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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5화 〉탐식마(貪食魔) (75/429)



〈 75화 〉탐식마(貪食魔)

희란은 조심스럽게 들이킨 숨을 내어쉬었다. 손끝에 걸리는 실낱같은 이질감을 놓치지 않기 위해서, 그녀는 최대한 얌전하게 왼손으로 동쪽을 가리켰다. 그러자 그녀의 앞으로 인영하나가 쏜살같이 튀어나갔다.


[끼이악!] 그걸로 끝이었다. 그 이후 이어지는 단말마도 없이 소리가 끊어졌다. 더불어 희란의 손끝에 걸리던 희미한 이질감이 촛불이 꺼지듯 사라졌다. 희란이  상실감에 움찔하자, 화련이 그녀의 손을  쥐며 물었다. 희란의 손은 이미 식은 땀으로 축축했다.

“괜찮아?”


희란은  대신 희미하게 미소 지으며 고개를 까딱였다. 그러면서도 속으로 계속해서 되뇌었다.

‘괜찮아, 사람이 아니라 괴수야. 사람이 아니라...’

“괜찮으십니까?”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희란의 고개가 홱 돌아갔다. 류 현이 떨떠름한 얼굴로 그녀들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그의 뒤에는 거대한 불길이, 라가의 굴을 집어삼킨 불길이 일고 있었다. 희란이 뭐라 대꾸하기 전에, 그녀가 가리켰던 방향으로 뛰어갔던 승하가 언제 돌아왔는지 얼굴을 불쑥 들이밀었다.
“뭐야, 무슨 일인데?”
“희란 씨가 좀 힘들어 하시는 거 같아서요.”
“그래? 그럼 오늘은 이쯤 할까?”


아직 승하가 불편한 희란은 애써 태연한 채하며 대꾸했다. 목소리가 평소보다 떨림이 심했지만.

“저,  괜찮은데요...”
“무리하실 필요 없습니다. 급하게 한다고 해서 빨리 끝날 일도 아니고요. 슬슬 해도 저물 시간이니 오늘은 이쯤 하도록 하죠.”


그 이상 다른 말은 나오지 않았다.


***

온통 풀숲인 구릉지에 덩그러니 자리하고 있는 공터에는,  뿐만 아니라 어둠마저 제대로 접근하지 못하고 있었다.

류 현은 불티를 계속해서 토해내는 모닥불을 뒤적거렸다. 불티가 더욱 거세게 튀어 올랐지만, 그는 상관하지 않고 두어 번  휘적거리다가 그만두었다.

“그러니까, 숨이 끊어지는 것도 느껴진다고? 근데 어제는 그런 소리 안 했었잖아?”
“그게...하면 할수록 민감해지는 느낌이라서요...”


희란은 그대로 우물거리며 말을 삼켰다. 승하는 승하대로 생각에 잠긴 듯 별 말이 없었다. 류 현은 자신의 오른쪽에 자리 잡고 있는 화련을  번  돌아봤다. 그녀는 금방이라도 앞으로 고꾸라질 것처럼 고개를  숙인 채 꿈나라를 헤매는 중이었다. 류 현은 그 모습에 픽 웃어버리고는, 제 손만 만지작거리고 있는 희란에게로 시선을 되돌렸다.


어제, 류 현은 한 점 돌파를 할 거라고 말을 하긴 했지만, 곧바로 그걸 행동으로 옮기진 않았다. 위험 없이 두 사람에게 경험을 쌓게 할 기회였으니까. 화련과 희란이 용잡이 팀을 나가지 않는 이상, 써 먹을 기회가 좀처럼 오지 않을 경험이지만.


‘3차 ‘대소환’이 터지면 경험해보고 싶어도 못 시켜줄 테니까.’


아직 여유가 있을 때 최대한 많은 경험을 시켜주고 싶은 게 그의 심정이었다. 블랙 던전이 이렇게 빨리 등장했는데 다른 일들도 빨리 일어나지 말라는 보장은 없으니까.

어제부터 희란에게 인간 레이더 역할을 맡긴 것도 그 때문이었다. 마력을 움직이는 파이프 라인 역할을 하는 능력 때문인지, 그녀는 이질적인 흐름을 감지하는 능력이 뛰어났다. 이게 본 능력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말이다. 지금 그대로도 괜찮지만, 그는 좀 더 그 부분을 키워주고 싶었다.


