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9화 〉탐식마(貪食魔)
사실 희란은 어렴풋이 눈치 채고 있었다. 능력을 각성하고 류 현과 다시 만났을 때, 그에게 처음으로 능력을 사용한 그 때부터. 그의 안에 움트고 있는 것이 플레이어들과 다른 무언가라는 걸 눈치 채고 있었다.
그녀의 능력은 양극을 연결하고 그 사이를 이어주는 파이프라인이 되어주면서, 동시에 양극이 서로의 힘에 반발하지 않도록 만들어주는 필터역할도 겸하는 것이다. 필터역할을 하는 건 제쳐두더라도, 이런 능력의 대상이 된 같은 팀 동료의 마력 성질에 대해서는 누구보다 잘 알 수밖에 없다.
그리고 지난 반 년 간 매일 같이는 아니어도, 수십 번 류 현과 연결되어봤던 희란은 본인 다음으로 그의 마력성질에 대해서 잘 알 수밖에 없다. 류 현이 그런 계통의 능력이 아니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희란이 가장 잘 안다고 해도 무방하겠지.
희란이 첫 연결 이후 줄기차게 그와 연결할 때마다 받은 느낌은 탐욕스러움이었다. 그렇게 많은 마력을 가지고 있음에도, 그의 내부에는 주변을 전부 빨아들일 듯한 탐욕스러움이 존재했다. 마치 살아있지도 않은 마력 덩어리가 살아있는 것처럼, 연결을 시도할 때마다 그녀를 향해서 탐욕을 드러내며 으르렁거렸다.
다른 플레이어와 연결해 본 적이 없다면, 그냥 당연한 것이라고 넘겼겠지만. 그녀에게는 몇 번 되지 않아도 다른 플레이어와 연결해 본 경험이 있었다. 각성 직후 검사를 받으면서 플레이어 협회 소속 공무원과 해보았고, 가장 많이 연결해본 화련과 요 두 달 사이에 수련하면서 매일 같이 연결했던 백혜라나, 나승하 등.
어느 누구도 류 현과 연결할 때처럼 마력자체에서 그런 탐욕스러움은 느낄 수 없었다.
물론 그 탐욕스러움이 그녀를 해하는 일은 없었다. 류 현은 희란이 연결을 할 때마다 그녀 쪽으로 흘러 보내는 마력량은 물론이고, 그 탐욕까지 단호하게 억눌러왔으니까.
거기에 희란은 화련이 어떤 식으로 벽을 깼는지, 어쩌다가 용잡이 팀에 들어오게 되었는지도 들었다.
화련은 초반에 기절해버려서 잘 모르겠다는 식으로 말했지만, 그 초반 묘사만으로도 희란은 대강 어떤 식으로 류 현이 화련에게 마력을 나누어주었는지 알 수 있었다. 그런 거야 말로 그녀의 전문이었으니까. 희란은 그가 얼마나 고생스러웠을지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리고 앞서 언급된 반 년 동안 반복된 절제와 배려. 첫 만남 때의 기억. 신뢰가 쌓이기에는 충분했다. 적어도 그녀에겐 충분했다. 앞뒤가 다 잘려서 괴상하게 들리긴 했지만, 그녀의 발언은 거짓하나 없는 진심이었다.
류 현이 쉽사리 손을 빼지도 못하고 잡힌 채로 어물거리고 있는 것도 그 때문이었다. 갑자기 왜 이러는지 모르겠지만, 희란이 장난으로 이러는 것 같지는 않았으니까.
“영혼의 교감 나누는 와중에 죄송하지만요. 마스터.”
그런 류 현에게 화련이 구원의 손길을 뻗쳐왔다. 화련은 자연스럽게 맞잡은 손을 갈라놓은 후에, 흥분상태인 희란을 자리에 앉혀놓고는 말했다.
“마스터의 능력에 대해서는 잘 알겠어요. 뭔가 더 있는 거 같지만...앞에서 아는 범위 내라고 못 박으셨으니 캐물을 수도 없겠네요. 그럼, 다른 걸 묻고 싶은데...”
