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7화 〉탐식마(貪食魔)
“대체 어떻게 되먹은 던전이야. 여기 그냥 퍼플이 아니라 퍼플 플러스 쯤 되는 거 같은데? 진짜 결정체 계측 말고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한다니까. 완전 엉터리야 엉터리.”
류 현은 쓰게 웃으며 승하의 투덜거림에 동의했다. 같은 블루라도 거의 블루 퍼플에 근접한 블루가 있는 것처럼, 이번 퍼플 던전은 블랙급은 되지 않아도 퍼플과 블랙 사이에 들어갈 정도는 되어보였다. 일단, 류 현 일행이 던전 안에서 잡은 라가 개체 수가 이미 백 단위를 달성한지 오래라는 것만 봐도 그랬다.
‘하기야, 청뢰가 있는데 쉬운 것도 말이 안 되지.’
그런 생각을 하면서 류 현은 다시금 전방을 훑었다. 라가 챔피언 하나, 주술사 둘, 주술사에게 목줄이 잡혀있는 응룡 하나, 그 외에 투구와 흉갑정도는 갖추고 있는 라가 전사가 삼십여 마리 정도. 나무 뒤에 숨어있을 사냥꾼을 생각하면 거의 사십을 헤아린다고 봐도 무방한 무리가 불과 십미터 거리까지 다가와 있었다.
막 아침식사를 끝내고 막 움직이려던 차에, 떡하니 이 무리와 마주친 것이다. 류 현은 우연이라고 생각하진 않았다.
‘방향도 안 틀고, 계속 직진했으니 우리 진격로 정도는 추측했겠지.’
이 던전 안에는 라가 로드가 있으니까. 지휘개체가 있다는 건 이런 것이다. 어마어마한 전술을 보여주진 못해도, 어수룩하게나마 대처를 한다. 그리고 어지간한 경우가 아니고서는 스펙상 괴수에게 밀릴 수밖에 없는 플레이어 입장에서는 이런 대처도 상당히 골치 아픈 일이다.
어지간한 경우에는 말이다.
“화련 씨, 희란 씨. 어제 말씀 하셨던 거 지금 하실 겁니까?”
“...해야죠.”
머뭇거리는 듯한 대답에 류 현이 뒤를 돌아보자, 화련은 그녀답지 않게 잔뜩 굳은 채로 정면을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류 현은 그녀의 시선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보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힘드시면 굳이 무리 안하셔도 됩니다. 곧 보스몹 얼굴도 보게 될 테니까...”
“...할 거에요.”
“희란 씨는요?”
“하, 할게요. 하게 해주세요!”
잠자리에 들 때만 해도 완전히 하얗게 질려서, 내일 제대로 걸을 수나 있을지 의심되었던 희란은 언제 그랬냐는 듯 기운차게 대꾸했다. 묘하게 기합이 들어간 대답에 류 현은 고개를 갸웃했지만, 굳이 따지진 않았다.
대신 그는 최선두에 서있는 승하의 등에 대고 말을 걸었다.
“승하 씨, 그럼 어제 부탁드린 대로...부탁드립니다.”
“응, 알았어.”
대답이 떨어지기 무섭게, 승하의 몸이 앞으로 내쏘아졌다. 류 현은 따라서 발걸음을 옮기기 전에 뒤를 한 번 더 돌아보고는, 앞으로 뛰쳐나갔다.
[끼이익!][꾸왁!]
라가 무리가 발광하듯 괴성을 내질렀지만, 둘의 질주는 멈추지 않았다. 가장 먼저 반응한 것은, 역시 응룡이었다. 응룡은 목줄이 잡힌 상태에서도 긴 목을 뻗어 승하를 물어뜯으려고 했지만, 승하는 되레 응룡의 콧잔등을 밟고 더 높이 뛰어올랐다.
허공에 떠오른 그녀는,
쉬익! 그대로 검집의 검을 내쏘아내듯 휘둘렀다. 푸핫! 나뭇가지가 쏟아지면서 허리가 잘린 라가들이 나무 아래로 쏟아져 내렸다. 그 순간, 류 현도 라가 무리와 부딪혔다.
[꾸왁!]
응룡은 승하에게 콧잔등을 밟힌 화풀이라도 하려는 듯, 거칠게 달려들었다. 하지만 이번에도 응룡이 목적은 달성하는 일은 없었다. 류 현의 목적은 응룡이 아니라 그 등에 타고 있는 주술사였으니까. 류 현이 응룡의 등 위로 펄쩍 뛰어오르자, 라가 주술사가 쥐고 있던 늑대 머리 지팡이를 그에게 향했지만,
쩌엉! 라가 주술사가 발한 저주는 허공에 파문만 일으킬 뿐 닿지 않았다. 라가 주술사가 그 광경에 의문을 가지기도 전에, 류 현이 도달했다.
콰직! 류 현의 오른 주먹이, 파쇄권을 한껏 발휘한 그것이 라가 주술사의 머리를 박살내놓았다.
[꾸오!] 라가 주술사의 몸이 허물어지면서 응룡이 발광했다. 류 현은 다시 발을 굴러 앞으로 뛰쳐나갔다. 그 자리에서 응룡을 때려죽일 수 있지만, 약속이었으니까. 류 현이 땅에 발을 딛자마자, 라가 전사들이 그를 포위해 들어왔다. 라가의 벽 뒤에서는 라가 주술사가 지팡이를 연신 흔들고 있었다..
[끼익!][꺄이익!]
