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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1화 〉탐식마(貪食魔) (71/429)



〈 71화 〉탐식마(貪食魔)

“어, 마스터. 죄송하지만  번만 더 말씀해주시면 안 될까요?”


 번 더 듣는다고 해서 상황을 완벽하게 이해할 수 있을 거 같진 않았지만, 화련은 되물었다.  현은 벙찐 얼굴을 하고 있는 화련을 향해 미소 지으며 말했다.

“앞으로 6주하고 3일. 그러니까 45일간 휴가라고 말씀드렸습니다만.”

다시 들어도 이해할  없는 이야기였다. 화련은 자신의 머리를 두 손으로 헤집다가 그에게 따지듯이 물었다.

“왜요?”
“질문하시는 의도를  모르겠습니다만. 두 분 다 휴식을 원하셨잖습니까?”

류 현이 되묻자 안 그래도 뒤엉켜있던 화련의 머릿속에  엉망진창으로 뒤엉켰다.  현의 옆자리에 앉아서 말없이 껌이나 씹고 있는 승하의 모습 때문에 혼란은 더했다.

‘저 여자는 대체 왜 또 여기 와있어? 그걸 터뜨리고도 여기 앉아 있어도 돼?’

승하가 팀 사무실에 불쑥불쑥 찾아오는 건 하루 이틀 일이 아니긴 했지만, 그래도 류 현은 팀원들끼리 할 말이 있을 경우에는 승하를 밖으로 내보냈다. 그 때마다 승하도 거절하진 않았다. ‘네 방에 먼저  있는다?’라고 화련의 속을 뒤집어 놔서 문제였지.


거기다가 그녀는 그저께 대형 사건까지 터뜨려 놨다. X던전의 존재를 까발리고, 후속조치 없이 침묵을 고수하고 있는 상황. 아직까지 언론에서는 뉴스 시간대 마다  이야기를 반복해서 떠들고 있을 정도다.

화련은 어제 뉴스를 보고 류 현이 당장 다음날 팀원들을 소집할 거라고 생각했다.

약 9개월 전부터 준비해온 프로젝트가 엎어질지도 모르는 상황이니까.  현의 성격상 팀원들에게 언질 없이 이런 걸 터뜨렸을 리가 없으니, 승하의 독단인 게 분명했다.

그런데 막상 호출 문자를 받고 사무실에 와보니, 평온하기 그지없어 보이는 모습의 류 현과 승하가 그녀들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걸로도 모자라서 뜬금없는 장기 휴가까지. 화련의 옆에 앉은 희란이 자리에 앉은 후에 말 한마디도 없이, 고개만 갸웃거리다가 자기 허벅지를 꼬집어보는 것도 무리가 아닌 것이다.


“휴식을 원하긴 했죠. 그렇긴 한데, 여태껏 마스터가...”

굴리기만 엄청 굴렸잖아요. 화련은 도무지 그 말을 그대로 내뱉을 수가 없어서 말끝을 흐렸다. 그냥 징징거리는 걸로는 씨알도 안 먹혀서 류 현이 무조건 져주는 세아까지 끌어들일 정도로  현은 그녀들을 제대로 굴렸다. 얄밉게도 한계까지 쥐어짜는 것도 아니고 견딜 수 있는 수준으로 말이다. 가장 큰 이유는 스스로도 체감할 정도로 엄청난 성장속도였지만.


화련도 바보가 아니다. 희란이야 경험이고 자시고 할 만한 게 전부 용잡이 팀에서 겪은 것이라 비교할 대상이 없지만, 그녀는 충분히 지금의 페이스가 오버 페이스라는 걸 인지하고 있었다.

그녀가 헬퍼로 뛰면서 겪어본 케이스 중에서, 길드 차원에서 키워주는 루키도 이렇게 열심히 던전을 돌지 않으니 말 다한 셈. 1년 전의 자신에게 나흘에 한 번 블루이상의 던전을 돌고 있다고 하면 허풍선 취급을 받을 정도로 현실성 없는 클리어 속도다.

