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9화 〉탐식마(貪食魔)
던전의 아침은 생각보다 늦게 시작된다. 새벽녘부터 울어대는 야생닭이나 새가 없기 때문이다. 더욱이 울창한 숲 한가운데에 야영지를 꾸렸기에, 류 현 일행의 아침은 조금 늦게 시작되었다.
그리고 화련은 반쯤 감긴 눈을 비비적거리며 모포를 개는 중이었다.
“진짜 싫다아...또 숲에서 구르고, 맛도 없는...”
화련이 잠자리를 정리하며 우는 소리를 내었다. 늘 있는 일이었다. 많지도 않은 용잡이 팀 인원 중에서 과반인 둘이 과묵한 편이니, 이런 역은 자연스럽게 화련이 맡게 된 것이다. 화련도 분위기를 만드는 정도에만 그칠 뿐, 정도 이상으로 뭐라고 징징거린 적은 없다.
희란은 어색하게 눈웃음 지으며, 그녀를 달랬고 류 현과 승하는 별 말 없이 자신들의 자리를 정리하며 뭔가 생각하고 있는 듯 했다. 희란은 그런 승하를 대놓고 계속 힐끗거렸지만, 승하는 그 시선을 대충 받아넘겼다.
이 퍼플 던전에 들어오기 전에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장면이었다. 승하는 몰래 힐끔거리기만 해도 곧바로 왜? 하고 물어오는 쪽이었고, 희란은 힐끔거리다가 상대가 눈치 챈 기색만 보여도 고개를 푹 숙이고 마는 소심 그 자체였다. 화련이 그런 희란의 모습에 뭐라 물으려던 찰나였다.
“오늘이 좋겠군요.”
“...마스터는 가끔 아니, 꽤 자주 뜬금없는 소리 하시는 거 알아요? 대체 뭐가 좋다는 건지...”
“저기 산꼭대기를 보시죠.”
“꼭대기요? 거기라고 해봤자 계속 번개만 때리고 있을...없네? 어디갔어?”
화련은 보고도 믿기지 않는지 다시 눈을 비비고, 옹기종기 모여 있는 세 산 무리를 바라봤지만 바뀌는 건 없었다. 그 위쪽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깨끗했다. 화련은 믿기지 않는지 몇 걸음 앞으로 나갔다가, 옆으로 갔다가 하며 최대한 다각도에서 산을 살폈다. 그녀가 그러고 있는 동안 나머지 일행들도 그녀와 똑같은 행동을 반복했다.
“아니...갑자기 왜?”
화련이 멍하니 중얼거렸다. 현실세계에서라면 산머리를 계속 후려치는, 한 곳에 몇날 며칠이고 떠있는 번개구름의 존재자체가 말이 안됐겠지만.
이곳은 던전이다. 말이 안 되는 것, 처음 보는 광경이 ‘자연스럽다’라고 해도 되는 비상식이 지배하는 공간. 그럼에도 던전 내부에서 일어나는 일에도 이유가 있기 마련이다. ‘그냥’은 없다. 그런데 베테랑 중의 베테랑인 승하조차 본적 없는 필드 특성이 별다른 조짐도 없이 갑자기 사라진 것이다.
일행들이 얼이 빠진 채 산머리만 멍하니 바라보고 있자, 류 현은 어깨를 으쓱하며 태평하게 말을 늘어놓았다.
“왜 그런지는 몰라도 잘 된 거 아니겠습니까. 번개 치고 있는 산을 오르는 것보다는 낫겠지요. 확실한 건 오늘이 저 안으로 들어가기 적기라는 겁니다.”
“그야 그렇지만요. 그래도, 이유도 모르는 데 그냥 들어가도 될까요? 좀 불안한데..”
“그렇다고 조사에 착수할 만한 정보가 있는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번개 치는 것만 본 걸로 뭘 알아볼 수도 없는 노릇이고요. 무엇보다 이제 슬슬 라가 로드도 본대를 데리고 나올 겁니다.”
화련은 조금 찝찝한 얼굴이었지만 고개를 끄덕거렸다. 류 현의 말대로 정보가 없어도 너무 없었다. 그들이 아는 거라곤 산머리가 깨져라 내리꽂히는 번개의 존재와 여태껏 탐사활동을 통해서 라가 무리를 포함한 본대가 저 너머에 있을 거라는 것 정도다. 번개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전혀 없었다.
아무리 대단한 승하나 류 현이라고 해도, 번개가 치는 산을 무작정 타고 들어갈 수는 없으니까.
한 점 돌파를 하겠다고 했던 류 현이, 공약을 철회하고 산 주변 진지를 정리하기 시작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번개에 대한 뚜렷한 대책이 없었으니, 제거할 수 있는 변수들부터 차근차근 줄여나간 것이다. 어차피 잡아야할 괴수이기도 했고.
“아무리 수준 차이가 난다지만. 여태 잡은 수로 볼 때, 못 해도 백 정도는 되는 병력에 맞서서 평지에서 싸우긴 좀 그렇지요. 이제 접근을 방해하는 번개도 없어졌는데 말입니다. 그리고 여차하면 빠지는 것 정도는 어렵지 않을 겁니다. 수가 많을수록 몸을 가누는 것도 힘들 테니까요.”
‘청뢰를 봉인지에서 직접 꺼내려면 좀 귀찮으니까. 그놈들이 스스로 봉인지에서 꺼낸 지금이 적기야. 봉인 푸는 법 찾는 척하려면 시간도 너무 오래 걸리고.’
