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4화 〉탐식마(貪食魔)
양보다 질이라는 말이 있지만, 수가 많다는 건 상대하는 입장에서 언제나 성가신 일이다. 던전 안에서는 수적 우위는 성가신 걸 넘어서게 된다. 던전 안에 들어온 플레이어에게는 모든 환경이 적대적이니까.
대부분의 경우에는 그런 수적 열세를 실감할 일이 잘 없다. 던전 안의 괴수 개체 수가 스물 이상이 되는 경우가 없고, 수를 헤아리는데 열 손가락을 다 쓸 일도 거의 없다시피 하다. 그마저도 옹기종기 모여 사는 게 아니라 서로의 영역을 유지한 채로 떨어져 사니까. 하나하나 천천히 수를 줄여나가면 되는 것이다. 블루 퍼플까지는 말이다.
퍼플 던전 클리어가 바로 아래 단계나, 아래아래 단계의 던전 클리어보다 독보적으로 인정받는 이유가 이 때문이다. 퍼플 던전에는 괴수가 무리를 이룬다. 보스도 보스룸에 쳐 박혀 있는 게 아니라, 던전 안을 마음대로 돌아다닌다. 괴수의 개체 수도 종류에 따라서 다르지만 최소 열은 넘는다.
저 중 가장 골치 아픈 특성은 보스가 보스룸에 갇혀있지 않고, 필드를 어슬렁거린다는 것이고, 그 다음이 무리를 이룬다는 점이다. 괴수가 무리를 이룬다는 건 상상이상으로 골치 아픈 일이다. 단순히 몬스터 수에 난이도를 곱하는 일로 끝날 일이 아니다.
플레이어의 스펙이 괴수를 능가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블루 던전을 밥 먹듯이 도는 베테랑이 레드 던전에 들어가지 않는 이상. 스쳐도 경상으로 끝나지 않는 상황에서 수적 열세 속에서 싸운다? 그럴 머리를 가진 작자라면 퍼플 던전에 들어오기도 전에 관안에 들어가 있을 터.
화련이 속으로 투덜거리면서 풀숲을 천천히 걷고 있는 건 그런 이유에서였다. 가슴에 무릎이 닿을 정도로 상체를 바싹 숙인 그녀는, 이름 모를 풀로 이뤄진 숲을 손으로 치우지 않고 마법을 써서 조용히 비켜내며 앞으로 걸어 나갔다. 그녀의 뒤로 집중하지 않으면 듣지 못할 정도로 조용하게 인기척 하나가 뒤따르고 있었다.
화련이 서른다섯 번째 걸음을 내딛었을 때, 그녀의 시야에 가장 먼저 들어온 건 목책이었다. 나뭇가지를 아무렇게나 엮어서 박아놓은 모습이었지만, 적의 진입을 막으려는 의도가 명확한 장애물이 분명했다. 화련은 목책을 발견하자마자 등 뒤편으로 손을 내저었다. 화련의 손짓을 봤는지, 뒤따르던 인기척이 그 자리에 멈춰섰다.
인기척이 멈춰선 걸 확인한 화련은 두 걸음 더 내딛었다. 그러자 화련은 목책 뒤쪽에 있는 걸 볼 수 있게 되었다. 목책 뒤편에 나와 있는 것 중 가장 눈에 띄는 건 지붕이었다. 목책과 비슷한 수준으로 나뭇가지와 나뭇잎을 아무렇게나 엮어서 네 기둥위에 얹어놓은 지붕.
그 지붕 밑으로 보이는 건 나무가면과 그녀의 허리 높이까지 쌓여 있는 돌담이었다. 그 뒤에는 볼 것도 없었다. 나무 가면의 위치를 다시 한 번 확인한 화련은 집중력을 끌어올렸다.
우웅! 그녀의 눈동자에 하얀 빛이 어리기 시작하고, 그 직후.
콰직! 무거운 것으로 단단한 뭔가를 내려친 듯한 소리가 터져 나왔다. 우당탕! 나무가면 두 개가 갑자기 담 아래로 쑥 내려갔다.
그것까지 확인한 화련은 뒤로 돌아보며 말했다.
“됐어, 희란아 가자.”
희란은 화련을 앞지를 기세로 뒤를 따랐다. 목책까지 도달한 그녀들을 가장 먼저 반긴 건 지린내였다. 예상한 일이었고, 이미 익숙해진 냄새였기에 그녀들은 그걸 무시하고 목책을 넘어서 돌담까지 도달했다.
