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6화 〉탐식마(貪食魔)
“이거 계속 받기만 하고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군...처음 봤을 때 그런 소리까지 했는데 말이지.”
“그냥 투자라고 생각해 주시죠. 그리고 공짜로 드리는 것도 아닌데 그렇게 말씀하시면 저도 좀 민망합니다.”
류 현은 손에 쥐고 있던 자루를 강 찬의 손에 쥐여 주었다. 강 찬은 사양하는 말과는 달리 쥐여주는 것을 거절하지 않고 단단하게 움켜쥐었다.
“요긴하게 잘 쓰겠네.”
“예.”
류 현은 웃음으로 응대하면서 애써 타들어가는 속을 감추었다.
현 시점에서 ‘황금손’은 엘릭서의 제조법을 알지 못한다. 류 현이 강 찬의 공방과 연을 맺은 후에 관찰을 거듭한 결과 얻은 결론이었다.
강 찬이 엘릭서 제조법을 알면서도, 감당할 수 없는 보물이라 판단해서 숨기고 있을 가능성도 있다. 그렇다면 강 찬이 엘릭서 제조법이나 엘릭서 자체를 보유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없는 것과 별 다를 게 없다. 강 찬을 압박할 만한 카드도, 은밀한 비밀을 공유할 만한 신뢰도 아직 쌓지 못했으니까.
차라리 아직 모른다고 생각하고, 엘릭서 제조를 돕는다는 기분으로 후원을 해주는 게 훨씬 마음은 편할 것이다. 류 현은 그런 마음으로 송장목 진액 같은 약재를 강 찬의 공방에 공급해주고 있었다.
물론 연구용으로 한정하며 그에 대한 감시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서해란이 감시역을 자청해주었다. 강 찬과의 첫 다리를 놓아준 것도 그녀고, ‘공방’에 대한 후원은 지금도 계속하고 있으니 아쉬운 소리를 하게 될 류 현이 직접 하는 것보다는 나았다.
지금 건네준 송장목 진액을 ‘예거즈’나 ‘산군’같은 대형 길드가 눈독을 들이고 있다는 소리에 떨떠름하게 웃는 걸보면, 빼돌릴 생각도 없어보였지만. 조만간 레시피를 협회를 통해서 퍼뜨릴 생각인 류 현으로서는 빼돌리면 그거대로 나쁠 건 없다. 강 찬에게 제대로 된 빚을 지울수 있게 될 테니까.
그런 류 현의 심정을 알 리가 없는 강 찬은, 자루를 열어보고 싶어서 근질거리는 지 자꾸만 자루 입구를 힐끗 거렸다. 저번 주, 그러니까 12월 5일에 페트병 한 병 정도의 양만 가져다 줬을 때도 강 찬은 거의 기절할 정도로 놀랐었다. 이 정도 양이면 실험을 해보고 싶어서 근질거려 하는 것도 이해 할 법했다.
이 후 일정도 있고 해서 류 현은 그를 놔주기로 했다.
“그럼 다음 주에 다시 뵙겠습니다.”
“살펴가시게.”
배웅에 나서려는 ‘공방’ 도제들을 물리친 류 현은, ‘공방’ 입구에 세워진 검은 세단에 올라탔다. 운전석과 뒷자석 사이에 방음 칸막이가 쳐져있는 이 차량도 서해란이 제공한 편의 중 하나였다. 차를 이용할 일이 세아의 병문안이나, 던전 사냥 이후에 팀 사무실로 돌아가는 일 외에는 거의 없는 그에게는 그런 게 있었나 싶을 정도였지만.
류 련이 손을 뻗어 운전석 머리 높이의 칸막이를 열자, 선글라스를 낀 중년 남자가 칼같이 물었다.
“어디로 모실까요?”
“일단 병원으로...”
그 때였다. 그의 바지 주머니에 고이 잠들어 있던 휴대폰이, 소리 높여 울어대기 시작했다. 류 현은 손을 살짝 들어 보인 후, 칸막이를 닫았다. 그 후에 전화를 받았다.
“예, 류 현입니다. 웨인 씨, 무슨 일이신지.”
“류 현님. 이런 소식을 전하게 돼서 유감스럽게 생각합니다만. ‘광대들’이 움직였습니다.”
