 포함해서 말이죠.]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검성도 포함해서요?”
[네, ‘모임’과 연관된 건 아닌 거 같은데 그 남자 류 현 씨와 검성이 연결되어 있다는 걸 알고 있는 거 같아요. 근거는 없는데 거의 막무가내로...]
“......”
[일단 잘라서 아니라고 하긴 했는데, 믿는 눈치가 아니라서...죄송합니다. 혹시 모르니 말은 전해놔야 한다고 생각해서...]
“죄송하실 건 없지요. 오히려 제가 죄송할 일이죠. 해란 씨가 제 비서도 아니고...좋습니다. 만나자고 전해주시죠. 하지만 만나는 건 저 뿐입니다. 일시는 일주일 뒤. 장소는 해란 씨가 적당한 곳을 수배해주셨으면 합니다. 부탁드리겠습니다.”
[알겠어요. 그럼 닷새 뒤에 장소를 수배해서 연락드릴게요. 좀 늦었지만, 퍼플 던전 원정 성공하신 거 축하드려요. 그럼 닷새 뒤에.]
“예. 감사합니다. 닷새 뒤에 연락하도록 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