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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2화 〉탐식마(貪食魔) (72/429)



〈 72화 〉탐식마(貪食魔)

산허리를 5월의 바람이 훑고 지나갔다. 류 현은 바람이 실어나른 초여름 특유의 풋내를 살짝 들이켰다가 내보냈다. 햇살이 적당히 따스한 게 이대로 누우면 꽤 기분 좋게 잠들  있을 것 같았다. 그의 동행은 전혀 그런 기분을 느끼지 못하고 있었지만.


“진짜 싫어어...왜 상위 던전은 다 산 구석에 쳐 박혀 있는 거야...”

화련의 우는 소리에 류 현은  웃으며, 자신이 깔고 앉은 아이스박스에서 얼린 생수를 하나 던져주었다.


“도시 주변에 던전이 있으면 누가 좋아하겠습니까. 그래서 협회에서 매기는 토벌 순위도 근처 큰 도시의 유무부터 따지고, 정부에서도 서울 내부에 던전 생기면 제일 먼저 처리하는  당연하지요. 상대적으로 이런 산골에는 집중하기 어려우니까요.”


화련은 반쯤 녹아있는 생수를  모금 넘긴 후에 투덜거렸다.


“그걸 누가 몰라요. 그거 감안해도 빈도수가 다르잖아요.”
“그거야 그렇긴 하죠.”

사람이 많이 몰려 사는 곳에는 던전이  생기지 않는다. 레드나 오렌지 던전은 서울시 내에도 생성되긴 하지만, 그린급만 되도  외곽에서나 볼 수 있다. 블루 급을 넘어가면 아예 산으로 올라간다. 마치 누군가 의도한 것처럼.

‘대소환’의 존재가 2차 대소환 이후에야 대중에게 알려지는 데 공헌한 사실 중 하나였다. 아직 던전에 대한 대응망이 갖춰지지 않은 초기에도 던전이 산골에서 터지면 은폐하는 건 일도 아니었으니까. 지금은 서울이나 부산 같이 대도시 집주인들 주머니만 불려주고 있지만.

‘퍼플이나 블랙은 아예 주변 5km이내에 인가가 있으면 나타난 기록이 없지. 3차 ‘대소환’ 터지기 전까지는.’


이전 생에서 수많은 논의가 오고 가게 만든 주제였고, 이번 생에도 그가 모르는 곳에서 이에 대한 논의가 오가고 있을 것이다. ‘대소환’은 누군가의 의도로 일어난 사건인가? 라는 식으로 말이다.

‘내 알바는 아니지.’

“도심 한 가운데에 나타나는 것 보다야 낫지요. 뭐 퍼플 급을 탐지 못해서 터질 때까지 방치할 일은 없겠지만요.”
“하아...”

화련은  현의 말을 듣는  마는 둥 그의 등 뒤편을 보더니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에  뒤에 있는 건 던전 입구, 그것도 퍼플 던전의 입구였다. 그녀의 한 숨의 의미를 모르지는 않는 류 현은 미소 지으며 그녀를 달랬다.

“두 분이 앞으로 나설만한 일은 잘 없을 겁니다. 그러니까 너무 걱정 안하셔도 됩니다.”


 현의 말에 화련은 되레 불퉁한 표정이 되었다.

“...그게 걱정이거든요?”

그녀는 눈을 가늘게 뜨고 던전 앞에 드러누워 있는 이를 노려봤다. 류 현은 그녀의 시선을 굳이 쫓지 않아도 누굴 보고 있는지  수 있었고, 어색하게 웃는 수밖에 없었다.

화련의 시선 끝에는 자신 몫의 배낭을 배고 자고 있는 나승하가 있었다. 검을 끌어안은 자세가 편할 리도 없는데도 승하는 색색 숨소리까지 내가며 숙면 중이었다.


“저 사람이 들어가는  제가 같이 들어가는 게 의미 있어요?”

그녀의 질문은 그녀들에게 휴가를 주고, 류 현이 세 달 여간 계속 고민해오던 문제였다. 퍼플 던전 원정팀 멤버를 어떻게 구성할 것인가.

퍼플 던전에 대한 허가는 이미 받은 거나 다름없었다. 클리어 가능성은? 2월 달이 시작하자마자 당장 류  혼자서 들어가도 됐었다. 솔플에 적합하지 않은 퍼플 던전 특성상 편하지는 않겠지만 불가능하진 않다. 오래 걸리겠지만, 안에 들어있는  생각하면 감수할 만한 시간 소비다.

