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5화 〉탐식마(貪食魔)
파쇄권(破碎拳).
류 현이 즐겨 사용하는 기술 중 하나다. 사실 기술이라고 하기도 민망한 아주 평범한 마력운용법이지만, 류 현은 굳이 이 이름을 기억해두었다. 이전 생에서 평생 동료로 삼고 싶었던, 원정대 동료였던 남자가 붙여준 이름이었기 때문이었다.
쓰는 방법? 그냥 온몸에 퍼져있는 마력을 끌어 모아서 치려는 팔과 주먹에 집중시키고 타점에 닿는 순간 펑하고 터트리면 끝이다. 매우 간단하고, 도구가 없어도 쓸 수 있는 기술이다. 마력을 갓 깨우친 각성한 지 일주일도 안 된 루키도 쓸 수 있는 기술.
하지만 쓰는 이가 매우 드문 그런 기술이기도 하다. 사람 잡는 훈련을 받는 플레이어들을 제외하면 정식으로 이 기술을 훈련 받는 경우는 없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다.
이유? 간단한 만큼 재미를 보기도 힘들기 때문이다.
괴수고, 플레이어고 마력을 지니고 있는 생명체는 자연스럽게 지니고 있는 마력이 비례하게 항마력을 띄게 된다. 그냥 주먹을 통해서 마력을 터뜨리는 건 이 항마력을 뚫기에 매우 비효율적인 짓이다.
그것도 마력량이 차이나봐야 거기서 거기인 플레이어끼리의 전투라면 어느 정도 주효하겠지만, 괴수와의 싸움에서 플레이어가 괴수보다 마력량이 많은 경우는 없다고 단언해도 좋을 정도다.
거기다가 자신의 마력이라고 해서 터뜨릴 때 반동이 없는 것도 아니다. 파쇄권을 쓸 때마다 타격을 위한 마력과 주먹을 보호하기 위한 마력이 이중으로 들어가게 된다. 마력량이 적을 때는 그 부분을 고려하지 않고 막 써도 몸이 버텨내지만 마력량이 늘어나서도 그런 짓을 했다간 팔다리 중 하나 못쓰게 되기 십상이다.
괜히 플레이어들이 비싼 돈을 들여서 무기를 마련하고, 더 좋은 무기를 갈망하는 게 아닌 것이다. 사람 잡는 걸 업으로 삼은 플레이어들도 최후의 수단을 준비해놓는 느낌으로 수련하는 것이지, 전문적으로 파고드는 이는 없다고 해도 좋을 정도다. 그야 말로 마력이 남아도는 류 현만이 수련할 법한 기술.
그런 면에서 보면 류 현의 파쇄권은 기술명을 붙여줘도 될 정도의 완성도를 가지고 있다고 해도 좋은 수준이었다. 그 투박함 뒤에 숨겨진 정교한 마력조절과 파괴력은 누구도 부정하지 못할 달인의 경지였으니까.
그리고 그런 류 현이 한 껏 마력을 끌어 모은 왼 주먹을 내질렀을 때, 두 명의 감시자가 내뱉은 건 순수한 경탄이었다. 이해관계를 떠나서 플레이어로서 높은 경지를 보여준 이에 대한 순수한 경탄. 그 경탄은 그의 주먹이 오우거의 머리통을 날려버리자 경악으로 뒤바뀌었다.
[크루룩!]
단말마는 없었다. 오우거가 류 현의 주먹을 인지하기도 전에 그의 주먹이 보스룸에서 튀어나온 오우거의 머리를 완전히 파쇄해버렸으니까. 쿠웅! 머리가 날아갔음에도 류 현 보다 1.5배 이상 커 보이는 몸뚱이가 뒤로 넘어갔다. 괴상한 짐승의 울음소리는 그가 격살한 오우거와 같이 보스룸에서 튀어나온 암컷의 울음소리였다.
울음소리에 반응 하듯, 류 현은 손가락이 하나같이 괴상한 방향으로 꺾인 왼손을 내려다볼 새도 없이 암컷 오우거를 향해서 달려들었다. 오우거를 숲속으로 진입하게 내버려 둬선 안됐다. 잡지 못할 건 없지만 편하게 잡을 방법이 있는 데 굳이 고생을 자처할 생각은 없었다.
자신이 머리통을 날려버린 수컷 오우거보다 머리통 하나가 작아 보이는 암컷 오우거에게 달려들면서 류 현은 확신했다. 이번 던전 날로 먹을 수 있겠다고. 그런 그의 확신은 대체로 맞을 확률이 높았다. 오우거는 반려가 죽임 당하면 그야말로 죽일 듯이 살해자를 쫓곤 하니까.
