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2화 〉탐식마(貪食魔)
“쉬잇-”
화련은 입술에 붙였던 검지를 슬쩍 떼고는 수풀 너머를 노려봤다. 해가 거의 저물어 햇볕이 닿는 곳보다 그림자가 드리운 곳이 더 많아 보일 지경이었지만, 플레이어인 그녀에게는 별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녀의 눈에 비치는 것은, 두 마리 라가 전사였다. 초소 밖으로 나와서 모닥불에 고기를 얹어놓고, 알아들을 수 없는 울음소리로 뭐라고 지껄여대는 두 마리의 라가. 화련은 불 위에서 그슬려지고 있는 고기를 정체를 알고 있었기에, 자연히 눈살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마스터한테서 듣긴 했지만...동족을 잡다니...’
류 현이 말했었다. 라가로드는 단순히 인간통치자처럼 라가들을 지배하는 게 아니라, 정신마법이나 다름없는 카리스마로 지배하는 것이기 때문에, 산 아래에 있는 라가들이 로드의 죽음을 알아차렸을 거라고. 구릉지 풀숲 초소 쪽이 특히 개판이 날거라고 그리 말했었다.
“놈들은 고삐가 풀리면 약한 동족을 잡아먹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놈들이 뭔가를 굽고 있다면 그 고기는 손대지 않으시는 게 나을 겁니다.”
류 현의 말은 그대로 이루어졌다. 희란이 초소를 찾아내서 이곳으로 왔더니, 초소는 텅 비어있었다. 텅 빈 초소를 보고 당황하고 있자, 얼마 안가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나더니 저 라가 전사 두 마리가 나타난 것이다. 나무 가면이 벗겨지고, 얼굴이 완전이 곤죽이 된 동족을 끌고 말이다.
그 뒤는 정말 일사천리였다. 한두 번 해본 게 아니었는지, 두 라가 전사는 동족의 시체를 순식간에 해체하더니 말끔하게 뒤처리까지 했다. 그리고 지금, 불 위에서 익어가는 동족의 고기를 보며 담소를 나누고 있는 것이다.
화련은 치밀어 오르려는 욕지기를 삼키며, 자신의 허리께를 더듬었다. 그녀의 손아귀 넓이의 원통이 잡혔고, 그녀는 원통을 비틀어 뚜껑을 연 후에 그 안에 있는 꼬챙이 두 개를 꺼내었다. 그리고,
우웅! 그녀의 눈동자에 하얀 빛이 서리자 투박한 검정색의 꼬챙이 두 개가 허공으로 두둥실 떠올랐다. 화련이 있는 힘껏 꼬챙이를 내쏘려던 그 순간이었다. 그녀의 어깨를 덥썩 잡는 손이 있었다.
“언니, 하나는 내가...”
화련이 뒤를 돌아보자, 희란이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말했다. 화련은 만류하기 위해서 입을 떼었다가, 다시 다물었다.
‘그래, 이미 잡아오는 거까지 다 봤는데...나까지 희란이를 애 취급할 수도 없고...’
목구멍까지 올라왔던 말과 함께 복잡한 속내를 집어삼킨 화련은 희란에게 고개를 끄덕여주고는, 곧바로 꼬챙이를 앞으로 내쏘았다. 날아간 꼬챙이는 단 하나였고, 희란은 그것과 경쟁하듯이 앞으로 뛰쳐나갔다.
쉬익! [끼익?][커르륵!]
단말마조차 없었다. 거침없이 일직선으로 날아간 꼬챙이가, 라가 전사의 목을 사정없이 찢어놓았다. 비명조차 내지르지 못하고 고꾸라진 동료를 당황스럽게 내려다보던 또 다른 라가 전사는,
콰직! 희란의 파쇄권으로 투구와 두개골의 강도를 시험해보는 처지가 되었다. 투구의 왼쪽 머리가 움푹 들어간 채 날려간 라가 전사는,
[끼이익!] 곧바로 일어서서 기성을 토해내었다. 희란은 그 모습을 라가들에게서 빼앗은 장창을 들고 담담하게 지켜보았다. 자신의 파쇄권이 라가 전사를 절명시킬 수준이 아니라는 건 알고 있었다. 보통의 라가 전사라면 모르되, 이 던전 내에 있는 라가 전사들은 전부 평균 이상의 무장을 하고 있었으니까. 그녀로서는 브류나크 같은 아티펙트의 힘을 빌리지 않는 이상, 한 번에 절명시킬 수 있는 건 무리에서 떨어져 나온 병든 라가 정도다.
