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6화 〉탐식마(貪食魔)
아침부터 맹렬하게 울어대는 초인종 소리와 현관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잠에서 깨었을 때, 류 현은 별 생각 없이 현관문으로 향했다. 현관문을 향해서 걸어가는 그의 의식은 아직 꿈나라를 헤매는 중이었다. 무리도 아니었다.
도망친 암컷 오우거를 추적해서 죽이고, 그 뒤에 시험관들에게 송장목 진액에 대한 설명을 해주고 던전에서 건질만한 것들을 긁어모으는 데 하루를 더 보냈다. 꼬박 나흘을 던전에서 보낸 것이다. 정확히는 102시간 이었다.
회귀 이후 최장기록이었다. 이전 생에서는 나흘 이상 던전에서 보내는 경우가 허다했지만, 이번 생은 그렇게 죽치고 있을만한 던전도, 환경도 나오질 않았다.
원래 던전에서 날짜를 헤아리는 건 피곤한 일이지만, 오랜만이라서 피로가 더했다. 거기다가 던전을 나온 뒤에 그는 바로 쉬지도 않고 세아를 찾아가 몸보신도 시켜주고, 나머지 송장목 진액의 해독 작업도 끝마친 후에야 잠자리에 들었다. 피곤하지 않으면 그게 비정상인 상황.
그러니 류 현이 현관문을 열고, 문 앞에 있는 이가 종교권유를 온 신도가 아니라 화련과 희란이라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한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그는 흐리멍덩한 눈으로 왠지 모르게 익숙한 인상의 두 여자를 멍하니 쳐다보았다.
그가 바라보고 있는 여자들도 그를 마주보았다. 그녀들은 반쯤 입을 벌린 채 자신들이 집을 잘못 찾아온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마저 들었다. 화련은 잽싸게 가스검침판 위에 붙어있는 호수를 확인했다. 이 집이 확실했다.
다시 고개를 돌려 명백하게 잠이 덜 깬 멍한 눈으로 고개만 갸웃하는 류 현을 본 화련은 굳은 표정을 풀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어색하게 미소 지으며 거의 한달 만에 만난 류 현을 향해 말했다.
“오랜만이네요. 마스터. 그런데 세수부터 하고 오시는 게 어때요?”
***
한 달 만에 찾은 사무실은 먼지 없이 말끔했다. 그의 팀원들이 들락거리면서 청소한 게 아니라 서해란의 배려 중 하나였다. 태양그룹과 본격적인 스폰 관계가 된 뒤에, 그녀는 던전 사냥 이외의 일에 신경 쓸 일 없게 해주겠다고 호언장담을 했고, 실제로 대부분 이루어지고 있었다.
어제만 해도 류 현은 거대한 오우거 사체의 별로 필요 없는 부분을 문자 몇 문장으로 처리했으니까. 오우거, 머리와 가슴 부분. 내장. 문자 내용은 그게 전부였다.
그리고 던전 앞에 방치하고 나온 그 사체를 처분한 돈은 이미 그의 계좌에 들어와 있는 상태였다. 정신 차린 지 얼마 되지 않은 류 현은 확인할 겨를 이 없었지만.
류 현은 조심스럽게 맞은편을 살폈다. 자신처럼 급하게 나온 것인지 화련과 희란도 츄리닝 차림이었다. 그녀들의 차림새를 살피던 류 현은 화련이 갑자기 눈을 맞춰오자 황급히 시선을 아래로 내리깔았다.
세상모르고 뻗어있던 그가 두들겨 깨워진 게 한 시간 전 일이다. 그러고도 반쯤 가수면 상태를 헤매던 그를 화련이 욕실로 밀어 넣었다. 샤워를 끝내고 정신을 차린 류 현이 옷을 입고 욕실 밖으로 뛰쳐나왔을 때는, 사무실에서 봐요. 라는 쪽지만 덩그러니 남아있는 상태였다.
그리고 지금에 이른 것이다. 본의 아니게 추한 꼴을 보이게 된 류 현은 선뜻 말문을 트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영원히 눈치만 살필 수도 없는 노릇. 류 현은 헛기침을 한 번 한 후 입을 떼었다.