돌담은 제법 널찍한 직사각형 모양으로 쌓여있었고, 안은 그녀의 무릎이 좀 넘을 정도로 구멍이 파여 있었다. 그 안에는 나무 가면을 뒤집어 쓴 라가 전사 두 마리가 널브러져 있었다. 두 마리 다 정수리부분이 망치로 내려친 마냥 움푹 파여 있었지만, 두 여자의 관심사는 아니었다.
“와, 여긴 건량 꽤 많네.”
“여기 과일도 꽤 있어요. 언니.”
초소 안에 비축되어 있는 식량에 희희낙락 할 뿐. 불과 사흘 전의 그녀들이라면 상상도 못할 반응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희란과 화련은 각자의 ‘가방’에서 포대자루를 하나씩 꺼내서 초소 안에 있는 먹을 만한 것들을 모두 쓸어 담았다. 화련은 라가 전사의 시체를 뒤적여서 화살까지 싹싹 긁어모았다.
그것들을 ‘가방’에 집어넣은 후, 두 여자는 다시 상체를 바짝 숙이고 풀숲을 기듯이 걸어 나갔다. 할당량을 채우려면 초소 두 곳은 더 털어야했다.
***
“생각보다 더 귀찮게 됐어. 그냥 꼴리는 대로 마을을 꾸린 게 아니라 작정하고 지점을 정해서 꾸린 게 분명해.”
승하의 말에 류 현은 대꾸하지 않고, 흙바닥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정확히는 승하가 흙바닥에 그려놓은 그림이었다. 제일 가장 자리에는 톱니바퀴가 그려져 있고, 그 안에는 큰 마름모가, 큰 마름모 꼴 안에 작은 마름모가, 그 작은 마름모 안에는 짜부라진 삼각형이 그려져 있었다.
승하가 정찰로 확인한 마을과 진지의 위치를 선으로 이어놓은 것이었다. 톱니바퀴 모양은 여태껏 발견한 수풀 초소의 배치를 보고 대강 예상해서 그린 것이었다. 그 뒤로는 산에 가까워질수록 마을 간의 간격이 좁아지는 모양새. 그녀의 말대로 의도를 가지고 마을을 조성한 게 분명한 배치였다. 마을이나 진지에 발각되지 않고는 산으로 향할 수 없도록 신경 쓴 기색이 역력한 배치.
‘설마 유니크 아이템이 보스 지능에도 영향을 끼치나?’
오죽하면 그런 생각마저 들었다.
“별 수 없지요. 인원수도 그렇고, 한 번에 몰살시킬 만한 화력도 안 되니 한 곳 한 곳 다 잡아 족쳐야겠죠.”
“포위라도 할 수 있으면 모르겠는데 네 명가지고는...”
승하가 말을 하다가 끊고 갑자기 고개를 돌렸다. 류 현도 그녀의 시선을 쫓았다.
“마스터-”
화련이 기운차게 손을 흔들며 희란과 함께 다가오고 있었다. 류 현은 픽 웃으며 손을 대충 마주 흔들어주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두 사람은 금세 류 현이 서 있는 곳까지 도달했고, 화련은 들고 있던 자루를 쿵 소리 내며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보란 듯이 어깨를 쫙 펴고 기세 좋은 웃음을 띠었다. 류 현은 웃지 않기 위해서 애쓰며 말했다.
“꽤 많이 모아오셨군요.”
재차 어깨를 들먹거리는 화련을 보고 승하가 낄낄거리며 한 마디 했다.
“들어보니까 자기가 나이도 더 많으면서 저러고 싶나 몰라.”
“저 여자가 진짜!”
***
“여, 여섯 곳이요?”
희란은 듣기만 해도 질린다는 얼굴로 되물었다. 류 현은 고개를 끄덕거리며 마른 장작을 모닥불에 밀어 넣었다. 불티가 일어나며 하늘로 치솟았다.
“산을 중심으로 조사한 거라서 한두 곳 더 있을 수도 있습니다. 뭐 숫자만 보면 지금까지 발견한 곳으로도 충분하긴 합니다만.”
“더 있다고 생각하고 잡아 족치는 게 속 편하지. 다 됐다 하고, 출구 갔는데 닫혀있으면...아, 상상만 해도 빡치네.”
승하는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으며 들고 있던 컵을 입에 기울였다. 한창 육포를 입안에서 불리고 있던 화련이 입안에 있던 걸 꿀꺽 삼키고는 대화에 끼어들었다.
