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0화 〉탐식마(貪食魔)
스스로 보지도 못했지만 화련은 자신의 감이 이끄는 대로 펄쩍 뛰어올랐다. 끈적하게 피부에 달라붙는 초록빛 안개가 그녀를 반겼다. 그 뒤 곧바로 능력을 사용해 몸을 띄운 그녀는 자신을 덮쳐들 예정이었던, 자신의 허리보다 더 굵은 나무 곤봉이 스쳐지나가는 것을 보았다.
콰앙! 곤봉으로 수면을 후려친 게 아니라 폭탄이 터진 듯한 소리와 함께 늪지가 뒤집혔다. 충격 때문에 주변에 빼곡히 들어찼던 녹색 안개가 확 물러났다. 늪지 바닥에 가라앉아 있던 고약한 것들도 물과 함께 솟구쳐 올랐다. 오우거가 먹다 남긴 썩다만 짐승의 머리, 내장과 늪지 바닥에서 어떻게 사는지 몰라도 독기와 함께 고약한 냄새를 뿜어내는 수초 등.
어느새 바닥에 내려앉은 화련은 그것들을 피하면서 자신의 뒤편에서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는 인영을 향해서 볼멘소리를 내뱉었다. 그냥 흘려보내는 소리가 아니라 명백한 의도를 담아서, 이 소란 속에서도 분명히 들을 수 있도록 크게.
“또 속았어!”
대꾸는 두 박자 늦게 들을 수 있었다. 그녀의 뒤편에서 얼쩡거리던 인영이, 잠시 솟구쳤다가 쏟아져 내리기 시작한 늪지의 비와 안개를 뚫고 들어왔다. 그리곤 그녀의 허리를 능숙한 동작으로 팔로 감고는 그 자리를 벗어나며 말했다.
화련은 그 손길을 거부하진 않았지만, 적극적으로 협조하지도 않았다. 뻣뻣한 그녀의 반응 때문에 류 현도 다시 되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또 뭐가 불만이라서 이러시는 겁니까. 휴식일도 따로 나흘 챙겨드렸잖습니까. 원래 휴식일 까지 해서 일주일. 충분하지 않습니까.”
그녀는 대꾸하지 않고 팔짱을 낀 채로, 자신을 옆구리에 끼고 달리는 남자의 옆얼굴을 노려볼 뿐이었다.
굳이 보지 않아도 입을 다문 그녀가 취할 행동이 예상 되었기에, 남자, 류 현은 그녀를 돌아보지 않은 채 앞을 향해서 소리쳤다.
“희란 씨!”
그의 부름에 응하듯 희란이 안개너머에서 뛰어나왔다. 안개와 늪지 물 때문에 그녀의 몰골도 말이 아니었다. 자신도 비슷한 상태일 거라는 걸 알고 있는 류 현은 거의 던지다시피 화련을 그녀에게 건네주고는 걸음을 멈췄다. 희란이 화련을 데리고 자리를 벗어나는 걸 보지도 않고 그는 몸을 돌렸다.
그리고 잔뜩 흥분한 채로 화련을 쫓아 그의 코앞까지 도달한 녹색 피부의 오우거를 바라봤다.
[크오오!]
‘진짜 너네도 지긋지긋하다. 별로 달라지는 것도 없으면서 색칠만 다르게 해서 아무데나 나타나냐.’
오우거와 싸워본 경험이 있는 플레이어가 들으면 기겁할 만한 소리였지만, 환경에 따라서 특수한 능력을 가지고 나타나는 오우거의 특성은 그에게 별다른 감흥을 주지 못했다. 무슨 타입의 던전이든 간에 오우거가 나타날 수도 있다는 게 짜증날 뿐.
더욱이 지금 그의 앞으로 달려들고 있는 오우거는 희란과 화련의 훈련 상대로도 부적합했다. 썩은 늪지에 초록색 피부를 가진 오우거라면 분명히 독을 품고 있는 개체라는 소리니까. 그녀들도 언젠가는 독을 품은 상위괴수와도 붙어봐야겠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화련과 희란에게 있어서 오늘이 첫 블루 퍼플 던전 도전이었으니까.
“...하필 나와도 이런 게 나오냐.”