그리고 희란은 그 사실에서 조바심을 느끼지도 않았다. 오른쪽 검지에 끼워진 반지가, 그녀의 버팀목이 되어주었다.
[끼아악!]
짧은 대치도 견디지 못하고 라가 전사가 덤벼들었다. 고기를 굽는 데 정신이 팔려서, 입고 있던 흉갑과 투구 말고는 변변한 무장조차 하고 있지 않았던 라가 전사의 선택은,
푸확! 모닥불을 밑에 깔린 흙 째로 휙 날려버리는 것이었다. 라가 전사는 그대로 멈추지 않고, 당황하고 있을 적에게 전력으로 달려들었다. 눈앞의 적과 최대한 엉겨 붙는 게 최우선 과제였다. 그래야 어딘가 숨어있을 적이 동료를 절명시킨 술수를 쓰지 못할 테니까!
그러나 그런 라가 전사의 어림짐작은,
쉭! 일직선으로 찌르고 들어온 창에 의해서,
[꺽!][끄르륵!]
무참히 찢겨졌다. 절명하기 직전, 라가 전사는 보았다. 재와 그을음을 잔뜩 뒤집어 쓴 채로 기둥처럼 굳건히 버티고 있는 적의 모습을. 적의 발치에 자신이 내던진 모닥불이 여전히 타고 있는 모습도.
“희란아! 괜찮아?”
라가 전사의 몸이 허물어지기 무섭게, 화련이 희란에게 엉겨 붙었다. 그러면서도 화련은 발로는 주변에서 계속 타고 있는 장작들을 굴려 급하게 불을 껐다.
“어쩌자고 그걸 그대로 맞았어?”
“괘, 괜찮아요. 그냥 불로는 약간 뜨거울 뿐이고...심해도 물집만 잡히고 마니까...”
“그래도 그렇지! 네가 이렇게 무대포로 나갈 줄 알았으면 둘 다 내가 잡았어!”
희란은 히히 웃으며, 화련이 재를 털어주는 손길을 그대로 받았다. 화련은 대책 없이 웃기만 하는 희란을 보고 저도 따라서 픽 웃으며 물었다.
“그렇게 좋니?”
“헤헤...”
화련은 따라 웃다가, 꿀밤을 먹이며 말했다.
“다음에 또 이러면 마스터한테 말할 거야. 희란이가 그거 받고 너무 신나하는 거 같으니까..”
“자, 잘 못했어요. 다음부터는 안 그럴게요...”
부모에게 혼나는 아이처럼 움츠러든 모습에, 화련은 다시 픽 웃음을 터뜨렸다. 그녀는 마저 희란의 몸에 묻은 재를 털어주며 타이르듯이 말했다.
“마스터도 많이 잡는 게 목적이 아니라, 우리 둘이서 던전 안에서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을지 경험하게 하는 게 목적이라고 했었으니까. 그렇게 기합 팍 넣고 있을 필요는 없다?”
“으응...”
“오늘은 이 초소에서 자면 될 거 같고...내일은 개울이라도 찾아봐야겠다. 으아, 막 머리카락 사이로 뭐가 기어 다니는 기분이야-”
***
나승하는 입에 물고 있던 갈대 줄기 같은 걸 툭 뱉어내고는, 하늘을 보고 드러누웠던 자세를 고쳐 오른팔을 베고 누웠다. 그녀의 몸을 떠받치고 있던 나뭇가지가 조금 출렁였지만, 소리는 나지 않았다.
뚱한 얼굴을 한 그녀의 시선 끝에는 암흑천지 한 중간에 빛을 내고 있는 모닥불과 뒤쪽에 있는 라가들의 초소였다. 승하는 그 주변에 자리한 두 개의 인영 중 하나를 유심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따금씩 오른 손등을 왼손으로 보듬으면서 히히 웃곤 하는 사람, 오희란이었다.
