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7화 〉탐식마(貪食魔)
“두 분 다 왜 그러시는지? 안색이 좋지 않습니다만. 어디 아프십니까?”
얼굴색이 시커멓게 죽어가는 두 여자에게 류 현이 천연덕스럽게 물었다. 자신이 생각해도 엄청난 강행군이다. 자신과 그녀들이 어느 수준까지 도달하는지 알고 있는 그도 좀 무리가 아닐까 하고 생각하는 판인데, 아무것도 모르는 그녀들이 이렇게 반응하는 건 당연한 일이다.
화련은 그가 농담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지, 대놓고 그의 코앞까지 얼굴을 들이밀고 표정을 살폈다. 결국 그의 얼굴에서 아무런 추론거리도 찾아내지 못했지만.
화련이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입을 꾹 다물고 그를 바라보자, 결국 희란이 나서는 수밖에 없었다.
“마스터...그게요.”
“예, 말씀하시죠.”
“조, 좀...무리가 아닐까요? 언니랑 저는 아직 블루 던전도 못 가봤고...”
“검성...아니, 승하 씨와 혜라 씨에게서 두 분의 훈련 진전을 들었습니다. 두 분 다 블루 던전에 들어갈 준비는 충분히 되어있다더군요.”
“그, 그래도...”
희란과 화련도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본인들에게 그런 말을 안 해주고 류 현에게만 해줄 정도로 그녀들은 몰상식하진 않았다. 정작 본인들은 별로 실감하지 못하는 바였지만, 화련과 희란은 검성으로 부터 블루 던전을 클리어 할 역량이 있다고 이미 검증 받은 상태였다.
역대 급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엄청난 성장속도였다.
그렇다고 삼 주 안에 블루 던전을 떼고, 한 달 동안 블루 퍼플에서 구른 뒤에 퍼플 던전에 도전하겠다는 류 현의 계획에 따라갈 수 있다는 소리는 아니었다.
류 현은 머뭇거리는 희란을 앞에 두고 미소 지으면서 입술에 살짝 침을 발랐다.
“많이 부담되시는 가 보군요. 그럼, 조건을 거는 건 어떻겠습니까?”
“...무슨 조건이요?”
입을 꾹 다문 채 그의 표정변화만 살피던 화련이 그제야 입을 열었다. 그녀는 여전히 그의 표정변화에 집중하고 있었다. 약장수에게 사기 당하고, 다른 약장수를 만난 이 같았다. 절대 속아 넘어가지 않겠다는 의지가 눈에 읽힐 정도였다.
하지만 사기꾼에게 속지 않는 가장 현명한 방법은 아예 대화를 하지 않는 것이라는 걸 그녀는 몰랐다.
류 현은 속으로 미소 지었다. 그는 자신의 제안을 그녀들이 절대 거부하지 못할 거라는 걸 확신했다. 자신도 비슷한 방식으로 속아본 경험이 있었으니까. 찝찝한 기억은 아니었고, 유쾌한 속임수였다.
“마침 개척된 블루 던전이 괜찮은 게 하나 제 몫으로 떨어져 있거든요. 그 블루 던전 보스를 두 분이서 상대해보는 겁니다. 물론 저도 그 자리에 있을 겁니다만, 도와드리진 않을 겁니다. 마력을 포함해서 모든 도움을 말입니다. 두 분이서 상대하는 데 성공하면, 제 계획대로 하는 거고, 작은 부상이라도 입을 시에는 계획을 즉각 철회하겠습니다.”
화련의 성격상 계획에 따르기 싫다고 대충 상대하는 일 따위는 없을 것이다. 그리고 화련이 본격적으로 나서면 희란은 싫어도 화련의 안위를 위해서라도 실력을 내는 수밖에 없다.
승하와 혜라로부터 들은 팁이었다. 희란의 소극성을 뜯어고치려면 이렇게 유도하는 게 좋을 거라고. 아니, 이렇게 해야 할 거라고 했다. 아직까지 희란이 그런 문제를 일으킨 적이 없기에 과한 걱정이라고 생각했지만, 써먹지 않을 이유도 없다.
사기꾼 보듯이 류 현을 뜯어보던 화련의 표정이 조금 누그러졌다.