입에 거품을 물고 광분하는 라가 무리에 대한 대답은,
콰직! 투구고, 흉갑이고 가리지 않는 파쇄권 연타! 류 현은 급소고 뭐고 가리지 않고, 손이 닿을 거리에 들어온 것들을 마구잡이로 두들겨 대었다. 그것뿐인데도, 라가들은 피거품이나 내장을 쏟아내며 뒤로 나자빠졌다.
어쩌다 창을 내찌르는 데 성공한 라가 전사가 있더라도,
카앙! 그의 피부조차 제대로 뚫지 못했다. 희란과 화련의 성장에 연신 놀라기만 하는 입장이었지만, 그 또한 성장을 소홀히 하진 않았으니까. 이미 2단계에 도달한 그가, 제대로 마력조차 담지 못한 창질에 데미지를 입을 리 만무!
쩌엉! 또 다시 류 현의 머리 부근의 허공이 충격파로 뒤흔들렸다. 데미지는 전혀 없었지만, 류 현은 라가 주술사가 서있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가 보유한 항마력이면 연발로 저주 다섯 발이 쏟아져도 뚫릴 일은 없겠지만, 그래도 기분 좋은 건 아니었으니까. 류 현은 그대로 자신을 향해서 내찔러오는 창을 밟고, 그대로 타고 올라가 창을 내찌른 라가의 머리를 발판 삼아 류 현은 다시 뛰어올랐다. 라가 주술사를 향해서. 당연한 이야기지만, 발판이 된 라가의 머리통은 볼품없이 짜부라지고 말았다.
류 현이 착지 지점을 향해 발을 내뻗으려는 그 때였다.
[크오오!]
그 때까지 라가 주술사의 근처 나무에 몸을 숨기고 있던, 라가 챔피언이 불쑥 튀어나오며 두 손으로 움켜진 곤봉을 있는 힘껏 휘둘러왔다. 마치 나무 가면에 가려져서 보일 리가 없는 라가 주술사가 웃고 있는 듯 했다. 걸렸구나, 멍청한 놈아!
그러나 류 현은 신경 쓰지 않았다. 그에게는 라가 챔피언 따위는 댈 수도 없는 지원군이 있었으니까. 류 현은 자신의 등 뒤로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는 승하에게 일순간 모든 집중력을 쏟았다.
슁 하는 바람 소리조차 없었다. 류 현 또한 그 일격을 보지 못했다. 하지만 느낄 수 있었다. 그녀가 칼을 휘둘렀다는 것을. 승하는 그대로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검을 갈무리했다.
푸핫! 라가 챔피언이 뭔가 인지하기도 전에, 가슴팍에서 피가 솟구쳤다. 그리고,
쿠웅! 자신의 상태를 확인하기도 전에 몸과 가슴이 분리되는 신세가 되었다. 류 현은 그 모습에 신경도 주지 않고 그대로 내달렸다.
[끼이이익!]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라가 주술사가 의미를 알 수 없는 울음을 길게 내뱉으며 지팡이로 류 현을 겨냥했지만, 쩌엉! 다시금 허공에 파문을 일으킬 뿐 류 현에게는 아무런 이상조차 없었다.
그게 마지막 기회였다. 콰직! 류 현의 주먹이 라가 주술사의 가면을 뚫고, 안면을 꿰뚫었다. 거침없이 나아가던 손등이 물컹한 것이 닿자, 류 현은 주먹을 거두었다. 라가 주술사의 몸이 허물어졌다. 류 현은 그대로 몸을 돌려남은 라가 잔당들을 청소하고자 했지만,
[꾸오오!]
숲속을 뒤흔드는 응룡의 피어가 그의 발목을 잡아채었다. 류 현의 고개가 응룡 쪽으로, 정확히는 화련과 희란 쪽으로 돌아갔다.
‘견뎠으려나?’
어제 내단을 다 먹고 나서 화련과 희란이 말했었다. 복수할 기회를 달라고. 류 현은 무슨 복수인지는 묻지 않았다. 피어를 처음 겪어보는 이들이 무슨 기분인지 그도 아니까. 류 현도 한 번 당해봤었으니까. 반응은 다양하다. 아예 그 기억이 트라우마가 돼서 용 형태를 뜬 괴수만 보면 얼어붙는 유형부터, 드물지만 화련처럼 전투 의욕을 불태우는 유형까지.
그래서 듣고서 조금 어이가 없긴 했지만, 류 현은 선선히 승낙했다. 트라우마를 안고 벌벌 떠는 것보다는 백배 나았으니까. 그는 그녀들에게 응룡을 다시 발견할 경우 둘이서 처리할 무대를 만들어주겠다고 했다.
단, 피어에 얼어붙지 않는다는 전제하에. 그 부분은 류 현도 장담하기 힘든 부분이었다. 피어에 대한 적응력은 사람마다 달랐으니까. 내단을 먹인 건 적응하기 편하도록 해주는 방책에 불과하다.
특히 예민한 희란의 경우에는 처음 그 때처럼 넋이 나갈 가능성도 없진 않았다. 그녀는 어제 잠자리가 들기 전까지 하얗게 질려있었으니까. 괜찮아졌다 싶으면 몸을 떨어서, 승하가 옆에 붙어서 틈만 나면 보듬어줄 정도였다.
‘피어 적응은 어떻게 해줄 수가 없는데...’
류 현의 걱정은 괜한 것이었다. 화련과 희란은 그다지 위축된 기색 없이 응룡의 등위를 오르락내리락 하는 중이었다. 류 현은 희미하게 미소 지으며, 그 사이에 자신의 옆구리를 찌른 창의 주인의 머리를 부숴놓았다. 그녀들이 약속의 조건을 맞췄으니, 약속을 지키는 데 전념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