‘진짜 이상하단 말이야...’
희란의 행동을 두고 하는 생각은 아니었다. 그녀는 희란을 바라보면서 한 남자가 어색하게 웃는 모습을 떠올렸다.
‘얻은 당일 날에 검증되지도 않은 물건을 아티펙트라고 단정 지은 것도 그렇고, 희란이한테 넘겨줄 때도 그렇게 망설임이 없을 수가 있나...? 그 정도면 거의 전략물자나 다름없는데. 솔직히 말해서 로드도 혼자서 잡았고 다른 애들은 없었어도 별 문제는 없는 상황이었잖아?’
류 현이 임시로 명명한 라가로드로부터 탈취한 아티펙트, 청뢰의 파괴력은 그야말로 규격외의 것이었다. 승하가 예상으로는 정부에서 알면 특별법을 개설해서라도 빼앗으려고 들 정도의, 세간에서 인식하는 아티펙트 테두리 밖의 물건이었다.
그런 물건을 소유권이 아닌 사용권이라고 해도, 그 자리에서 선뜻 팀원에게 내어준다? 욕심이 있고 없고의 문제가 아니라, 지능이 의심되는 행동이다. 승하가 보기에는 류 현의 지능에는 별 문제가 없다. 멍청이는 퍼플 던전은커녕 그 전전 단계도 넘지 못하니까.
그렇다면 류 현이 전부터 이런 식으로 행동하기로 정해두었다는 것이 된다.
‘...다시 생각해보자. 지금 당장 밖으로 나가서 존재를 공개한 뒤에, 망명 신청을 하면 모든 나라가 다 받아줄 아티펙트를 사양할 플레이어가 있나? 자기가 써보지도 않고? 직접 맞아보기 까지 했는데? 없어. 있어서는 안 되지.’
승하는 질문 아닌 질문을 되씹다가 낮 동안 몇 번이고 내었던 결론을 다시 내렸다.
‘마치 이 던전에 아티펙트가 있다는 걸 알고 미리 다 결정해둔 거 같은 태도였어. 그래, 그런 게 아니면 그런 반응은 불가능해.’
그러다 갑자기 자신의 머리카락을 사납게 휘저으며 발버둥을 쳤다.
‘이럼 뭐해. 물증이 없어서 캐물을 수도 없는데.’
승하는 다시 뚱한 표정이 돼서는 희란을 바라봤다. 복잡한 그녀의 속은 알바 아니라는 듯이 희란은 검지에 낀 반지에만 온통 신경이 다 팔려있었다. 이미 인간 수준을 벗어난 승하의 시력은, 희란의 손안에서 모닥불빛을 반사하는 푸르스름한 반지를 어렵지 않게 포착해내었다.
‘저런 걸 쥐어 주고 무슨 놈의 생존 훈련이야. 얼마나 빨리 라가들을 다 튀겨버리는 지 기록 재는 게 더 말이 되지.’
속으로 툴툴 거리긴 했지만, 승하는 희란이 하루 전의 아티펙트 테스트 이후에 청뢰를 한 번도 사용하지 않았다는 걸 알고 있었다. 류 현이 생존 훈련을 위해서 둘만 따로 구릉지의 풀숲으로 보낸 뒤, 희란은 시도 때도 없이 반지를 만지작거리긴 했어도 발동시키진 않았다. 류 현의 부탁 때문에 두 여자의 감시역이자 보호역으로 따라나선 승하는 모르려야 모를 수 없는 사실이었다. 청뢰의 화력이 숨기고 싶다고 해서 숨길 화력도 아니었고.
‘내 팀도 아닌데 대뜸 왜 저런 걸 쥐여 줬냐고 따질 수도 없고...으으 지금 합류하겠다고 하면 너무 속 보이겠지? 그리고 바로 그렇게 물어보면 바보가 아닌 이상 눈치를...어?’
나승하는 반사적으로 몸을 벌떡 일으켰다. 그 때문에 지금까지 별의 별짓을 하지 않아도 소리조차 내지 않았던 그녀는 저도 모르게 삐걱거리는 소리를 내고 말았다.
