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1화 〉탐식마(貪食魔)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꼬르륵! 짜증날 정도로 울어대는 배꼽시계와 비정상적으로 동하는 식욕!
능력이 능력인 만큼, 류 현은 이전 생에부터 이런 날이 오지 않을까 생각했고, 실제로도 그런 날은 오고야 말았다.
‘그래도 그건 괴수 사체기라도 했지!’
바로 이전 생에서 네임드 몹을 잡았을 때 일이었다.
그 때 류 현은 각성을 한 이후, 처음으로 자신의 능력이 가진 성격에 대해서 절감했다. 적의 살점을 먹어치워서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그 능력은 배고픔을 가지지 않은 게 아니었다. 그저 배고픔을 느낄만한 상대를 만나지 못해서 침묵했을 뿐.
정신을 차렸을 때는 7성 리치의 라이프 배슬을 반쯤 파먹은 뒤였다. 혼자서, 단독으로 리치 사냥에 나서지 않았다면, 아마 그 일로 난리가 났을 것이다.
그 당시에는 이미 리치의 라이프 배슬을 마법적인 의미로 해부하는 게 이상한 일이 아니었고, 던전이 포화된 것도 아닌데 갑자기 등장해서 근처에 있는 블랙, 화이트 던전을 열어젖히던 네임드 몹의 사체는 억만금을 줘도 구할 수 없는 보물이었다.
거기에 최초로 등장한 8성 리치라는 타이틀까지. 리치가 남긴 건 라이프 배슬과 리치의 저주 때문에 쓸 수 없는 반지 일곱 개가 끝이었지만, 그것만으로도 값을 매기는 게 의미 없는 보물 덩어리였다.
류 현도 다른 의미로 당황하는 수밖에 없었다. 어차피 흡수할 생각이었다지만, 이런 식으로 능력에 휘둘려 본적이 없었으니까. 류 현을 불안에 떨게 한 ‘강림’마저 이 정도 수준으로 그를 휘두르진 못했다. 그런 그가 단순한 식욕에 휘둘린 것이다. 기분 좋을 리가 없는 상황.
불행히도 이 불쾌한 경험은 그 뒤로도 계속 되었다. 처음만큼은 아니었지만, 류 현은 네임드 괴수를 잡아 죽인 뒤, 그 사체를 앞에 두고 극심한 허기에 시달렸다. 결국 먹어야 한다는 사실과 대부분 혼자서 잡았다는 상황 덕택에 큰 문제는 일어나진 않았지만, 그건 류 현 인생에 있어서도 특기할만한 강렬한 경험이었다.
그리고 류 현은 다시 재회한 그 극심한 허기가 어처구니없었다. 다른 것도 아니고 청뢰가 그 대상이라니.
‘먹는 게 아니라고! 이 미친 위장아!’
꼬르륵. 그러거나 말거나, 류 현의 위장은 단말마 같은 소리를 계속해서 토해내었다. 류 현은 배를 쥐어박으면 좀 잠잠해질까 하고 생각하다가 자신의 손안에 있는 청뢰를 멍하니 바라봤다.
푸르스름한 빛깔을 띤 그것은, 반지라기보다도 깍지 같은 형태였다. 중앙에 박힌 보석 같은 것도 없고, 금방이라도 날아오를 것 같은 용이 음각되어 있는 걸 제외하면 아티펙트스러운 면이라고는 요만큼도 보이질 않았다. 하지만 새겨진 용의 형상만큼은 인간의 손으로 만들 수 없을 것 같은 신비스러운 기운이 물씬 풍겼다.
류 현은 홀린 듯이 음각된 용의 머리를 바라보다가, 멍하니 반지를 올려놓은 손을 자신의 입가로 가져갔다. 반지가 입으로 들어가기 직전, 그의 눈에 생기가 돌아오며 손이 멈췄다.
“이런 미친...”
류 현은 반지를 올려놓은 오른 손을 그대로 주먹 쥐고는 자기 배를 쥐어박았다. 그래봤자 돌아오는 것은 짜증날 정도로 절절한 배꼽시계 소리뿐이었다.
‘먹을 게 따로 있지. 먹을 게 이거 밖에 안 남았어도 절대 안 돼!’
