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5화 〉탐식마(貪食魔)
리치(lich).
리치의 유래 대해서 알려진 건 그렇게 많지 않다. 리치라는 이름도 첫 발견자가 해골에 마법을 쓰면 리치지! 하고 이름 붙여서 리치라고 불리는 것 뿐. 마법사가 스스로 언데드가 된 건지, 아니면 저주에 걸린 건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
분명한 건 퍼플 이상의 던전에서 단골손님처럼 나타나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강하다는 것! 블루 퍼플 던전에서는 만나는 게 이상할 정도로 강한 괴수다. 블루 퍼플 던전을 도는 원정대가 사고를 만났다는 소리가 떠돌면, 리치를 만났다는 소리와 같다.
류 현이 희란과 화련이 괴수 복이 터졌다고 하는 것도 그 때문이었다. 보통 팀이 블루 퍼플 던전 수준을 상정하고 들어왔다면 전멸에 준하는 피해를 입겠지. 그의 팀에는 해당 사항이 없는 소리다.
리치는 개체의 수준은 제쳐놓고 그 존재만으로도 블루 퍼플에서 나올 만한 괴수가 아니지만, 블루 퍼플에 등장한 이상 던전 수준에 맞게 힘을 제약 당하게 된다. 리치라는 상대하기 까다로운 괴수에 대한 경험을 늘리기에는 딱 좋은 상황.
그래서 미소마저 띤 채, 류 현은 검은 성 입구를 앞두고 말했다.
“저 안에 있는 건 리치 일겁니다.”
“리치요? 어, 그거 퍼플 던전에나 나오는 괴수 아니에요?”
화련이 되물어 왔고, 희란은 고개만 갸웃했다. 그녀들에게 협회에서 받아낸 괴수에 대한 자료들을 넘겨주긴 했지만, 요 며칠간 최소한의 휴식만 취하고 던전을 도는 강행군을 지속했으니 공부할 새도 없었을 것이다. 공부했더라도 드문 경우에 대해서는 보지 못했을 것이고.
“드물게 블루 퍼플에서도 나오기도 합니다. 오늘 꽤 운이 좋군요.”
“...어디가요?”
“두 분께 좋은 경험이 될 겁니다. 라가 주술사 이외에는 마법 쓰는 괴수는 상대 안 해보셨잖습니까?”
“그렇긴 하죠.”
화련이 떨떠름한 얼굴로 대꾸하자 류 현은 픽 웃으며 말했다.
“그렇게 끔찍하다는 얼굴 안하셔도 됩니다. 두 분은 보조만 해주시면 되니까요. 말씀 드린 것처럼 두 분이 마법 쓰는 괴수가 어떤 건지 경험만 시켜 드릴 생각입니다.”
“마스터 혼자서 잡으시게요?”
“예, 뭐. 제 기준으로는 꽤 쉬운 녀석이라서요. 상성도 편한 편이고요.”
화련은 다시금 떨떠름한 표정이 되었다. 희란이 낌새를 눈치 채고, 화련의 팔을 살짝 잡아끌었지만 그녀는 기어코 제 할말을 했다.
“마스터 가끔 되게 재수 없는 말을 자연스럽게 하는 거 알아요?”
류 현은 미소 지을 뿐 대꾸는 하지 않았다. 그녀가 장난으로 이런 소리를 한다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체험도 알고 체험하는 것과 모르고 체험하는 건 차이가 크니, 리치 공략법에 대해서 대강 설명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두 여자가 그의 앞에 붙어 앉았다. 류 현은 그 모습을 확인 한 뒤에 말을 이었다.
“리치 공략의 기본은 역할 분담입니다. 아시다시피 불사신에 가까운 리치 자체를 때리는 건 별 의미가 없습니다. 그래서 리치를 상대하는 미끼조와 라이프 배슬을 파괴하는 파괴조로 인원을 나눕니다. 당연히 리치를 상대하는 미끼조에 마법사를 주류로 한 팀을 구성하며, 파괴조에는 주로 근접계열을 집어넣습니다.”
리치는 불사신이다. 영혼이 들어있는 건지, 아니면 단순히 육체를 수복시킬 마력이 담겨있는 건지 모를 라이프 배슬이 파괴되지 않는 이상 죽지 않는다. 회복속도는 느릴지언정 리치는 온몸이 박살나도 라이프 배슬에 이상이 없다면 기어코 재생해낸다.
