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2화 〉탐식마(貪食魔)
검성, 나승하는 콧노래를 불러가며 바쁘게 발을 놀렸다. 그녀의 발밑으로 수많은 건물들이 스쳐지나갔다. 승하의 콧노래는 시야에 오래된 아파트 단지가 들어오기 시작하자 끊어졌다.
그녀는 콧노래 대신 미소를 지었다. 친구의 집이 눈앞이었다. 류 현의 집이었다.
화련과 희란의 훈련을 봐주는 걸 끝낸 후, 그녀의 일과가 되어버린 일 중 하나였다. 낮 동안에는 X던전을 돌기 위해서 몸을 만들고, 저녁에 내키면 맥주라도 사다들고 그의 집으로 찾아갔다. 거의 매일 같이.
류 현은 방문을 거절하는 법이 없었다. 연락 없이 불쑥 찾아가도 또 왔습니까. 하고 그녀를 들여보내주고, 요리 같은 거에 취미 없으니 불평 말라고 하고 안주거리나 시켰다.
그 뒤에는 특별한 건 없다. 그냥 보통 술친구처럼 술이나 마시며 이야기를 나눴다. 그 이야기 거리가 주로 괴수를 써는 이야기라서 조금 살벌하게 들릴 뿐이지.
이야기를 나눠보면 볼수록 승하는 자신의 추측이 확신이 되어가는 것을 느꼈다. 처음에는 그냥 떠보기 겸 백혜라에게 쫓겨났을 때 피난처로 가는 기분이었지만, 승하는 점점 그의 집에 찾아가는 데 재미를 붙였다.
마치 죽은 ‘예거즈’ 창립멤버들과 던전 클리어 후에 노닥거리던 그 때로 돌아간 듯 한 기분이었다. 혜라가 별 말 없는 것도 그런 분위기를 읽었기 때문일 테지.
최근에는 안하던 사전연락도 할 정도였다. 매일 같이 던전을 들락거리는 류 현의 사정상, 잘못하면 다 식은 맥주를 혼자 홀짝이는 불의의 사태를 막기 위한 행동이었지만. 그녀의 성격을 아는 이라면 거짓말하지 말라고 외칠 법한 변화였다. 오늘도 그녀는 맥주를 한 아름 사들고 그의 집으로 향하는 중이었다.
아파트 옥상에 사뿐히 내려앉은 승하는 이미 관리인도 통제를 포기한 옥상 통로를 타고 내려가려고 했다. 그 순간이었다.
“?”
그녀의 촉이, 당당하게 제 6감이라고 칭해도 좋을 정도로 날카로운 촉이 위화감을 감지해내었다.
그 다음 순간 그녀는 쏜살이 되었다.
승하는 자신이 어떻게 4층까지 내려왔는지 기억하지 못할 정도로 빠르게 옥상 10층에서 류 현의 집이 있는 4층까지 내려왔다. 발로 계단을 밟는 것보다 공중에 떠있는 시간이 훨씬 길었을 것이다.
4층 복도에 도달했을 때, 그녀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전투태세에 들어간 상태였다.
그리고 익숙한 남자의 얼굴을 확인했을 때, 승하는 자신의 촉이 왜 그렇게 민감하게 반응했는지 알게 되었다. 그녀는 새어나온 자신의 살의에 놀라서 엉거주춤하게 서있는 남자를 향해서 물었다.
“웨펀 마스터?”
웨인 크로이츠는 별로 좋아하지 않는 별명에 잠깐 얼굴을 찌푸렸다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오랜만에 뵙는군요. 검성님.”
“니가 왜 여기 있어?”
묻는 동안에도 그녀는 전투태세를 풀지 않은 채였다. 대답에 이상한 부분이 있다면 일단 달려들고 볼 생각이었다. 코트를 포함에서 그 안에 온갖 무장을 갖춘 웨인과 달리, 그녀는 보이는 그대로 비무장 상태였으니까. 선공을 내주고 뭘 장담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닌 것이다. 입고 있는 옷마저 그냥 평범한 옷이었다.
‘예거즈’를 빠져나올 때 협회에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달라고 했던 빚이 있지만, 빚과 별개로 그녀는 협회를 별로 믿지 않았다. 정확히는 그녀는 팀 이상의 인원이 모인 단체를 믿지 않았다. 한국정부처럼 협회도 그녀의 뒤통수를 날려버리려고 각을 보고 있을지 누가 알겠는가.
“그게 말입니다...”
“두 분 지금 뭐하시는 겁니까?”