“그러고 보니 제가 정신이 없어서 왜 찾아오셨는지도 못 물어봤군요. 두 분 무슨 일 있으십니까? 혹시 연구에 지장이라도?”
“아뇨, 연구...라고 하긴 아직 민망한 수준이긴 하지만 진행에는 별 문제 없어요. 해란 씨가 필요한 것들은 재깍재깍 구해다 주거든요.”
“그럼 무슨 일로...?”
“전 마스터가 알고 계실 거라고 생각했는데.”
류 현은 고개를 갸웃했다. 팀원들과 거의 한 달 동안 만나지 못했다. 안부 확인 차 연락은 계속 주고받았지만, 서로 바빴으니까. 그런데 자신이 알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니?
류 현이 전혀 모르겠다는 듯이 반응하자 화련은 작게 한숨을 내쉰 후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냈다. 화련은 화면을 몇 번 터치하더니 그에게 들이밀었다. 화면은 그녀가 찍은 사진 목록이 떠올라 있었다. 류 현이 그녀를 다시 돌아보자 화련은 고개를 끄덕였다.
허락이 떨어지자 류 현은 가장 앞에 있는 사진부터 눌러봤다. 첫 번째 사진은 못해도 열은 되 보이는 택배 무더기였다. 택배 무더기가 현관문을 가로 막듯이 주택 입구에 쌓여있었다. 류 현은 찍힌 주택이 어디서 많이 본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사진을 넘겨 뒤로 갈수록 그의 낯익음은 점차 기정사실이 되어갔다. 택배 무더기는 현관문 앞에 놓여 있는 것이 끝이 아니었다. 집 전체를 포위하듯이 빙 둘러서 쌓여있었다. 여러 각도에서 집을 돌아보게 된 류 현은 낯익음의 정체가 무언인지 알게 되었다.
사진 속의 화련의 집이었다. 류 현이 화련을 영입하기 위해서 삼고초려, 아니 한 달 동안 스토킹 아닌 스토킹을 감행할 때 거의 매일 같이 보던 그 집.
“이게 대체 무슨...”
“잠깐만 휴대폰 좀 줘보실래요?”
류 현은 그렇게 했다. 화련은 자신의 휴대폰을 돌려받고 다시 화면을 조작하더니 그에게 넘겨주었다. 이번에는 집 사진이 아니라 택배 중 하나를 크게 확대해서 찍은 사진이었다. 발송인과 수취인이 선명하게 찍혀있었다. 수취인은 당연히 화련이었고, 발송인은 ‘산군’이었다.
류 현이 아침에 보여줬던 그 멍청한 눈으로 화련을 돌아보자 화련은 팔짱을 낀 채로 말했다.
“아침에 일어나보니까 이렇게 돼 있었어요. 안에 들어있는 거 보고 그 뭐라고 하더라? 덤태기 판매법? 그거 인 줄 알았다니까요. 냉장고에, 차키에, 포션에. 거기 찍힌 연락처로 연락해보니까. 마스터한테 잘 부탁드린다는 답변을 얻었거든요? 마스터를 착각한 거 아니냐고 물어보니까. 우리 마스터가 맞데요. 마스터, 정말 아는 거 없어요?”
“저, 저도요. 저도 그랬어요.”
희란이 재빨리 끼어들었다. 류 현은 두 손으로 얼굴을 덮었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바로 다음날부터 이 난리를 친단 말이야?’
왜 이 난리를 피우는 지는 알만 했다. 블루 퍼플 던전 보스로 나온 오우거를 한 방에 때려죽이고, 연구재료로 쓰는 것 말고는 버리던 송장목 진액의 독기를 해독해서 그걸로 사람 팔을 앉은 자리에서 붙여버렸으니 조용하면 그게 이상한 것이다.
류 현도 어느 정도 극적인 반응을 예상하고 벌인 일이었다. 이전 생이라고 해서 딱히 자신을 숨기거나 하진 않았지만, 이번 생에서는 그 정도로 그치는 게 아니라 적극적으로 앞으로 나설 생각이었으니까. 그냥 강력한 플레이어 중 한 명이 아니라, 흐름을 주도하는 그런 자가 될 생각이다.