이 사실은 굉장히 골치 아픈 문제다. 리치는 오우거처럼 육체적인 스펙으로 플레이어들을 유린하는 괴수가 아니니까. 마법을 쓰는 데 필요한 머리와 손만 수복되어도 리치는 플레이어를 죽일 수 있다.
그리고 대부분의 리치는 라이프 배슬을 자신의 성 어딘가에 보관해놓는다. 리치라는 강력한 괴수를 상대하면서 전력을 분산시켜야하는 이유가 여기서 나온다. 리치를 뼛가루까지 불태워도 라이프 배슬을 찾는 과정에서 재생해서, 공격해 올 수도 있는 것이다. 리치가 바보가 아니라면 라이프 배슬을 숨기는 걸 소홀히 했을 리가 없으니까.
리치의 몸을 산산조각 냈을 경우, 개체에 따라서 조금 다르지만 평균적으로 완전 수복까지 만 하루가 걸린다. 문제는 재수가 없으면 그 기간 내내 라이프 배슬 찾아 해맬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다가 어느 정도 몸을 수복한 리치와 좁은 성안에서 만나면 팔다리 성해서 도망칠 생각은 버려야한다.
그렇기 때문에 리치와 조우한 원정대는 팀을 나누어서 공략에 들어갈 수밖에 없다. 전력을 쪼개야하니 힘들기는 마찬가지겠지만, 개활지에서 리치를 상대하는 게 그나마 나으니까. 만약 나눌만한 팀 구성이 안 되어있다면?
둘 중 하나다 그냥 손 놓고 죽던가, 아니면 성안에서 발광하는 리치를 상대할 각오를 하고 라이프 배슬 파괴에 올인 하던가. 어느 쪽이든 해피엔딩은 없다.
그러한 사실에 비추어 볼 때, 류 현의 팀은 누구보다 혹독한 대가를 치러야 하는 자들이었다. 류 현은 그런 대가를 치르는 것에 전혀 관심이 없었지만.
“뭐, 저희 팀에는 해당 사항이 없는 이야기죠. 일반적인 공략법이 그렇다는 거고, 우리 팀은 리치를 어느 정도 무력화 시킨 후에 라이프 배슬을 찾아 나설 겁니다. 두 분께서는 옆에서 보고 저를 보조해 주시면 되고요.”
류 현은 말을 멈추고 검지와 중지를 펴보였다. 그는 중지, 검지 순으로 손가락을 접어가며 말했다.
“주의 하실 부분은 두 가지입니다. 리치의 손가락을 피하고, 5미터 이내로 거리를 좁히지 말 것.”
“...소, 손가락을 피해요?”
희란이 고개를 기울이며 물어왔다.
“예, 리치의 마법에는 딜레이가 거의 없습니다. 손에 끼고 있는 반지와,”
그는 자신의 정강이를 검지로 톡톡 쳐보였다.
“이 뼈 안에 있는 마법 결정으로 마법을 쓰거든요. 결정의 경우에는 한 번 쓰면 파괴 됩니다만, 반지의 경우에는 그렇지 않고 연사하는 경우도 있다고 합니다.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게 발동 트리거이니 그거라도 보고 피하는 수밖에 없죠.”
보통 마법사들은 각성과 동시에 깨우쳤든, 모든 마법이 모이는 ‘마법사의 탑’에 가서 배웠든 간에 마법을 쓸 때 연산과정과 발동 딜레이를 가지게 된다. 육성 영창이 필요한 경우까지 있으니, 화련 같은 경우는 양반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어쨌든 마법사들은 반드시 가지게 되는 아킬레스건을 리치는 가지고 있지 않다. 몸 안에서 만들어지는 마법결정과 그것을 단련해서 만든 반지로 마법을 사용하기 때문이다. 영창도, 딜레이도 없다.
다행스러운 점은 마법 결정은 무제한 생성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한 번 사용하면 파괴되며, 반지 또한 많아봐야 네다섯 개 수준이 한계라는 것이다. 그냥 마법 결정으로 쓰는 마법은 반지에 비해서 수준도 낮다.
핵심은 리치가 반지를 몇 개 보유하고 있느냐. 반지 개수로 3성 리치, 5성 리치 이렇게 등급을 나눌 정도다. 현재 발견되고 잡힌 리치 중 최고 수준은 5성이다.