희란의 손아귀에서 벗어난 류 현은 속으로 가슴을 쓸어내리며 대꾸했다. 그녀가 뭘 묻든 간에 대답해주고 싶은 기분이었다.
“말씀하시죠.”
“어째서 지금이죠?”
“질문의 의도를 잘 모르겠습니다만...”
이런 질문을 던지는 게 썩 내키지 않았기에 화련은 류 현의 시선을 살짝 피했다. 그렇다고 그냥 넘어가기에는 영 찝찝했으니 묻지 않을 수 없었다. 희란이 이런 질문을 할 리가 없으니 그녀의 몫인 것이다.
“비꼬는 건 아니니까. 기분 나쁘게 듣지 않으셨으면 좋겠어요.”
“예, 그러죠.”
“마스터의 성장 속도를 볼 때, 우리 둘 이랑 돌고 따로 던전 도신 건 맞죠? 사먹는 건 의미가 없다고 하셨으니 까요.”
“네, 본의 아니게 속이게 됐지만, 그 부분에 대해서는 죄송하게...”
“아, 아뇨. 그런 말을 들으려는 게 아니라니까요. 그러니까, 제가 하고 싶은 말은...여태껏 아무 문제없이 혼자서 잘 진행하시다가 갑자기 이렇게 밝히는 이유가 궁금하다는 거에요.”
류 현은 아무 말 없이 화련을 빤히 바라보았다. 질문의 의도가 어처구니없어서가 아니라 의외의 반응이었기 때문이었다.
‘화를 안내내?’
류 현은 희란의 반응에 대해서도 걱정했지만, 화련이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 대해서는 추측을 아예 포기했었다. 팀 창설 이유에 대해서 얼렁뚱땅 속여 넘기려다가 실패했을 당시를 생각해보면, 자신의 추측이 별로 믿을 만한 게 못 된다는 걸 여실히 알 수 있었으니까. 그리고 화련의 변화무쌍한 성격도 한 몫을 했다.
하지만 그런 그도 몰래 몰래 혼자 던전을 추가로 출입했다는 걸 알면 그녀가 호의적인 반응을 보이지 않을 거라는 사실 정도는 추론해 낼 수 있었다. 도대체 왜 그녀가 거기에 대해서 화내는 지에 대해서는 설명할 수 없었지만.
그런 그의 예상을 깨고 화련은 굉장히 침착한 태도로 그에게 질문하고 있었다. 크나큰 곤욕을 예상했던 류 현은 기꺼운 마음으로 질문에 응하기로 했다.
“이제 와서 제가 이런 소리 하면 웃기게 들리실 지도 모르겠지만, 계속 숨길 생각은 없었습니다. 제 능력이 같은 팀 동료에게 숨길 정도로 비밀을 요하는 능력도 아니고요. 일이 자꾸 생겨서 어쩌다보니 이렇게 미뤄진 거지요.”
“그렇다곤 해도 굳이 이 시점으로 고른 이유가 있으실 거 아니에요?”
“왜 지금이냐고 물으신다면...슬슬 저도 제 능력을 따로 수련하기 버거워져서 라고 답해야겠군요.”
“...수련이요?”
두 여자의 고개가 동시에 기울어졌다. 류 현은 쓰게 웃으며 다시 ‘가방’을 조작해서 이번에는 라가 챔피언의 머리통을 꺼내놓았다.
심장을 터뜨려서 잡은 개체였기에 머리통 자체는 말끔했다. 너무 멀쩡해서 시퍼렇게 뜨여진, 실핏줄이 다 터져나간 눈이 섬뜩했다. 희란이 그걸 보고서 찔끔했지만, 이전처럼 뒷걸음치다가 뒤로 넘어지거나 하진 않았다.
“앞서 제가 알고 있는 능력 범위 내에서는 제 능력이 괴수를 먹어서 마력으로 치환하는 거라고 말씀 드렸었지요.”
“네에, 그러셨죠.”