“아니 여기 뭐 먹을 게 있다고 걔네 그렇게 대책 없이 새끼 쳤데요?”
새끼 친다는 말이 민망한지 희란은 슬쩍 화련을 외면했다. 류 현은 뒷머리를 긁적거리며 대꾸했다.
“저도 그에 대해서는 아는 게 별로 없습니다만. 던전 내부의 공간이 원래 격리된 게 아니라, 어딘가의 일부분이었다가 던전이 됨과 동시에 격리되었다는 그런 이야기가 있긴 하지요.”
“아, 나도 기억난다. 협회에서 초대한 교수가 그랬었는데 이름이...그레...뭐였더라?”
“그레이엄 교수님일 겁니다. 어쨌든 그 가설대로라면 저런 경계도 이해가 가지요. 저런 초소를 하루아침에 만들 수 있는 것도 아닐 테고 말입니다.”
류 현의 말에 화련의 표정이 확 찌그러졌다. 그 초소를 열심히 터느라 아직도 허벅지가 뻣뻣한 기분이었다. 던전에 들어온 지 벌써 나흘 째, 화련과 희란은 라가 전사들이 보초서고 있는 풀숲 초소만 열심히 터는 중이었다. 최대한 조용히, 주변 초소가 눈치 채지 못하게 처리한 후 식량을 쏙 빼오는 것. 류 현 그녀들에게 내린 지시는 그게 전부였다.
그녀들은 숲은 아직 구경도 못해봤다. 류 현과 승하만이 번갈아 가며 그 안쪽을 정찰하고 와서, 약도 비슷한 걸 그리고 있는 상황.
그런데 자신의 예상보다 숫자가 훨씬 많다는 소리를 들었으니 기분이 좋을 리 만무한 것이다. 초소 터는 일이 아무리 쉬운 일이라도, 아니 쉬운 일이기 때문에 질려버린 상태였다. 화련은 희망을 담아서 물었다. 노골적으로 특정 대답을 요구하는 눈빛도 잊지 않았다.
“그럼 풀숲 초소 전멸시킬 때 까지 오늘처럼 해야 하나요?”
‘절대 싫어요!’ 화련은 눈빛만으로 대화가 가능하다는 걸 증명해 보이려는 듯, 간절한 눈빛을 보냈다. 희란도 이 때다 싶었는지 가세해왔다. 류 현은 두 손을 펴 보이며 그녀들을 진정시켰다.
“그래서야 클리어 하고 나가면 크리스마스가 되겠지요. 인원수가 부족해서 포위 섬멸도 힘들고 하니, 한 점 돌파할 생각입니다. 라가들 식량을 뺏어 먹는 것도 한계가 있으니까요.”
두 여자의 머리가 격하게 아래위로 요동쳤다. 화련은 한 마디 보태기까지 했다.
“소금이 그리워 질 줄은 몰랐어. 나가서는 고기는 무조건 기름장에만 찍어 먹을 거야.”
희란은 저러다 고개가 떨어지는 거 아닌가 싶을 정도로 격하게 끄덕거리며 동의했다.
류 현은 그 모습을 보고 옅게 미소 지었다.
나흘 전만 해도 라가들 식량을 뺏어서 먹겠다고 하자, 뜨악한 표정을 짓던 여자들은 이제 어디에도 없었다. 라가들은 간을 안 해서, 먹어도 먹은 거 같지가 않다고 투덜거리는 여자들만 남았을 뿐.
류 현이 나흘이나 들여서 그녀들만 따로 돌린 이유도 이런 것 때문이었다. 편하게 괴수 목만 쓱싹하면 되는 것에 익숙해지면 곤란했으니까.
“대놓고 한 점 돌파해도 비전투 인원은 소집 안 될 텐데? 그럼 마을 놈들은 우리가 본대 박살내고 마을 진입하는 순간 사방으로 도망칠 걸? 병력들 내버려두고 마을만 골라 족치는 것도 좀 그렇지만, 그거 언제 다 추적해서 잡게? 걔네 도망치는 재주 하나는 기똥찬데.”
승하의 반론에 류 현은 오른 팔을 뻗어 그를 끼고 양 옆에 앉아있던, 화련과 희란 중 오른쪽에 앉아있던 희란을 슬쩍 끌어당겼다. 갑작스러운 행동에 희란은 아무 말도 못하고 입만 뻐끔거렸고, 화련의 눈썹이 꿈틀했다. 류 현은 눈치 채지 못하고 제 할 말만 했다.
“그건 희란 씨가 잘 해결해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