하지만 희란이 듣기에는 거리도 제법 있었고, 뭣보다 희란은 반지에 반쯤 정신이 팔린 상태였다.
‘맞아! 쟤들도 바보가 아니면 이상하다는 건 알거 아냐? 살짝 부추겨서 대신 물어보게 하면...’
결심이 서자마자, 승하는 누워있던 나뭇가지에서 훌쩍 뛰어내렸다. 그녀의 발밑으로 나뭇가지 몇 개가 스쳐지나가며 부러지며 소리를 내었다. 그 쯤 되자, 희란도 소란을 눈치 채고 그녀가 누워있었던 쪽으로 고개를 홱 돌렸다. 승하는 전혀 신경 쓰지 않고, 두 여자가 있는 모닥불 쪽으로 걸어갔다.
“어, 언니. 일어나 봐요...라가가 있는 것 같...어?”
“으응? 라가? 이 밤중에 무슨...으하암...?”
승하가 모닥불까지 10m거리까지 다가갔을 때, 희란이 화련을 흔들어 깨웠다. 오밤중에 갑자기 일어난 화련은 눈을 비비적거리며 주변을 살피다가 덜컥 굳었다.
“거...검성님...?”
승하는 방금 전까지 실없이 웃고 있었던 희란의 급격한 표정변화가 재미있다는 듯이 빙긋 미소 지으면서, 모닥불 앞에 자리를 잡았다.
“님은 무슨 님이야. 같이 던전도 돈 사이끼리.”
“...왜 마스터가 아니고 그 쪽이 나와요? 그리고 우리한테 모습 보이면 안 되는 거 아니에요?”
어딘가 실망한 듯한 화련의 태도에 승하는 킬킬거리면서 대꾸했다.
“미안하네, 바라던 임이 아니라서. 너희 마스터는 번개 맞아서 그런지 좀 쉬어야겠다고 그러더라고. 그래서 내가 대신 왔지. 그런데 누가 따라붙을 줄 알았나봐?”
“마스터 성격이야 뻔하니까...그런데 마스터 아프데요? 왜 그런 얘기는 안하고 혼자서...”
“아아, 아픈 건 아니고 마나흐름이 조금 엉켜서 조용히 가다듬을 시간이 필요하다고 했었어. 너희 마법사들이 잘 하는 거잖아?”
“너희 마법사라니...뭔가 놀리는 거 같은데...”
“그럴 리가. 오늘 가슴을 터놓고 얘기하고 싶어서 이렇게 나온 거라고? 너희 마스터한테 한소리 들을 것도 각오하고 말이야.”
화련은 못 볼꼴을 본 사람처럼 떫은 얼굴로 말했다.
“...난 그러기 싫은데요.”
“에이, 그러지 말고. 들어보면 너도 공감하는 바가 많을 거 같은데? 너희 마스터에 대한 이야기인데.”
일순간 화련의 표정이 급격하게 굳어졌다. 화련은 표정을 수습한다고 수습했지만, 그렇다고 굳은 기색을 완전히 떨쳐내진 못했다.
“거절하고 싶은데요. 다 큰 어른이 본인도 없는 자리에서 뒷담화를 하고 싶어요?”
“나쁜 얘기는 아니야. 그저 살짝, 궁금한 게 있어서. 뭐 정확히는 류 현이 아니라 청뢰에 대한 류 현의 의향 이야기지만. 들어보고 너희도 그렇다고 생각하면 대신 물어봐 주기만 하면 돼?”
희란이 반응하지 않을 수 없는 말이었기에, 희란은 저도 모르게 들을 준비가 된 듯한 자세를 취했다.
그 모습을 보고 승하의 입가에 악동의 미소가 걸렸다. 화련은 무시하고 싶었지만, 어제부터 계속 그녀의 머릿속을 맴돌던 의문이 승하의 말을 무시할 수 없게 만들었다.
“이상한 소리 하기만 해봐요. 마스터한테 바로 말할 거니까.”
“친구 험담하는 취미 같은 건 없으니까. 안심해도 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