“그리고 이건 며칠 전에 새로 얻은 아니, 깨우친 능력입니다.”
류 현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그가 들어 올린 왼손에서 갑자기 검은 그림자 같은 것이 일렁거리기 시작했다. 희란과 화련이 기겁하기도 전에 류 현은 그 왼손을 라가 챔피언의 머리로 옮겼다.
그러자,
쩌적! 푸스스! 공사현장에서 쓰이는 해머로 내려쳐도 찌그러지지 않을 라가 챔피언의 머리통이, 닿은 부분부터 급격히 메말라가기 시작하더니 급기야 뼈를 드러내고 내려앉기 시작했다.
뼈가 내려앉기 시작한 부위는 얼마 안가 뼛가루를 흩날리기 시작했고, 닿지 않은 부위도 피부와 근육 순으로 말라갔다. 거칠 것 없다는 듯이 머리통 전체로 기현상이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5분이 채 되지도 않는 짧은 시간 만에 라가 챔피언의 머리통은 한줌의 재가 되었다. 류 현은 입을 반쯤 벌리고 그 광경을 멍청하게 보고 있는 두 여자를 곁눈질로 살피고는 재를 정리했다.
그는 다시 왼손을 들어 올려 그녀들의 눈앞에 들이밀고는 말했다.
“임시로 에너지 드레인이라고 이름 붙여둔 능력입니다. 깨우친 지 일주일도 안 된 터라 확언하기는 좀 그렇습니다만, 보신 대로 대상의 생기까지 마력으로 전환해서 흡수하는 듯합니다.”
담담하게 이전 생에 이미 마스터했던 능력을 처음 알았다는 듯이 말하는 류 현을 보며, 화련은 어처구니가 없어지는 감각이 뭔지 알 것 같은 기분이었다.
물론 그의 거짓말을 알아차린 건 아니었다. 그녀는 처음으로 믿지도 않는 신에게 엿을 날려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무슨 이딴 사기캐가...’
순간 억울함마저 느꼈지만, 화련은 다 년간 단련해 온 인내심으로 억눌렀다. 쓸데없는 투덜거림 보다는 묻고 싶은 게 많았다.
“살아있는 괴수한테 써 보셨어요?”
“예.”
“효과는요? 설마 방어막 무시가 되던가요?”
“아쉽게도 방어막을 완전히 무시는 못했습니다. 방어막 자체는 흡수가 가능했지만요. 접촉을 하면 방금 전 같은 효과를 낼 수 있긴 했습니다만, 방금 보신 것처럼은 안 되더군요.”
‘이런 미친...!’
점입가경이었다.
류 현의 팀이 가진 역량이나 장비가 특출 나서 그렇지, 보통 팀들은 보스를 상대하기 전에 마법이나 염동력 같은 화력 좋은 능력으로 괴수의 방어막을 소모시킨 후에 전투에 들어간다. 근접계열들이 아무리 한 점 집중해서 공격을 해도, 쌩생한 보스 방어막을 뚫고 타격을 주기란 쉽지 않기 때문이다. 돌려 깎기가 기본 전술인데 상처 내는 것부터가 안 되면 전술이고 뭐고 소용없으니까.
그 때문에 성격이 지랄 맞은 플레이어들 중에서도, 유독 지랄 맞은 인간들이 몰려있는 포지션인 마법사들이 그 성격에도 불구하고 대접받을 수 있는 것이다. 그린 이상만 되도 화력 지원 없이 보스를 잡는 게 사실상 불가능해지니까.
아예 불가능하진 않지만 보스몹 상대로 체력 싸움할 정도로 길게 싸우고 싶어 하는 이는 없다. 차라리 성격지랄 맞은 동료를 감수하는 쪽을 택하지.
류 현이 일주일 전쯤에 깨우쳤다고 보여준 능력은 그 화력담당 조차 필요 없게 만드는 것이다. 마법으로 폭격을 때리면 동료가 맞을 수도 있고, 아예 허공에서 터져서 힘만 빼는 경우도 있지만 그가 보여준 에너지 드레인은 그럴 건덕지가 없어보였으니까.
