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1화 〉탐식마(貪食魔)
말쑥한 정장차림의 남자는, 차림새에 어울리지 않게 거의 달음질치듯이 잰걸음으로 복도를 가로질렀다. 어둑한 대리석 바닥의 복도에 남자의 발소리가 건조하게 울려 퍼졌다.
기나긴 복도를 가로질러 문 앞에 도착한 남자는 한 번 숨을 고른 후에 나무문을 양손으로 밀어젖혔다.
방안에서 쏟아져 나오는 불빛과 함께 열이 넘는 시선들이 남자에게 쏠렸다. 방 전체를 가로지르는 기다란 탁자의 자리를 한 자리씩 차지하고 있는 이들은, 하나 같이 중년을 넘어서 노년을 바라보고 연배들이었다.
남자, 웨인 크로이츠는 옅게 미소 지으며 시선들을 향해서 고개를 살짝 숙였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웨인의 사과에 그에게 몰렸던 시선이 방 끝, 그러니까 탁자 끝의 상석으로 몰렸다.
상석을 차지하고 앉아있는 노인은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자네를 바쁘게 돌리고 있는 게 우리인데 사과할 것이 뭐가 있는가. 사과라면 우리가 해야겠지. 마음 쓰지 말고 앉게.”
“예, 그럼 감사히.”
웨인은 자리를 권하는 노인이 앉은 맞은 편, 탁자의 다른 끝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웨인이 자리를 잡고 앉아 상석에 앉아있던 노인은 지체 없이 물었다.
“오늘도 똑같이 그러던가?”
“예, 보고 받은 바로는 오늘도 블루와 블루 퍼플 총 두 곳을 돌았다고 합니다.”
웨인의 대답에 방안에 소란이 일었다. 하나같이 우려가 담긴 내용이었다. 상석에 앉아있는 노인은 늘어지기 시작한 턱을 매만지며 다시 물었다.
“내 기억이 맞는다면, 이주 째 인거 같은데. 총 네 번 맞는가?”
“예, 총 네 번이지요. 블루와 블루 퍼플을 각각 네 번씩 말입니다.”
소란이 웅성거림을 넘어서 본격화 되었다.
“무슨 던전 도는 기계도 아니고...”
“그 친구한테 다른 뒷배가 없는 건 이제 확실하군.”
“압력을 받아서 저렇게 빠르게 도는 게 아니라?”
“저 정도 괴물을 골라내서 키울 정도인데 그 정도 머리도 없겠는가. 무슨 레드 던전도 아니고, 저렇게 굴리는 건 그냥 죽으라는 거지. 본인의 독단이 확실해.”
“혼자 도는 것도 아니라고 하지 않았나? 어떻게 팀원들을 설득한 건지 그게 더 신기한데.”
“나는 팀원들 쪽이 더 놀라운데. 따로 접촉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지 않을까 싶군.”
“그러다가 그 류 현이란 친구 자극하면 어쩌려고?”
“‘예거즈’와 ‘산군’이 조용하다는 게 더 이상한데. 표면만 보면 그토록 찾던 검성의 대항마인데. 설마 검성과의 관계를 알고 있는 거 아닌가?”“그건 확실히 아닐 걸세. 그 친구 스폰서 휴대폰에 불이 나고 있거든.”
“스폰서?”
“그러게 내가 자료나 읽고 다음 회합부터 참석하라고 하지 않았나. 누가 저 친구한테 저번 회합 자료 좀 가져다주게.”
굳이 소란을 수습하지 않고 떠드는 모습을 조용히 지켜보던 노인은, 소란이 잦아들기 시작하자 손을 들어 올리며 좌중을 침묵시켰다. 노인은 여전히 자신의 맞은편에 앉아있는 웨인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말했다.
“부산물 처분은?”