물론, 이게 리치의 무서움의 전부는 아니다.
“5미터 이내에 접근하시면 안 되는 이유는 리치가 반지를 세 개 가지고 있다고 가정한다면 하나에는 거의 반드시 저주 마법을 넣어놓기 때문입니다. 여태껏 확인 된 것 중에서 저주마법의 최대 사거리가 4.5미터가량이죠.”
언데드답게 리치는 반드시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저주 마법을 가지고 있다. 가장 끔찍한 건 리치는 저주의 특성, 그러니까 시전자도 리스크를 안고 간다는 그 대전제를 무시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라가 주술사의 경우 저주를 한 번 사용하면, 대상이 죽기 전에는 다시 저주를 쓰지 못한다. 대상이 저주를 이겨낼 경우에는 반동으로 자신이 급사하기도 한다.
그런데 리치는 그런 리스크를 무시한다. 저주 반지가 하나라면 한 대상에게 밖에 저주를 걸지 못하지만, 반동 같은 게 없는 것이다.
이게 미끼조에 되도록 원거리 계열만 남겨놓는 결정적인 이유다. 저주는 피할 수도 없고, 어지간한 항마력으로는 이겨낼 수도 없다. 저주술사를 죽이거나, 아군 마법사의 해주를 받더라도 정신적인 데미지 때문에 전장복귀는 꿈도 못 꾼다.
“그 두 가지만 주의하시면 됩니다. 부담 가지실 필요도 없고요. 두 분의 경험만 좀 늘려드리고 제가 알아서 처리할 거니까요.”
동네 마실 나간다는 것처럼 한가로운 류 현의 어투에 두 여자는 반박할 생각도 못하고 그저 고개만 끄덕거렸다.
***
흐아아. 여인의 흐느낌 같기도 하고, 공동에 울리는 바람 같은 소리가 리치의 두개골 사이로 흘러나왔다. 그런 리치가 가리킨 허공에,
쩌정! 갑자기 얼음이 얼어붙었다. 류 현은 방금 전까지 자신이 날고 있던 곳에 얼음이 얼어붙는 걸 곁눈질로 살피고는 손에 쥐고 있던 나무토막을 내팽개쳤다. 그리고 뒤편에 꽂혀있는 수많은 무기 중에서 묵직한 메이스를 움켜쥐었다. 그의 머리통보다 1.5배는 더 굵은 놈이었다.
그는 곧바로 앞으로 뛰쳐나갔다. 양자의 거리 15미터 남짓. 그에겐 거리라고 할 수도 없는 간격. 그의 시선 끝에는 리치가, 이미 오른팔이 떨어져나가서 왼손으로 그를 가리키고 있는 리치가 있었다.
퍼펑! 그의 앞을 가로막듯이 불꽃이 터져 나왔다. 허공에서 터져 나온 불꽃은 순식간에 세를 키워 그를 집어삼켰다.
흐아아. 리치의 입에서 다시금 괴이한 소리가 터져 나왔다. 리치는 승리를 확신한 듯 했지만 그 다음순간, 후웅! 뻐엉! 바람이 폭발하며 불꽃이 흩어지자 리치는 입을 다시 다물게 되었다. 류 현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리치를 향해서 일직선으로 내달렸다.
리치도 가만있지 않았다. 리치가 하나 밖에 안남은 손으로 땅을 끌어당기는 듯한 동작을 해보이자,
떨그럭! 떨그럭! 아무것도 없던 땅에서 갑자기 뼈만 남은 시체. 스켈레톤들이 솟아올랐다. 수십 구의 스켈레톤들은 시커먼 눈구멍을 빛내며 전의를 불태웠지만, 콰직! 그런 모습이 무색하게 류 현의 한 번 휘두름에 산산 조각나 흩어지게 되었다. 두 번이나 방해를 받았지만, 류 현은 거칠 것 없다는 듯이 내달렸다.
거리가 네 다섯 걸음 안으로 좁힐 때까지, 리치는 반응하지 않았다. 마치 거듭된 출수를 류 현이 가볍게 받아넘겨버리자 패배를 시인한 듯한 모양새.
하지만, 류 현이 한 걸음 더 앞으로 디뎠을 때, 리치가 눈구멍이 시퍼런 빛을 토해내며 그를 왼손으로 가리켰다. 마치 함정에 빠진 적을 비웃는 듯한 그런 느낌이었다.