남녀는 뒤쪽에서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합을 맞춘 듯 동시에 뒤돌아보았다. 웨인은 등허리에 식은땀이 흐르는 걸 느꼈다. 검성에게 정신이 팔려있었다지만 누군가 다가온 다는 걸 전혀 느끼지 못했다.
‘아무런 기척을 못 느꼈는데? 아니, 내가 아는 그 남자가 맞긴 한 건가?’
말을 걸어오기 전에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다.
아무리 지난 세 달 동안 미친 듯이 던전을 돌았다지만, 이토록 극적인 변화가 있었을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혼자서 블루 퍼플을 밥 먹듯이 돌 수준이라는 건 인지하고 있었지만, 거기서 더 나아갔을 줄이야.
검성의 표정으로 봐서는 그녀도 웨인과 별로 다른 상황은 아닌 듯 했다. 그녀는 누가 봐도 ‘언제 왔어?’라는 표정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녀는 그게 별로 놀랍지도 않은지 현관문을 가리키며 류 현에게 물었다.
“안에 있던 거 아니었어? 통화할 때 말하는 거 보고 그런 줄 알았는데?”
“전화하셨을 때 오는 중이었는데, 차가 좀 막혀서요. 차라리 제 발로 오는 게 더 빠를 정도로 막히더군요.”
“차 안 막혀도 뛰어다니는 게 더 빠르지 않아? 저번에 택시 타고 와보니까 골목골목...어휴, 다시는 차타곤 안 와.”
“승하 씨처럼 건물 사이로 뛰어다니다가 걸리면 골치 아파집니다.”
“안 걸릴 수 있으면서 오버한다.”
류 현은 못 당하겠다는 듯이 고개를 내젓고는 화제를 바꾸었다.
“그래서, 두 분은 왜 그러고 계셨던 겁니까?”
“친구 집 앞에 완전 무장한 수상한 남자가 있으면 경계하는 게 당연하지 않을까?”
승하는 웨인의 말문을 틀어막으려는 듯 재빨리 대꾸했다. 그 모습에 웨인은 쓴웃음을 지을 뿐이었다. 류 현은 한숨을 집어삼키며 말했다.
“...수상한 사람이 아니고, 웨인 씨가 연락하셔서 제가 이쪽으로 와달라고 한 겁니다.”
실제로 웨인을 집으로 와달라고 한 건 류 현이었다. 묘하게 들러붙는 팀원들과 세아의 병문안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려는 중에 웨인과 승하가 차례대로 연락해 왔었다. 승하야, 평소처럼 술이나 사들고 오겠지 하고 허락했고, 웨인의 경우에는 빨리 돌려보낼 생각으로 집으로 와달라고 청했다. 이번 방문의 목적이 훤히 보였으니까.
‘슬슬 움직이겠지 하니까 바로 연락을 해오다니, 양반은 못 될 인간들이야.’
류 현의 말을 듣고도 승하는 뭔가 불만스러운지 웨인을 아래위로 훑어보다가, 손에 들고 있는 비닐봉투를 흔들어 보이며 말했다.
“그럼 난 돌아가?”
“아뇨, 안 그러셔도 됩니다. 그런데 또 술입니까?”
“응? 그럼 다른 게 있어?”
천연덕스럽게 되물어 오니 할 말이 없었다. 웨인이 류 현을 대신해서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곧 표정관리에 휩쓸려 사라졌지만. 천연덕스럽게 되묻는 승하를 보던 류 현은 픽 웃어버리고는, 비밀 번호를 눌러 현관문을 열었다. 그리고 두 사람에게 권했다.
“안이 좀 너저분하긴 합니다만, 들어오시죠.”
승하는 대꾸도 없이 집안으로 쓱 밀고 들어갔다. 매일 같이 찾아오는 이니 사양하길 바라는 것도 웃긴 일일 것이다. 류 현은 제 집처럼 들어가는 승하를 멍하니 보고 있는 웨인에게 다시 권했다.
“웨인 씨?”
“예?”
“들어가시죠.”
“아, 예. 그래야죠.”
웨인을 안내해서 거실로 들어서자, 승하는 이미 냉장고 문을 열어젖히고 뭔가를 찾는 중이었다. 류 현에게는 일상적인 풍경이었지만, 웨인에게는 그렇지 못했다. 굳어있는 그가 정신을 수습하게 내버려 두고 류 현이 승하에게 물었다.