류 현의 표정에 일순간 금이 갔다. 그의 얼굴을 보고 있는 자가 있었다면 흠칫 했을 정도. 하지만 그런 금은 금세 사라졌다.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군요. ‘광대들’라니요?”
“아, 죄송합니다. 상황이 급박해서 저도 모르게 쓰던 호칭을 그대로 쓰고 말았군요. 전화로 다 말씀드리기에는 이야기가 좀 길어서 그런데, 좀 만나 뵐 수 있겠습니까? 되도록 팀원분들도 같이요.”
“알겠습니다. 팀원들에게는 연락 해놓지요. 언제면 되겠습니까. 내일 모레? 아니면 내일?”
“지금 막 한국에 입국했습니다. 정말 죄송하지만 오늘 내로 뵙고 싶은데요. 어떻게 안 되겠습니까?”
“...정말 급한 일인가 보군요. 팀원들은 아직 사무실에 있으니 곧장 오시면 됩니다. 저도 사무실로 바로 가겠습니다. 거기서 뵙죠.”
화련과 희란은 사무실에서 아직 류 현을 기다리고 있다. 망년회 겸 크리스마스 파티를 하자고 화련이 졸라왔고, 화련이 세아까지 포섭해놨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그는 두 손 드는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오늘은 ‘공방’에 볼일을 마치고, 병원에 가서 세아를 사무실로 데려갈 예정이었다. 연말 파티 계획을 짜기 위해서.
“갑작스러운 요청, 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류 현은 전화를 끊고 이를 아주 세게, 빠득! 소리가 날 정도로 세게 사려 물었다. 웨인에게는 모르는 척 했지만, 그는 ‘광대들’라고 불리는 집단에 대해서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현 시점에서 그 본인들보다 훨씬 더 정확하게. 그들의 미래까지.
류 현은 끓어오르는 짜증을 한숨으로 내뱉은 후, 다시 운전석 칸막이를 열고 나지막하게 말했다.
“사무실로. 부탁드립니다.”
중저음의 묵직한 “예”소리가 들리자 류 현은 좌석시트에 몸을 묻었다. 차가 부드럽게 앞으로 미끄러져나가기 시작했다.
***
3차 대소환, 그러니까 류 현의 이전 생의 3차 대소환 이후 무력(武力)과 금력(金力)간의 관계는 역전되었다. 1차 대소환이 벌어지고, 단위가 늘면 늘수록 금력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는 현대의 무력이 아닌, 플레이어라는 새로운 무력이 탄생했다. 2차 대소환은 그런 무력의 존재를 세상에 알렸고, 3차 대소환은 그 균형을 깨버렸다.
금력의 위력은 여전했지만, 가까운 무력의 중요성이 너무나도 커져버렸고 금력이 제 위력을 발휘하기에는 사회 인프라의 붕괴가 심각했다.
물론 갑자기 나타난 괴수 군단에 목숨 부지하기도 힘든 서민들에게는 아무래도 좋고, 와 닿지도 않는 이야기였다. 이 관계역전을 몸으로 실감한 건 세계의 대부호들이었다.
플레이어의 존재를 강력한 사병정도로 취급했던, 돈으로 모든 걸 살 수 있다며 세상을 오시하고 실제로 그걸 실현한 부호들.
3차 대소환 초기에는 그런 기미는 없었다. 막강한 플레이어들을 금력으로 부리는 대부호들은 누구보다 안전하게 3차 대소환 전이나 다름없이 인생을 즐기고 있었으니까.
시발점은 한국. 플레이어의 시대의 개막을 알린 검성의 나라였다.
검성의 사후, ‘예거즈’는 멍청하게 시간낭비를 하진 않았다. 적극적으로 퍼플 던전에 계속해서 도전하고, 토벌전을 주도했다. 그 결과 검성의 뒤를 잇는 퍼플 던전 솔로 플레이어들이 양성되었고, 무보수 토벌전 참여는 국민들의 지지를 이끌어내었다.
그리고 국민들의 지지가 극에 달했을 때, 3차 대소환이 터졌다. ‘예거즈’는 초반 한두 달 정도는 이전처럼 토벌전을 주도하며 전선을 유지했다. 그러다가 3차 대소환이 터진지 세 달쯤 되었을 무렵, 돌연 독립을 선언했다.