“거의 없습니다. 그들이 던전을 돈 횟수를 생각해보면 없다고 해도 무방할 정도죠. 스폰서가 있는 만큼 아이템을 축적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그렇다곤 해도 아예 밖으로 안낼 수는 없지. 그 친구가 직접 공방을 운영하는 것도 아니니.”
“예, 계약한 공방이 있긴 합니다만. 그 쪽으로 보냈더라도 기록이 아예 안남을 수는 없죠. 태양그룹 쪽도 기록이 깨끗합니다.”
“처음 생각하는 건 아니지만 이 친구는 참 하는 행동마다 의미 불명이구먼. 아무런 기반도 없이 팀원 마법사 연구실을 차려줬을 거 같지는 않고. 웨인, 자네 생각은 어떤가?”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아무리 연구실을 은밀하게 차렸다고 해도 필요한 기재를 자급자족하는 건 불가능하니까요.”
노인은 미간만 만지작거리며 말이 없었다. 위치가 위치인 만큼 그는 신음을 속으로 삼키고는 말했다.
“찝찝하긴 하지만 지금으로서는 알 수 있는 방법이 없겠군. 그 부분에 대해서는 조사를 중단하기로 하세. 태양그룹 측에서 감지하면 좀 이야기가 꼬일 수도 있으니.”
노인의 말에 탁자 중간에 자리하고 있던 이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고개를 꾸벅 숙이더니 방밖으로 향했다. 고개를 마주 끄덕여 그를 배웅해준 노인은 다시 웨인에게로 시선을 되돌렸다.
“그보다 더 골치 아픈 문제가 있지.”
“예, 용잡이 팀의 던전 클리어 페이스가 너무 비정상적입니다. 마치 뭔가에 쫓기듯이 던전을 돌고 있는 상태죠. 키워주기 하는 유망주도 팀을 바꿔가면서 키워줘도 이보다는 널널하게 굴리는데, 용잡이 팀의 던전 클리어 페이스는 그 수준을 넘어섰습니다.”
“성장속도만 놓고 봐도 비정상적인데, 거기에서 던전 도는 페이스까지 더 끌어올린다라...이거 참, 비교 대상이랄 것도 없어서 뭐에 빗대어 말하기도 힘들군.”
“그가 팀을 꾸리기 전의 페이스도 정상적이라고 하기는 힘들었습니다. 그 뒤로 페이스를 늦추기는커녕 계속 끌어올리고 있는 상태입니다. 여태껏 사고가 터지지 않은 게 기적이죠. 솔직하게 말씀드리자면 저는 사고가 터지지 않은 게 더 불안합니다.”
류 현의 팀, 용잡이 팀의 던전 클리어 페이스는 말 그대로 비정상적이었다.
팀을 결성하고 그린까지 도달하는데 걸린 시간만 봐도 신기록 축에 들 정도였다. 그 뒤에 협상을 위해서 미국에 다녀간 이후 두 달간은 류 현을 제외하곤 조용히 지내더니, 갑자기 단체로 블루던전이니 블루 퍼플이니 요구하면서 닥치는 대로 클리어 하고 있는 것이다.
나흘에 두 곳이라는 보고도 믿긴 힘든 페이스로 말이다.
대형 길드에서 작정하고 밀어주는 유망주도 이런 페이스로 던전을 돌진 않는다. 길드 소속 팀이 돌아가면서 키워주는 것도 한계가 있을뿐더러, 유망주 본인이 버티지 못하기 때문이다. 수준 차이가 나는 이들이 버스를 태워주는 데도 이러할 진데, 용잡이 팀은 압도적인 실력자라고 해봐야 류 현 뿐이다.
더 놀라운 건 아무런 사고도 없었다는 점이었다. 아무리 플레이어의 재생력이나 면역력이 대단하더라도, 죽으려고 던전에 들어가는 게 아닌 이상 부상을 입으면 병원에 들르게 된다.
