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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0화 〉탐식마(貪食魔) (70/429)



〈 70화 〉탐식마(貪食魔)

2036년의 12월은 그야말로 순식간에 지나갔다. 중순부터 말까지 ‘광대들’의 움직임을 대비하느라 정신이 없었고, 의외로 손쉽게 ‘광대들’을 진압한 뒤에도 류 현은 마음 편히 쉴 틈이 없었다.

‘광대들’ 신문과정을 거의 웨인에게 떠넘기긴 했지만 그렇다고 마냥  놓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거기에, 그다지 바라진 않았지만 스폰서 비슷한 위치가 된 ‘모임’의 관계자들도 여기저기서 손을 뻗쳐왔다.

‘광대들’의 존재를 알고 있는 이들이 앞 다퉈서 그에게 찾아왔다.  현이 기어코 짜증을 부려서 전부 되돌려 보낼 정도로 끈덕지게.

숨 돌릴 틈은 그의 생일파티 겸 크리스마스 파티 때가 끝이었다. 아마도 화련이 반 억지로 밀어붙이지 않았다면, 그는 신년 해가 밝고 지금까지  돌릴 틈도 없이 사람들에게 시달렸을 테지.

“웬일로 먼저 찾아왔나 했더니 그냥 도망 나온 거야? 아니다, 네가 찾아온 건 이게 처음인가?”
“...그런 건 좀 대충 넘어갑시다.”


류 현은 뚱한 얼굴로 대꾸하고는 손에 쥔 맥주병을 기울였다. 검성, 나승하는 그런 류 현의 모습에 낄낄 웃으며 옆에 자리를 잡았다. 너저분하게 널려있는 술병과 음료수 병들이 발에 걸렸지만 그녀는 신경 쓰는 기색이 아니었다. 승하가 자리 잡고 앉자, 류 현이 푸념하듯 내뱉었다.

“아니 자기들도 어떻게 돌아가는지 대충 자기 사람 심어놓고 듣고 있으면서 대체 왜 엄한 사람 못 살게 구는 건지.”
“오늘도 잔뜩 몰려왔나봐?”
“제가  안 열어주니까. 팀원들한테 찾아갔습니다. 그래서 한소리 해놓고 왔죠.”

승하는 고개를 내저으며 맥주병을 기울였다. 신년의 해가 밝은지 보름 째, 류 현은 ‘광대들’의 포획소식에 몸이 달은 ‘모임’ 가담자들에게 시달리고 있었다.


시작은  현이 무력화 시킨 베니 에벌린의 신병을 웨인에게 넘기고, 신문에 대한 걸 전적으로 맡기고 나서 사흘 후. 그러니까, 12월 26일에 벌어졌다. ‘광대들’ 포획소식을 어떻게 알아낸 ‘예거즈’,‘터주’,‘산군’에서 사람을 보내온 것이다.

예상 못한 건 아니었다. 협회의 본거지라고 할 수 있는 유럽도 아니니 정보가 유출될  감안하고, 웨인에게 베니의 신병을 넘겼다. 현 시점에서 짜낼 수 있는 정보라고 해봐야 이미 알고 있는 것에서 곁가지를 더하는 수준일 거라는 생각에 기반한 여유였다.

그런데 문제가 엄한 곳에서 터진 것이다. 안 그래도 송장목 건으로 류 현을 구워삶지 못해서 안달이 나있던 길드들의 방문이 쇄도했다.


당연한 일이었다. 웃기지도 않는 팀명과 다르게 ‘광대들’은 길드 고위층에게 공습경보나 다름없는 존재였으니까. 그렇지 않아도 태풍의 핵이었던 루키가 괴수만 잘 잡는 게 아니라, 살인전문가를 역으로 잡을 정도로 대인전도 능하다? 찔러보지 않는 게 이상할 정도.


청뢰를 확보한 뒤에는 서로 닭과 소처럼 지낼 생각이었던 류 현으로서는 달가울 수가 없는 상황.

‘이것들을 치워버릴 수도 없고. 진짜...’

“근데 어차피 겪을 일이었잖아? 던전도 자기 페이스 그대로 돌고 있으면서. 피할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받아들여.”
“그게 말이 쉽지...승하 씨가 제 입장이 되 보십쇼. 관심도 없는 인간들이 계속 찝적거리고...진짜 다 갈아엎을 수도 없고.”
“그게 싫으면 나처럼 이렇게 은둔하든가?”

승하는 낄낄거리며 남은 맥주를 다 비워버리고는 옆에 두었던  병을 땄다. 류 현은 방안 꼴을 한 번 둘러보고는 조금 질린 기색으로 말했다.


“이게 은둔자의 방입니까. 전형적인 방구석 외톨이의 방이지.”
“외출도 주기적으로 하고, 친구도 이렇게 찾아와주는데 외톨이는 아니지.”

그녀가 말하는 외출은  중 하나였다. 던전 사냥을 가거나, 류 현의 집에 쳐들어가거나. 어느 쪽이든 사람 대하는 숫자가 10명을 채 넘지 못한다는 점에서 훌륭한 방구석 외톨이라고 할만 했다.