국민들은 물론이고 정치권 인사들까지 몰래 카메라가 아닌가 할 정도로 어처구니없는 독립 선언이었다. 마땅한 영토마저 없는, 비 전투인원을 모두 쳐야 천 단위가 되는 집단이 독립이라니? 거기다가 괴수가 자국 영토를, 국민들을 유린하고 있는 이 상황에서?
모두가 이 선언이 해프닝이 되기를 바랐고, 정부는 강경하게 대처할 것을 천명했다. ‘터주’와 군부는 앞장서서 저 괴뢰무리를 토벌하라!
거기서 두 번째 사건이 발생했다. 문민호를 필두로 한 ‘터주’는 플레이어에 대한 국제 협약을 들먹거리며, 이는 플레이어라는 집단에 대한 탄압이라며 ‘예거즈’에 대한 토벌을 거부했다. 그리고 정부가 반박을 하기도 전에 지휘관급 장성들을 전부 죽여 버리곤 지휘부를 역으로 장악해버렸다.
3차 대소환 이후 쏟아지는 괴수를 막기 위해서 ‘터주’와 군부가 이미 한 몸처럼 움직이고 있었기에 피할 수 없었던 공격이었다.
물론 그것으로 ‘터주’가 군대 전체를 장악할 수는 없었다. 결정적으로 군 전체를 통제하기에는 ‘터주’의 인원이 너무 부족했다.
하지만 ‘예거즈’에 대한 토벌이나, ‘터주’에 대한 보복에 대해서 정부가 다시 한 번 검토해보기에는 충분한 일격이었다. 정부는 죽어버린 장성들의 빈자리를 채우면서 괴수와의 전선을 유지하는 것만으로도 힘겹게 되었으니까.
여력이 있었더라도 그들을 전부 죽일 수도 없었다. 플레이어 전력이 공백이 되어버리면 리치 같은 상위 괴수를 누가 잡는단 말인가? 라이프 배슬을 부수겠다고 자국에 미사일 폭격을 가하겠는가?
‘터주’와 ‘예거즈’가 괴수를 나 몰라라 하면 모르겠지만 그것도 아니었다. 그들은 독립을 주장했을 뿐, 처음부터 정부 전복시도는 하지도 않았다. 누구보다 먼저 나서서 리치를 붙들어두고 라이프 배슬을 파괴했다.
그들의 행동은 명백히 말하고 있었다. ‘독립을 보장하면 괴수와의 전쟁에서 등 돌리진 않겠다.’ 그리 되자, 정부는 미래를 기약하며 분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세계 최초의 플레이어 군벌들이 탄생했다.
이 극동 아시아의 소국에서 일어난 사건은 플레이어들에게, 주로 자신이 억눌린 채 살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이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야심가들 또한 이 사건에 주목했지만, 가장 빠르게 반응한 건 그들이었다.
목줄이 채워져 있던 사냥개들이, 주인의 목을 물어뜯는 일이 속출했다. 태평양 한가운데 자리한 섬의 별장에서, 혹은 지하 핵 방공호에서. 우스갯소리로 돈으로 사람 목숨을 살 수 있을 정도로 돈이 넘치는 이들이 죽어나갔다. 그들은 자신들이 돈으로 삶을 사들인 플레이어 사병들에게 찢겨죽었다.
무력과 범죄의 시대가 막을 올리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광대들’은 주인의 목을 물어뜯고 얻은 자유를, 좀 과하게 즐기던 미치광이들이었다.
그들은 범죄를 용인 받는 대신, 주인이 지목한 자를 죽이고 능욕하는 사냥개들이었다. 자신들이 아니라 상대를 광대보다 추레한 꼴로 만드는 살인 전문가들. 그래서 이름이 ‘광대들’.
실력은 상당한 수준이었다. 이름만 들어도 아! 소리가 절로 나오는 금력을 가진 주인의 지원 하에 사람 죽이는 훈련을 거듭해 온 자들이니까. 주인의 사후에는 완전히 돌아버렸지만.
그들의 주인이 살아있었다면 절대로 타겟으로 잡지 않았을, 이미 세계최강 후보에 이름을 올리고 있었던 류 현을 아무런 연고도 없이 시비를 걸어올 정도로 미친 자들이었다.
그래서인지 험한 소리를 내뱉는 류 현의 표정은 장난기라고는 없었다.
“미친놈들이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