하지만  현은 그러지 않았다. 청뢰를 얻기 위한 원정을 용잡이 팀의 데뷔전으로 삼고자 했다. 청뢰를 얻은 뒤에 네임드 몹 레이드나 아니면, 자체적으로 영상을 찍어서 청뢰까지 공개하면 효과가 배가 될 테니까.

조용히 던전에서 괴수만 뜯어먹어서는 안 된다. 네임드 괴수는 있는 대로 때려 잡아놓고, 정작 필요한 때에 변변한 지원도 받지 못한 이전 생과 다를  없어지니까.

물론 이미 이전 생과는 확연히 달라졌다. 협회의 대우는 말할 것도 없고, 예전에 적으로 치고받았던 ‘터주’나 ‘예거즈’ 또한 그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는 상황.


그러나 이걸로는 부족하다. 알만한 이들만 알고 대중적 인지도는 한국 내에서 미묘한 3인자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파이터즈 길드보다 못하니까.


파이터즈 길드 최정예팀이 퍼플 던전 경험은커녕, 블루 퍼플 던전 클리어 횟수도 용잡이 팀보다 부족하다는 걸 생각하면 실력에 비해서 인지도는 처참한 수준이다.


이전 생의 류 현 또한 그랬다. 그가 본격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했을 무렵에는 언론 통제는 말할 필요도 없는 수준이었고, 얼마 안가 통신망 자체가 붕괴했었다. 그가 유명세를 날린 건 아지다하카와 맞붙기 직전이었고,  유명세가 본격화 되기 전에 그는 악룡과 서로 쳐죽이는 싸움을 벌렸다.

‘알만한 새끼들만 알고 있으면 돌아오는 건 암살자뿐이야.’

그리고 그런 상태로 괴수와의 싸움을 이어나가면서 그가 깨달은 건, 이득에 눈이 먼 인간은 상상이상으로 멍청하다는 것이었다. 인류 문명 자체가 폭삭 망하기 직전임에도 그들은 계산기만 두들겼고, 결국 류 현은 태평양이라는 거대한 장벽이 존재하는 미국의 지원만 받은  싸울 수밖에 없었다.


그 때에는 제 아무리 대단한 미국이라도 바다 건너까지 본격적인 지원을 해주긴 힘들었다. 비행기  대 띄우는 것도 어마어마한 리스크를 감당해야 할 수 있는 시대였다. 그마저도 중간에 격추 당할 가능성이 훨씬 높은 상황이었다.


그러니 그들이 느긋하게 계산기를 두들길  없는 명분을 만들어줄, 대중적인 인지도가 필요했다. 그렇게 본격적으로 유명세를 날리면 없던 적도 생기겠지만, 그게 무서웠다면 ‘광대들’을 직접 치우지도 않았을 것이다. 협회에 일임하고 안전가옥에 숨어서 땅콩이나 까먹었겠지.

어쨌든, 류 현은 이번 원정을 용잡이 팀의 데뷔무대로 삼을 생각이었다. 처음에는 ‘파도잡이’ 서해란을 후보로 낙점했었다. 용잡이 팀의 데뷔전이라는 느낌을 해치지 않고, 이번에 도전할 퍼플 던전 내에서 유효하게 써먹을 수 있는 전력이었으니까. 해란이 요청할 경우 그녀의 팀원 두  정도는 데리고 들어가 줄 의향도 있었다. 승하가 X던전의 존재를 터뜨리기 전까지는.

고민이 시작된 건 그  부터였다. 팀원들에게 장기 휴가를 제공하게 만든 원인. 그 날, 승하의 지적으로, 그는 자신의 조바심을 알게 되었으니까.


자신이 던전 안에서도 조바심을  낸다는 보장이 있을까? 류 현 혼자서 들어간다면 괜찮다. 어지간한 공격은 그냥 맞고, ‘어우, 아프네. 정신 좀 차려야겠다.’ 하면 그만이니까.


문제는 혼자서 들어가는 것도 아니고, 퍼플 던전 내부에서는 그녀들의 행동 동선을 모두 커버해   없다는 것. 조바심에 집중력을 잃으면 아차! 하는 순간 그녀들에게 대형 사고가 터질 수도 있다.


승하를 부른 건 그 때문이었다. 자신에게 브레이크를 적극적으로 넣어주고, 만일의 경우에도 화련과 희란을 커버해줄 수 있는 실력자. 그가 아는  이 조건에 맞는 건 나승하, 그녀뿐이었으니까.

퍼플 던전을 혼자 도는 그녀를 부른 순간 용잡이 팀의 데뷔전이라는 색깔은 한 없이 옅어지겠지만.