“진짜에요? 사기 치는 거 아니죠?”
“제가 뭐 하러 두 분한테 사기를 치겠습니까. 이런 걸로 사기 쳐봐야 무슨 이득이 있다고요.”
화련은 콧잔등만 만지작거리며 잠시간 말이 없었다. 그러다가 그녀는 옆자리에 앉아있던 희란을 돌아보고는 서로를 향해서 고개를 끄덕했다. 화련이 대표로 입을 열었다.
“좋아요. 그렇게 하죠. 그런데 언제요?”“바쁜 일이 없으시다면 내일 어떠십니까?”
화련은 벌써부터 뭔가 속은 느낌이 들었지만 애써 찝찝함을 떨쳐내었다. 설마 굴려봐야 죽기야 하겠어 하고.
***
“사기 당했어!”
말소리가 다 울려 퍼지기도 전에 화련은 있는 힘껏 위로 뛰어올랐다. 혼자가 아닌 둘이서. 아니, 뛰어 올랐다기보다도, 날아올랐다고 해야 할 것이다.
후웅! 그러기 무섭게 화련의 발밑으로 생나무가 후려치고 지나갔다. 가뿐하게 피해낸 화련은 나무를 뿌리 채 휘두른 라가 챔피언과 눈이 마주쳤다. 보통 사람 같으면 그 자리에 주저앉을 살의가 그녀를 덮쳐들었지만, 그녀는 콧방귀만 뀔 뿐이었다.
그 때 그녀의 오른팔에 안겨있던 희란이 소리쳤다.
“언니!”
“알고 있어!”
화련의 눈동자에 기이한 하얀 빛이 어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쉬익!
두 여자가 낚시에 채인 물고기처럼 순식간에 라가 챔피언 뒤편으로 날려갔다. 너무 과해서 움직이는 게 불편해 보이기까지 한 근육질 등판으로 시야가 가득 찼다.
화련은 이동을 인지한 순간 희란의 허리를 휘감고 있던 팔을 풀고, 오른손으로 희란의 등판을 강하게, 팡! 소리 나게 쳤다.
“Go!”
그 말이 신호탄이었다. 희란이 허공에서 화살처럼 뛰쳐나갔다.
희란은 날아가는 와중에 침착하게 자신의 왼쪽 허리춤에 매달아놓은 작은 원통 뚜껑을 비틀었다. 그 안에서 짧은 단창을 하나 꺼낸 희란은 오른손에 마력을 집중하기 시작했다. 부웅! 단창이 황금빛을 내뿜으며 진동하기 시작했다. 그러는 동안에도 거리는 점점 더 좁혀지고 있었다.
[크륵?]
라가 챔피언이 뒤늦게 고개만이라도 돌렸지만 이미 늦은 상황이었다.
그 잠깐의 틈도 희란이 이미 라가 챔피언의 등판에 도달하기에 충분했으니까. 라가 챔피언의 등과 부딪히기 직전, 희란은 있는 힘껏 단창을 내찔렀다! 푸욱!
[키이익!]
특이한 빛깔을 띠고 있는 것 외에는 특별할 것이 없어 보이는 단창은, 라가 챔피언의 두터운 근육층을 뚫고, 갈비뼈를 피해서 정확하게 심장에 도달했다. 길이가 부족했기에 완전히 꿰뚫지는 못했다.
단단한 상위 괴수의 몸을 뚫은 것은 무기의 공이겠지만, 정확하게 심장을 겨눈 것은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기 힘든 솜씨.
물론, 관통상만으로는 상위 괴수의 질기디 질긴 명을 끊어놓기에는 부족했다. 라가 챔피언의 거대한 몸에 비하면 단창은 바늘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으니까. 지금도 라가 챔피언의 심장은 격렬하게 뛰고 있었다. 희란은 단창을 매개로 그 고동을 그대로 느낄 수 있었다. 인간이라면 이런 식으로도 죽을 수 있겠지만, 괴수는 그렇지 않다.
그걸 잘 알고 있는 희란은 손으로 잡고 있기에도 곤란할 정도로 깊이 박힌 단창을 쥔 채, 다시 마력을 집중해서 단창으로 흘려 넣었다.
