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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3화 〉탐식마(貪食魔) (63/429)



〈 63화 〉탐식마(貪食魔)

“근데 그래도 되겠어?”

승하의 물음에  현은 곧장 대꾸하지 않고 맥주를 한 모금 넘긴 후에 대꾸했다. 그의 발치에는 이미 열 개가 넘는 캔들이 뒹굴고 있었다.


“뭐가 말입니까?”
“싸울 생각까지 한 내가 할 말은 아닌 거 알기는 한데, 일단 저 쪽 도움이 필요한 건 사실이잖아?”


승하가 지적하고 있는 건 웨인이 입을 열기도 전에, 그에 대한 답을 내주고는 거의 내쫓듯 그를 보낸 일이었다. 협회가 원하고 있었다고는 해도 류 현과 승하는 협회에게 빚이 있고, 지금도 그 빚은 실시간으로 늘어나는 중일 거다. ‘예거즈’나 ‘터주’를 비롯한 쟁쟁한 플레이어 단체들이 둘에게 손을 뻗치는 지, 자나 깨나 감시중일 테니까. 그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류 현은 고마움을 느낄지언정 참견 받을 생각은 없었다. 설명을 할 수 있으면 좋겠지만, 그것도 불가능하다. 미래에서 과거로 돌아왔다는 이야기를  수는 없지 않은가?

그렇다면 선택지는 하나뿐이다. 한 번 불쾌함을 표출한 후에,  후에도 계속해서 참견질을 해온다면 무시.

협회가 마음에 들지 않거나 한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협회를 높이 샀다. 세계 여러 나라의 견제를 받으면서도 조직을 건사하고, 그 와중에 대의를 보고 대비를 하고 있으니까. 문제는 자신의 행동을 설명해  수도 없고, 어설픈 거짓말은 역효과가 날 공산이 높고, 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런 거에 할애할 시간 아껴서 괴수 한 마리라도 더 때려잡거나, 휴식을 취하는  훨씬 이득이니까.

무리를 해가면서 검성을 ‘예거즈’에서 나오게 도와준 협회가 이 정도로 자신을 버리진 않을 거라는 확신도 있었다. 협회는 이제 검성과 그를 한 세트로 보고 있을 테니까. 협회 대표자로 나온 웨인이야 기분 나쁠 수도 있겠지만, 딱히 위해를 가한 것도 아닌데 어쩌겠는가.

웨인이 납득하지 않고 반론을 제기할 경우 다소 강압적인 수단도 동원할 생각이었지만, 웨인은 의외로 순순히 납득하고 자리를 떠났다.


류 현은 몰랐지만, 그의 말도 안 되는 성장을 목도한 웨인은 이미 자신이 방문목적이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고 있는 상태였다.


‘제 좁은 식견으로 류 현님을 너무 성급하게 재단한 것 같군요. 불쾌하셨다면 사과드리겠습니다. 다른 도움이 필요하시다면 언제든 연락주시길.’

거의 반쯤 쫓겨나듯이 집을 떠나면서도 웨인은 그렇게 말했다. 이쯤 되면 류 현이라도 조금 양심에 찔릴 정도다.


“패널티를 줘도 어쩔 수 없지요. 그게 무서워서 기껏 흐름을 탔는데 그걸 망칠 수도 없는 노릇 아닙니까.”
“그야 그렇긴 하지. 한 번 흐름 탔는데 갑자기 맥 끊겼다가, 다시 흐름 타기 전에 억지로 던전 들어가면 어이없는 데서 사고 터지기도 하니까.”

승하는 쥐고 있던 캔의 내용물을 마저 목구멍으로 털어놓고는, 새 캔을 따며 말했다.

“근데 진짜 신기하네. 여태 긁힌 상처도 안 났단 말이야? 와, 희란이 쪽은 네 기록이랑 거의 비등비등한 수준 아니야? 백화련도 벽에 막혀있던 기간은 거의 의미 없으니까. 그거 떼버리고 나면 똑같네.”
“예, 저도 깜짝깜짝 놀라곤 합니다.”

조금의 과장도 없는 진심이었다. 그녀들에게 계획이랍시고 혹사 일정을 말해주긴 했지만, 류 현은 말한 대로 전부 실행할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급하게 굴어서 좋을 게 없는 일이니까. 던전 플레이를 하면서 조급증을 내는 건 좀 더 빨리 사후세계의 존재 여부를 확인하고 싶다는 말 밖에 되지 않는다.


내년 3월 달까지 퍼플 던전을 도전할 정도만 성장해줘도 충분했다. 허황된 목표치를 말한 건, 진짜 목표치도 녹록한 편이 아니었기에 깔아둔 일종의 밑밥이었다.

그런데 화련과 희란은 놀랍게도 그 말도  되는 일정을 소화해내었다. 블루 던전에서는 그의 예상이상으로 환수 타입에 적응해내었고, 첫 블루 퍼플 던전 도전에서는 그조차 상상하지 못한 결과를 내놓았다. 보스 몹을 제외한 괴수들을 둘이서만 정리한 것이다.