‘사고 터지는 것보다야 백 번 낫지. 뭣보다 데뷔전은 다시 치르면 되는 거고.’


 뒤부터는 그가 조바심 내고 싶어도 낼 수 없다. 한반도에 현존하는 퍼플 던전은 3군데뿐이고, 국외에서 돈다는 건 더 말이 안 된다. 아프리카 같이 던전 때문에 대륙 전체가 작살난 곳이면 모를까. 설사 돌 수 있더라도, 협회에서  달 내로는 허가를 안 내줄 것이다.


거기다가 데뷔전이라는 색깔만 옅어질 뿐, 인지도를 높일  있다는 점은 변함없다. ‘예거즈’를 나온 검성이 선택한 파트너! 벌써부터 기자들이 쏟아낼 기사 제목들이 눈에 보이는 듯하다.

 오랜 시간을 들여서 정한 인선이었기에 류 현은 별 어려움 없이 대꾸했다.

“승하 씨는 오늘 안전벨트 역할입니다. 그리고 어지간한 팀 구성으로는 기껏 받아낸 허가가 취소 될  있으니까요. 경험을 쌓기 힘든 퍼플 던전이잖습니까. 자력 클리어 보다는 안전하게 경험을 쌓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한 번 깨고 나서 승하 씨가 증언까지 해주면 이 다음부터는 훨씬 쉽겠죠. 기회가 자주 오진 않겠지만요.”
“...그렇게 말씀하시면 할 말은 없네요.”


화련은 조금 고심하는 듯하다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이상한 부분은 없었다. 혼자서 퍼플 던전을 썰어버리는 사람이 참가해준다는데, 그것도 경험치만 쌓자는 식으로 말해주는 데 거부할 이유가 없다.

화련이 고개를 끄덕거리는 것까지 확인한 류 현은 고개를 돌려 희란을 찾았다. 그리고 뿜을 뻔 했다.

희란은 받은 장비가 영 어색한지 어린아이가 새 옷을 이리저리 뜯어보는 것처럼, 망토를 들췄다가 흉갑가슴 부분을 당겨봤다가 하며 부산스럽게 움직이고 있었다. 퍼플 던전에 대한 긴장감이나, 승하의 합류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 없는 것 같은 모습.

류 현은 픽 웃고는 손뼉을 쳐서 그녀들의 주의를 집중시켰다.

“자, 진입 전에 마지막 점검입니다. 집중합시다!”

***

류 현은 빛으로 바뀌어 버린 것 같은 눈꺼풀을 비비적거렸다.

그러자 눈부심이 조금 덜해지는 듯 했다. 류 현은 눈을  번 더 비비적거리면서도 발걸음을 멈추진 않았다. 눈부심이 상당히 사그라지자, 그는 발걸음을 멈췄다. 그의 뒤로  사람분의 발걸음도 움직임을 멈췄다.

눈을 뜨기 전에 그를 가장 먼저 반긴 건 풋내였다. 생선 비린내를 풍기는 나무가 자라기도 하는 던전에서는 이질적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평범한 풋내. 류 현은 그 풋내에 미소 지으며 눈을 떴다.


눈앞에는 구릉이, 커다란 뱀이 기어가다가 굳어버린 듯한 굴곡이 제법 되는 구릉이 굽이치고 있었다. 구릉지에는 전반적으로 그의 허리까지 오는 갈대 같은 것들이 무성했다.

저 멀리 구릉의 물결 너머에는 거대한 숲이, 척 봐도 굉장히 높아 보이는  개의 산이 시작하는 부분을 가로막듯이 무성했다. 거기까지는 평범했다. 지구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 광경이었다.

하지만 옹기종기 모여 있는  개의  위쪽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산허리까지는 나무로 빽빽하던 산은 정상부근에 거대한 바위만이 덩그러니 놓여있을 뿐이었다.

거기다가 산 정상부근에는 맑기 그지없는 주변 날씨와 다른 세계인양, 먹구름이 바위를 향해서 계속 번개를 토해내고 있는 먹구름이 몰려있었다. 구릉지나 숲까지는 햇살이 닿고 있는데, 산머리에는 어둠이 드리워져있고 번개가 치고 있는 괴이쩍은 광경.

어지간한 이는 눈살부터 찌푸리고 볼만한 풍경이었지만, 거기까지 살핀  현은 만족감 속에서 입가에 걸린 미소를 깊게 했다.


‘여기가 맞아.’

그는 재차 산머리를 후려치는 번개를 보고 확신했다. 이곳이 확실했다. ‘예거즈’가 발견한 첫 번째 유니크급 아티펙트 청뢰가 저 산 너머에 잠들어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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