아티펙트를 먹어보지 않은 건 아니다. 정확히는, 보통 리치의 라이프 배슬을 처리할 때처럼 에너지 드레인을 통해서 흡수한 것이지만. 그건 류 현이 이전 생에서 행했던 수많은 실험 중의 하나였다. 남들처럼 각성과 동시에 자기 능력의 정체를 알지 못했으니, 별 수 없는 일이었다.
아티펙트를 흡수할 생각은 한 이유는 간단했다. 그 당시 류 현은 자신의 한계를 절감하고 있었다. 일 대 일로는 한나라의 군대조차 대적하지 못하는, 네임드 몹도 상대할 수 있는 그였지만, 그저 많기만 한 괴수 군단 앞에서는 그 용력은 큰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그에게는 다수의 약한 적을 짓누를만한 능력이 없었다.
그래서였다. 아티펙트 흡수에 눈을 돌린 것은. 유니크 급에 비할 바는 아니었지만, 3등급만 되어도 전선에서 꽤나 유용하게 써먹힐 정도는 되었으니까.
문제는 아티펙트들의 내구성이 그가 기대하는 수준이 미치지 못한다는 것. 마력의 유입을 못 견디고 부서지거나, 아티펙트와 연결된 마력라인이 신경 쓰여서 류 현 본인의 기량이 떨어지는 주객전도 벌어졌다는 것이다. 무식하게 단단한 몸에, 무식하게 마력을 때려 박는 싸움법에 이미 익숙해진 그로서는 아티펙트를 포기하는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만약 그 안에 깃든 힘만 쏙 빼낼 수 있다면, 자신이 아는 한 가장 튼튼한 도구인 자신의 몸으로 그 권능을 발휘할 수 있다면, 잔챙이들을 상대하다가 밀려나는 일을 더 이상 겪지 않아도 된다! 그런 희망 속에 류 현은 2등급과 3등급 아티펙트를 다수 입수한 후 그것들을 전부 에너지 드레인으로 흡수했다.
결과는 대실패. 딸려 들어온 것은 아티펙트 안에 잔존해 있던 미약한 마력 뿐, 아티펙트 내부에 잠들어 있던 마법은 그냥 증발해버린 것이다.
그 뒤로 류 현은 아티펙트에 관심을 거의 끊어버렸다. 유니크 급 아티펙트에는 계속 관심을 두긴 했지만, 의미 없는 짓이었다. 유니크 급 아티펙트들은 이미 주인이 있고, 그 주인들은 류 현에게 협조할 생각이 전혀 없었으니까. 협조 생각이 없는 정도가 아니라 아주 대놓고, 류 현이 그것을 훔칠 수 있으니 숨겼다는 제스쳐를 취했다.
그러니 류 현이 자신의 입을 틀어막고 청뢰를 못 볼 물건인 마냥, 멀찍이 떨어뜨려 놓으려고 애쓰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흡수해봐야 아무런 의미가 없을 확률이 더 높고, 이 청뢰야 말로 용잡이 팀의 결정적인 약점을 보완해줄 물건이니까.
그 때와는 다르게 지금 그의 능력이 몸 안쪽에서 격렬하게 요구하는 중이었지만, 그는 묵살할 생각이었다. 다른 건 다 쳐 먹어도 이건 안 돼! 그런 의지를 관철할 수 있었던 건 이전 생에서 제대로 붙어보지도 못하고 처참하게 철퇴했던 수많은 기억들 때문이었다.
류 현에게 있어서 청뢰는 단순히 강력한 아티펙트를 넘어서, 과거와는 다른 길을 걸을 것이라는 상징과도 같았다. 승하에게 제지당할 정도로 노골적으로 조바심을 낸 것도, 이런 영향이 없지 않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꿀꺽.”
반지 쪽을 한 번 힐끔 보는 것만으로도 군침이 넘어가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빨리 아무한테나 넘겨줘야 해. 더 쥐고 있다간, 괴수 군단 지지는 것보다 내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게 더 빠를 거야.’
그런 류 현의 속내를 알 리가 없는 일행들에게, 류 현의 행동은 번개를 맞아서 생긴 광증으로 보일 뿐이었다. 어느 새 류 현의 주변으로 몰려든 일행 중, 화련이 조심스럽게 그를 불렀다.