하지만 연 단위 기간 동안 벽에 가로막혀 있었던 그녀에게 지난 두 달여간의 강행군은, 힘들기도 했지만 꿈만 같은 시간이었다. 꿈에서 깨고 싶지 않다는 생각과, 아직까지는 보스 전은 류 현이 도맡아서 하고 잡몹 정리도 류 현의 마력을 빌어서 하는 상황이라 목소리를 내기가 곤란했다.

언제쯤 제대로 얘기를 해볼까 하고 고민하던 와중에 나승하가 갑자기 X던전을 터뜨리고, 호출문자를 받아서 와보니 뜬금없이 휴가 얘기가 나온 것이다. 화련은 류 현이 자신을 놀리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의심마저 들었다.  근래에 세아를 방패막이로 자주 칭얼거린 복수를 하는 게 아닐까 하고 말이다.

“제가 두 분을 너무 몰아붙였다는 거 알고 있습니다. 그렇게 생각하실 만 하죠. 그 부분에 대해서는 할 말이 없습니다. 죄송하다는  밖에 할 말이 없군요. 두 분의 의견도 들어보면서 일정을 짰어야 했는데...”
“아, 아뇨. 마스터 제 말은 그게 아니라...”


화련이 내저으며 말을 더듬거리자 류  옆에 앉아있던 승하가 히죽거리기 시작했다. 화련은  얼굴에 커다란  자국을 내주고 싶다고 생각했다. 어쩜 저렇게 밉살스러운 짓만 골라서  수 있는지.


그런 화련의 소망을 들은 것인지, 류 현은 승하를 찌릿하고 노려봐서 입을 다물게 한  말했다.


“어찌되었든. 휴식이 필요한 시점 아니겠습니까. 그저께 화련 씨도 부상당하실 뻔 했고요.”
“그...그건...”

엊그제 블루 던전에서 눈보숭이를 상대로 잠깐 멍 때렸다가 큰일 치를 뻔한 일을 지적당하자, 화련은 고개를 푹 떨구고 웅얼거렸다.

“아니, 그 일을 책망하려는 게 아닙니다. 따지고 보면 피로가 중첩되어 온 집중력 저하이니, 무리한 일정을 진행시킨 제 탓이죠.”

 현은 화련이 슬그머니 고개를 들자 말을 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2달 이렇게 휴식기간을 보장해 드리고 싶습니다만. 그러기가 곤란해서요.”
“...무슨 일이 있나...요? 마스터.”

화련이 입을 다물자 희란이 바통을 넘겨받아서 물었다. 류 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배당 받아 놓은 퍼플 던전 포화 기간이 5월쯤이거든요.”


두 여자의 눈이 크게 뜨여졌다.

“퍼, 퍼플 던전이요?”
“예. 아직 절차를 다 밟은 건 아니지만, 협회 측에서 가능할 거라는 답변을 얻었으니 정부에서도 반대는 안할 겁니다.”


‘돈은 좀 먹여야겠지만.’

퍼플 던전 쯤 되면, 던전 신고제 자체가 유명무실해진다. 당연한 일이다. 퍼플 던전은 (어제부로 바뀌었지만) 지금까지 밝혀진 던전  최상위 던전이며, 그 안에서 얻을  있는 결정체나 괴수 부산물은 전략물자 취급해도 무방한 수준이다.


아니, 퍼플 던전을 돌  있는 수준에 도달한 플레이어 자체가 병기라고 봐도 무방한 수준이다. 길드를, 국가를 대표해도 손색없는 괴물들.


거꾸로 생각해보면 퍼플 던전에 도전하겠다는 건 그런 자가 되겠다는 것과 같다. 국가를 대표하는 플레이어가, 던전 사냥의 트렌드를 주도하는 트렌드 메이커가 되겠다는 의미! 그런 곳에 들어가는  신고서 한 장으로 절차가 완료될 리가 없지 않은가?

사실 실질적인 서류 절차는 얼마 되지 않는다. 사과박스가 전달되는  드는 시간과 사과박스가 약발을 발휘하는 데 시간이 걸릴 뿐.