“뭐 특별할 게 있다고 그렇게 뒤지십니까. 어디에 뭐가 있는지 뻔히 다 아시는 분이.”
류 현의 핀잔 아닌 핀잔에 승하가 고개를 쏙 내밀고 말했다. 그녀의 얼굴에는 조금 당황스러움이 묻어났다.
“없어.”
“예?”
“아무 것도 없어. 생수도 없는데?”
그 소리를 듣고 나서야, 류 현은 이마를 두드리며 잊고 있던 사실을 기억해냈다.
“아, 안에 있던 거 다 내다버렸지.”
최근 들어 거의 매일같이 던전을 돌게 되면서, 류 현은 집안일에는 당연히 소홀해지는 수밖에 없었다. 청소야 대충 로봇청소기 돌리고 하면 된다지만, 냉장고 안의 음식물은 로봇청소기가 어떻게 해줄 수 없는 영역이니까. 음식을 잘 해먹는 성격도 아니라서, 세아가 입원한 뒤로는 별 것 없는 냉장고였지만 그래도 상할 음식이 없진 않았다.
그렇게 하나 둘 씩 쌓이다보니, 일일이 구분해서 처리하는 것도 짜증난 류 현은 어젯밤에 싸그리 냉장고 내용물을 내버렸다. 던전 돌고나서, 세아의 병문안을 끝낸 후에 장을 볼 생각이었지만 웨인과 승하의 연락 때문에 까맣게 잊어버린 것이다.
아무리 빨리 돌려보낼 손님이라지만, 웨인에게 내놓을 것이 없다는 걸 알게 되자 류 현은 앓는 소리를 내는 수밖에 없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지금 가서 장을...”
“뭐하러 그래?”
승하의 목소리에 반응하기도 전에 얼굴 쪽으로 뭔가가 날아들었다. 류 현은 반사적으로 그 물체를 받아내고는 승하를 돌아보았다. 승하가 던져준 건 캔맥주였다. 류 현이 뭐라고 하기도 전에 승하가 말했다.
“그거면 됐지. 안 그래? 무슨 다과회를 할 것도 아니고.”
언제 던져준 것인지 웨인도 류 현처럼 캔맥주 한 캔을 들고 있었다. 류 현이 승하에게 핀잔을 주려고 입을 열자, 다시 그의 말을 가로막듯이 웨인이 말했다.
“저는 괜찮습니다. 두 분께 술을 대접받을 거라고 생각도 안했는데 기분 꽤 괜찮군요.”
결국 류 현은 다수결에 승복하기로 했다. 웨인의 방문 목적을 짐작하고, 귀찮은 손님이라고 분류하고 있다는 것도 한 몫 보태었다. 셋 다 플레이어들이니 음료 대용으로 취급해도 무방하기도 했다.
치익! 서로 좋을 대로 자리 잡고 앉은 세 사람은 말없이 맥주만 목구멍으로 넘겼다. 만족할 만큼 목을 축인 후, 웨인이 입을 열었다.
“갑작스럽게 찾아와서 이렇게 폐 끼친 점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사안이 사안인지라 시간을 지체할 수가 없더군요. 그러니...”
“예, 뭐. 대충 짐작하고 있으니까. 굳이 사과 안하셔도 됩니다. 사과는 제가 해야 할 테니까요.”
말이 중간에 끊겼지만 웨인은 불쾌해하는 기색 없이 고개를 갸웃했다. 짐작하고 있었다? 되묻고 싶은 대목이었지만, 웨인은 류 현의 뒷말을 차분히 기다려주기로 했다. 받아들이기에 따라선 쓸데없는 참견질이 될 수도 있는 권유를 하러왔으니, 될 수 있는 대로 그의 심기를 건드리고 싶지 않았다. 방금 전에 류 현의 경지를 살짝 엿보고 나서는, 그 권유가 의미가 있는지 조차 의심스러웠지만.
“제 팀의 던전 클리어 속도 때문에, 페이스를 조금 늦추라고 찾아오신 것 같은데. 뭐라고 말씀하시든 간에 지금 당장 계획을 수정할 생각 없습니다. 저도 제 나름대로의 계획이 있고, 그리고 협회가 제 상사는 아니지 않습니까?”
류 현은 맥주캔을 한 번 들이킨 후에 다시 말을 이었다. 왜 그런지는 몰라도 승하는 히죽히죽 웃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웨인 씨. 이렇게 먼 곳까지 발걸음 해주셨지만. 제 생각은 바뀌지 않을 겁니다. 협회장이 직접 와서 종용한다고 해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