그렇게 되면? 아직 멀쩡한 오른손으로 파쇄권을 먹여주면 그만이다. 부러진 뼈 맞추는 게 귀찮긴 하겠지만 사흘 넘게 숲을 뒤적거리는 것 보다는 나을 것이다.
그래서 암컷 오우거가 그에게 등을 보이고 전속력으로 달아나기 시작했을 때, 그는 어이가 없어서 바로 쫓지 못하고 멈칫하고 말았다. ‘왜 안 덤벼? 저게 뭘 잘 못 쳐 먹었나?’
그리고 암컷 오우거의 진행 방향에서 갑자기 사람 얼굴이 불쑥 튀어나왔을 때 류 현은 저도 모르게 묻고 말았다. “저 인간이 왜 지금 저기서 튀어나와?” 류 현이 오우거를 한 방에 격살하는 걸 지켜보고 있었던 두 명의 감시자도 마찬가지 심정이었다.
류 현은 정신을 수습하자마자 다시 내달리기 시작했지만, 오우거가 남자와 맞닥뜨리는 것이 훨씬 빨랐다.
[뿌득!][쉬칵!]
양자는 순식간에 합을 주고받았고, 양측 다 피를 흩뿌리는 처지가 되었다.
남자의 왼팔은 오우거의 손에 뜯겨나갔고, 남자는 그 대가로 창으로 오우거의 옆구리를 길게 찢어놓았다. 장이 삐져나올 정도의 깊은 상처. 하지만 승패는 명백해보였다. 남자는 버티지 못하고 피를 흩뿌리며 바닥에 쓰러졌고, 오우거는 그대로 남자의 팔을 내팽개치고 숲속으로 사라졌으니까.
바닥에 쓰러진 남자에게 도달한 류 현은 오우거가 사라진 방향을 한 번 노려보고는 남자의 상세를 살폈다.
힘으로 잡아 뜯겨서 그런지 절단면은 너덜너덜하다 못해 지저분하기까지 해보였다. 꾸역꾸역 피를 토해내는 팔꿈치 부분을 꽉 틀어쥔 채 남자는 이를 악물고 있었다. 그런 남자도 고통을 다 감당해 낼 수 없는지 거친 숨 사이로 신음 비슷한 것이 새어나왔다.
‘냅두면 오우거가 다시 돌아와서 죽이겠지.’
근육덩어리 그 자체인 외향과는 다르게 오우거는 영리하다. 무리가 있으면 그 중 가장 약한 놈을 상처 입혀서 무리 전체에 피로도를 쌓은 다음 천천히 체력싸움으로 몰고 갈 정도로. 그게 별 효과가 없으면 상처 입은 놈을 쳐 없애, 과감하게 숫자를 줄여버릴 정도로 똑똑하다.
류 현이 남자를 내버려두고 추적을 시작하는 순간, 오우거는 상처 입은 남자를 죽이려 들 것이다.
류 현은 뒤편으로 시선을 한 번 던졌다. 자기네들은 숨어있는 다고 숨었겠지만 그는 진작에 두 여자의 존재를 눈치 채고 있었다. 굳이 뭐라고 할 필요가 없어서 모른 척 했을 뿐.
아마도 그녀들은 일찌감치 보스룸을 찾아서 이곳에서 대기하고 있었을 것이다. 류 현이 느긋하게 송장목 진액을 채취하며 보낸 삼 일동안 이곳에서 숨죽이고 대기하고 있었을 것이다.
나갈 문이 여기고, 죽지 않았다면 류 현이 올 수밖에 없는 곳이니까. 제대로 된 팀도 못 꾸린 상태에서 섣불리 블루 퍼플 던전을 돌아다니는 것 보다는 현명한 처사다.
‘이대로 두고 가면 오우거를 잡든 말든 저것들이 보고 올릴 테고.’
그런 현명한 이들이 있는 곳을 바라보는 그의 눈초리는 곱지 못했다.
어떤 형태로든 사망자가 나오면 ‘모임’측에서는 어떤 형태로든 간에 그걸 물고 늘어질 것이다. 블루 퍼플에 들여보낼 정도의 플레이어가 죽었다면 태양그룹도 무조건 그를 두둔하진 못할 테니까. 류 현으로서는 유쾌하지 못한 상황.
‘그래, 팔 하나 붙이는 데 얼마 들지도 않는데 뽀찌라고 생각하자.’