부우웅! 라가 챔피언의 몸에 박힌 상태에도 계속되던 단창의 진동이 격렬해졌다. 손아귀에 있는 힘없는 힘 쥐어짜내서 단창을 붙잡고 있던 희란이 놓칠 정도로. 단창을 놓치자 희란은 자연스럽게 라가 챔피언의 등판에서 떨어지게 되었다.
그런 그녀를,
우웅! 화련이 다시금 마법으로 받아내었다. 우주공간에 내던져 진 것처럼 둥실 떠오른 희란은, 자신의 의지와 별개로 화련에게로 날아와 그녀의 옆에 서게 되었다. 그러는 동안에도 라가 챔피언의 등판에 꽂힌 단창의 진동은 한계를 모르고 격렬해지고 있었다.
[크라악! 크이익!]
그에 비례하게 라가 챔피언의 괴성도 점점 커져갔다. 진동 때문에 창에 꽂힌 부분 근처 근육들이 울렁거릴 정도가 되었을 때. 퍽! 하고 라가 챔피언 안에서 물풍선 터지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와 동시에 괴성도 끊어졌다. 말 그대로 맥이 끊겨버린 것처럼.
쿵! 산맥처럼 굳건하던 라가 챔피언의 몸이 앞으로 고꾸라졌다. 그리고는 미동조차 없었다. 단창이 꽂혀있는 등 부분에서 부터 번져나가는 핏자국만이 라가 챔피언이 입은 타격을 짐작케 했다. 사인은 심장파열. 볼 것도 없이 즉사다.
하지만 잡기 어려운 괴수를 잡은 것 치고, 라가 챔피언의 사체를 내려다보는 화련의 시선은 싸늘하기 그지없었다. 별다른 기쁨의 기색이 느껴지지 않는 건, 위업을 달성한 희란도 마찬가지였다.
그 때 부스럭거리며 인기척이 그녀들에게로 다가왔다. 화련은 굳이 보지 않아도 인기척의 정체를 알고 있었지만, 자신의 목적을 위해서 인기척이 나타난 방향을 돌아보았다. 그리곤 말했다.
“진짜 사기 당했어. 사기꾼.”
“아니 제가 무슨 사기를 쳤다고 그러십니까.”
냉기마저 느껴지던 표정에서 볼에 바람을 반쯤 넣다만 부루퉁한 표정으로 바꾼 화련은 다시금 힘주어서 말했다. 자신의 마스터를 향해서.
“사기꾼.”
“화련 씨가 동의 하셔놓고 무슨 사기입니까. 제가 두 분을 속여서 무슨 이득 본 게 있습니까? 아니, 이번 건에 대해서 속인 게 있긴 합니까?”
화련은 듣지 않겠다는 듯이 고개를 홱 돌렸다. 희란이 뒤늦게 보태었다.
“...너무하세요. 마스터.”
“봐요. 희란이도 그렇다잖아요.”
“제가 뭘 심하게 했다고...두 분 다 동의 하신 일 아닙니까.”
사실이었기에 두 여자는 대꾸하지 않았다. 하지만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그녀들의 마스터를 지긋이 바라보는 건 포기하지 않았다.
결국 류 현은 당근을 제시하는 수밖에 없었다.
“알겠습니다. 정 그러시면 오늘부터 나흘간 휴식기간을 갖기로 하죠. 됐습니까?”
두 여자는 짜기라도 한 듯이 동시에 히죽거리기 시작했다.
***
고약한 암모니아 냄새가 코를 찔렀다. 비위가 약한 사람이라면 구역질을 하고 남을 수준이었지만, 화련은 태연했다. 지금 그녀의 몸에서도 절대 좋은 냄새는 나지 않을 테고, 이번 주 내내 라가 챔피언과 주술사를 번갈아가면서 잡으면서 저 피 냄새에 익숙해진 탓이었다.
화련의 관심사는 이제 조금 불쾌하고 말 정도로 적응된 피 냄새가 아니라, 라가 챔피언 사체 앞에 웅크리고 앉아있는 남자였다.
류 현은 분주하게 손을 놀리며 라가 챔피언을 해체하고 있었다. 공기 중에 노출되면 강한 암모니아 냄새를 풍기는 피 때문에, 해체를 느긋하게 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대체 언제부터 이런 훈련 매뉴얼을 짜놓은 걸까?’