중간부터는 마력이 떨어져서 그의 마력을 끌어다 쓰긴 했지만,  다 앞에서 싸우는 타입이 아니라 지원형 쪽이라는 걸 감안한다면 마력을 조금 가져다 쓴 건,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대단한 성과였다. 정작 그녀들은 나흘에 한 번 가는 원정이 블루 퍼플이 2회가  걸 보고는, 괜히 실력  냈다고 후회하는 중이었지만.

기대 이상이라는 말로는 부족했다. 그야말로 규격외의 성장력.


마력은 크게 늘어나지 않았기에, 블루 이상에서 단독으로 활약하는  무리지만 그건  현의 존재로 인해서 의미가 없는 한계였다. 오히려 그는 그녀들의 성장이 기술적인 부분이 치중되어 있다는 걸 반겼다. 그 부분은 류 현이 채워줄 수가 없으니까.


“하긴, 지금 매 시간마다 세계 기록을 갈아치우는 사람 앞에서  말은 아니었네.”
“비행기 태워주셔도 아무 것도 안 나옵니다.”


승하는 그의 대답에 낄낄거리더니 ‘가방’을 조작해서 커다란 가죽주머니 같은 것을 끄집어내었다. 그녀는 그것의 주둥이를 잡고 흔들어 보이며 말했다.


“이런 것도 줬는데 내가   바라겠어.”


류 현은 보지 않아도 그 안에 들어있는 내용물을  수 있었다. 처리를 끝내고 희석까지 끝마친 송장목 진액일 것이다. ‘시험’때 생각보다 많이 송장목을 사냥할 수 있었던 그는, 팀원들과 승하와 혜라에게도 그것을 나누어주었다. 물론 대가 같은 건 요구하지 않았다.

류 현에게는 직접 연락하진 못하고 서해란에게 매일 같이  단위 액수를 불러가며 그것을 요구하고 있는 대형길드들이 봤다면 뒷목을 붙잡았을 것이다. 류 현과 승하가 알바는 아니었지만.

“원하시면 해독 레시피도 알려드릴 수 있습니다.”
“아, 그건 됐어. 지금 당장 대가로 줄만한 것도 없고, 그냥 이거저거 받았다가는 이상한 버릇 들어.”
“그렇게 도와주셨는데 그 정도는 받으셔도 됩니다.”

빈말로 하는 소리가 아니라, 승하는 미국에서 귀국한 이후에도 그의 팀원들 몰래  현을 계속 도와주었다. 던전을 같이 돌아주는 식으로. 자신이 생각해도 무리한 일정을 강행한 류 현으로서는,  도움은 도저히 외면할 수 없는 그런 것이었다.

요즘이야 팀원들과 같이 들어갈 던전도 부족한 실정이라서 뜸해졌지만, 퍼플로 넘어가게 되면 당장 그녀의 도움이 필요해질 것이다. 허가 문제도 그렇고, 인원 손실 없이 던전을 공략할 생각인 그로서는 안전장치는 많을수록 좋으니까. 그렇게 생각하면, 이정도 선물은 별로 아깝지 않았다.


“됐어, 됐어. 맛 괜찮은 괴수나 발견하면 혼자 먹지 말고 나한테나 좀 알려줘. 해독 레시피는...혜라 걔는 무조건 받고 싶다고 할 테니까. 얘기 안 하는 게 좋을 걸?”
“그거 알려드린다고 돈 드는 것도 아니고, 상관없습니다.”


해독 레시피를 독점하고 있는  그에겐 아무런 의미가 없으니까.


이전 생에서 류 현이 절감한 것은,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아무리 그가 괴수 군단을 혼자 상대할  있는 괴력이 있다고 해도, 감당할 수 있는 전선의 범위는 한계가 있다. 한 손이 열 손 못 당하는 상황을 그는 숱하게 겪어봤다.

물론 그 본인이 지진 않았지만, 전투에서 이기고 전쟁에서는 지는 그런 상황이  번이나 펼쳐졌다.

거기에 그가 아무리 1:1로 네임드 괴수를 잡을 수 있다고 해도, 1:1 링이 마련되지 않으면 아무런 소용도 없는 이야기인 것이다. 과거의 그는 급한 대로 용잡이 팀을 만들고 결국 아지다하카와 1:1로 붙을 수 있었지만, 그마저도 잔존한 인류의 군대가 괴수 군단을 맡아주지 않았으면 불가능 했을 것이다.

그러니 유능한 플레이어가 많이 살아남을수록 그에게는 좋다. 적대적 세력이든 뭐든 인류를 찢어 죽이려고 발광하는 괴수의 무리 앞에서는, 감정을 뒤로 미루는 수밖에 없을 테니까.