그리고 류 현이 그 행동의 의미를 곧바로 알 수 있었다. 덜컥! 두 번의 방해에도 거칠 것 없이 진행되었던 류 현의 질주가 멈추었다. 류 현은 발아래를 살피지 않아도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을지 알 수 있었다. 신발이, 발이 땅과 붙은 것처럼 석화되고 있을 것이다.
류 현의 시선이 리치를 향했다. 리치는 류 현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석화 저주! 그것이 리치의 마지막 수였다. 유효범위까지 들어올 때까지, 자신의 성을 부수고, 오른팔까지 파괴한 지독한 인간이 스스로 기어들어 오는 걸 리치는 기다린 것이다.
흐아아. 리치는 이번에야 말로 승리를 확신하며 기괴한 소리를 흘렸다. 그런 리치의 도취감은,
콰직! 있는 힘껏 휘둘러진 마력을 잔뜩 머금은 메이스가 리치의 두개골을 때려 부숨과 함께 부서져나갔다. 리치는 허물어지면서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류 현을 바라봤다.
그리고 류 현이 맨발이라는 것과 드러난 맨살을 보고, 석화 되서 바닥에 붙어 깨진 바지와 신발 이외에는 류 현의 몸 어느 곳도 석화 저주의 영향을 받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 상황에 의문을 갖기도 전에,
콰직! 류 현이 다시 휘두른 메이스가 리치의 두개골을 완전히 가루로 만들어 놓았다.
***
“끝났습니다.”
“...수고하셨어요.”
말을 건네면서도 화련은 자신의 말이 적절한 것인지 의문스러웠다. 수고했다? 그게 과연 수고로웠을까?
성에 진입하기 전에 류 현이 늘여놓은 장황한 설명과 달리 전투는 일방적이었다. 아니, 전투라고 부를 수도 없었다. 류 현은 리치를 교보재로 가지고 놀았다.
리치가 성을 개조해서 일종의 아티펙트처럼 사용할 수 있다면, 리치가 성벽을 움직여서 자신을 찍어 누르려는 걸 받아내고 그녀들이 잘 봤는지 확인한 후에 성벽을 박살내버렸다.
그 뒤에는 3성 리치의 화력을 체험시켜주겠다며, 일부러 리치가 맞추기 좋은 거리에서 얼쩡거리면서 자신을 보조해보라고 요구했다. 화련은 나름대로 기량을 쥐어짜서 그의 몸을 보호막을 둘러봤지만 리치의 마법 한 방에 찢어졌다. 더 황당한 건, 보호막이 벗겨지고 그런 마법을 맨몸으로 맞고도 옷만 찢어졌을 뿐 류 현은 멀쩡하다는 점이었다.
류 현은 계속해서 리치 몸의 강도나, 체내의 마법 결정으로 쓰는 마법의 화력을 보여주기 위해서 일부러 리치에게 위협만 가했고. 결국 리치 안에 들어있던 마법 결정 십 여 개를 모두 소진시켰다.
뽕을 다 뽑고 나자 그제야 류 현은 본격적으로 리치를 공격하기 시작했고, 단 두 번의 공격으로 리치를 저렇게 무력화시켜 놓았다. 첫 번째 공격이 창이 부러지는 바람에 리치의 오른팔만 자르고 말았다는 점을 감안하면, 무기만 멀쩡했다면 한 방에 무력화도 가능했을 것이다.
‘저주도 맨몸으로 버티다니...’
그런 건 들어보지도 못했다.
‘진짜 누가 괴물인건지.’
새삼 자신의 마스터가 어떤 괴물인지 다시금 실감했다.
“아니, 괜찮습니다. 희란 씨. 보세요, 이게 어디 돌 같아 보이십니까?”
하지만 그런 생각은 금세 뒤쪽으로 밀려나갔다. 그녀는 미소 지으며 송장목 진액팩을 들고 무작정 권하는 희란과 난색을 표하는 류 현에게로 다가갔다. 희란을 말려야 하는 건 자신의 역할이었으니까.
“오오, 뜨겁네. 뜨거워. 둘이서 그렇게 뜨거우면 난 서러워서 어떡하라고 이래요?”
그렇다고 장난칠 권리를 포기하진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