“...말을 맙시다.”

두 사람은 한동안 말없이 병 안의 맥주에만 집중했다. 류 현의 옆에 병이  개 정도 세워졌을 때, 류 현이 지나가는 투로 말했다.


“2월 중에 퍼플 던전에 들어갈 겁니다.”
“...와, 나 대충 계산해봤는데 네 팀 만든  일 년도 안 되지 않았어? 아니 일 년이 뭐야, 8개월?”
“등록한지는 얼추 11개월 정도 됐습니다. 화련 씨 영입하는 데 한 달 좀 넘게 쓰고, 지금 인원 정식으로 갖춰진 게...3월 말인가 그랬으니까...거의 10개월 되가네요.”
“그거나, 그거나. 와, 이렇게 생각해보니까. 걔네들이 너 죽어라 괴롭힐만하네. 나라도 그러겠다.”
“당하는 사람은 죽을 맛이니까. 그런 소리 마십쇼.”


승하는 고개를 멍하니 생각하는 듯하다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으며 말했다.

“네 팀원들에서 죽은 애가 없는 게 신기할 정도네. 걔네 방어 훈련시킨 게 엊그제 같은데. 그 정도로 굴리는데 우는 소리  나와? 쩔도 그렇게 받으면 죽겠다고 드러누울 텐데.”
“두  다 기본적으로 성실하니까요.”


가끔 이상한 이유를 대서 류 현의 병문안에 따라가, 세아에게 징징대는 것만 빼면. 류 현은 굳이 뒷말을 덧붙이지 않았다. 자신이 말한 대로 그 둘이 성실하게 잘 따라와 주고 있는  사실이었으니까. 성장은 너무 순조로워서 이렇게 잘 풀려도 되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


“성실한 정도가 아니라 진짜 탈날 거 같은데. 남의 팀 운영에 이래라 저래라 할 정도로 잘 아는 건 아니지만...진짜 괜찮겠어? X던전 때문에 그런 거면 기한을 늦추면 되잖아. 당장 카운트다운 들어갈  같지도 않은데.”

X던전은 검성이 발견한 이래 변함없이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던전 주변에 서있는 두 개의 바위에 들어와 있는 빛에는 변화의 조짐이 없었다. 승하는 사흘에 한 번씩 그곳에 찾아가서 사진을 찍어, 류 현에게 보내주고 있다.

그게 아니더라도 블랙 던전이 당장 카운트다운에 들어갈 일이 없다는  알고 있는 류 현이었지만, 그럼에도 이전 생보다 훨씬 빨리 모습을 드러낸 블랙 던전에 대한 우려는 접을 수가 없었다. 이미 이전 생의 정보를 맹신하기에는 블랙 던전이라는 반례가 존재하지 않는가.


‘최소한 힘을 빨리 쌓아놨다고 후회할 일은 없어. 슬슬 피로가 쌓이긴 하겠지만...’

페이스가 지나치게 빠른 건 사실이다. 이미 지나쳐온 길을 달리고 있는 류 현도 그렇게 느낄 정도로 빠르다.

‘그렇게  따라오면 멈추기도 뭣하다고...’


그런데도  사람은 따라오고 있다. 류 현에게 마스터한테 쳐지니 짐이니, 곧잘 투덜거리지만 그가 보기에는 재능은 두 사람 쪽이 압도적이다. 거기에 기세까지 탔다. 류 현이 강행군을 계속하고 있는   기세를 죽이고 싶지 않아서 이기도 하다.

‘그래도 슬슬 쉬게 해주긴 해야겠지.’

던전 사냥에 있어서 조바심은 사망 플래그 최단루트다. 그 사실을 최강의 플레이어까지 도달한 그가 모를 리가 없을 터.


“예, 쉬긴 해야겠죠. 일 주...아니 한 이주 정도는 휴가를 줄까 생각 중입니다. 그래서 퍼플 진입을 2월 달로 잡은 거고요. 걱정 마십쇼. 기한까지 맞춰서 쉬어가면서 수준 끌어올릴 생각이니까.”
“...그래?”


류 현은 그렇게 말하는 승하의 표정이 미묘하게 불만스러움에 차있다는 걸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 만남으로부터 일주일이 흘렀다.

[검성은 해당 던전을 가칭 X던전으로 명명하고,  하반기 내에 도전할 것을 천명하며......원정대 구성인원에 대한 문의가 쇄도하고 있어...]

갑자기 무릎을 적시는 액체에 류 현은 놀라서 무릎을 바라봤다. 그러자 반쯤 벌어진 입으로 흘러내리던 맥주가 전부 쏟아져 내렸다. 류 현은 기겁하며 휴지를 찾다가, 맥주를 밟고 미끄러져 뒤로 넘어졌다.

꿍! 뒤통수 소파 모서리에 부딪혔지만, 눈에 별이 보이고 하는 일은 없었다. 되레 소파 모서리가 오히려 망치로 후려친 것처럼 움푹 들어갔다. 류 현은 소파와 탁자에 끼여 뒤로 쳐 박힌 상태에서 자문해 보았다.