입으로는 불평을 담으면서도 류 현은 조용히 마력을 긁어모았다. 그가 끌어 모은 마력이 각각 오른손과 왼손으로 몰려들었다. 그러는 동안에도 오우거의 그의 코앞까지 거리를 좁혀왔다.
[크와악!]
오우거는 시야 안에 류 현이 들어오자마자,
후웅! 곤봉을 있는 힘껏 내휘둘렀다. 그의 허리보다 더 굵은 곤봉이 날아드는 것을 바라보면서 류 현은 짧게 한숨을 몰아쉬었다. 그리고는 슬쩍 왼 주먹을 나무 곤봉을 향해서 내밀었다.
그 이상을 할 필요도 없었다. 나무 곤봉이 풍압만으로도 그를 날려버릴 기세로 날아들었다.
콰직! 콰광! 오우거는 전혀 인지하지 못했지만, 그의 왼 주먹에 곤봉은 꺾이는 게 아니라 안쪽에서부터 터져나갔다. 곤봉의 파편 때문에 시야가 어지러웠지만, 류 현은 가볍게 발을 굴러 위쪽으로 뛰어올랐다.
균형을 잃고 앞으로 고꾸라지고 있는 오우거의 머리 쪽을 향해서. 몸 쪽으로 잔뜩 끌어당긴 오른 주먹을 장전 한 채로.
그리고,
뻐엉! 단말마는 없었다. 가죽 북을 찢어져라 후려친 듯한 소리가 터짐과 오우거의 머리통이 터져나갔다. 동시에 사방으로 비릿한 혈향과 피륙이 비산했다.
한주먹에 오우거의 머리를 터뜨린 위업에 아무런 감흥도 없는지 류 현은 무덤덤한 얼굴로 바닥에 착지했다. 그보다 뒤늦게, 쿠웅! 오우거의 거체가 땅에 몸을 눕혔다. 어찌나 충격량이 컸는지 앞으로 고꾸라지던 오우거는 뒤로 벌렁 드러누운 채였다.
“아, 씨. 입에 들어왔어.”
침과 함께 늪지 물을 탁 뱉은 류 현은 오우거의 시체에는 관심도 주지 않고, 희란이 사라진 방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
“첫 날부터 블루 퍼플에 끌고 갈 거라고는 안하셨잖아요?”
“...끌고 간다니 꼭 그렇게 표현하셔야 겠습니까.”
그 외에는 딴죽을 걸어봐야 역으로 깨질 게 뻔했기에 그가 항의할 수 있는 건 그런 부분뿐이었다. 류 현은 자신이 말해놓고도 참 구차한 항의라고 생각했다.
“다른 걸로 말 없으신 거 보니까. 마스터 스스로도 심했다는 건 아시는 모양이네요. 그렇게 잘 아시는 분이, 어떻게 블루 던전 네 번 돈 게 전부인 팀원을 첫날부터 블루 퍼플 던전에 끌고 올 수 있죠?”
류 현은 다시 그 ‘끌고 온다.’라는 표현에 대해서 말을 해볼까 하다가 이내 포기했다. 팔짱을 낀 채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화련의 눈초리가 너무 매서웠다. 이번에는 희란도 말리지 않고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기만 했다. 뭔가 배신당한 것 같은 기분이 들었지만 류 현은 애써 떨쳐내었다.
‘설마하니 도와주겠다는 말은 안 무르겠지...?’
그녀의 성격상 이미 뱉은 말을 무를 리는 없을 테지만, 기껏 팀원들의 이해를 얻고 원만하게 성장을 꾀할 수 있는 기회를 제 발로 차고 싶진 않았으니까.
류 현은 대신 미리 짜두었던 변명을 꺼내들기로 했다.
“그게, 근처에 가장 가까운 블루 던전은 2시간 거리에 있어서요. 협회에서 받은 지도가 있으니까. 나가서 확인해 보시면 아시게 될 겁니다.”
그건 사실이었다. 오늘 첫 번째로 돈 블루 던전 근처에는 지금 그들이 들어와 있는 블루 퍼플 던전을 제외하면 블루 이상 급의 던전이 전무했다. 그걸 알고 류 현은 일부러 행선지를 이리로 골랐지만, 그 사실은 쏙 빼놓고 말했다. 지도도 당연히 이 주변 것 외에는 들고 오지 않았다.
아무런 사고도 없었는데 굳이 불꽃이 튈만한 단서를 줄 필요는 없으니까.