“...마스터?”
“네? 아, 화련 씨.”
“전혀 안 괜찮으신 거 같은데, 예의상 한 번 물어볼게요. 괜찮으세요?”
“무슨 말씀이신지. 저 멀쩡합니다. 일단 이것부터 받으시죠.”
류 현은 거의 집어던지다 시피 하며 청뢰를 건넸고, 화련은 그게 뭔지도 모른 채 허겁지겁 받아내었다. 화련은 자신의 작은 손에 놓인 반지를 보고 고개를 갸웃했다.
“이게 뭔데요?”
“라가 로드가 가지고 있던 겁니다. 아마도 전격 마법이 새겨져 있을 겁니다.”
화련이 의문을 표시하기도 전에 승하가 끼어들어왔다. 그녀는 자신의 추측과 일치하는 말이 류 현의 입에서 튀어나오자 잔뜩 흥분한 상태였다.
“라가 로드가 이걸 썼다고? 확실해? 리치 말고 괴수가 아티펙트를 썼다는 기록은...”
“없지요. 하지만 리치가 있지 않습니까. 그럼 이제부터 더 나타나도 이상할 건 없지요. 선천적으로 그런 전격을 내쏠 수 있는 개체랑 우연히 마주쳤다는 것 보다는 더 말이 되지 않습니까. 그리고 마력 라인이 흐르는 건 확인했습니다.”
“확실해?”
“...아마도?”
자신에게 들려주는 듯한 흘러가는 물음이 화련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다른 일행들이 놀라워하든 말든, 화련은 반지를 두 손으로 받친 그 자세 그대로 류 현의 옆얼굴을 유심히 뜯어보았다. 그는 뭐가 그리 불편한지 애써 시선을 먼 산 쪽으로 고정시켜놓고 있었다.
‘아마도? 라고? 번개 맞더니 사람이 바뀐 거야 뭐야? 언제는 안전이 확인하기 전에는 절대로 다가오지 말라던 사람이. 거기다가 여기 들어오고 나서 희란이 방치하는 것도 그렇고.’
화련이 의심이 가득한 눈초리로 그의 옆얼굴을 흘겼지만, 청뢰 쪽으로 돌아가려는 시선을 붙잡는 것만으로도 버거운 류 현은 그 시선을 눈치채지 못했다.
***
희란은 잠시 심호흡을 한 뒤, 가슴을 한 번 쓸어내리고 그것만으로는 안심이 되지 않는지, 뒤를 다시 돌아봤다.
팔짱을 낀 채 서있는 류 현과 그 옆에 서있던 승하가 손을 흔들어 주었다. 희란은 시선을 좀 더 왼쪽으로 돌렸다. 두 사람과 멀찍이 떨어져 서있던 화련은, 희란과 눈이 마주치자 우거지상을 풀고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희란은 똑바로 앞을 보고 섰다. 그녀의 눈앞에는 끝없이 계속 될 것 같은 수해와 거대한 뱀이 기어가고 있는 듯한 구릉들이 펼쳐져있었다.
그리고 천천히 조심스럽게 오른팔을 들어올렸다. 마치 보이지 않는 추가 매달린 것처럼 힘겹게. 그녀의 오른팔에 부담을 주고 있는 물건은 하나도 보이지 않았지만, 아무도 그녀를 닦달하지 않았다.
마침내 어깨 높이로 팔을 들어 올린 그녀는 천천히 다시 심호흡 했다. 이번에는 단순히 심호흡만 한 건 아니었다. 그녀의 명치 아래에 움트고 있던 마력이, 그녀의 가슴을, 팔을 타고 오른손 끝으로 모여들었다. 정확히는 그녀의 오른손 검지에 끼워져 있는 푸르스름한 반지로.
처음에 반지는 무정물답게, 그녀가 밀어 넣는 마력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그녀가 반지에 지닌 마력의 1/3쯤 밀어 넣었을 때, 그것이 본색을 드러내었다.
“!”
‘버텨!’