사실 말이 인간 레이더지, 류 현과 승하가 정찰을 반복해서 찾아낸 마을 방향이라도 지목한다면 충분히 만족할 생각이었다. 첫 날인 어제는  하고 자시고도 없었다. 저녁쯤이  돼서야 시작했고, 그녀가 찾은 건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는 초소  곳이 전부였다.

그런데 오늘 희란은 전혀 엉뚱한 방향을 지목했고,  방향 끝에는 마을에서 이탈한 걸로 보이는 병든 라가무리가 굴을 파고 생활하고 있었다.


류 현과 승하는  시점에서 얼빠진 얼굴로 희란을 돌아볼 수밖에 없었다. 그 바람에 몇 마리를 놓쳐서 쫓아야하는 수고로움이 있었지만 그건 아무래도 좋은 이야기다. 희란이 오늘처럼 제 능력을 발휘한다면 잔챙이들과 기나긴 술래잡기를 할 일도 없을 테니까.

퍼플 던전을 솔로 플레이 하면서 라가 부락을 혼자 몰살시켜본 있는 승하는 그 자리에서 만세까지 외쳤다. 마을에서, 부대에서 떨어져나간 잔챙이를 잡는다고 던전 안에서  달 이상 더 구른 경험이 있는 그녀였으니 무리도 아니었다.


‘그런데 너무 예민해서 문제라니...’


문제는 전혀 생각지도 않은 곳에서 터졌다. 체내 보유 마력량으로 따지면 막 각성한 플레이어보다 못한 병든 라가까지 감지해낸 희란의 예민함이, 그녀의 신경을 갉아먹기 시작한 것이다. 감지권 내에 있는 라가가 죽어나자빠 질 때마다 희란이 눈에 띠게 움찔거렸고, 급기야 식은 땀까지 뻘뻘 흘려댔다. 그녀의 말을 믿고 계속 했으면 아마 거품물고 기절하는 모습까지 봤을지도 모르는 일.


아직 희란이 자신의 예민함을 다루지 못해서 일어난 일이다. 이상한 일도 아니다 그녀는 아직 각성한 지 채 일 년도 되지 않았고, 기본기를 다질 시간도 없이 급격히 성장했으니까.

‘로드를 치기 전에 외곽에 있는 잔챙이들을 대충 쳐내고 싶었는데...’

이 던전의 보스몹인 라가 로드는 이미  현 일행의 존재를 눈치 챘을 것이다. 던전에 들어온  닷새째 밤이고,  동안 외곽초소를 꾸준히 줄여왔다. 거기에 오늘은 숲에서 보일 정도로 꽤 큰 불까지 났다. 라가들의 굴 입구에 있던 횃불이 풀숲에 떨어지면서 붙은 불이었다. 숲에 있는 진지나 초소에서 로드에게 보고를 올렸을 것이다.

‘이제 슬슬 병력을 모아서 무거운 엉덩이를  준비를 하겠지.’


당장 라가 로드가 병력을 이끌고  구릉까지 기어 나오진 않을 것이다. 못해도 사흘은  걸리겠지.

하지만 희란의 반응으로 봐서는 그 동안 그녀를 나침반 삼아 부락에서 떨어져 나온 잔챙이들을 처리하긴 어려워보였다. 그녀는 잘 숨기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류 현은 똑똑히 보고 있었다. 그녀의 손이 아직도 가늘게 떨리고 있다는 것을.

‘뭐, 그냥 예정대로 공략을 진행하는 것뿐이니까. 슬슬 무료하기도 했고.’

***


“귀 막아!”


드물게 나승하는 다급하게 소리쳤다. 그녀의 말소리가 다 울리기도 전에,

[꾸오오!]


머릿속을, 뼛골을 울리는 포효가 숲을 뒤흔들었다. 그 소리가 다 울리기도 전에, 희란과 화련의 눈동자가 풀리더니 실 풀린 인형마냥 주저앉았다. 승하는 예상이라도 했다는 듯이 둘의 앞을 가로막아서면서 외쳤다.

“류 현!”

대꾸는 없었다. 대신 그녀의 앞쪽에 있던 나무의 가지가 출렁하고 끊어질 기세로 내려갔다가,

퉁! 검은 인영을 내쏘아보냈다. 류 현은 순식간에 포효의 근원지를 향해서 날아갔다. 승하는  모습까지 확인한 후 뒤를 살폈다.