붙어서 써야한다는 부담이 있지만, 좋은 무기 다 거절하고 주먹을 주로 쓰는 인간이 그런 걸 부담이라고 생각하는 게 이상한 일이다. 모르긴 몰라도 그냥 평소처럼 괴수를 쥐어 패면서 쓰면 될 것이다.
‘진짜 혼자서 다 해먹으라고 누가 짜 준거 같네.’
오죽하면 그런 생각마저 들었다.
그런 화련의 상념을 류 현의 목소리가 끊어내었다.
“하지만 효율이 영 형편없는 수준입니다. 방금 빨아들인 머리통에서도 빨아들인 마력보다 쓴 마력이 더 많을 정도니까요.”
“그 정도인가요?”
“얻은 지 얼마 안 돼서 그런 걸 수도 있겠습니다만, 솔직히 여기서 효율이 더 늘어난다고 해도 대형 괴수 상대할 때 빼고는 써먹기가 어려울 것 같군요.”
실제로 이전 생에서 네임드 괴수들을 상대로 상당히 유용하게 써먹었었다. 압도적인 마력량으로 다 때려 부수는 지금 당장이야 효율도 안 나고 별 쓸모없는 능력이지만, 마력량만으로 방어를 뚫기 힘든 적을 상대할 때 필수적인 능력이다.
아지다하카의 말도 안 되는 방어력을 뚫어낸 것도, 그 몸에서 뿜어지는 독기를 싸움동안 버텨낸 것도 이 ‘에너지 드레인’의 공로가 컸다. 당장의 효율 문제를 따질 게 아니라 최우선적으로 숙련도를 높여야하는 능력인 것이다.
“그럼...”
“예, 이 기술을 계속 써먹으려면 저도 꽤 소모를 감수해야하는 데, 그렇게 되면 두 분께 숨겨가면서 따로 던전 돌 여력이 안날 거 같아서요. 그렇다고 두 번째 도는 때에 이 기술만 수련하자니 마력량 늘리기도 요원하고요.”
에너지 드레인의 수련은 필수적이지만, 그렇다고 마력량을 늘리는 걸 소홀히 할 수도 없다. 에너지 드레인도 결국 마력량에 영향을 받으니까. 에너지 드레인이 끝도 아니고, 다음 단계로 나아가기 위해서도 괴수를 먹는 건 멈출 수가 없다.
화련은 아무것도 걸리는 게 없는 턱을 몇 번 매만지며 생각하더니 물었다.
“그럼 분배는 이전 계약서처럼 가는 건가요.”
“예.”
화련은 다시 고개를 끄덕끄덕하면서 고심하는 듯하다가, 이내 입을 떼었다.
“좋아요. 그럼 분배는 유지하고, 저희도 던전 가는 날에 한 번이 아니라 두 번 가는 걸로 하죠. 좀 빡세긴 하겠지만, 그래야 마스터 손해도 메워질 테니까요. 희란아, 괜찮겠니?”
희란은 기다렸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녀가 사태를 파악하고 이러는 것인지 화련도 의문스러웠지만, 원하는 대답을 얻어낸 화련은 개의치 않고 류 현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는 갑작스러운 두 여자의 공동 합의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하루에 던전을 두 번 들어가는 일은 법으로 금지된 건 아니지만, 플레이어들 사이에서는 금기다. 던전을 들어가는 순간 발생하는 피로도와 마력 손실 때문에 할 수 있는 이도 드물지만, 할 수 있는 이들도 하지 않는다. 플레이어 협회에서도 이에 대한 교육을 매분기마다 실시할 정도다.
그런데도 그녀들은 굳이 그와 어울려주겠다고 나선 것이다. 계약서에 명시된 사항도 아님에도.
“괜찮으시죠?”
하지만 기분 좋은 오산이었기에 류 현은 상쾌한 기분으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두 분의 배려. 감사히 받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