갑자기 둑에 구멍이 뚫린 것처럼, 그녀의 마력이 반지로 쏠려나갔다. 아니, 반지가 그녀의 마력을 닥치는 대로 빨아들였다. 갈라진 논바닥이 물을 빨아들이는 것보다 더욱 탐욕스럽게!
말 그대로 기가 빨려나가고, 덤으로 혼이 딸려나갈 것 같은 감각에 희란은 이를 악물었다.
‘버텨! 조금만 더...조금만...!’
그런 그녀의 인내를 알아준 것인지, 반지 쪽으로 쏠리던 마력의 흐름이 뚝 끊어졌다. 이미 가지고 있던 마력의 3/4를 빨렸지만, 희란은 의지를 불태웠다.
‘이제 저 바위를 조준하고...’
꽈릉! 희란이 뭔가 더 생각하기도 전에, 그녀의 손끝에서 우레가 천지사방을 찢어놓을 기세로 뛰쳐나갔다. 그렇지 않아도 다리 힘이 풀려서 주저앉기 직전이었던 그녀는 뒤로 조금 날려간 뒤에 주저앉았다.
“희란 씨!”
류 현이 후다닥 희란에게 다가와서 부축했지만, 그녀는 반쯤 넋이 나간 얼굴로 정면을 보려고 애를 썼다. 그녀는 자신이 넘어지며 일으킨 흙먼지가 가라앉자 좀 더 눈에 힘을 주었고, 곧 자신이 일으킨 참상을 볼 수 있게 되었다.
“와, 이것만 있어도 웬만한 길드 화력은 그냥 찌바르겠는데?”
조금 날티나는 표현이었지만, 희란은 승하의 표현에 그대로 동의하고 싶은 기분이었다.
‘이걸 내가 했다고...?’
조금 전까지만 해도 보는 이로 하여금, 평화로움과 까마득함을 동시에 느끼게 해주던 수해는 온데간데없고 재난 영화에나 나올법한 광경이 펼쳐져있었다.
사람에게 겸손을 느끼게 해주던 거대한 나무들은 상식을 잊은 것처럼 뿌리를 하늘로 향했고, 땅에 쳐 박힌 잎 부분은 불타고 있었으며, 그녀가 타겟으로 정한 바위는 흔적도 없었다. 그 주변에 널려있던 자갈들은 숯처럼 새카맣게 그을린 채 연기를 피워 올리고 있었다.
희란은 섬뜩과 만족감을 동시에 느끼며 자신의 오른손 검지에 끼워진 반지를 쓸어내렸다.
‘이거라면 나도...’
그녀의 입에서는 생각과는 상반되는 말이 나갔지만.
“마, 마스터. 저한테는 너무 과한 것 같은데...로드 잡을 때 전 별로 도움도 안 됐었고...”
“그 아티펙트의 사용 지분은 두 분한테 있고, 두 분이 용잡이 팀 소속인 이상 저는 거기에 손 댈 생각 없습니다. 화련 씨랑 잘 상의 해보시길.”
희란의 시선이 자신을 향하자, 화련이 질색하는 표정으로 두 손을 내저었다.
“언니...”
“나보고 아티펙트 관리까지 하라고? 못 해, 못 해. 거기다가 난 내 마법만으로도 코스트 오버야. 마력 많이 먹고, 계산 크게 필요 없고. 네가 쓰기 딱 이잖니?”
“그리고 저는 아티펙트 사용할 만큼 머리가 여유 있는 것도 아니고요.”
그렇게 말하곤 화련은 웃으며 희란을 다독거리고 있는 류 현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진짜 이상하단 말이야...이렇게 맞춘 것처럼 희란이한테 딱 맞는 걸로, 그것도 저런 아티펙트를 사용권을 홀랑 넘겨줘?’
화련은 입을 열려다가, 관두었다. 모처럼 좋은 분위기를 깨고 싶지 않은 것도 있지만, 지금 이런 자리에서 내뱉을 정도로 가벼운 사안이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마스터 성격상, 여기서 심증만 가지고 추궁하면 또 이상한 거짓말로 어물쩍 넘어가겠지.’
‘진짜 이렇게 다 퍼주면서 말 못할 사정이 대체 뭐야?’
그리고 조금 꽁한 마음도 없잖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