“아...아...”
“...으으아...아윽...”

화련과 희란은 자신의 팔로 스스로를 끌어안은  몸이 부서져라 떨고 있었다. 승하는 혀를 한 번 짧게 찬 후 두 사람을 보듬기 시작했다. 거의 넋이 나간 화련과 희란은 체온을 쫓는 건지 승하를 아스러지게 끌어안았다.

‘본대도 아니고, 정찰대에 응룡(鷹龍)이라니 개체수도 그렇고, 이 던전은 대체 어떻게 되먹은 거야?’


승하는 둘을 그냥 보듬지 않고, 쓰다듬는 손을 통해서 자신의 마력을 천천히 흘러 보냈다. 그렇게   정도를 보내자,

“콜록! 콜록!”
“하아...콜록!”

승하의 품안의  사람이 경쟁이라도 하듯이 기침을 해대기 시작했다. 승하는 기침이 멎을 때까지 쓰다듬는 걸 계속했다. 기침이 멎자, 그녀는 둘의 눈을 마주보고 시선의 상태를 확인하곤 물었다.

“괜찮아?”
“...전혀 안 괜찮아요. 방금 그거 대체 뭐에요? 갑자기 막 심장이...”

전혀 안 괜찮다고 하는 화련보다 희란의 상태가 더  좋았다. 희란은 아직까지 몸을 부들부들 떨면서 시선을 좀체 고정하지 못하고 있었다. 승하는 희란을 다시 끌어안고 보듬어주면서 화련의 질문에 대꾸했다.

“피어(fear)는 알지? 응룡이 피어를 쓴 거야.”
“응룡?”
“용이 되다만 괴물. 날개 없는 용...그러니까, 커다란 도마뱀쯤 돼. 그래도 피어정도는 발산할 수준은 되니까.”
“...그 쪽은 왜 멀쩡해요?”
“그놈보다 강한 놈 피어에 노출된  있거든. 경험이 없으면 저항하는 게 거의 불가능해. 마음에 담아 두지 마.”
“누, 누가 그런데요? 그런데 우리 마스터는요?”

승하는 턱짓으로 앞을 가리켰다. 앞쪽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나무가 두 세 그루 씩 뒤로 나자빠지고, 흙먼지가 가라앉을 법하면 일어나고, 가라앉을 법하면 일어나고를 반복해서 도무지 보이는 게 없었다. 터져 나오는 소리는 형언하는 게 의미 없을 정도로 엉망진창으로 뒤엉킨 상태였다. 누가 봐도 흙먼지 장막 너머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이 좋은 일은 아니었다.


그리고 화련과 희란은 그걸 보고도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유추하지 못할 정도로 바보는 아니었다.


“...혼자 갔다고요?”

목소리를  건 승하의 품안에서 덜덜 떨고 있던 희란이었다. 희란은 그대로 벌떡 일어서더니 금방이라도 쓰러질  같은 발걸음으로 앞으로 걸어 나갔다. 승하는 그 모습을 보고 한숨을 내쉬고는, 희란의 오른팔을 붙잡고 부축해주며 말했다.

“봐 봤자 맥만 빠질 텐데.”

화련이 부리나케 따라붙었고, 세 사람은 거의 엉겨 붙다시피 한 상태로 천천히 흙먼지를 향해서 걸어 나갔다. 그녀들이 그곳에 도달했을 무렵에는 흙먼지도 대부분 가라앉은 상태였다.

그리고 난장판이 된 숲에서 그녀들이 본 것은,


“이놈을 어떻게 요리해야 하나...내단은 일단 두 사람한테 먹이고.”

악어와 도롱뇽을 뒤섞어 놓은 다음 1톤 트럭 크기로 확대한 듯한, 그런 괴상한 생명체 위에 앉아서 요리법을 고민하고 있는 남자. 류 현이었다.  걱정이 무색하게 그는 흙먼지를 뒤집어써서 조금 전보다 좀 더 더러워졌을 뿐 상처 하나 없이 멀쩡한 모습이었다.

주변에 갈가리 찢긴 채 너부러져 있는 라가들을 치우고 나면, 네셔널 지오 그래픽에 내보내도 될 만큼 평안한 모습이었다.

화련과 희란이 어이없는 심정을 어떻게 표현해야하나 고민하고 있자, 승하가 그녀들의 심정을 대변해주었다.

“너희 마스터 생각보다 훨씬 괴물이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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