그런데 용잡이 팀에 소속되어 있는 셋 중 어느 누구도 지난 5주간 병원 진료기록이 아예 없는 상황. 블루와 블루 퍼플 던전을 계속 들락거리는 과정에서 아무런 부상도 입지 않았다는 소리다. 기록을 보고도 조작이라고 외치고 싶을 정도로 말도 안 되는 상황이었다.
그런 기록상으로만 보면 류 현의 팀은 이 말도 안 되는 페이스를 문제없이 소화하고 있다는 소리가 된다. 말이 안 되는 일이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상황.
노인은 고개를 내저었다.
“너무 페이스가 좋아서 문제라니. 거 참...”
“차라리 억지로 쥐어짜내서 페이스를 올린 거였다면 조언이라도 할 수 있겠습니다만...이래서야 그러기도 곤란하지요.”
그게 문제였다. 말도 안 되는 페이스를 유지하면서도 아무런 사고가 안 터지고 있다는 점.
그들이 보기에는 뜯어말려야하는 시점인데, 말릴만한 건덕지가 없다는 게 문제였다. 아무런 문제도 안 터졌는데 괜히 참견질 하기에는 협회와 그의 관계가 그렇게까지 가깝진 않았다.
“곤란한 일이야. 또 다른 에이스 카드가 될 수도 있는 인재가 폭주기관차 마냥 앞만 보고 달리는 걸 그냥 보고 있을 수도 없으니.”
“그렇다고 손 놓고 있을 수도 없지요.”
웨인은 침중한 어조로 덧붙였다.
“지금도 그렇긴 합니다만. 수준을 더 끌어올린다면 사고가 나면 그냥 몇 달 병원에 누워있는 걸로는 끝나지 않을 테니까요.”
현재 용잡이 팀은 나흘에 한 번 꼴로 던전사냥을 나서서, 그 하룻동안 두 곳을 클리어하고 있다. 블루 던전 한 번, 블루 퍼플 던전 한 번. 이제는 슬슬 한국 내에서는 던전 수급이 곤란해질 지경인 것이다. 블루 이상의 던전이 그렇게 흔한 건 아니니까. 한반도 면적을 생각해보면 지금의 던전 분포도 충분히 고밀도였다.
그런 상태에서 지금까지 해왔던 것처럼 단계를 올려서 한 번에 블루 퍼플만 두 곳 돈다고 가정을 한다면, 그 때 터지는 사고는 사고가 아니라 장례식으로 마무리될 가능성이 높았다. 블루 던전과 블루 퍼플을 병행해서 도는 지금도 충분히 위험했지만, 더 상위 던전을 두 번 도는 게 더 위험하다는 건 당연한 사실이다.
좌중은 침묵했다. 해결책이랄 게 딱히 없는 문제인데다가 자신들이 말을 보탤만한 처지도 아니기 때문이었다.
직접 던전을 돌아본, 그것도 현존하는 최상위 던전을 솔로플레이 해본 그만이 손대어 볼 시도라도 할 수 있을 테니까. 다른 의견을 내어봐야 부외자의 헛소리일 뿐이다.
“제가 직접 그를 만나보겠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설득할 자신은 없습니다만...아예 안 하는 것보다야 낫지 않겠습니까. 운이 좋다면 그러는 의도를 들을 수 있을 지도 모르고요.”
“그래 주겠나? 어째 자네한테 궂은 일만 맡기는 것 같아서 미안하네.”
웨인은 옅게 미소 지었다.
***
“엣취!”
시원스러운 재채기와 함께 장부에 7이라고 써내려가고 있던 볼펜이 위로 확 엇나가며 번개무늬를 그렸다. 류 현은 왼손으로 코끝을 문지르며, 오른손으로는 휴지를 찾았다. 화련이 그의 손에 휴지를 쥐여 주며 말했다.
“누가 마스터 욕을 하나보네요.”
“환절기라서 그런 겁니다.”
코를 한 번 풀고 화련을 올려다본 류 현은 표정에서 글자를 읽을 수 있다는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화련의 표정은 ‘당신 같은 괴물도 감기에 걸리느냐?’라고 묻고 있었다.