그리고 송장목 해독 레시피는 그 효용에 비해서 독점이 굉장히 빨리 풀린 레시피였다. 연구과정에 한발 걸치고 있었던 플레이어가, 이건 플레이어를 위한 기술이라고 익명으로 그걸 인터넷에 뿌려버렸기 때문이었다.


단계가 올라갈수록, 던전에서 부상을 입으면 변변한 치료 방법이 없어서 죽어나가던 상위 플레이어들의 생존율이 이 기술이 퍼지면서 확 높아졌다. 송장목 진액은 기존의 포션이나 치료계열 능력과는 달리, 플레이어 본인의 항마력의 영향을 받지 않고 인체에 직접 작용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런 레시피를 틀어쥐고 있는다? 기껏   푼 벌겠다고 제 목을 조르는 행위가 될 것이다. 독점이 길어질수록, 곧 있을 3차 대소환 이후 괴수와의 전쟁에서 전선을 감당해  인재를 죽이는 일이 될 테니까.


“어차피 송장목 공략법 작성이 끝나면 같이 협회에 넘길까 하고 생각 중이거든요. 저야 바빠서 그러기 힘들지만 뽑아먹을 사람이 있으면 좀 뽑아먹어 놓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척 봐도 어마어마한 가치를 지닌 레시피를 무상으로 배포하겠다고 하는 그를 보고 승하는 고개를  번 갸웃했다.


하지만 깊은 의문은 가지지 않았다. 새로 사귄 친구가 돈에 별 관심이 없구나 하고 넘어갈 뿐.

“그래? 그럼 한 번 얘기 해봐야겠네.”
“예, 잘 좀 전해주십쇼.”


***


화련은 눈을 감은 채로 앞으로 쭉 뻗은 오른손을 천천히 바깥쪽으로 휘둘렀다. 그 와중에 그녀의 손이 아래 위로 가늘게 떨렸다. 어깨선에 도달하자 그녀는 오른손을 내리고 눈을 떴다.


화련의 눈앞에 무수히 많은 하얀 선과 하얀 점으로 이루어진 세계가 펼쳐져 있었다. 그 외에는 암흑뿐이었다. 아마 그녀가 자신의 손을 본다면 폭발적으로 맥동하는 선의 다발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그러지 않았다. 지겹도록 봤었으니까.


그녀는 자신이 바둑판처럼 일정한 간격으로 선을 그어놓은 발밑의 대지를 유심히 살폈다. 그녀가 나눠놓은 구획 중앙에는 그녀의 엄지정도 크기의 점이 찍혀있었다. 그 점들을 살필 때마다 화련의 눈동자에 어린 하얀 빛이 강해졌다가, 다시 꺼졌다가를 반복했다.

그녀는 점을  살피고 나자 무심하게 오른 손을 다시 어깨 높이까지 들어 올렸다가, 휙 하고 팔을 내휘둘렀다.


그러자,

[키이이익!]

괴성이 그녀의 선과 점만으로 이뤄진 세계를 부수고 들어왔다. 하양과 검정, 선과 점으로 이루어진 세계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회색빛이 가득한 숲이 그녀의 시야에 가득 들어찼다. 그중에서도 압도적인 건 시뻘건 속살을 사정없이 내보이며 달려드는 송장목이었다.

화련은 자신을 향해서 달려드는 송장목을 바라보며 비웃음을 머금었다.


그리고 목소리는 내지 않고 입만 뻐끔거려 조롱의 말을 내뱉었다.

‘느려터졌어. 느림보.’


그녀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덜컥 하고 송장목의 움직임이 멎었다. 그 뒤는 없었다. 송장목은 달려들던 기세가 무색하게 그대로 대지에 몸을 눕히더니 움직이지 않게 되었다.


화련은 미동도 없는 송장목 시체, 정확히는 위장을 아무 말 없이 내려다보았다. ‘봐도봐도 적응이  된단 말이야. 이게 어떻게 위장이야?’

그런 그녀의 상념을, 짝짝짝 박수소리가 깨부수었다. 화련은 은근한 미소를 머금은 채 박수소리가 들려온 방향을 돌아보았다.

류 현과 희란이 그녀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화련은 뭐라고 뻐기는 소리를 할까 고민하다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손을 허리에 얹은 채 그가 다가오기를 기다렸다.


이윽고 화련의 코앞까지 도달한 류 현이 말했다.

“뭐 하십니까? 상처내서 진액 빼야지요.”
“...그래, 이래야 우리 마스터지.”

아무래도 박수를 쳐준  희란인 모양이었다. 화련은 소리 없이 한숨을 내쉬고는 자신의 ‘가방’에서 손도끼를 꺼내었다. 하지만 한마디 하고 싶은 욕구를 참진 않았다.


“진짜 칭찬 좀 해주면 어디 덧나요?”
“퍼플 던전에 가서  정도 하시면 듣기 싫다고 하실 때까지 해드리지요.”
“진짜 이 악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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