물론 류 현이 신경 쓸 일은 아니었다. 서해란이, 정확히는 태양그룹의 영업부에서 고생할 일이다.


류 현이 한 일이라고는 11월 초에 웨인에게 전화를 걸어서 퍼플 던전에 들어가려면 누구랑 면담하는  제일 빠르냐고 물어본 것뿐이다. 웨인의 대답은 48시간 내에 답을 주겠다는 것이었고, 44시간 후에 웨인으로부터 어느 곳을 원하냐는 답변을 들을 수 있었다.


류 현이 요구할 곳은 정해져 있었다. 청뢰가 잠들어 있는 강원도 정선의 백운산!


협회는 군말 없이 허가증을 내주었다. 이제 뿌린 돈이 약발이 들어서 정부가 무거운 엉덩이를 들어 올릴 때 까지 단련만 끝마치면 되는 상황.

그에게는 고맙게도 백운산의 퍼플 던전은 포화시기가 2월 중순 쯤으로 추정되고 있었다. 원래라면 결정체를 투입해서 포화기간을 늦추겠지만, 괜한 결정체 버리지 말고 우리가 들어가겠다고 해버리면 명분도 선다. 라고 그는 생각하고 일정을 짰다. 어제까지의 그의 생각이었지만.

그는 여기서 살짝 입술에 침을 발랐다.

“그 때 못가겠다고 하면 정부에서 알아서 결정체를 투입은 하겠지만, 이 후에 도전하겠다고 하면 그리 좋은 시선을 못 받겠지요.”


거짓말이다. 포화 연장에 들어가는 결정체는 태양그룹 측에 대줄 것이고,  자금은 류 현에 공급한 마나 포션 레시피의 로열티에서 깎일 것이다. 정부 입장에서는 전혀 손해 볼 것도, 용잡이 팀에 대해서 눈을 찌푸릴 일도 없는 상황.


“음...마스터. 이렇게 말하면 어떻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최대한 귀를 열어두고 경청하겠습니다. 말씀하시죠, 화련 씨.”
“마스터가 퍼플 던전에 들어가시겠다면.  황당하긴 해도 납득할 수 있어요. 마스터가 혼자서 맨손으로 리치 때려잡는 거 보면...안 들어가는  이상할 정도니까요. 그런데 우리 둘이 그 수준이 될까요...?”

말을 끝마치는 화련은 자신 없다는 듯이 조심스럽게 류 현의 눈치를 살폈다. 희란도 그 불안감에 전염된 것인지 그의 눈치를 살폈다.  현은 픽 웃으며 말했다.

“됩니다.”
“네?”
“두 분다, 퍼플에서 충분히 먹힙니다.”


너무나도 단호하고 빠른 대꾸에 화련은 오히려 의심이 드는지   빤히 쳐다보았다. 방금  조심스럽게 그의 눈치를 살피던 것은 잊어먹었는지, 대놓고 ‘또 무슨 사기를 치려고?’라는 기색이 역력했다. 류 현은 두 손을 펴보였다. 그는 입을 열기 전에 다시 한 번 입술에 침을 바르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럼, 이렇게 하지요. 휴식기간이 끝난 뒤에 블루 퍼플 던전에 들어가서...”
“아, 됐어요.”
“...아직 다  들으셨잖습니까.”
“또 이상한 내기  거잖아요. 들어가서 둘이서 보스 잡으면 퍼플 던전 매일 같이 가자. 이러려고 그러죠? 이제 완전히 사기 치는데 맛 들리셨네.”
“사기라니요. 저는 어디까지나 두 분의 불안감을...”
“됐어요. 그 얘기 들으니까 불안감이고 뭐고 싹 가시네. 믿어요. 마스터가 그렇게 말할 정도면 사실이겠죠. 별로 실감은 안 나지만.”
“그렇다면 다행이군요. 그럼, 희란 씨는?”
“저, 저는 언제나 믿으니까요!”

거의 덥쳐들듯이  손을 덥썩잡고 외치는 희란을 보며  현은 헛웃음을 흘렸다.


‘그래, 이런 팀원들 데리고 조바심 낼 필요는 없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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