“그래요?”
근처에 마땅한 블루 던전이 없어서 그랬다는 변명에는 그녀도 별 수 없는지 화련의 눈초리가 누그러졌다. 그녀는 팔짱을 풀더니 갑자기 뒤로 쓰러졌다. 희란이 가뿐하게 그녀를 받아내었다.
“으으, 피곤해 죽겠어. 희란아, 우리 마스터 너무 막 굴리지 않니?”
“...다 들립니다만.”
“들으라고 하는 소리에요. 근처에 블루 던전 없다고, 블루 던전 돈지도 얼마 안 된 팀원들 데리고 블루 퍼플 들어가는 사람은 마스터 밖에 없을 거에요. 마스터가 어엄청 대단해서 블루 퍼플도 혼자 씹어먹을 수 있는 건 잘 알겠는데, 저희 둘은 지극히 평범한 플레이어거든요? 다 마스터 같다고 생각하면 큰일 난다고요. 그치 희란아?”
희란은 류 현의 눈치를 한 번 살피더니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그 모습을 보고 류 현은 기가 막혔다. 다름 아닌 화련이 둘을 평범한 플레이어라고 칭하는 부분이.
‘오렌지 수준에서 지지부진 하던 플레이어가 벽 깨고 반년 만에 이렇게 성장해놓고는 평범?’
가지고 있는 능력을 제쳐놓더라도 그 성장속도만 봐도 둘은 이미 유망주 수준을 넘어섰다. 오늘 퍼플 블루에서는 경험이 모자라 그의 조력을 받아야 했지만, 블루 던전은 이제 아주 가지고 노는 수준이다. 눈보숭이가 보스몹일 경우에는 화련은 아주 눈 감고도 혼자서 보스를 요리할 수 있을 정도였다.
‘나야 재 각성 하면서 마력이 어느 정도 돌아왔다지만, 저 둘은 진짜...’
천재라고 불리기에 충분한 성장 속도였다.
그렇다고 힘만 키우고 있느냐면 그것도 아니었다. 던전을 한 번 돌고 나서 주어지는 사흘간의 휴식기간 동안 그녀들은 틈틈이 만나서, 전에 말한 포탈에 대한 연구를 계속하고 있는 상태였다. 요즘은 류 현에게 실험에 나서달라고 도움을 요청할 정도.
‘보통이 아닌 줄은 알았지만 이 정도일 줄은...’
희란과 화련이 그의 수련을 위해서 던전을 두 번 가주기로 한 첫날. 오늘, 반쯤 억지로 퍼플 블루에 데리고 들어온 건, 정말 말 그대로 경험을 늘려주기 위해서였다.
그런데도 두 사람은 보스몹인 오우거를 제외하고 던전 내의 다른 괴수들을 상대로도 충분히 대처해내었다. 중간부터 두 사람의 마력이 동이 나 그의 마력을 퍼다 쓰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대처능력이 빛이 바라는 건 아니었다. 오우거도 장기전으로 돌입했다면 잡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사고를 바라지 않았던 류 현이 직접 처리한 것이다.
아무래도 오늘 두 번째 던전 사냥이고, 처음 보는 보스몹을 상대로 피로가 쌓였을 그녀들을 붙이는 건 영 불안했던 것이다. 보스룸 문이 늪 밑에 있는 지랄 맞은 구조 때문에, 화련이 오우거와 맞부딪힐 뻔 하기도 했지만 무사히 끝난 것이다.
돌이켜보면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아이템 빨로 누른 것도 아니고, 오늘 처음 블루 퍼플에 들어와 보는 두 여자가 던전내부를 청소하다니. 류 현은 새삼 둘의 천재성에 소름이 돋았다.
“응? 왜 그래요, 마스터. 제 얼굴에 뭐 묻었어요?”
저도 모르게 두 사람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던 류 현의 시선을 눈치 챈 화련이 물어왔다. 그는 픽 웃으면서 대꾸했다. 방금 전 화련에게 당한 걸 갚아주는 의미에서, 조금 장난기를 담아.
“글쎄요. 안 묻은 곳을 찾는 게 더 빠르지 않을까요?”
“아, 진짜 좀 불평했다고 쪼잔하게 이러기에요!”
화련의 새된 목소리가 늪지에 울려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