하지만 이렇게 빠르게, 그것도 어제 던전에서 나온 그를 배려한답시고 팀원들부터 이렇게 귀찮게 굴 거라고는 생각하지도 못했다. 팀원들과 감동스러운 재회를 생각한 건 아니었지만 의문의 택배 때문에 이렇게 한 달 만에 재회할 줄이야.
‘둘 중 한 가지만 보여줬어도 됐을 걸 너무 과했나?’
오죽하면 그런 생각이 들 정도였다. 원래 송장목 진액에 대해서는 당장 밝힐 생각은 아니었고, 본의 아니게 보여주게 된 것이었지만. 그렇다고 무를 수도 없는 일이다. 거기에,
‘...어차피 겪어야 할 일이니까.’
류 현은 편하게 생각하기로 했다. ‘모임’측에서 멋대로 그의 이름을 여기저기 뿌리고, 팀원과 그에게 직접 찾아와서 귀찮게 굴었다면 꽤나 짜증났겠지만 선물의 벽정도면 귀여운 수준이다.
“그게 말입니다.”
이제는 팀원들에게 사정을 설명할 차례다. 어차피 오늘 내일 중으로 불러서 시험과정을 말해줄 생각이었으니 문제는 없었다.
***
류 현은 사실을 전부 전달하기 보다는 가장 큰 두 사건만 말했다. 오우거를 한 방에 격살시킨 것과 송장목 진액으로 부상당한 시험관 팔을 붙여준 일. 그리고 그것 때문에 그녀들에게 택배의 산이 간 것 같다는 추측도 함께.
모든 이야기를 듣고 화련과 희란은 말없이 탁자만 멍하니 바라봤다. 언제나 그렇듯 침묵을 깨고 먼저 입을 뗀 건 화련이었다.
“마스터, 사실 다른 별에서 온 전투 민족이에요?”
“예?”
“아니에요. 신경 안 쓰셔도 되요...와, 이렇게 스펙 차이가 나니까 오기도 안 생기네.”
화련은 김빠진 다는 듯이 후우, 하고 숨을 내뱉고는 소파에 몸을 파묻었다. 화련과 대조되게 희란은 두 손을 꼭 마주 쥔 채로 류 현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이내 화련이 뒤로 젖히고 있던 몸을 일으키며 다시 입을 떼었다.
“그럼 이제부턴 블루 퍼플 던전 혼자서 들어가시겠네요? 허가도 받았으니까.”
반 정도는 나무라는 투였다. 이전에 그녀들을 떼놓고 검성과 함께 블루 던전을 들어간 일을 꼬집는 말이었다. 류 현은 쓴웃음을 지으면서 대답했다.
“아니요. 당분간은 블루 던전에 들어갈 계획입니다.”
“왜요? 그러려고 시험에 응하신 거 아니었어요?”
“저만 강해져서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이제 준비는 대충 끝났으니, 두 분의 전력증강을 꾀해야지요. 팀플레이 연습도 필요하고요.”
그의 말에 화련과 희란을 눈빛이 확 달라졌다. 상위 던전에 들어간다는 통지를 들은 이들의 눈빛이라고는 믿기 힘들 정도로 생기로 반짝거렸다. 류 현은 그녀들의 반응에 내심 흐뭇해하면서 생각해둔 계획을 입 밖으로 내었다.
“삼 주일 안에 블루 던전을 마스터하고, 그 다음 달부터 퍼플 블루 던전에 들어갈 겁니다. 이곳은 한 달 안에 마스터하는 게 목표입니다. 그리고 넉넉히 잡아서 X던전 진입 한 달 전까지 퍼플 던전을 최소 한 곳을 클리어 할 예정입니다. 아마도 퍼플은 수배가 힘들어서 한 곳 이상은 힘들 겁니다.”
류 현의 말이 끝나자마자 두 여자의 안색이 시커멓게 죽어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