‘대체 왜?’

불과 일 분도  되는 시간동안 류 현은 그 말을 몇 십번이고 곱씹었다. 하지만 답은 나오지 않았다. 이유는 간단했다. 류 현은 나승하가 아니니까.

일반적인 상식에 맞춰서 행동의 이유를 유추하기에는 검성, 나승하는 괴짜 앞에 굉장히 라는 단어가 세 번 이상 들어가야 할 정도로 특이한 인간이었으니까. 결국 류 현은 유추를 포기하고, 몸을 몇  뒤척여 일어섰다.

그녀에게 물어봐야한다. 왜 갑자기 블랙 던전에 대해서 발표했는지. 왜 일언반구도 없이, 협회 뿐만 아니라 언론사에 까지 그 사실을 떠벌렸는지. 알아야만 했다.

 현은 부리나케 현관문을 나섰다. 그가 자신의 바지가 맥주 때문에 몹쓸 꼴이 되어있다는  깨달은  아파트 맞은편에 있는 건물 세 개를 뛰어넘고 나서였다.


***

살다 보면 그런 일이 있다. 자신은 상대의 행동 때문에 굉장히 당황스럽고, 화가  있는데 상대의 반응이 너무 덤덤해서 화보다는 억울함이 드는 그런 상황이. 자신을 화나게  그 행동보다 상대의 무덤덤함에 더 신경이 가는 그런 상황이 있다.


지금 류 현이 바로 그런 처지에 놓여있었다. 류 현은 숨이 전혀 차진 않았지만, 쉼호흡을 한 번  뒤에 최대한 감정을 억누르고 물었다.


“왜 그러셨습니까?”
“뭐가?”
“그 블랙...아니, X던전 말입니다.”
“블랙? 넌 그렇게 불러? 진작 말을 하지. 그럼 네가 부르고 싶은 대로 부르게...”
“지금 그런 게 중요한 게 아니지 않습니까!”

류 현은 말문이 막혀서 가슴만 두드렸다. 승하의 태연자약한 모습을 보고 있자니 머릿속이 뒤엉키는 느낌이었다. 그는 잠깐 밖에 나가서 다시 말을 정리한  들어올까 하는 생각마저 했다. 그런 류 현의 고민을 승하가 덜어주었다. 그가 원하는 방향은 아니었지만.

“지금 반응 보니까. 나보다 네가  들어가고 싶어 하는 거 같네. 흠, 이거 기분 나쁘지 않은 걸.”

류 현은 말을 하는  포기하고 승하를 말없이 노려보았다. 승하는 그의 눈빛에도 움츠러드는 기색 없이 어깨만 으쓱해 보였다.

“최초라는 타이틀에 관심도 없으면서 대체  그렇게 서두르는 건데?”
“예?”
“X던전. 최초로 깨고 싶은 건 아니잖아? 그런 거였으면 내가 처음 보여줬을 때 그런 반응도 안 했을 거고. 아니야?”
“......”
“그대로 뒀다간 그거 깨겠다고  엑셀 밟다가 사고 날 거 같아서 그랬어. 차라리 이렇게 공개 되어 버리면 너도 알려지기 전에 깨겠다고 난리 칠 구실이 없어지잖아? 어차피 계속 숨길 것도 아니었고. 시기만  당겨졌을 뿐이야. 덤으로 너한테 브레이크 구실도 되고. 덤 쪽이 내 목적이긴 했지만.”

류 현은 반쯤 입을 벌린 채 승하가 말하는 모습을 멍하니 지켜만 봤다. 승하는  현의 반응을 신경 쓰지 않고 계속 말했다.

“대체 뭐 때문에 그러는 건지 모르겠는데.  달 가까이 줄창 던전만 돌아놓고 쉰다는  이주? 던전 안에 무덤 세우려고 그래?”

류 현은 승하의 말에 뭐라고 반박해보려고 했지만, 그의 이성이 그걸 막았다.


‘반박해서  어쩌게? 그 페이스를 계속 끌고 가게?’

지금의 페이스를 유지하는 게 불가능하다는 건 자신이 제일 잘 알고 있다. 그저 지금 쉬어서 기세가 꺾이면 다시는 이렇게 성장시킬 기회가 올 것 같지 않아서, 미련 때문에 계속 휴식기간을 갖는 걸 미루고 있을 뿐이었다. 미래가 자신이 알고 있는 것과 똑같지 않을 수도 있다는 우려 또한 그를 부추겼다.


어제만 해도 던전에서 화련이 안 하던 실수를 해서 큰일 날 뻔하지 않았는가. 누가 봐도 누적된 피로로 인한 집중력 저하였다.


결국 류 현은 승복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 말대로입니다. 조금만 더 차분하게 생각 해봤어야 했는데...과하게 흥분했습니다. 미안합니다.”
“아니, 미안할  없고. 나한테 미안할 게 뭐가 있어. 그냥 친구끼리 하는 흔한 참견질 이잖아? 그렇게 받아치면 내가 민망하다고?”


승하의 구김살 없는 웃음에 류 현은 저도 모르게 헛웃음을 흘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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