류 현의 속내를 알 리가 없는 화련은 재차 고개만 끄덕거릴 뿐이었다. 희란도 딱히 반대할 생각은 없는지, 이젠 고요하기 그지없는 산머리를 멍하니 바라볼 뿐이었다. 승하만은 조금 달랐다. 그녀는 눈을 게슴츠레 뜨고 류 현이 하는 짓을 유심히 관찰했다.
‘대체 뭐지? 번개가 쳤던 원인을 알고 있는 거야?’
뚜렷한 증거가 있다기보다도, 순수 촉에 의한 의심이었다. 승하는 류 현의 확신마저 느껴지는 말투에서 뭐라 설명하기 힘든 괴리감을 느꼈다. 저건 추론만으로 나오는 자신감이 아니라고, 그렇게 고하고 있었다.
‘평소에는 그렇게 싸고돌더니 희란이 방치하는 것도 그렇고. 어제 그러던 거 다 들어놓고 한 마디도 안하네?’
그런 승하를 향해서 류 현이 고개를 돌리곤 물었다.
“어디 불편하십니까?”
그녀는 당장이라도 입술을 비집고 튀어나오려는 의문을 꽉 눌러 담았다. 지금은 그런 걸 물어볼 때가 아니었다.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
[끼익!][꺅꺅!][꾸루룩?]
그야말로 난장판이었다. 울음소리 패턴을 알고 있어도 알아듣기 힘들 정도로, 다수의 라가들이 제 좋을 대로 끽끽거리고 있었다. 사방이 막혀있고, 움푹 들어간 지형이라서 그런지 소리가 분지 내에 왱왱 울리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아무도 그 광경을 보고 개판이니 어쩌니 하지 못할 것이다. 나름대로의 무장을 갖춘 라가들이 어색하게나마 오와 열을 맞추고 서있는 이 상황을 두고 말이다. 더욱이 그것들을 상대해야 하는 입장이라면.
실제로 화련은 발끝이 오그라드는 기분 속에서, 아래쪽 분지에 자리한 라가의 물결을 조심스럽게 살폈다. 시선에 소리라도 낼 수 있는 것처럼 조심스럽게.
생각보다 라가의 물결은 길지 않았다. 대충 헤아려도 이백은 못 미치는 숫자. 문제는 그 무리 곳곳에 자리 잡은, 괴수들이었다. 응룡 세 마리, 라가 챔피언 네 마리, 라가 주술사 다섯 마리. 그것들로만 던전을 구성해도 퍼플급이라는 소리를 들을 법한 구성이었다. 여기까지 오면서 그들이 잡아 죽인 숫자까지 합한다면, 아마 아무도 그녀의 무용담을 믿지 않을 것이다. 퍼플 던전이 이번이 처음인 화련이 보기에도 명백한 난이도 측정 미스.
‘미친, 이게 무슨 퍼플이야. 퍼플에 플러스를 두 개 붙여도 모자라겠네!’
그리고 그런 화련의 불평은 물결의 끄트머리에 도달했을 때, 그녀 자신조차 잊게 되었다.
네 마리의 라가 전사가 떠받치고 있는 조잡한 가마에 탄 그것은, 보통 라가 전사보다 머리통 하나 정도가 큰 수준이었다. 라가 전사와 다른 점이라면 좀 더 잘 짜여진, 마른 근육질 몸을 갖고 있다는 것과 체모를 포함해서 몸 전체가 희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라가 챔피언처럼 척 봐도 피지컬이 어마어마해 보이는 몸도 아니었고, 하얀 몸은 흙먼지 때문인지 조금 탁해진 상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달랐다. 존재감이 차원이 달랐다. 저것은 라가 챔피언이나, 그녀가 이 던전에서 만난 가장 강한 난적인 응룡과도 비교가 안 되는 괴물이었다.
멀리서 보는 것만으로도 가슴 위에 돌덩어리를 얹은 것 같은 기분이 들게 만드는 괴물.
‘저게 로드라고...? 그냥 쟤만 있어도 퍼플 판정 받을 거 같은데?’
라가 로드. 라가 투성이인 이 던전의 지배자.
‘저걸...잡을 수 있는 거야? 저 많은 라가들을 뚫고?’
화련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곧바로 한 단어를 떠올릴 수 있었다.
실패. 그 단어가 떠오르자마자 화련은 몸을 돌렸다. 자신이 자리한 수풀 보다 아래쪽에 숨어 있는 류 현을 부르고자 했다. 그렇게 해서, 류 현이 시선을 끌고, 승하가 라가 로드의 목을 날려버린다는 어처구니없는 계획의 실행을 막고자했다.
하지만 그런 그녀의 결심은,
“뭘 그렇게 멀뚱멀뚱 보고 있냐. 적이라고 적.”
류 현이 라가 무리의 정면으로 털레털레 걸어 나타나는 것으로 무산되었다. 화련은 저도 모르게 입술을 꽉 짓씹었다. 그녀는 뻣뻣해진 무릎을 꽉 움켜쥐고는 자신을 채찍질했다.
‘움직여! 일단 마스터를 빼낸 다음에 다시 갉아먹기 쪽으로 하자고 건의를...’
화련이 몸을 일으키기도 전에 가마 위에 타고 있던, 심드렁한 얼굴을 한 라가 로드의 오른손 검지가 류 현을 향했다. 그 직후,
꽈릉! 우레가 류 현을 관통했다. 유니크 아티펙트 청뢰가 플레이어들 앞에 첫 선을 보이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