류 현의 등을 바라보며 화련은 생각했다. 류 현의 제안에 속아서 팔자에 없다고 생각한 블루 던전을 전전하기 시작한지 이 주째. 화련과 희란은 다치기는커녕, 아무런 위기도 없이 블루 던전의 수준에 적응했다.
본인들 스스로도 어처구니가 없다 못해, 가끔 볼을 꼬집어 볼 정도였다.
그녀들의 첫 번째 블루 던전의 보스몹은 눈보숭이였다. 완전 환수타입이라는 류 현의 설명을 듣자마자, 화련과 희란은 마스터가 옆에서 보고 있어도 까딱하면 골로 가겠구나 하고 바짝 긴장했지만, 직접 붙어본 결과는 쾌승 그 자체였다.
희란이 눈보숭이 본체를 찾아내고, 화련이 의체를 적당히 상대하는 사이에 희란이 본체를 공격하자 전투는 너무 싱겁게 끝나버렸다. 그 때도 ‘공방’에서 보급 받은 단창이 큰 역할을 해주었다. 아직까지 숨통을 끊을 만한 기술이 없는 그녀들에게는 단창의 말도 안 되는 관통력은 정말 큰 보탬이 되었다.
그렇다곤 하지만, 쉬워도 너무 쉬웠다. 류 현을 만나기 전에는 블루던전은커녕, 그린 던전조차 못 가본 화련이었지만 년차가 있으니 여기저기서 주워들은 게 있다. 완전 환수형 괴수는 상대하기 지랄 맞다고.
그런데 직접 상대해보니 이보다 쉬울 수가 없었다. 화련의 코스트 대비 효율이 말도 안 되게 낮은 공간 마법은 대 환수형 마법인양, 눈보숭이 의체를 갖고 놀았다. 마력으로만 이루어진 의체는 화련의 장난질에도 두 쪽이 나서 공중을 날아다녔다.
거기에 희란은 지난 두 달 동안 마력 흐름 제어만 연습했을 뿐인데, 너무나도 손쉽게 눈보숭이 본체를 찾아내었다. 그냥 이질적인 흐름을 쫓아가니 그곳에 본체가 있었다. 본체를 찾아서 단창으로 찌르니 끝.
여기까지만 했다면 화련이 오늘 사기니 어쩌니 할 일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보았다. 그녀들이 눈보숭이를 갖고 놀다가 잡는 순간 ‘계획대로’라는 표정으로 히죽 웃는 류 현의 모습을. 그 웃음은 금세 사라졌지만, 화련은 확신했다. 이 인간이 우릴 굴리려고 이미 이겨놓고 내기를 걸었구나!
그리고 그녀의 확신은 지난 이주 간 끊임없이 재확인 되었다. 그녀들은 처음 겪어보는 블루 던전의 괴수들도 단 한 번의 위기도 없이 죄 잡아 죽이는 데 성공한 것이다.
화련은 확신했다. 류 현이 알고 내기를 건 것이라고. 대체 어떻게 한 것인지 몰라도, 류 현은 그녀들의 수준을 정확하게 측정해서 블루 던전을 견딜 수 있다고 판단해서 그런 제안을 한 것이다.
이제 와서는 그녀도 그 부분을 물고 늘어져서 무를 생각도 없고, 피곤할 때 징징거리는 용도로나 들먹거릴 뿐이다. 여전히 블루 퍼플이나, 퍼플 던전에 들어가는 건 좀 무섭지만, 이전만큼은 아니었다. 도망은? 생각지도 않는다.
애당초 그녀는 이런 목적으로 만들어진 팀이라는 걸 알고도 남았다. 지금은 다른 게 궁금할 따름이었다.
‘진짜 무심한 척 하면서 은근히 스토커 기질 있단 말이야.’
류 현이 언제부터 자신들을 이렇게 열심히 분석해서 계획을 짰는지 말이다. 평소의 무심한 태도로는 이런 견적은 못 낼 테니까.
‘그 쪽 방향으로 문제 있는 줄 알았는데...이러면 아주 가망이 없진 않겠는 걸.’
사심도 없잖아 있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