류 현은 미간을 찌푸리곤 나오지도 않은 질문에 대꾸했다.
“저도 사람이라서 걸립니다.”
“거짓말.”
류 현은 이어진 화련의 반문 아닌 반문에는 묵비권을 행사했다. 그가 다시 장부 작성에 집중하자 화련이 불평하듯 한마디 했다.
“그냥 대충 건당 얼마치면 안 돼요? 매번 사서 고생하시네.”
류 현이 하고 있는 건 자신의 위장 속으로 사라진 괴수 고기와 가죽 등의 대략적인 무게와 그 가격을 기입하고, 분배율에 따라서 그녀들의 몫을 기록하는 일이었다.
있지도 않은 부산물에 값을 책정하고 분배한다. 용잡이 팀 한정으로 화련의 말대로 사서 고생이라는 말이 딱 맞는 짓이었다.
하지만 류 현은 쓸모없는 짓이라곤 생각하진 않았다. 자신의 성장을 위해서 그녀들의 배려를 받았으니, 이런 수고 한 번 더 거쳐서 더 챙겨주는 건 그에게 있어서 당연한 일이었으니까.
“이런 건 처음부터 확실히 해야 서로 마음 상할 일 없습니다.”
애초에 화련의 제의가 받는 쪽에서 할 소리는 아니었다. 플레이어 팀 해체 원인 1순위가 분배문제였으니까.
화련도 그걸 모르는 건 아니었다. (그녀가 아는 한) 류 현보다 플레이어로 활동한 기간이 더 길었으니까. 분배 문제로 던전 다 돌고 나서 팀이 공중분해 되는 경우는 수도 없이 봤었다. 그 과정에서 헬퍼인 자신의 분배율이나 임금이 깎이는 황당한 경우도 겪어봤었다.
그 뒤로 그녀는 철저히 계약서상의 의무만 이행했고, 그 이상의 할 경 경우 변호사를 동원해서라도 제몫을 챙겼다.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누그러들기는 했지만, 원칙은 바뀌지 않았다. 길드라는 뒷배가 없었던 그녀는 필연적으로 그 문제에 민감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은 자기 몫을 깎아도 상관없다는 소리를 하고 있지만. 어디까지나 용잡이 팀 한정이었다. 팀장이 나서서 팀원들 더 챙겨주겠다고 있지도 않는 물건 가격을 시세 맞춰서 책정하고, 분배해주는 건 그녀가 알기로 이 팀뿐이었으니까.
“그런 거 말고 휴가나 좀 더 챙겨주지.”
“퍼플 던전 클리어 하고 나면 실컷 드리죠. 그것도 월 단위로.”
“이 악마. 차라리 죽을 때까지 휴가가 없다고 해요!”
둘이 티격태격하는 모습을 조용히 바라보던 희란은 키득키득 웃으며 창가로 시선을 옮겼다. 곧 그녀의 반쯤 감긴 눈이 크게 뜨여지더니 탄성이 터져 나왔다.
“아.”
“응? 왜 그래, 희란아?”
“눈이요. 눈.”
“눈? 어? 진짜네!”
화련은 곧바로 자신의 능력으로 두둥실 떠올라서 창가에 바짝 달라붙었다. 류 현도 창가로 시선을 돌렸다. 그곳에는 첫 눈이, 수줍은 듯이 창문에 조용히 내려앉고 있었다.
‘벌써 다시 겨울인건가. 시간 한 번 빠르네.’
화련과 희란이 수선을 떠는 모습을 바라보며 류 현은 조용히 미소 지으며 생각했다.
‘해 넘어가기 전에 둘이서만 블루 퍼플 던전 돌 수 있게 해봐야지.’
2036년 12월 1일. 첫눈과 함께 화련이 들었다면 거품 물고 기절했을 류 현의 팀원 육성계획이 결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