결정을 내린 류 현은 ‘가방’을 조작해서 그 안에서 꽉 찬 비닐팩 하나를 꺼냈다. 혈액팩 같은 모습의 그것은 혈액팩 치고는 굉장히 커다랬고, 내용물도 피가 아니라 뒤가 비쳐 보일 정도로 투명한 붉은 빛이었다. 그는 팩 주둥이를 만지작거려서 왼손에 내용물을 한 움큼 받아내었다. 겉보기와 달리 그것은 류 현의 손아귀에서 젤리처럼 흐물거렸다.
지켜보고 있던 여자들의 눈이 커다랗게 뜨여졌다. 합의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녀들은 동시에 생각했다. ‘송장목 진액?’ 드물게도 두 여자 모두 송장목의 존재를 아는 이들이었고, 그 진액에 들어있는 독기 또한 알고 있었다.
류 현이 그 진액 덩어리를 남자의 팔꿈치에 들이밀자 여자들은 속으로는 기겁했지만, 말리거나 하진 않았다. 만약 류 현이 독의 존재를 모르고 쓴 것이라면 중상을 입은 남자는 견디지 못하고 죽을 테고, 그녀들이 속한 조직은 좋은 꼬투리를 얻게 되는 것이니까.
하지만 그녀들의 예상은 빗나갔다. 류 현은 조심스럽게 환부에 진액덩어리를 바르고 떨어진 팔을 주워와 갖다 대었다. 그러자 진액덩어리가 부글부글 끓어오르더니 끝부분부터 천천히 피부가 돋아나서 금세 붙어 버리는 게 아닌가? 독은커녕 진통 효과까지 있는지 몸을 부르르 떨던 남자가 떠는 걸 멈춘 상태였다.
방금 전만 해도 바닥에 고개를 쳐 박고 끙끙 앓는 소리만 삼키던 남자마저 놀라서 돌아볼 정도로 말도 안 되는 회복속도였다. 두 감시자가 경악에 빠져서 입만 벌리고 있든 말든, 류 현은 남자의 팔을 붙잡은 채로 오 분정도 더 지켜보다가 잡은 손을 떼었다.
“손가락 한 번 움직여 보시겠습니까? 예, 다행히 잘 움직이네요. 그래도 깔끔하게 잘린 게 아니고 잡아 뜯겼던 거니까, 밖에 나가서 검사 한 번 받아보세요. 그리고 다 회복된 게 아니라 그냥 붙여놓기만 한 거니까. 당분간은 무거운 걸 들거나 수련 하시면 안 됩니다.”
남자는 멍청한 표정으로 고개만 끄덕거렸다. 남자가 감사의 말을 고르려고 입만 뻐끔뻐끔 거리고 있자, 류 현은 고개를 돌려 감시자들이 숨어있는 쪽으로 말을 걸었다.
“거기 두 분, 이 분 좀 돌봐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오우거의 상처가 아물기 전에 잡고 싶은데 이분 혼자 두고 가기가 좀 그러네요.”
그의 말에 두 감시자는 숨어있던 나무에서, 구덩이에서 나와서 모습을 드러내었다. 원래라면 그럴 계획은 전혀 없었지만, 그래도 나름 경험 많은 플레이어로서 움직이지 않을 수 없었다. 앉은 자리에서 사람의 팔을 붙여버렸으면서, 별 거 아니라는 듯한 류 현의 태도가 그녀들을 더욱 긴장시켰다.
던전이 아무리 기괴한 일이 발에 채일 정도로 많이 일어나는 곳이라지만, 류 현이 행한 일은 그 이상이었다. 별다른 체력 소모 없이 플레이어도 전장을 이탈해야하는 중상을 순식간에 치료하다니. 길드내의 ‘해결사’로 활동하면서 기밀에 속하는 고급정보를 접해본 그녀들도 들어보지 못한, 그야말로 기적이다.
주먹질 한 방에 오우거를 때려잡고, 아무도 모르는 송장목 진액 해독방법을 알고 있는 루키. 그녀들이 목격한 바만 정리해도 저 정도였다.
그래서 그녀들은 류 현의 말대로 바닥에 누운 남자를 수습하면서도 외부인에게 명령받고 있다는 불쾌감을 느낄 겨를은 없었다.
눈앞에 트렌드를 주도할 새로운 트렌드 메이커가 나타났으니까. 그녀들의 머릿속에선 주판알이 불꽃을 튀길 기세로 무섭게 왔다 갔다 했다.
‘여기 숲 놈들 진액이 꽤 진하네. 누나 몸보신 제대로 시켜줄 수 있겠다. 예상보다 두 마리 더 나왔으니까 팀원들도 좀 챙겨주고...’
정작 류 현은 딴 생각으로 가득했지만.